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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리산 성지 → 남한산성순교성지 → 구산성지 → 마재 성가정 성지
39.4Km 26.5Km 13.8Km
수리산 성지를 떠나 남한산성성지를 가기위해 남한산성입구에 도착하자
차가 밀리기 시작하여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오늘이 토요일이라 관광객들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50분 걸리는 길을 거의 2시간만에 도착했다.
시간도 12시를 조금 넘긴 시각이라 점심식사하려는 관광객들로
주변 식당은 인산인해를 이루어 성지주변에는 주차할 공간도 없었다.
아내는 몇 번 성지를 다녀갔기에 차를 가지고 주변을 돌고
나만 내려서 성지를 둘러보고 순례도장을 찍고는 전화해서
차를 가지고 내린 장소로 다시오라고 하여 승차하였다.
주말에 관광지 부근에 있는 성지를 순례할 때는 늘 있는 일이다.
불국사에서 그랬고, 언양줄림굴 갈 때도 석남사 주변과
통도사 주변에서 교통체증으로 고생한 일이 있다.
18. 남한산성순교성지
1801년 경기도 광주. 한 옹기장수가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하지만 웬일인지 그는 벌이가 될 법한 사람 많은 고을은 모두 지나쳤다.
그에게 옹기를 팔아 돈을 버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덕운(토마스, 1752~1802)이 옹기장수로 변장해 가고 있는 곳은 한양.
박해받는 교우들의 동정을 살피기 위함이었다.
한양 근처 청파동에 이르렀을 때,
한덕운은 근처에서 거적에 쌓인 시신을 발견했다.
동네 주민이 그에게 말했다.
“홍낙민이라 하더이다. 천주를 모시다 저리됐다 들었소.”
한덕운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머리가 잘린 시신 앞에서 끓어오르는 비통함을 느끼며
홍낙민(루카, 1751~1801)을 애도하는 기도를 바쳤다.
그날 이후 한덕운은 서소문 밖 형장을 찾았다.
그곳에서 최필제(베드로, 1770~1801)의 시신을 찾은 한덕운은 그의 장례를 치러줬다.
하지만 순교자의 시신을 수습하는 것은 자신 또한 신자라는 것을 드러내는 행동.
머지않아 한덕운은 체포돼 한양 관아로 끌려갔다.
포졸들의 고문은 극악무도했지만 한덕운은 무서울 정도로 표정에 변함이 없었다.
오히려 그 모든 고통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결국 한덕운에게 내려진 것은 참수형.
죄인에 대해 그가 살던 고장에서 형을 집행함으로써
백성들에게 경각심을 주려고 실행됐던 해읍정법(亥邑正法)에 따라
그는 광주 남한산성으로 보내졌다.
1802년 1월 30일 남한산성 동문 밖 길,
한덕운이 형장에 자리하자 망나니는 사납게 생긴 칼을 들었다.
그때 그가 망나니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단칼에 베어주시오.”
그의 단호한 목소리와 눈빛에 망나니는 겁을 먹었다.
당황한 망나니는 두 번이나 헛칼질을 했고,
결국 세 번째 칼날에 한덕운의 목이 떨어졌다.
그리고 구경꾼이 떠난 형장에는 맑은 계곡 물소리만 감돌았다.
서울에서 동남쪽으로 약 24㎞ 떨어진 남한산.
자동차를 타고 산비탈 도로를 5분 정도 오르면 귀가 먹먹해질 때쯤
‘남한산성’이라 쓰인 큰 비석이 보인다.
산등성이를 따라 이어지는 약 10㎞의 성벽.
경기도 남한산성도립공원이다.
삼국시대와 신라, 조선 시대에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로 평가됐던 남한산성은
조선 후기 여러 관청이 자리하면서 천주교 박해의 대표적 장소가 됐다.
포도청에서 인력이 모자라면 군인들이 무술을 연마하던 연무관에서까지
천주교 신자를 심문할 정도였다.
이런 모진 박해에 순교한 신자만 300여 명.
그리고 이 중에는 복자 하느님의 종 한덕운이 있다.
남한산성이 최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서
세계인들의 이목이 남한산성으로 집중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남한산성을 통해 무엇을 보고 느껴야 할까.
비석만이 알려주는 곳
남한산성 동문 밖 주차장 한쪽에는 ‘남한산성옛길’이라 적힌 돌비석이 놓여있다.
그마저도 주차된 자동차와 나뭇잎에 가려 비석이 한눈에 들어오지는 않는다.
교회사 학자들은 이곳을 한덕운 순교자의 치명 터로 추정하고 있다.
남한산성 동문은 송파장과 덕풍장, 경안장 등 당시 장터가 성행했던 곳으로
유동인구가 많아 참수의 본보기를 보이기 좋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덕운은 장터에 모인 인파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오히려 죽음을 기쁘게 맞이했다.
“저는 천주교의 교리를 깊이 믿으면서 이를 가장 올바른 도리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이제 비록 사형을 받게 되었지만,
어찌 (신앙의 가르침을 믿는) 마음을 바꿀 생각이 있겠습니까?
오직 빨리 죽기를 바랄 뿐입니다.”
동암문 옆 절벽 아래에는 계곡 물이 흐른다.
증언에 의하면 순교자들의 시신은 따로 처리되지 않고 이 계곡에 버려졌다고 한다.
처형된 사람 수가 많을 때에는 나뭇가지에, 돌담 사이사이에
순교자들의 시신이 널브러져 있었다고 한다.
맑게 흐르는 계곡 물을 한참 들여다보면
그 안에 서린 순교자들의 피가 보이는 듯하다.
순교자의 피가 서린 동암문(시구문)
동문 근처에는 동암문이 자리하고 있다.
동암문 안은 어둡고 캄캄해 마치 짧은 터널을 지나는 듯하다.
약 200년 전, 순교자들은 포도청에서 사형 명을 받고 동암문 밖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이렇게 박해기간 동안 이 동암문 앞에서 목숨을 잃은 순교자만 300명이 넘는다.
칼을 떠올리며
동암문에서 남한산성순교성지까지는 약 1㎞.
잘 정돈된 인도를 15분 정도 걸으면 남한산성순교성지 근처 주차장에 닿는다.
이곳은 200년 전 순교자들이 고초를 겪었던 포도청과
피를 흘리며 갇혀 있던 옥사가 있던 자리다.
그러나 지금은 주차장 귀퉁이에 놓인 작은 비석 하나만이
포도청 자리였음을 가늠케 할 뿐이다.
포도청 터에서 약 50m 정도 들어가면 남한산성순교성지 초입에 들어선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높이 솟은 현양탑.
높이 4m에 돌 무게만 100t 되는 현양탑은
순교자들이 옥에 갇혀 목에 썼던 칼 모양으로 만들어졌다.
현양탑은 낮은 기와 돌담이 둘러쳐진 잔디밭에 있는 탓에 꼭 작은 성지처럼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자연스레 현양탑 비석에 새겨진 순교자들의 이름을
한 분씩 마음속으로 외쳐보게 된다.
‘한덕운, 김만집, 정여삼, 이화실….’
남한산성순교성지
남한산성순교성지 전담 박경민 신부는 기자와 동행하며
성지 곳곳에 담긴 순교 영성에 대해 설명했다.
먼저 살펴본 곳은 성전.
제대 위 십자고상에 달린 예수님은 순교자들처럼 목에 칼을 쓰고 있었다.
또 스테인드글라스에 그려진 한덕운의 순교 장면과 남한산성의 모습이
초여름 햇빛에 색색으로 나타났다.
성당 외벽에 그려진 참수와 교살, 백지사형 등 그림을 설명한 박 신부는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한덕운 순교자는 교우의 시신을 수습하고 가족을 위로했습니다.
한국교회 최초로 연령회장 역할을 한 것이지요.
이제 남한산성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서
더 많은 분이 이곳을 찾아올 겁니다.
그럴수록 한덕운 순교자를 비롯해 35위 순교자와
무명 순교자 300여 명의 순교정신을
함께 본받도록 노력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겠지요.”
19. 구산성지
마을을 둘러싼 뒷산이 거북이 형상을 닮았다는 구산(龜山) 마을은
팔당 부근 한강변에 위치해 순교자들의 숨결이
150여 년이 넘도록 고스란히 살아 숨쉬는 곳이다.
서울에서 불과 1시간 내에 시원스레 뚫려 있는 강변도로와 중부고속도로를 통해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교통상의 편리함도
구산 사적지를 찾는 이들에게 매력적인 요소이다.
구산 사적지 또는 구산 마을이라고 할 때
어느 곳을 말하는지 잘 모른다고 해도
미사리 조정 경기장 하면 "아, 그곳!" 하며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경기도 하남시 망월동에 위치한 구산 마을은
먼저 103위 성인 중 71번째 성인인 김성우 안토니오를 비롯해
박해 시대에 많은 치명자가 탄생한 유서 깊은 사적지라는 데서
그 교회사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특히 구산은 성인의 후손들이 대대로 살아오며
묘소를 가족 묘지에 이장, 보존하고 있어
우리나라에서 박해 시대의 자취가 가장 원형대로 남아 있는 곳 가운데
하나라는 점에서 중요성을 갖고 있다.
더군다나 150여 년 동안 교회를 지키며 신앙생활을
확고하게 지켜 가고 있는 교우촌으로 도시화로 인한 급변속에서도
구산 마을은 한마음으로 신앙 안의 일치를 잃어버리지 않고 있다.
6.25 당시에 구산 마을은 원로 신부들의 피신처로 아주 적합한 곳이었다.
낮에는 곳곳에 무성한 사람 키보다 더 큰 갈대숲 사이에서 숨죽이고 엎드려 있다가
저녁에 살금살금 나와 지친 몸을 쉬었다고 한다.
쭉 뻗은 강변도로와 그 아래 미사리 조정 경기장은
구산 마을을 들어서는 순례객들의 가슴을 시원하게 해준다.
도로 건너편 골목으로 조금만 걸어 들어가면 시골 성당의 정취를 물씬 풍기는
아담하고 아름다운 구산 성당이 나온다.
성당에서 걸어서 15분 남짓 거리에 개발되어 있는 구산 사적지에는
사람 키보다 약간 높은 야트막한 기와 담장이 둘러쳐져 있다.
고개를 빼고 담장 안을 넘겨다보는 순례객들에게는
마치 이 담장이 성속(聖俗)을 가르는 경계선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담장을 돌아 사적지로 통하는 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형형색색의 도자기 작품으로 둘러싸인
우리의 도움이신 성모 마리아상(성모자상)이 보인다.
우리의 도움이신 성모 마리아상은
고(故) 김세중(전 서울대학교 미대 학장) 화백이 조각,
지난 1983년 축성된 것이다.
성모자상과 함께 사적지 안을 돌아보면
오른쪽으로 자그마한 기와 대문(안당문)이 보이고,
그 안으로 성인 묘역과 성당이 보인다.
숙연한 마음을 가다듬고 문을 들어서
성 김성우 안토니오 순교 현양비와 묘소 앞에 서서 잠시 눈을 감고
죽음 앞에서도 의연하게 신앙을 택했던 그의 풍모를 기린다.
양반의 자제로 유복한 살림과 존경받는 가문에서 남부러울 것 없었던 그가
신앙의 험로를 걷기 시작한 것은 1830년경으로 알려져 있다.
경주 김씨 계림군파(鷄林君派)의 15대 손인 김영춘의 맏아들로
정조 19년(1795년) 구산에서 태어난 그는 두 동생과 함께 세례를 받고
친척과 이웃들을 입교시켜 이 지역을 교우촌으로 만들었다.
한동안 유방제 신부를 모시고 회장직을 수행하며 온 마을에 복음을 전한 그는
1836년 모방(Maubant) 나(羅) 신부가 입국하자
자기 집에 모방 신부를 모시기도 했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체포됐다가 간신히 풀려났던 그는
1840년 1월경 다시 가족들과 함께 붙잡혀 서울 포청으로 압송됐다.
포청에서 형조로 이송돼 갖은 고문을 당한 그는 배교를 강요하는 재판관에게
"나는 천주교인이오.
살아도 천주교인으로 살고 죽어도 천주교인으로 죽을 것입니다."
라며 결코 신앙을 굽히지 않았다.
요지부동의 굳은 신앙에 결국 그는 이듬해 4월 29일 47세의 나이로 순교했고
1925년 7월 복자위에 올랐다가 마침내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당 왼쪽으로 청동 빛의 고색창연한 14처상이 들여다보인다.
굽이굽이 말려 올라간 소나무들의 푸른빛이 십자가를 진 예수를 향해
시퍼렇게 날선 창을 겨눈 병사들의 청동 빛에 어우러져 섬뜩할 정도로 처절했던
순교 당시의 고통을 이야기해 주는 듯하다.
2001년 하남시 향토유적 제4호로 지정된 유서 깊은 교우촌인 구산 마을은
급격한 도시화와 이농 현상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신앙 공동체의 모습을 간직하려
노력하고 있는 귀중한 교회이며 순교의 얼이 살아 있는 곳이다.
길을 가다 만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같은 하느님을 믿는 형제이기에
구산 마을은 이웃집 친구를 만나러 가듯 정겨운 마음으로 찾아가 볼 만한 곳이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2년 7월 22일)]
우리의 도움이신 성모 마리아
이곳 구산성지에 세워진 성모상은 성모님께 특별한 신심을 가졌던
구산성지 초대 주임 故 길흥균 이냐시오 신부(재임기간 1979~1884)가
꿈속에서 알현한 성모님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다.
길 신부는 당시 서울대학교 미대학장인 故 김세중 프란치스코 화백에게 작품을 의뢰하였고,
김 화백은 생의 마지막 작품으로서 심혈을 기울여 이 성모상을 제작하였다.
왕관을 쓰고 오른손에 지휘봉(왕흘)을 들고 계시는 이 성모상은
가정과 인류의 평화를 진구하는 "우리의 도움이신 성모마리아"로서
구산성지에서만 볼수있는 유일한 성모상이다.
천주강생 2000년 1월 천주교 구산성지
20. 마재성지
마재는 조선후기 실학자이자 한국 천주교 최초의 신학자인
순교자 정약종(아우구스티노)을 비롯한 다산 정약용, 정약전(1777년 주어사 강학회 참석)등
4형제가 태어나고 자란곳이다.
마재(능내리)에서 한강 넘어 천진암 앵자봉 능선을 바라다 볼수 있으며,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양수리)건너
권철신 5형제의 생가터인 양근성지와는 지척의 거리이다.
이곳은 옛 지명을 따서 흔히 '마재 성지‘로 부르는데, 공식 표기는 '다산 문화 유적지'다.
도대체 다산 생가가 가톨릭과 무슨 연관이 있기에 이곳을 천주교 성지라고 부르는 걸까?
아무리 둘러봐도 궁금증을 풀어줄 실마리는 눈에 띄질 않는다.
한국교회사에 대한 지식 없이 찾았다가는 낭패를 볼 것 같다.
그러니 먼저 마재 성지 유래부터 살펴보자.
의정부교구 덕소본당 관할인 마재는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증거자를 비롯한
다산 정약용 등 4형제의 생가 터다.
마재는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한강변에 안겨있는 마을로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증거자가 태어나고 묻히신 곳이다.
또한 이벽, 이승훈, 황사영 등 신앙의 선조들의 발길이 잦았던 곳으로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있다.
정약현, 약전, 약종, 약용 등 여기서 태어난 4형제 중 셋째인 약종은
천주 신앙을 위해 피를 흘린 순교자로,
약용은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학자로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그러나 약현의 부인이 이벽 성조의 누이,
정씨 형제의 누이가 최초의 세례자 이승훈의 부인,
약현의 사위가 황사영이라는 것을 알면 정씨 형제가 얼마나
천주교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한국 최초의 신학자인 정약종 증거자는
형제들 중에 가장 늦게 신앙을 받아 들였지만,
불타는 열성으로 끝까지 신앙의 길을 걸어갔다.
최초의 평신도 단체인 명도회의 초대회장으로 전교에 힘썼으며,
특히 한문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기 위해
최초의 순수 한글 교리서인 「주교요지」를 편찬하였고,
그 뒤 교리서를 종합·정리하여 「성교전서」라는 책을 쓰던 중
신유박해가 일어나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였다.
가족들까지도 기해박해 때 모두 순교하였다.
정하상은 아홉 차례나 북경을 드나들며 성직자 영입 운동을 벌였고,
그가 로마 교황에게 보낸 청원서는 조선교구 설정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정하상은 또 한국교회 최초의 호교론서인「상재상서(上宰相書)」를 통해
천주교가 유교 전통에 어긋나지 않으며, 사회윤리를 바르게 하는
미덕을 포함하고 있음을 박력 있는 명문장으로 웅변했다.
정약용은 그의 형 약종처럼 순교하지는 않았으나 천수(天壽)를 다하면서
"목민심서", "경세 유표", "흠흠 신서" 등 수많은 명저를 남겼다.
그는 본래 세례자요한이라는 세례명을 갖고 10여 년간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제사 문제로 번진 신해박해 때(1791년)만 해도 그는 교회를 떠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을묘년(1795년) 포도청 장살 사건이 당쟁으로 발전, 좌천되면서
반대파의 원성을 가라앉히기 위해 자명소(自明疏)를 올린다.
즉 천주교를 떠났다는 것을 글로써 명백히 밝힌 것이다.
이어 그는 신유박해(1801년) 때 배교함으로써
죽음을 면하고 전남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실학을 집대성한 5백여 권의 주옥같은 저서는
바로 이 무렵 18년간의 유배 생활 동안 쓰인 것이다.
이때 그는 스스로 호를 여유당(與猶堂)이라고 부름으로써
초대 교회 창립을 위해 명도회를 조직, 회장으로 크게 활약한
형 약종과 매부 이승훈이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데 대해 부끄러움을 표시했다.
그는 당시의 참담한 심정과 외로움을 ‘만천 유고(蔓川遺稿)’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한평생을 살다보니 어쩌다가 죄수가 되어 옥살이를 하게 되었을까?
그 옛날 어질던 스승과 선배, 그리고 절친했던 친구들은 다 어디로 갔나."
그러나 그는 20여 년간의 기나긴 유배 생활 중에 잃었던 신심을 되찾는다.
1811년에는 성직자를 영입하기 위한 교회재건운동에
간접적으로나마 참여할 정도였다.
그가 완전히 교회로 돌아온 것은 유배에서 풀려난 지 2-3년 뒤로 볼 수 있다.
그의 생활은 은둔과 묵상, 고행과 기도로 일관했을 뿐만 아니라
회갑을 맞으면서 미리 작성해 둔 자신의 묘비명 가운데는
참회와 성찰의 문구가 역력하다.
유배 생활을 끝내고 다시 이곳 마재로 돌아온 그는
보속하는 뜻에서 기도와 고행의 삶을 살다
중국인 유방제 신부에게 병자 성사를 받고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정약용과 약종 가족의 숨결이 배어 있는 마재성지는 이들 생가와
다산 묘소, 다산 동상과 기념관 등으로 꾸며져 있다.
마재 성지에서 천진암 앵자봉 능선을 멀리 바라다볼 수 있다.
그리고 천주교회의 큰 초석이 된 권철신 5형제의 집터가 있는
양근(陽根) 대감 마을과도 지척이다.
때문에 마재는 당시 천진암 주어사에서 천주학을 공부하던 선비들의 글 읽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곳이기도 하다.
아름드리나무 곁에 있는 커다란 기와집인 생가는 옛집 그대로가 아니라 복원한 것이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당시 생활상을 보여주는 인형들이 이 방 저 방에서 순례객을 맞는다.
다산의 일생을 들려주는 방송이 애절한 음악과 함께 흘러나오는데,
쉬어갈 겸 툇마루에 앉아 잠시 200년 전으로 돌아가보는 것도 괜찮을 듯 싶다.
성지를 지키고 있는 남궁 신부는
"마재 성지순례를 통해 신자들이 신앙 선조 숨결을 느끼고 자신의 소명을 받아들여
삶의 자리로 돌아가서 더 나은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이곳에 와서 자연 속에서 쉬고, 영적 힘을 얻어 갔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매월 둘째, 넷째 주 토요일에
가족이나 소규모 단체를 대상으로 1일 피정을 기획하고 있으며,
인근 구산ㆍ천진암ㆍ양근성지 등과 연계해 성지순례 코스를 개발하거나, 영화촬영소ㆍ
친환경농장과 연계해 문화벨트를 형성할 수도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첫댓글
오늘도 성지에 고운 마음씨를
마중드립니다
세잎 클로버 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