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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와 언어, 윌프리드 셀라스의 「경험주의와 심리철학」에 대한 리처드 로티의 서문
윌프리드 셀라스(Wilfrid Sellars)의 「경험론과 심리철학(Empiricism and the Philosophy of Mind)」을 공부하고 있다.
이미 이 논문을 한 번 전체적으로 읽어보았지만 아직 나에게는 내용이 충분히 이해되지 않는다.
다루어지고 있는 주제 자체가 쉽지 않은 데다, 셀라스의 난삽한 글쓰기가 가뜩이나 익숙하지 않은 영문 독해를 더욱
버겁게 한다.
셀라스를 이해하기 위한 참고자료로 드 브리스(Willem A. deVries)의 『윌프리드 셀라스(Wilfrid Sellars)』라는 해설
서를 비롯하여 관련 논문들을 함께 읽어보려고 계획 중이다.
여러 참고자료들 중에서도 셀라스의 「경험론과 심리철학」에 대한 리처드 로티의 짧은 서문은 분석철학 진영에서
셀라스의 위치와 의의를 파악하기에 좋은 글이라고 생각된다.
개인적으로 나는 로티의 신실용주의적 철학에 대해 상당부분 동의하기 때문에 그가 제시하는 흐름에 따라 셀라스를
공부하는 것이 철학 전체에 대한 큰 그림을 그리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여겨진다.
사실 근래에 들어 셀라스를 비롯하여 도널드 데이비슨, 존 맥도웰, 힐러리 퍼트남 등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로티의 영향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유럽의 대륙철학과 영미의 분석철학은 로티의 견해대로 ‘언어’, ‘반표상주의’, ‘실용주의’와 같은 주
제들에 대해서 서로 매우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
특별히 현대철학에서 소위 ‘언어적 전회(linguistic turn)’라고 불리는 일련의 사건들이 일어난 이후로 두 사조를 엄격
하게 구분하는 것은 거의 무의미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두 사조는 비록 표현방식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언어와 세계
의 관계에 대해 상당히 유사한 생각을 전개시키고 있으며, 이를 통해 전통적인 철학의 문제들 전체를 새로운 관점에
서 조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셀라스의 철학 역시 바로 이러한 맥락 속에서 이해해 보고자 한다.
The shift from the earlier to the later form of analytic philosophy, a shift which began around 1950 and was
complete by around 1970, was a result of many complexly interacting forces, the pattern of which is hard to trace.
Nevertheless, any historian of this shift would do well to focus on three seminal works: Willard van Orman Quine’s
“Two Dogmas of Empiricism” (1951), Ludwig Wittgenstein’s Philosphical Investigations (1954), and Wilfrid Sellars’s
“Empiricism and the Philosophy of Mind” (1956).
로티는 탈실증주의적 분석철학(post-positivistic analytic philosophy)이 형성된 배경에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텍스트
가 놓여 있다고 주장한다.
(1)콰인(W. V. O. Quine)의 「경험주의의 두 가지 도그마(Two Dogmas of Empiricism)」, (2)비트겐슈타인(L. Wittgenstein)
의 『철학적 탐구』, (3)셀라스(W. Sellars)의 「경험주의와 심리철학(Empiricism and the Philosophy of Mind)」. 로티에
따르면, 셀라스는 ‘소여의 신화(the Myth of the Given)’를 비판함으로써 감각-자료 경험주의(sense-data empiricism)를
붕괴시켰고, 에이어(A. J. Ayer)의 현상주의(phenomenalism)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러나 콰인과 비트겐슈타인의 텍스트가 많은 주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셀라스의 텍스트는 그 중요성에 비해 상대
적으로 강조되지 못하였다.
The fundamental thought which runs through this essay is Kant’s: “intuitions without concepts are blind.” Having
a sense-impression is, by itself, an example neither of knowledge nor of conscious experience. Sellars, like the
later Wittgenstein but unlike Kant, identified the possession of a concept with the mastery of the use of a word.
So for him, mastery of a language is prerequisite of conscious experience. As he says in sect. 29: “all awareness
of sorts, resemblances, facts etc., in short all awareness of abstract entities – indeed, all awareness even of
particulars – is a linguistic affair.” This doctrine, which he called “phychological nominalism,” entails that Locke,
Berkley, and Hume were wrong in thinking that we are “aware of certain determinate sorts …… simply by virtue of
having sensations and images” (sect. 28).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이다.”라는 칸트의 주장이 셀라스의 「경험론과 심리철학」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생각이다.
감각-인상 자체는 지식도, 의식적인 경험도 아니다. 의식적인 경험은 언어를 숙달함으로써만 획득된다.
소위 ‘이성의 논리적 공간(the logical space of reasons)’이라 불리는 언어적인 조건을 통해서만 세계는 우리에게 비로
소 경험된다.
감각-자료, 감각-인상이 직접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다는 경험주의의 생각은 허구적이며, 셀라스에게서 ‘소여의 신화’
라는 명칭으로 비판받는다.
그러나 현대철학이 칸트의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가?
판단의 초월론적 조건을 찾으려는 칸트의 시도가 여러 한계를 안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수많은 후대의 철학자들에
의해 비판되었다.
가령, 칸트는 공간과 시간을 감성의 형식으로 제시하면서 오늘날에는 이미 극복된 유클리드 기하학과 뉴턴 역학의
사고방식에 의존하고 있다.
또한 판단의 논리적 형식으로부터 지성의 개념들을 추론해 내는 과정은 『순수이성비판』에서도 불분명한 부분으로
유명하다.
이러한 점들 때문에 현대철학이 칸트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 도입할 수 없다는 사실은 거의 자명해 보인다.
그렇다면 셀라스는 어떻게 칸트의 주장을 발전시켜 경험주의를 비판하는가?
셀라스에게서 언어는 어떻게 경험을 구성하는 조건으로서 밝혀지는가?
대륙철학 전통에 속한 가다머의 경우 우리의 경험이 ‘역사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 때문에 ‘대화적 구조’로 이루어진
다는 사실이 언어의 문제를 부각시키는 데 중요하게 작용한다.
여기서 가다머는 칸트보다는 헤겔을 끌어들인다.
오히려 칸트는 가다머에게 비판의 대상이 된다.
왜냐하면 칸트가 경험의 잡다(das Mannigfaltige)들을 종합하는 조건으로서 제시한 감성의 형식과 지성의 개념은 모
두 인식의 초월론적 조건으로서 고정불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다머에 따르면 언어는 문화적이고 역사적이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특징을 지닌다.
따라서 칸트와 같이 고정된 인식의 한계로서 초월론적 조건을 찾으려는 시도는 잘못된 것이라 여겨진다.
Sellars’s argument for phychological nominalism is based on claim which spells out the moral of many of the
aphorisms of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The essential point is that in characterizing an episode or a state as
that of knowing, we are not giving an empirical description of that episode or justifying and being able to justify
what one says” (sect. 36). In other words, knowledge is inseparable from a social practice – the practice of
justifying one’s assertions to one’s fellow-humans. It is not presupposed by this practice, but comes into being
along with it.
로티는 셀라스의 ‘심리적 유명론(phychological nominalism)’이 지식을 사회적 실천과 분리 불가능하도록 만든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셀라스 자신의 생각인가 아니면 셀라스에 대한 로티의 해석인가?
나는 이전에 셀라스의 언어철학이 인식의 초월론적 조건을 찾으려는 칸트의 시도와 유사한 작업이라고 배웠다.
내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셀라스가 말하는 ‘이성의 논리적 공간’이란 우리 인식의 초월론적 조건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셀라스의 철학으로부터 지식과 사회적 실천을 연결 짓는 생각이 도출될 수 있는가?
오히려 사회나 문화와는 무관한, 우리 인식의 조건으로부터 결정되는 필연적 지식에 대한 생각이 도출되는 것이
아닐까?
So we cannot do what some logical positivists hoped to do: analyze epistemic facts without remainder “into non
-epistemic facts, whether phenomenal or behavioural, public or private, with no matter how lavish a sprinkling of
subjunctives and hypotheticals” (sect. 5). In particular, we cannot perform such an analysis by discovering the
“foundation” of empirical knowledge in the objects of “direct acquaintance,” objects which are “immediately before
the mind.” We cannot privilege reports that, for example, there is something red in the neighborhood as “reports of
the immediately given.” For such reports are no less mediated by language, and thus by social practice,
than reports that there are cows or electrons in the neighborhood. The whole idea of “foundations” of knowledge,
basic to both empiricism and rationalism, disappears once we become phychological nominalists.
셀라스의 논의로부터 이끌어지는 결론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논리실증주의자들의 기대와는 달리 인식적 사실들
(epistemic facts)을 남김없이 비-인식적 사실들(non-epistemic facts)로 분석할 수가 없다.
직접적으로 대상들과 만나는 가운데 경험적 지식의 “토대(foundation)’를 발견할 수 있다는 생각이 비판되었기 때문
이다.
경험주의와 합리주의는 모두 지식의 토대에 대한 생각을 전제로 두고 있지만, 우리가 심리적 유명론을 선택하게 되
면 지식의 ‘토대’에 대한 모든 관념들이 사라져버린다.
Whereas Quine’s “Two Dogmas” had helped destroy the rationalist form of foundationalism by attacking the
distinction between analytic and synthetic truths, “Empiricism and the Philosophy of Mind” helped destroy the
empiricist form of foundationalism by attacking the distinction between what is “given to the mind” and what is “
added by the mind.” Sellars’s attack on the Myth of the Given was a decisive move in turning analytic philosophy
away from the foundationalist motives of the logical empiricists. It raised doubts about the very idea of “
epistemology,” about the reality of the problems which philosophers had discussed under that heading.
One of the most quoted sentences in the essay occurs in sect. 38: “…… empirical knowledge, like its
sophisticated extension, science, is rational, not because it has a foundation but because it is a self-correcting
enterprise which can put any claim in jeopardy, though not all at once.” This sentence suggests that rationality
is a matter not of obedience to standards (which epistemologists might hope to codify), but rather of give-and-
take participation in a cooperative social project.
콰인의 「경험주의의 두 가지 도그마」는 ‘분석적 진리’와 ‘종합적 진리’의 이분법을 공격함으로써 합리주의적 형태의
토대론을 무너뜨리는데 공헌하였다.
반면 셀라스의 「경험론과 심리철학」은 ‘마음에 소여된 것(what is “given to the mind”)’과 ‘마음에 의해 덧붙여진 것
(what is “added by the mind”) 사이의 구별을 공격함으로써 경험주의적 형태의 토대론을 무너뜨리는데 공헌하였다.
이 문단에서 ‘마음에 소여된 것’과 ‘마음에 의해 덧붙여진 것’이라는 구별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직 모르겠다.
또한 셀라스의 철학이 ‘소여의 신화’를 비판함으로써 토대론을 무너뜨렸다는 점이 분명하다 하더라도, 여기서 곧바로
로티가 주장하는 것처럼 지식이 주고-받는 참여(give-and-take participation)를 통해 구성되는 사회적인 산물이라는
주장이 나올 수 있는지도 의문스럽다.
셀라스의 작업이 일종의 인식의 초월론적 조건을 찾는 작업이라면, 논리적 진리나 수학적 진리와 같은 것들은 우리
사고의 벗어날 수 없는 조건으로서 사회나 문화와 상관 없이 필연적인 참으로 제시될 수 있을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지식에 대한 로티의 주장에 동의하지만, 셀라스 본인이 지식을 사회적 산물이라고까지 생각하였는
지에 대해서는 보다 공부를 해 보아야할 것 같다.
An elaboration and defense of the presuppositions and implications of psychological nominalism, however, is
not all there is to “Empiricism and the Philosophy of Mind.” Sections 48-63 contain Sellars’s “Myth of Jones”
── a story which explains why we can be naturalists without being behaviourists, why we can accept
Wittgeinstein’s doubts about what Sellars calls “self-authenticating non-verbal episodes” without sharing Ryle’s
doubts about the existence of such mental entities as thoughts and sense-impressions.
셀라스가 제시하는 ‘존스의 신화(Myth of Jones)’에 대해서는 아직 그 의의를 정확히 파악하기가 힘들다.
비트겐슈타인의 사적 언어 논증처럼, 언어 이전적인 내적 감각이 우리에게 직접 주어진다는 생각을 비판하기 위한
가설인 것으로만 알고 있을 뿐이다.
로티에 따르면 ‘존스의 신화’는 우리가 행동주의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자연주의를 옹호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
로티는 라일과 비트겐슈타인의 차이를 통해 이를 설명한다.
그는 셀라스의 논증을 통해 우리가 라일의 생각을 수용하지 않더라도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은 수용할 수 있게 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사고들과 감각-인상들로서의 심적 대상의 존재에 대해 의심하지 않으면서도, ‘자기-입증적이며
비-언어적인 에피소드들(self-authenticating non-verbal episodes)’에 대해 의심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로티의 이 주장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
흔히 라일과 비트겐슈타인은 ‘일상언어학파(ordinary language school)’라는 이름 아래에 하나로 묶이곤 한다.
그러나 로티는 셀라스의 ‘존스의 신화’를 통해 라일과 비트겐슈타인을 분명하게 구분한다.
나는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와 『철학적 탐구』는 꽤 주의 깊게 읽어보았지만, 라일의 책은 아직 읽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 차이를 정확히 이해하기 힘들다.
로티의 구분을 따를 경우 라일은 ‘행동주의자인 동시에 자연주의자’인 반면, 비트겐슈타인은 ‘행동주의자가 아니면서도
자연주의자’라고 도식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마 이때의 ‘행동주의’나 ‘자연주의’는 특별히 심리철학적 문제에 국한된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듯하다.
At the time at which Sellars was writing, this was a vexed issue. For the appearance of Ryle’s The Concept of
Mind (1949) shortly before that of the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1954) had made Wittgensteinian opposition to
the idea of a “private language,” and to that of “entities capable of being known by only one person,”
seem inseparable from Ryle’s polemic against “the ghost in the machine.” Sellars’s account of inner episodes
as having originally been postulated, rather than observed, entities, together with his account of how speakers
might then come to make introspective reports (sect. 59) of such episodes, made clear how one could be
Wittgensteinian without being Rylean. Sellars showed how one could give a non-reductive account of “mental
event” while nevertheless eschewing, with Wittgenstein, the picture of the eye of the mind witnessing these e
vents in a sort of immaterial inner theater.
여기서도 로티는 라일과 비트겐슈타인을 구별하는 분명한 논증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는 셀라스의 ‘존스의 신화’가 지닌 의의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즉, 존스의 신화는 ‘심적 사건’에 대해 비환원적인 설명을 제시하면서도, 동시에 비물질적인 내적 극장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관찰하는 마음의 눈에 대한 그림을 피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
다시 말해, 마음을 행동주의의 입장으로 환원시키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내적 감각이 우리에게 직접 주어진다는
생각을 비판함으로써 자연주의의 입장을 취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
아마 셀라스의 전체 논지를 보았을 때 여기서 핵심이 되는 것도 역시 ‘언어’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내적 감각은 우리에게 언어를 통해 주어진다. 따라서 비물리적이며 내적으로 직접 파악할 수 있는 존재자로서 마음
을 상정해서는 안 된다. 이 점에서 자연주의는 옳다.
그러나 비물리적 존재자로서 마음이 비판받았다고 해서 마음을 행동이나 행동 성향을 통해 설명하려고 시도해서도
안 된다. 이 점에서 행동주의는 틀렸다. 그 구체적인 이유가 다음 문단을 통해 조금이나마 제시되고 있다.
Sellars’s treatment of the distinction between mind and body has been followed up by many philosophers of mind
in subsequent decades. He may have been the first philosopher to insist that we see “mind” as a sort of
hypostatization of language. He argued that the intentionality of beliefs is a reflection of the intentionality of
sentences, rather than conversely. This reversal makes it possible to understand mind as gradually entering the
universe by and through the gradual development of language, as part of a naturalistically explicable evolutionary
process, rather than seeing language as the outward manifestation of something inward and mysterious which
humans have and animals lack. As Sellars sees it, if you can explain how the social practices we call “using
language” came into existence, you have already explained all that needs to be explained about the relation
between mind and world.
셀라스에 따르면 ‘마음’이란 언어의 실체화(hypostatization)이다.
‘실체화’라는 직역이 적절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다른 선생님은 이 단어를 ‘가설적 대상’이라고 풀어서 소개하셨는
데, 의미상으로는 그렇게 번역하는 것이 더 올바르다고 생각된다.
즉, 마음은 언어를 통해 일종의 가설로서 제시된다. 셀라스에 따르면 믿음들의 지향성(intentionality of beliefs)은 문장
들의 지향성(intentionality of sentences)을 반영하며, 둘의 관계가 반대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마음은 언어의 점차적인 발달을 통해서 점차적으로 우주에 들어온다.
이때 언어의 발달이란 ‘내적이고 신비적인 무엇인가’로서의 ‘마음’이 외부로 표출되는 과정이 아니다.
오히려 자연주의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 진화론적 과정일 뿐이다. 셀라스에 따르면, 우리가 ‘언어 사용(using language)’
이라고 부르는 사회적 실행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는지를 설명할 경우, 우리는 이미 마음과 세계의 관계에 대해 설명
되어야 할 모든 것들을 설명한 셈이다.
로티는 『철학과 자연의 거울』에서 셀라스를 이용하여 심리철학의 기획 전체를 비판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언어철학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마음과 세계를 존재론적으로 구별한 뒤 이들 사이의 관계를 해명하려는 시도는 결국
사이비 문제에 빠져 있는 것으로 밝혀질 뿐이다.
세계는 언어를 통해 구성된다. 마음도 언어를 통해 구성된다.
하지만 심리철학은 세계와 마음을 구성하는 ‘언어’라는 조건에 대해 제대로 반성하지 않은 채 마치 언어 밖에 마음이
나 세계가 따로 존재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서 문제를 설정하였다.
특별히 현대 심리철학은 물리학을 통해 발견된 대상들을 근본 토대로 삼아 세계와 마음의 비밀을 밝힐 수 있을 것이
라는 물리주의의 환상에 빠져 있다. 언어가 없으면 세계도 없고 마음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심리철학은 세계나 마음
의 ‘토대’를 직접 발견해낼 수 있을 것이라 전제한 상태에서 논의를 진행시키는 것이다.
만일 이러한 언어철학의 비판이 정당하다면 심리철학은 그 근본에서부터 무너져버린다. 내가 알기론, 이 때문에 영
미 분석철학 계열에서도 언어철학과 심리철학 사이에는 갈등이 있다고 한다.
그렇지만 언어철학적 통찰이 담고 있는 함의가 단순히 심리철학 비판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언어철학은, 로티가 보여주는 것처럼, 근대 인식론 전체를 비판하며 특별히 그로부터 파생된 과학주의적 세계이해를
뿌리부터 공격한다.
세계의 객관적인 토대가 존재한다는 생각, 그리고 그 토대를 인식주체인 우리가 마치 대상을 거울을 비추듯이 마음
속에 표상함으로써 그려낼 수 있다는 생각, 더 나아가 그렇게 그려진 그림이 바로 수리물리학에 근거한 자연과학의
이론들이라는 생각, 마지막으로 이러한 이론들은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만큼 객관적인 지식이라는 생각
전체가 한꺼번에 무너진다.
비트겐슈타인, 콰인, 셀라스, 데이비슨, 맥도웰, 로티, 브랜덤 등으로 이어지는 탈실증주의적 분석철학 전통은, 비록
서로 의견의 차이는 있지만, 커다란 흐름을 형성하며 이와 같은 비판을 수행하고 있다.
이 지점에서 대륙철학과 분석철학은 완벽하게 일치한다.
언어를 통해 존재가 열어밝혀진다고 주장하는 하이데거와 가다머, 언어적 의사소통을 통해 생활세계가 형성된다고
주장하는 하버마스, ‘에피스테메’라는 각 시대의 언어적 구조가 우리 지식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구성한다고 주장하
는 푸코, 우리는 언어로 구성된 상징계에 들어감으로써만 대상을 욕망할 수 있게 된다고 주장하는 라캉, 형이상학은
‘문자’라는 이질적 요소의 개입을 통해 성립할 수 있을 뿐 결코 세계를 있는 그대로 현전하게 하지 못한다고 주장하는
데리다 등은 모두 ‘언어’라는 주제를 통해 분석철학과 만나고 있다.
근대적 주체 비판, 근대적 합리성 비판, 근대의 표상주의 비판이라는 주제들은 결코 대륙철학자들만의 전유물이 아
니다. 현대철학의 핵심적인 문제들의 배경에는 언제나 언어가 놓여 있으며, 대륙철학과 분석철학은 모두 언어에 대
해 고민하는 과정에서 서로 매우 유사한 생각들을 전개시키게 되었다.
A recent book by Robert Brandom, Making it Explicit, offers the first systematic and comprehensive attempt to
follow up on Sellars’s thought. More specifically, it offers a “semantic explanatory strategy which takes inference
as its basic concept,” as opposed to the alternative strategy “dominant since the Enlightenment, which takes
representation as its basic concept.” Brandom’s work can usefully be seen as an attempt to usher analytic
philosophy from its Kantian to its Hegelian stage ── an attempt foreshadowed in Sellars’s wry description of
“Empiricism and the Philosophy of Mind” as “incipient Meditations Hegelienes” (sect. 20) and his reference to
Hegel as “that great foe of ‘immediacy’” (sect. 1).
로티는 탈실증주의적 분석철학의 형성을 칸트에서 헤겔로의 전회로 설명한다.
이미 셀라스 자신부터가 그의 「경험주의와 심리철학」을 “막 시작된 헤겔주의적 성찰(incipient Meditations Hegelienes)”
이라고 표현한 바 있으며, 헤겔을 “‘직접성’에 반대하는 위대한 대항자(that great foe of ‘immediacy’)”라고 언급한 바 있다.
로티에 따르면,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이다.”라는 칸트의 통찰을 수용한 것은 단지 분석철학 내부에서 일어난 변화의
첫 단계일 뿐이다.
로티가 이 서문에서 분석철학의 헤겔주의적 전회에 대해 그리 뚜렷하게 서술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 아마도 그는
신실용주의적 철학이 칸트보다는 헤겔에게 더 가깝다고 여기는 것으로 보인다. 확실히 신실용주의가 문화적 공동체,
사회적 실천,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지식의 변화 등을 강조한다면, 이러한 생각은 칸트에 비해 헤겔에게서 더욱 많이
발견할 수 있다.
특히 로티는 언어를 초월론적 조건으로 보지 않으며, 언어에 한계를 그으려 하지도 않기 때문에 더욱 헤겔과 유사하다.
언어는 사회적 실천으로써 역사 속에서 자기 한계를 계속 넘어갈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로티가 말하는 헤겔로의 전회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보다 공부를 해 보아야 할 것 같다.
신실용주의와 헤겔 사이의 개별적인 유사점들은 많이 지적할 수 있지만, 아직 무엇이 그 전환을 일으킨 가장 핵심적인
요소인지는 파악하지 못하겠다.
Philosophers in non-anglophone countries typically think quite hard about Hegel, whereas training in the history
of philosophy which most analytic philosophers receive often tempts them to skip straight from Kant to Frege.
It is agreeable to imagine a future in which the tiresome “analytic-Continental split” is looked back upon as an
unfortunate, temporary breakdown of communication – a future in which Sellars and Habermas, Davidson and
Gadamer, Putnam and Derrida, Rawls and Foucault, are seen as fellow-travelers on the same journey, fellow-
citizens of what Michael Oakeshott called a civitas peregrina.
로티는 분석철학의 헤겔주의적 전회를 통해 대륙철학과 분석철학 사이에 활발한 대화가 이루어지는 미래를 상상하고
있다.
셀라스와 하버마스, 데이비슨과 가다머, 퍼트남과 데리다, 롤스와 푸코가 같은 여행을 떠난 길동무로서, 순례자의 도성
(civitas peregrina)의 공동시민들로서 여겨질 수 있는 미래 말이다.
언어에 대한 논의가 대륙철학과 분석철학 모두에서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는 만큼, 또한 이를 통해 두 사조가 모두 근대
의 인식론을 비판하며 헤겔과 유사한 논지로 철학을 전개시키고 있는 만큼, 로티가 꿈꾸는 철학의 미래는 이미 이루어
지고 있으며 앞으로는 더욱 분명해질 것이라고 생각된다.
인용과 해설
셀라스의 논문 「경험주의와 심리철학」은 단행본으로도 출간되어 있다.
책 앞부분에는 리처드 로티의 서문이, 뒷부분에는 로버트 브랜덤의 스터디 가이드가 실려 있다.
특히 브랜덤이 자신의 대학원생, 학부생 제자들을 위해 쓴 「경험주의와 심리철학」 스터디 가이드는 대단히 유익하다.
셀라스의 철학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두었을 뿐만 아니라, 논문을 각 절(section) 단위로 해설하고 있기 때문에 꽤
상세하기까지 하다.
나는 브랜덤의 설명을 통해서 셀라스가 주장하고자 하는 요지를 대략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이 글에서는 셀라스의 논문 원본과 브랜덤의 스터디 가이드를 함께 인용하며 내용을 요약·정리해보고자 한다.
I PRESUME that no philosopher who has attacked the philosophical idea of givenness or, to use the Hegelian
term, immediacy has intended to deny that there is a difference between inferring that something is the case and,
for example, seeing it to be the case.1
셀라스는 ‘추론(inferring)’과 ‘바라봄(seeing)’ 사이의 구별을 통해 ‘소여의 신화(Myth of the Given)’를 비판한다.
이 구분은 ‘인과적(casual)’ 질서와 ‘인식적(epistemic)’ 질서의 사이의 구분, ‘자연적(natural)’ 질서와 ‘규범적(nomative)’
질서 사이의 구분, ‘사실(is)’과 ‘당위(ought)’ 사이의 구분에 대응한다.
감각-자료 경험주의는 이 두 구분을 혼동한 나머지 인식적 질서를 인과적 질서로 해명하고자 하는 일종의 ‘자연주의
적 오류(naturalistic fallacy)’에 빠지고 말았다는 것이 셀라스의 비판이다.
셀라스는 감각적 소여에 대한 ‘바라봄’이 우리의 믿음이나 주장을 정당화할 수 없으며, 정당화는 믿음이나 주장들
사이의 ‘추론’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는 점을 지적한다.
For what is known even in non-inferential knowledge, is facts rather than particulars, items of the form
something’s being thus-and-so or something's standing in a certain relation to something else.
It would seem, then, that the sensing of sense contents cannot constitute knowledge, inferential or non-inferential;
and if so, we may well ask, what light does the concept of a sense datum throw on the ‘foundations of empirical
knowledge?’2
경험주의에 대한 셀라스의 비판 논점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셀라스는 ‘비추론적 지식(non-inferential knowledge)’과 ‘추론적 지식(inferential knowledge)’ 사이의 관계에 대해 비판
하지 않는다.
즉, 추론적 지식은 비추론적 지식을 통해 정당화된다는 점에 대해 셀라스는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셀라스는 ‘감각 내용에 대한 감각(sensing of sense contents)’과 ‘지식(knowledge)’ 사이의 관계를 문제 삼는다.
경험주의는 지식이 직접적 소여인 감각 자료들을 토대로 하여 정당화될 수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셀라스는 정당화란 지식들 사이의 관계에만 적용될 뿐, 감각과 지식 사이의 관계에는 적용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다시 말해, 셀라스에 따르면, 감각 내용에 대한 감각은 지식을 구성할 수가 없다.
그 지식이 추론적 지식이든, 비추론적 지식이든 말이다.
Now it might seem that when confronted by this choice, the sense-datum theorist seeks to have his cake and
eat it. For he characteristically insists both that sensing is a knowing and that it is particulars which are sensed.
Yet his position is by no means as hopeless as this formulation suggests.3
셀라스는 경험주의자들이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다음 두 선택지 사이에서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1)감각은 지식이 아니다. (2)감각은 지식이다.
가령, “나는 빨강을 감각한다.”라는 주장과 ‘빨강’에 대한 감각은 어떻게 관련되는가? “
나는 빨강을 감각한다.”는 단지 문장의 형태를 지닌 주장일 뿐 결코 ‘빨강’에 대한 감각 자체가 아니다.
그런데 경험주의자들은 이 문장이 참이라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빨강’에 대한 감각을 내세운다.
이때 (2)라면 ‘빨강’에 대한 감각은 다시 지식이 되므로, 지식 밖에서 지식을 정당화해주는 토대의 역할을 할 수가 없다.
(1)이라면 이 감각은 “나는 빨강을 감각한다.”라는 지식을 발생시킨 인과적 원인은 될 수 있을지언정, 어떻게 그 지식
을 정당화해주는 토대의 역할을 할 수 있는지가 제대로 해명되지 못한다.
둘 중 어떠한 선택지를 택하든지 감각-자료를 지식의 토대로 내세우는 경험주의는 실패하고 만다.
The Myth of the Given is the idea that there can be a kind of awareness that has two properties. First, it is or
entails having a certain sort of knowledge──perhaps not of other things, but at least that one is in that state,
or a state of that kind──knowledge that the one whose state it is possesses simply in virtue of being in that
state. Second, it entails that the capacity to have that sort of awareness, to be in that sort of state, does not
presuppose the acquisition of any concepts──that one can be aware in that sense independently of and
antecedently to grasping or mastering the use of any concepts (paradigmatically through language learning).
The conclusion of Sellars’s critical argument is that these two features are incompatible: only what is
propositionally contentful, and so conceptually articulated, can serve as (or for that matter, stand in need of) a
justification, and so ground or constitute knowledge.4
브랜덤은 셀라스가 제시한 ‘소여의 신화’에 대한 비판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소여의 신화는 의식(awareness)이 두 가지 속성을 지닐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로, 의식은 지식이거나 지식을 수반한다. 둘째로, 그러한 의식을 가질 수 있는 능력은 어떠한 개념(concept)의
획득도 전제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두 특징은 양립불가능하다.
오직 명제적으로 내용이 있는 것만, 그리고 개념적으로 분명히 표현된 것만, 정당화를 위해, 지식을 근거지우거나
구성하기 위해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To treat something as even a candidate for knowledge is at once to talk about its potential role in inference, as
premise and conclusion. Because a crucial distinguishing feature of epistemic facts for Sellars is that their
expression requires the use of normative vocabulary, to treat something as a candidate for knowledge is also
to raise the issue of its normative status. The Myth of the Given eventually appears as “of a piece with the
naturalistic fallacy in ethics”──the attempt to derive ought from is. This is because talk of knowledge is
inevitably talk of what (conceptually articulated propositional contents) someone is committed to, and whether
they are in various senses entitled to those commitments.5
브랜덤은 ‘소여의 신화’를 ‘자연주의적 오류’와 연결 짓는다.
어떠한 주장이나 믿음을 지식의 후보들로서 다룬다는 것은, 곧 전제와 결론으로 이루어진 추론에서 그것이 지닌 잠
재적인 역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주장이나 믿음은 추론을 통해 도출되거나, 추론의 근거가 될 때 비로소 지식의 후보들로 여겨질 수 있다.
이러한 추론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지식의 후보들이 지닌 규범적인(normative) 상태이다.
이때의 ‘규범’이란 논리학의 규칙들과 같은 ‘인식적 규범’이다. 즉, 어떠한 주장이 믿음이 추론 과정 속에서 지식의
후보들로 다루어기 위해서는 인식적 규범의 질서를 따라야 한다.
언어 속에서, 언어의 규범을 따르고 있는 믿음이나 주장만이 지식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소여의 신화는 이 언어의 규범을 언어 밖의 사실로 환원시킬 수 있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이 주장은 윤리학에서 윤리적 규범을 자연적 사실로 환원시키려는 시도가 비판받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비판받을 수 있다.
물리적 대상(Physical Objects)
↓
(1)
↓
감각 내용에 대한 감각(Sensings of Sense Contents)
↓
(2)
↓
비추론적 믿음(Noninferential Beliefs)
↓
(3)
↓
추론적 믿음(Inferential Beliefs)6
브랜덤은 위와 같은 도식을 통해 셀라스의 주장을 보다 이해하기 쉽게 설명한다.
우리는 흔히 물리적 대상으로서 빨간 사과가 외부에 있기 ‘때문에’ 빨강에 대한 감각이 발생한다고 이야기한다.
또 빨강에 대한 감각이 있기 ‘때문에’ “이 사과는 빨갛다.”라는 비추론적 믿음이 생겨난다고 이야기한다.
또 “이 사과는 빨갛다.”와 같은 종류의 여러 비추론적 믿음들이 있기 ‘때문에’ 그 밖의 여러 추론적인 믿음들이 형성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브랜덤은 이 일련의 과정에서 사용된 ‘때문에’라는 용어가 사실은 서로 다른 층위를 지니고 있다는 점을 지적
한다.
감각 내용에 대한 감각이 물리적 대상 ‘때문에’ 발생하였다고 말하는 경우, 우리는 ‘인과적(causal)’ 관계를 이야기하
고 있다.
반면 추론적 믿음이 비추론적 믿음 ‘때문에’ 형성되었다고 말하는 경우, 우리는 ‘인식적(epistemic)’ 관계를 이야기하
고 있다.
(1)이 원인-결과의 자연적 관계라면, (3)는 전제-결론 사이의 정당화 관계이다.
그리고 이때 가장 문제시되는 부분은 그 두 관계를 연결해주는 (2)이다.
(2)라는 연결이 과연 가능할 수 있느냐에 대한 의문이 바로 「경험주의와 심리철학」의 핵심이다.
Suppose that one understands the sensing of a sense content to be the existence of a nonepistemic relation
between one particular, the sense content, and another, the person doing the sensing. (This is the position
Sellars himself eventually endorses.) If so, then it is hard to see how the sensing of a sense content could entail
or justify a claim, for instance a noninferential belief. For only things with sentential structure can be premises of
inference, not nonepistemically specified particulars. For this reason sensings, understood in terms of
nonepistemic relations between sense contents and perceivers, are not well suited to serve as the ultimate
ground to which inferentially inherited justification traces back.7
경험주의 철학에는 ‘감각 내용에 대한 감각’과 ‘비추론적 믿음’ 사이의 관계에 대해 잘 해명되지 않은 채 애매하게 남
겨진 부분들이 있다.
바로 이 부분이 셀라스가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지점이다.
경험주의는 직접적 소여를 지식의 토대라고 함으로써 이 토대로부터 지식을 정당화하길 시도한다.
하지만 정당화는 오직 추론 관계에서 이루어질 수 있을 뿐이다.
‘비추론적 지식’을 ‘감각 내용에 대한 감각’을 통해 정당화할 수 있다는 주장은 정당화의 범위를 벗어나서 정당화를
사용하고 있는 셈이다.
경험주의는 그들의 이 근본적인 입장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지에 대해 명확한 설명을 제시하지 못할뿐더러,
이 문제를 제대로 고민하지조차 못하였다.
이 때문에 직접적 소여가 지식의 토대라는 경험주의의 입장은 셀라스에게서 단순한 하나의 허구로서 ‘소여의 신화’
라 비판받는다.
반대로 생각할 경우, 우리의 모든 지식은 추론의 과정 안에, 정당화의 관계 안에 놓여 있을 수밖에 없다.
셀라스는 이렇게 지식이 작동하는 공간을 ‘이성의 논리적 공간(the logical space of reasons)’이라 부른다.8
이 공간이 바로 ‘언어’이다.
언어는 직접적 소여에 의존하지 않는 그 자신만의 규칙을 지니고 있으며, 우리의 주장과 믿음은 언어사용의 규칙 속
에서 정당화를 얻는 것이다.
셀라스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한 사건이나 상태를 그것에 대한 지식으로서 특징짓는 경우, 우리는 그
사건이나 상태에 대해서 경험적인 기술을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것을 이성의 논리적 공간 안에, 정당화하는 공간 안에 그리고 말해진 것을 정당화할 수 있게 하는
공간 안에 위치시키고 있는 것이다.”9
Now the idea that epistemic facts can be analyzed without remainder──even “in principle”──into non-epistemic
facts, whether phenomenological or behavioral, public or private, with no matter how lavish a sprinkling of subjunc
tives and hypotheticals is, I believe, a radical mistake──a mistake of a piece with the so-called “naturalistic falla
cy” in ethics.1
감각-자료 경험주의자들은 ‘자연주의의 오류(naturalistic fallacy)’를 범하고 있다는 것이 결국 셀라스가 주장하고자
하는 핵심 내용이다.
만일 경험주의자들이 감각 내용에 대한 감각을 비추론적 지식과 동일시해 버린다면, 그들은 둘 사이가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에 대한 논리적 연관을 잘라버리는 셈이 된다.
설령 경험주의자들이 감각 내용에 감각을 더욱 분석될 수 있는 것으로 여긴다고 하더라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이 경우 감각은 비인식적 사실로 분석될 것이므로, 이로부터 어떻게 인식적 규범이 도출될 수 있는지가 해명될 수 없다.
따라서 셀라스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내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고전적인 감각-자료 철학자들이 감각 내용에 대한 소여를 비인식적 용어로 분석될 수 있
는 것으로 보았든지, 아니면 어떻게든 환원될 수 없고 지식적인 활동들에 의해서 구성된 것으로 보았든지에 간에,
그들이 예외 없이 그것(감각 내용에 대한 소여)들을 다른 의미에서 근본적인 것으로 지니고 있었다는 점이다.”2
For they have taken givenness to be a fact which presupposes no learning, no forming of associations, no
setting up of stimulus-response connections. In short, they have tended to equate sensing sense contents with
being conscious, as a person who has been hit on the head is not conscious, whereas a new-born babe,
alive and kicking, is conscious. They would admit, of course, that the ability to know that a person, namely
oneself, is now, at a certain time, feeling a pain, is acquired and does presuppose a (complicated) process of
concept formation. But, they would insist, to suppose that the simple ability to feel a pain or see a color, in short,
to sense sense contents, is acquired and involves a process of concept formation, would be very odd indeed.3
감각-자료 경험론자들은 감각 내용을 감각하는 것을 의식을 가지는 것과 동일시한다.
이들에 따르면, 고통을 느끼거나 색깔을 보는 단순한 능력, 곧 감각 내용에 대한 감각 능력은 따로 습득될 필요가 없
으며 개념 형성의 과정 또한 필요로 하지 않는다.
물론 이들 감각-자료 경험론자들도 지식을 가지기 위한 능력은 습득되어야 하며 개념 형성의 과정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 대해 동의한다.
그런데 셀라스는 바로 여기서 모순이 발생한다고 지적한다.
만일 감각-자료 경험주의자들이 감각 내용에 대한 감각을 습득 이전적인 것이라고 주장할 경우, 이들은 “x가 감각
내용을 감각한다.”를 더 이상 분석할 수가 없게 된다.
반대로 만일 감각-자료 경험주의자들이 “x가 빨간 감각 내용 s를 감각한다.”를 “x가 s는 빨갛다는 것을 비추론적으로
안다.”로써 분석할 수 있다면, 다시 말해 감각 내용에 대한 감각이 비추론적 지식과 동일하거나 서로 뗄 수 없는 것이
라면, 이들은 비추론적 지식을 가질 수 있는 능력이 그 자체로 습득 이전적인 것이라고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비추론적 지식을 가질 수 있는 능력이 습득 이전적인 것이라는 주장은 경험주의자들에게 도저히 수용될 수가
없는 이상한 주장이다. 셀라스는 이러한 모순이 발생하는 지점을 보다 명료하게 다음의 세 명제 사이의 관계로 설명
한다.
A. “x가 빨간 감각 내용 s를 감각한다.”는 “x가 비추론적으로 s는 빨갛다는 것을 안다.”를 수반한다.
B. 감각 내용에 대해 감각할 수 있는 능력은 습득 이전적인 것이다.
C. x가 Φ라는 형식을 지닌 사실에 대해 지식을 가지는 능력은 습득된 것이다.4
세 명제는 동시에 성립할 수가 없다. A와 B를 유지할 경우에는 –C, B와 C를 유지할 경우에는 –A, A와 C를 유지할
경우에는 –B가 된다. 따라서 감각-자료 경험주의자들은 세 가지 명제 중에 무엇을 포기할지 선택해야 한다.
이 문제에서 셀라스가 취하는 선택지는 B와 C를 유지하면서 A를 버리는 것이다.
A가 바로 셀라스에 의해서 신랄하게 비판받는 ‘소여의 신화(Myth of the Given)’, 곧 감각 내용에 대한 감각과 비추론
적 지식을 동일시하는 자연주의의 오류이다. 셀라스는 A를 버릴 경우 다음과 같은 결과가 생긴다고 이야기한다.
“그(감각-자료 경험주의자)는 A를 버릴 수 있는데, 이 경우 감각 내용에 대한 감각은 비인식적 사실이 된다.
비인식적 사실은, 틀림없이 비추론적 지식을 위한 필요조건, 논리적으로조차 필요조건이 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지식을 구성하지는 못하는 사실이다.”5
Sellars’s diagnosis, which is not yet a treatment for the conceptual illness of givenness, is that it results from
confusing two trains of thought, the first derived from an attempt to give a scientific account of perception and the
acquisition of empirical information, and the second from an attempt to give a foundational epistemological account
on the Cartesian model canvassed above in the discussion of [3]6
셀라스는 감각 자료에 대한 고전적인 개념이 서로 다른 두 가지 생각들의 혼합으로 인해 생긴 잡종(mongrel)이라고
평가한다.
첫 번째 생각은 지각과 경험적 정보의 습득에 대한 과학적 설명을 제시하려는 시도에서부터 나왔다.
이 생각에 따르면, 감각 내용 C#에 대한 감각은 인간 존재 안에서 아무런 선행하는 배움이나 개념 형성 없이 일어날
수 있다.
반면 두 번째 생각은 데카르트주의에 대해서 토대주의적인 인식론적 설명을 제시하려는 시도에서부터 나왔다.
이 생각에 따르면, 우리에게는 특정 대상이 C#라는 사실에 대한 비추론적 지식이 있으며, 바로 이 지식이 다른 지식
들을 위한 증거를 제공해 줌으로써 경험적 지식의 필요조건이 된다.
첫 번째 분류는 인과적 역할에 의해 선발되어진 개별자(particular)들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두 번째는 추론적 또는
정당화적 역할에 의해 선발되어진, 문장의 형태로 구조화된 주장(claiming)들로 이루어져 있다.
브랜덤은 이렇듯 서로 층위가 다른 두 생각을 혼합하게 될 경우 감각 내용에 대한 감각이 경험적 지식의 전형(paradigm)
이 되어버리고 만다고 이야기한다.
• Should we think of the sensation in question as a kind of particular (structured like a triangle), or as a kind of
belief (structured like a sentence)?
• Is the capacity to have empirical knowledge like this acquired by experience, or prior to experience?
• Is it prior to the rest of our knowledge in the order of causation, or in the order of justification and evidence?7
감각-자료 경험주의자들은 서로 다른 층위의 생각들을 혼합해버리고 말았다.
셀라스는 이때 생겨날 수밖에 없는 여러 당혹감(perplexity)을 지적하는데, 브랜덤은 이를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한다.
첫째, 우리는 감각을 (삼각형처럼 구조화된) 개별자(particular)의 한 종류로 생각해야 하는가, 아니면 (문장처럼
구조화된) 믿음(belief)의 한 종류로 생각해야 하는가?
둘째, 경험적 지식을 가지는 능력은 경험에 의해 획득된 것인가, 아니면 경험에 선행하는 것인가?
셋째, 경험적 지식을 가지는 능력은 우리의 다른 지식들을 인과(causation)의 질서에서 선행하는가,
아니면 정당화(justification)와 증거의 질서에서 선행하는가?
「경험주의와 심리철학」을 가능한 글의 흐름에 따라 전체적으로 요약해보고 싶은데 내용이 쉽지 않다.
이해를 위해 논문 전체를 번역해 보려고 생각도 하였지만 시간이 너무 많이 들뿐더러, 번역이 까다로운 영어 문장들
이 종종 있어서 포기하였다.
현재로서는 어쩔 수 없이 논문을 읽는 과정에서 눈에 띄는 내용들을 부분적으로 발췌하고 정리해 두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I shall now examine briefly a heterodox suggestion by, for example, Ayer to the effect that discourse about sense
data is, so to speak, another language, a language contrived by the epistemologist, for the situations which the
plain man describes by means of such locutions as “Now the book looks green to me” and “There seems to be a
red and triangular object over there.” The core of this suggestion is the idea that the vocabulary of sense data
embodies no increase in the content of descriptive discourse, as over and against the plain man’s language of
physical objects in Space and Time, and the properties they have and appear to have.1
에이어(Ayer)는 감각 자료에 대한 담론이 ‘다른 언어’라고 이야기한다.
‘다른 언어’란 소박한 사람이 “지금 그 책은 나에게 초록색으로 보인다.”와 “저기에 빨간색의 삼각형 물체가 있는 것
으로 여겨진다.”와 같은 어구를 써서 기술할 수 있는 상황을 위하여 인식론 연구자들에 의해 고안된 언어이다.
셀라스를 통해 이 논의를 처음 접한 나로서는 ‘다른 언어’에 대한 에이어의 생각이 정확히 어떠한 맥락에서 등장한 것
인지 이해하기 힘들다.
뒤따르는 설명을 번역하자면, 감각 자료에 대한 어휘가 서술적인 담화의 내용 속에서, 시간과 공간 속에 있는 물리적
대상들에 대한 소박한 인간의 언어에 대하여, 그리고 그 물리적 대상들이 가지고 있으며 가지고 있는 것 같은 속성들
에 대하여, 아무런 증가도 구현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이러한 제안의 핵심이라고 한다.
난삽하게 쓰인 이 문장은 아마도 에이어의 ‘다른 언어’라는 것이 물리적 대상들에 대한 일상적 언어와 구별되면서도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는 점을 말하고자 하는 듯하다.
즉 “X는 S에게 Φ라는 감각 자료를 준다.”라는 형태의 문장은 “X는 S에게 Φ로 보인다.”라는 형태의 문장과 동일한
강제력을 가지는 것으로 규정된다. 예를 들어 “토마토가 S에게 불룩하고 빨간 감각 자료를 준다.”는 “토마토가 S에게
빨갛고 불룩하게 보인다.”에 대한 고안된 대응물이 될 것이며, 전자는 정확히 후자가 의미하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As an aid to explicating this suggestion, I am going to make use of a certain picture. I am going to start with the
idea of a code, and I am going to enrich this notion until the codes I am talking about are no longer mere codes.2
‘코드(code)’라는 개념이 처음으로 등장하고 있다.
이 단어를 어떻게 번역하는 것이 적절한지, 이 논의가 어떠한 의의를 지니는 것인지 잘 이해되지 않는다.
셀라스에 따르면, 그는 ‘코드’라는 것에 대한 생각으로부터 논의를 시작하고자 하며, 그가 이야기하고 있는 이
코드가 더 이상 단순한 코드가 아니게 될 때까지 이 개념을 강화하고자 한다.
The topic here is one possible form a sense datum theory might take to avoid the nonepistemically-specifiable-
particular vs. only-epistemically-specifiable-sententially-structured-premise dilemma Sellars is constructing for
it. One might give up entirely on the nonepistemic side of things, and embrace the foundational noninferential
belief side. Thus Ayer sees sensing-of-sense-data talk as equivalent to and derivative from talk about how t
hings look or seem to a subject.3
브랜덤의 설명을 통해 ‘다른 언어’ 이론의 전체적인 요지를 파악해 보고자 한다.
브랜덤에 따르면, 여기서 논의되는 주제는 감각-자료 경험주의가 ‘비인식적이며-명시할 수 있는-개별자’ 대 ‘오직-
인식적이며-명시할 수 있는-문장형태의-구조화된-전제’ 사이의 딜레마를 피하기 위해 취할지도 모르는 하나의 가능
한 형태에 관한 것이라고 한다.
이 딜레마는 지금까지 계속 논의되었듯이, ‘감각 내용에 대한 감각(sensings of sense contents)’과 ‘비추론적 믿음
(noninferential beliefs)’ 사이의 연결고리가 과연 비인식적인 것인지, 아니면 인식적인 것인지에 대한 논의일 것이라
고 생각된다.
경험주의자들은 이 연결고리를 비인식적이라고 주장할 경우 ‘자연주의의 오류’에 빠지게 되고, ‘인식적’이라고 주장
할 경우 자기모순에 빠지게 된다. 이러한 딜레마를 피하기 위해 에이어는 ‘감각-자료에 대한-감각을 말하는 것’을
‘어떻게 사물이 주체에게 보이는지 또는 여겨지는지에 대해 말하는 것’과 동일시하며 전자가 후자로부터 파생된 것이
라고 본다.
Three nested descriptions of a phenomenon. First, a platitude: I may be mistaken that there is a red triangle in
front of me. It is not possible for me to be mistaken about there seeming to be one. Next, a reifying move: an
application of the Cartesian principle that although appearance must be distinguished from reality since subjects
can be in error about the latter, on pain of an infinite regress it cannot be that one might be mistaken about the
former also. Finally, a foundational claim: The class mentioned in (a) consists of beliefs that would be expressed
by sentences used to make perceptual reports, prefixed by a special operator “It looks to me now that……,” “It
seems to me now that……,” or “It now appears to me just as though……”4
브랜덤은 에이어의 제안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위에서 발췌한 내용은 그 중에서도 두 번째 부분이다.
에이어의 제안에 대한 브랜덤의 설명도 나에게는 만족스럽게 이해되지 않는다.
그의 설명을 그대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a)우리의 다른 경험적 믿음들을 위하여 정당화의 근거를 형성하는 비추론적 믿음들의 계열이 존재한다.
(b1)평범한 의견: 나는 내 앞에 빨간 삼각형이 있다는 점에 대해 실수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빨간 삼각형에 대한 바라봄이 있다는 점에 대해 실수하는 것이란 나에게 불가능하다.
(b2)구체화하는 제안: 데카르트주의적 원리의 적용, 곧 주체가 실재에 대해서 오류를 범할 수 있기 때문에 비
록 드러남(appearance)은 실재(reality)로부터 구분되어야 하지만, 무한퇴행을 각오한 채 드러남에 대해서 역
시 실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b3)근본적인 주장: (a)에서 언급된 계열은 문장들에 의해 표현되는 믿음들로 구성된다.
이때 그 문장들은 “나에게 지금 ……처럼 보인다.”, “나에게 지금 ……라고 여겨진다.”
또는 “지금 나에게 마치 ……인 것처럼 드러난다.” 같은 특별한 연산자에 의해서 덧붙여지는 지각적 보고를
만들곤 한다.
(c)“S는 F인(즉, 빨갛고 삼각형인) 감각 자료를 가지고(또는 자각하고) 있다.”라는 형태의 문장은 정의상 “
그것은 S에게 그가 어떠한 F를 감각하는 것처럼 보인다.”라는 형태의 문장과 동일하다.
이러한 이해에 대해서, 감각 자료인 개별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반대의 인상을 주는 분명하게 지칭적인 단수
형 용어는, ‘비가 온다(it is raining).’에서 사용된 ‘it’처럼, 맥락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다른 언어’는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셀라스와 브랜덤의 설명을 통해 대강 살펴보았을 때, 에이어의
‘다른 언어’란 감각 경험을 “나에게 지금 ……처럼 보인다.”와 같은 형태의 문장으로 환원시키려는 시도인 듯하다.
하지만 이러한 제안이 셀라스가 제시한 딜레마와 정확히 어떠한 관련을 맺을 수 있는 것인지,
그리고 셀라스가 구체적으로 어떠한 비판을 통해 이 제안을 논파하는 것인지는 아직 나에게 불분명하다.
Here Sellars offers an observation about this approach, and then formulates a dilemma for it. The observation
regards merely generic lookings. Something can look polygonal without there being any determinate number of
sides that it looks to have. But nothing can be polygonal without there being a determinate number of sides that
it has. (This contrasts will be explored in [17].) So the inferences one is permitted to make in sense-datum talk
as introduced by the equivalence asserted by (c) are not the same as those licensed by the sense-datum
theorist’s talk of sense data as particulars (for which the above 'inference to further determination' goes through).
Thus the code is misleading.1
에이어(Ayer)는 “x는 F이다(x is F).”를 “x는 F로 보인다(x looks F).”의 형태로 환원시키길 시도한다.
이러한 시도는 셀라스가 제시한 ‘인과적 관계’와 ‘추론적 관계’ 사이의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감각-자료 경험주의자
들이 취할 수 있는 가능한 여러 방식들 중 하나이다.
“x는 F로 보인다.”를 가장 확실하고 근본적인 경험으로 받아들일 경우, ‘인과적 관계’라고 이야기되는 사물의 비인식
적인 측면은 완전히 포기된다.
그러나 이렇게 함으로써 감각-자료 경험론자들은 비추론적 지식의 근거를 “나에게 지금 ……처럼 보인다.”와 같은
직접적 소여에 둘 수 있게 된다.
즉, 우리는 사물의 실재가 어떠한지 알 수 없지만, 사물이 우리에게 어떻게 보이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이러한 ‘보임(look)’ 혹은 ‘여겨짐(seem)’은 직접적 소여이며, 이 소여를 토대로 우리의 지식들이 성립하게 된다.
셀라스는 이러한 입장을 두 가지 방향에서 비판한다.
첫 번째 비판은 조금 표면적인 층위에서 제시되지며, 두 번째 비판은 보다 문제의 핵심을 건드린다.
두 비판은 각각 ‘섹션 9’와 ‘섹션 9 다시’에서 다루어진다(「경험주의와 심리철학」 본문에서는 둘 모두 ‘섹션 9’라고
표기되어 있다).
위에서 설명되는 내용은 바로 첫 번째 비판이다.
이 비판은 “x는 F이다.”와 “x는 F로 보인다.”가 논리적으로 동치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불분명한 형태를 지닌 그림이 다각형으로 보일 수 있다고 하여서, 그 모양이 곧 다각형이 되지는 않는다.
다각형이 되기 위해서는 확실한 선분의 개수가 필요하므로, 단지 다각형처럼 보인다는 사실이 그 모양을 다각형으로
만들어주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우리는 x가 F처럼 보이지만 F가 아닌 사례들을 찾을 수 있을뿐더러,
반대로 x가 F이지만 F처럼 보이지 않는 사례들도 찾을 수 있다.
The dilemma presents a more serious objection. If sense datum talk is just a code, it is redundant (insofar as it is
not misleading). So what good is it? It can't explain anything about seemings or appearance.2
두 번째 비판에 따르면, “x는 F이다.”를 “x는 F로 보인다.”의 형태로 환원시키려는 시도는 (1)불필요하거나, (2)자기
모순적이다.
위의 해설은 우선 환원의 불필요함을 지적하고 있다. 에이어와 같은 ‘다른 언어’ 이론가들은 사물의 비인식적 측면을
포기한 채, 단지 “나에게 지금 ……처럼 보인다.”와 같은 사실들만을 수용하고 있다.
문제는 “나에게 지금 ……처럼 보인다.”가 일종의 ‘비추론적 믿음’이라는 점에서 발생한다. 나는 실재(reality)가 어떠
한지 아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보이는 드러남(appearance)에 대한 믿음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애초에 에이어의 이론은 바로 이 비추론적 믿음을 더 근본적인 직접적 소여로 해명하고자 하였던 시도였다.
따라서 “나에게 지금 ……처럼 보인다.”도 결국 비추론적 믿음들 중 하나라면, 비추론적 믿음을 “나에게 지금 ……처
럼 보인다.”라는 형태로 더욱 환원시킬 수가 없게 된다.
즉, ‘다른 언어’ 이론가들은 비추론적 믿음을 비추론적 믿음으로 설명하는 동어반복에 빠지고 만다.
To do that it would have to be a theory of appearings, explaining them by relation to a certain kind of particular,
namely sense data. (Sellars begins to explain how he thinks about theoretical explanation in [21] and [22].
We then hear a lot more about this topic in the second half of the essay, beginning at [39]-[44].) But this would
reintroduce the strand of thought (1) above (in [7] and [[7]]), which the code theory is formulated precisely to
avoid.3
뿐만 아니라 ‘다른 언어’ 이론은 자기 모순적이다.
‘다른 언어’ 이론이 동어반복으로 귀결되지 않기 위해서는, 이 이론이 처음에 거부하였던 사물의 비인식적 측면을
수용하여야만하기 때문이다.
즉, “x는 F이다.”가 “x는 F로 보인다.”와 구별된다면, 그래서 “x는 F이다.”를 “x는 F로 보인다.”라는 형태로 환원할 수
있다고 한다면, 결국 “x는 F로 보인다.”는 ‘물리적 대상’으로부터 ‘감각 내용에 대한 감각’이 발생하는 인과적 관계에
해당될 수밖에 없다.
물리적 대상 ‘x’가 감각 내용 ‘F’를 인과적으로 일으키는 과정이 바로 “x는 F로 보인다.”에 해당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경우 ‘다른 언어’ 이론은 앞서 제시된 감각-자료 경험주의의 고전적인 형태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딜레
마에 봉착하게 된다. 어떻게 “x는 F이다.”라는 추론적 관계 속의 명제가 “x는 F로 보인다.”라는 인과적 관계 속의 사
건으로 환원될 수 있는지가 설명되지 못한다. 따라서 결국 ‘다른 언어’ 이론은 ‘소여의 신화’의 일종으로 밝혀질 뿐
이다.
Many who attack the idea of the given seem to have thought that the central mistake embedded in this idea is
exactly the idea that there are inner episodes, whether thoughts or so-called “immediate experiences”, to which
each of us has privileged access. I shall argue that this is just not so, and that the Myth of the Given can be
dispelled without resorting to the crude verificationisms or operationalisms characteristic of the more dogmatic
forms of recent empiricism.1
셀라스에 따르면 고전적인 감각-자료 경험주의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사고의 혼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1)지각에 대한 과학적인 설명을 제공하고자 하는 사고,
(2)추론 관계에 대한 인식적 설명을 제공하고자 하는 사고. 두 사고는 모두 일종의 ‘내적인 사건(inner episodes)’을
상정하고 있다.
이 때문에 많은 경우 ‘소여’를 비판하는 이론들은 ‘내적인 사건’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문제 삼는다.
그러나 셀라스는 ‘소여의 신화’에 대한 비판이 단순히 ‘내적인 사건’의 존재에 대한 비판만으로는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고 본다.
특별히 그는 자신의 이론이 조악한 검증주의나 조작주의에 의존하여 ‘내적인 사건’의 존재를 의문시하는 입장이 아니
라고 강조한다. 브랜덤에 따르면, 셀라스가 ‘검증주의’와 ‘조작주의’라고 부르는 입장은 사실 ‘논리실증주의(logical
positivism)’이다.
셀라스가 보기에 이러한 입장은 단지 경험주의의 도그마적 형태에 불과하며, 결국 ‘소여의 신화’를 다시금 전제할 수
밖에 없다. 아마도 셀라스는 논리실증주의가 과학의 ‘이론명제’를 직접적 경험으로 형성된 ‘관찰명제’로 환원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는 점을 염두에 두는 듯하다.
‘관찰명제’의 진리값이 직접적 경험에 근거하여 결정된다는 논리실증주의의 기본 전제는 바로 ‘소여의 신화’이기 때문
이다.
Everything hinges on why these philosophers reject it. If, for example, it is on the ground that the learning of a
language is a public process which proceeds in domain of public objects and is governed by public sanctions,
so that private episodes──with the exception of a mysterious nod in their direction──must needs escape the
net of rational discourse, then, while these philosophers are immune to the form of the myth which has flowered
in sense-datum theories, they have no defense against the myth in the form of the givenness of such fact as that
physical object x looks red to person S at time t, or that there looks to person S at time t to be red physical
object over there.2
셀라스는 비트겐슈타인의 ‘사적언어 논증’ 또한 ‘소여의 신화’를 비판하기에 충분하지 못하다고 주장한다.
셀라스에 따르면 ‘사적언어 논증’은 감각-자료 경험주의에 일반적으로 널리 퍼져 있는 신화에 대해서는 면역력을 지
니고 있다.
하지만 ‘사적언어 논증’은 “물리적 대상 x가 S라는 사람에게 t라는 시간에서 빨갛게 보인다.”
또는 “S라는 사람에게 t라는 시간에서 빨간 대상으로 보이는 것이 저기에 있다.”라는 형태의 신화에 대해서는 무력
하다. 그러나 나로서는 구체적으로 어떠한 점에서 ‘사적언어 논증’이 이러한 형태의 신화를 제대로 비판하지 못하는
지 아직 이해가 되지 않는다.
I have, in effect, been claiming that being red is logically prior, is a logically simpler notion, than looking red;
the function “x is red” to “x looks red to y”. In short, that it just won’t do to say that x is red is analysable in term
of x looks red to y. But what, then, are we to make of the necessary truth──and it is, of course, a necessary
truth──that
x is red ·≡· x would look red to standard observers in standard conditions?3
데카르트주의적 인식론은 “……이다(is).”를 “……로 보인다(looks).”로 환원시키고자 한다.
즉, “x는 빨강이다(x is red).”를 “x는 빨강으로 보인다(x looks red).”로 환원시키고자 한다. 이 경우 “x는 빨강이다.”라
는 문장은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x는 표준적인 관찰자에게 표준적인 조건 속에서 빨갛게 보일 것이다.” 하지만 셀라스는 “……이다.”가 “……로 보인다.”
에 논리적으로 선행하며, 논리적으로 더욱 단순하다는 사실을 주장하고자 한다.
그에 따르면, 오히려 “x가 빨강으로 보인다.”라는 문장이 “x는 빨강이다.”로 환원되어야 한다.
셀라스는 이제 이 주장을 증명함으로써 “……로 보인다.”라는 형태의 문장을 통해 직접적 소여를 이야기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제시하고자 한다.
만일 셀라스의 논증이 정당하다면 그는 비트겐슈타인의 ‘사적언어 논증’이 ‘소여의 신화’에 대해 지니고 있던 맹점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This is green” have both a fact-stating and a reporting use, we can put the point I have just been making by
saying that once John learns to stifle the report “This necktie is green” when looking at it in the shop, there is no
other report about color and the necktie which he knows how to make. To be sure, he now says, “This necktie
is blue.” But he is not making a reporting use of this sentence. He use it as the conclusion of an inference.4
셀라스는 ‘섹션 14’에서 ‘넥타이 가게의 어린 존(young John in the tie shop)’이라는 우화를 제시한다.
우화에 등장하는 주인공 존은 처음에 가게의 불빛 아래에서 넥타이를 바라보고서 손님에게 “이 넥타이는 초록색입니
다.”라고 말한다.
그러자 손님은 존을 가게 밖으로 데리고 나와 넥타이가 일상적인 햇빛 아래에서는 파란색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제 존은 더 이상 “이 넥타이는 초록색입니다.”라는 보고를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이 넥타이는 파란색입니다.”라
고 말해야 한다.
아마도 그는 이제 가게 안에서 넥타이를 볼 때 단지 “이 넥타이는 지금 나에게 초록색으로 보입니다.”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셀라스의 우화는 문장의 ‘사실-진술적(fact-stating)’ 사용과 ‘보고적(reporting)’ 사용 사이의 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넥타이 가게’라는 환경은 표준적인 조건이 아니다.
이 환경은 존의 믿음이 체계적인 오류에 빠지도록 만든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존은 더 이상 “이 넥타이는 초록색입
니다.”라는 ‘사실-진술’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주장에 ‘승인(endorsement)’을 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그는 “이 넥타이는 지금 나에게 초록색으로 보입니다.”라는 새로운 주장을 만드는 법을 배운다.
즉, 주체는 “x는 F이다.”라는 사실-진술을 만들 수 없는 상황에서 “x는 F로 보인다.”라는 보고를 만든다.
데카르트주의적 인식론은 “……이다.”라는 진술이 오류가능한 반면 “……로 보인다.”라는 진술은 오류불가능하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셀라스가 보기에 사실 두 진술은 데카르트주의적 인식론이 생각한 것과는 정반대의 방식으로 사용된다.
우리는 오히려 오류가능한 상황에서 “……로 보인다.”라는 진술을 사용하며, 오류가능성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없는
상황에서는 “……이다.”라는 진술을 사용한다.
우리의 주장에 대해 ‘승인’을 내리는 것을 보류해야 하는 경우 우리는 “……이다.” 대신 “……로 보인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셀라스는 “……로 보인다.”라는 진술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이다.”라는 진술을 사용하는 법을
먼저 배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다.”가 “……로 보인다.”에 화용론적으로 앞서는 것이다. 따라서 “……로 보인다.”
라는 보고가 우리에게 가장 확실한 진술로서, 지식의 토대를 이루는 기초 믿음이 되어야 한다는 데카르트주의적
인식론의 주장은 성립될 수 없다.
What is the difference between a parrot trained to utter “That’s red!” when and only when confronted by the visible
presence of something red, and a genuine noninferential reporter of the same circumstance? Having the differential
responsive dispositions is not enough to have the concept, else a chunk of iron that rusts in wet environments
and not in dry ones would have to be counted as having the concepts of wet and dry environments. What more,
besides the parrot’s sentience is required for the sapience that consists in responding differentially by applying a
concept? Sellars’ answer, invoking the second dimension of reporting, is that the response must be taking up a
position in the space of reasons──making a move in the game of giving and asking for reasons.5
브랜덤에 따르면, 셀라스에게서 문장의 보고적 사용은 두 가지 차원을 갖는다.
(1)보고는 ‘신뢰가능한 차별적 반응 성향(reliable differential responsive disposition)’의 표시이다.
(2)보고는 ‘이성의 논리적 공간(the logical space of reasons)’ 안에서 자리를 차지하는 반응이다.
(1)에 따르면, 우리의 보고는 우리가 특정한 환경적 상황에서 특정한 방식으로 반응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을 나타내 준다.
즉, “이 넥타이는 지금 나에게 초록색으로 보입니다.”라는 존의 보고는 ‘넥타이 가게’라는 주어진 조건 속에서 그가
넥타이를 초록색으로 보는 성향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단순한 반응 성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특정 상황 속에서 “저건 빨간색이야!”라고 말하도록 훈련된 앵무새
나, 특정 상황 속에서 녹이 스는 철 한 덩어리도 그러한 반응 성향은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2)에 따르면, 우리의 반응 성향은 ‘이성의 논리적 공간’ 혹은 ‘이유들의 논리적 공간’ 속에서 제시될 때에야 비로소
보고로서 기능한다. “……로 보인다.”라는 보고는, 우리가 “……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충분한 이유를 확보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즉, 우리는 주어진 상황에서 특정하게 반응하려는 성향을 가지고 있지만, 이러한 우리의 성향에 대해 섣부르게 승인
을 내릴 수가 없기 때문에 ‘보고’라는 형태의 진술이 등장한다.
따라서 보고는 단순히 직접적으로 주어진 경험을 그대로 나타내기만 하면 되는 활동이 아니다.
우리는 보고 과정에서 이유를 제시하거나 질문하는 활동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But once we have seen the source and nature of this incorrigibility──in down-to-earth, practical, resolutely
nonmetaphysical terms──we see also why it is precisely unsuited to use as an epistemological foundation for
the rest of our (risky, corrigible) empirical knowledge. For, first, the incorrigibility of claims about how things
merely look simply reflects their emptiness: the fact that they are not really claims at all. And second, the same
story shows us that ‘looks’ talk is not an autonomous language game──one that could be played though one
played no other. It is entirely parasitic on the practice of making risky empirical reports of how things actually
are. Thus Descartes seized on a genuine phenomenon──the incorrigibility of claims about appearances,
reflecting the non-iterability of operators like looks, seems, and appears──but misunderstood its nature, and
so mistakenly thought it available to play an epistemologically foundational role for which it is in no way suited.6
랜덤은 “……로 보인다.”라는 현상 진술이 인식론적 토대로 사용될 수 없는 이유를 두 가지로 요약한다.
(1)사물들이 어떻게 보이는지에 대한 진술은 공허하다. 사실상 이 진술들은 전혀 실질적인 주장이라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진술들은 단지 자신들이 오류가능하다는 사실만을 확실하게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2)“……로 보인다.”이라는 말은 자율적으로 사용될 수가 없다. 이 말은 “……이다.”라는 말에 기생적이다.
우리는 “……이다.”라는 사실-진술을 사용하는 법을 배우고서야 오류가능한 상황에서 “……로 보인다.”라는 보고를
제시하는 법 또한 배우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로 보인다.”라는 현상, 곧 직접적 소여가 인식론적 토대로서 제시
될 수 있다고 믿었던 데카르트주의적 인식론의 견해는 잘못된 것으로 드러난다.
스터디 가이드 요약
섹션 4와 5:
감각-자료 이론가들은 ‘감각함(sensing)’을 일종의 ‘인식적 비추론적 믿음(epistemic noninferential belief)’으로서
다룬다. 감각-자료 이론가들에 따르면, 감각 내용 x가 F라는 속성을 가진다고 믿는 것은 더 이상 환원될 수 없는 우리
인식의 가장 근본적인 차원이다. 이들은 ‘감각함’으로부터 다른 모든 종류의 추론들이 도출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즉, 다른 모든 종류의 추론들은 자신의 정당성을 ‘감각함’이라는 토대 위에 세운다는 것이다.
섹션 6:
셀라스는 감각-자료 이론가들의 주장이 비일관적이라고 비판한다.
그는 감각-자료 이론가들이 받아들이는 다음 세 가지 명제들 사이에 모순이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A. ‘S는 빨간 감각 내용 x를 감각한다.’는 ‘S는 비추론적으로 x가 빨갛다는 것을 안다.’를 수반한다.
B. 감각 내용을 감각하는 능력은 비습득적이다.
C. ‘x는 F이다.’ 형태의 분류적인 믿음들을 가지는 능력은 습득되었다.
감각-자료 이론가들에 따르면, 우리 지식은 ‘감각함’이라는 직접적 소여로부터 형성된다. 이때 ‘감각함’은 특별한
학습이 필요 없는 비습득적인 활동이라고 여겨진다. 외부의 대상으로부터 자극이 주어지는 과정은 모든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반면 ‘감각함’이라는 활동에 근거하여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학습이 필요하다.
즉, 우리에게 주어진 자극을 언어로 해석하여 “사과는 빨갛다.”라는 명제를 만드는 능력은 습득되어야만 한다.
그런데 문제는 감각-자료 이론가들이 ‘감각함’이라는 비습득적 활동과 “사과는 빨갛다.”라는 습득적인 지식을 동일
시한다는 점에서 발생한다.
감각-자료 이론가들에게는 “사과는 빨갛다.”라는 비추론적인 믿음이 곧 ‘감각함’의 활동이라고 여겨지는 것이다.
이 경우 감각-자료 이론가들은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1)‘감각함’이 비습득적이라는 B의 명제를 포기해야 하거나,
(2)“사과는 빨갛다.”와 같은 비추론적 믿음이 습득적이라는 C의 명제를 포기해야 하거나, (3)‘감각함’과 ‘비추론적
믿음’을 동일시하는 A의 명제를 포기해야 한다.
이 셋 중 A가 바로 셀라스에 의해 비판받는 ‘소여의 신화(the Myth of the Given)’이다.
셀라스는 세 명제 중 A가 포기되어야 한다는 점을 논증하고자 한다.
섹션 7:
셀라스는 ‘소여(the given)’라는 개념이 두 가지 종류의 서로 다른 사고가 뒤섞여 만들어진 애매한 개념이라고 본다.
첫 번째 사고는 지각에 대한 과학적인 설명을 제공하고자 하는 사고이다. 두 번째 사고는 추론 관계에 대한 인식적
설명을 제공하고자 하는 사고이다. 전자는 인과적 설명을 제공하는 반면, 후자는 추론적 설명을 제공한다.
1. 인간 존재(혹은 짐승)에게, 아무런 선행하는 배움이나 개념의 형성 없이 일어나는, 그리고 이것 없이는
어떠한 물리적 대상의 표면이 빨갛고 삼각형이라는 사실을 보거나, 어떠한 물리적 소리가 C#이라는 사실을
들을 수가 없게 되는, 빨강에 대한 감각 혹은 C#에 대한 감각 같은 어떠한 내적 에피소드가 있다는 생각.
2. 어떠한 사물이 빨갛거나 C#이라는 사실에 대한 비추론적인 앎으로서, 그리고 모든 다른 경험적 명제들을
위해 증거를 제시하는 경험적 지식의 필요조건으로서 어떠한 내적 에피소드가 있다는 생각.
‘소여’ 개념의 애매성 때문에 발생하는 인식론적 혼란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감각’이란 일종의 ‘개별자(particular)’인가, 아니면 일종의 ‘믿음(belief)’인가? (
2)경험적 지식을 소유하는 능력은 비습득적인가, 아니면 습득적인가?
(3)우리의 지식들은 ‘인과적 질서’ 속에 있는가, 아니면 ‘추론적 질서’ 속에 있는가?
섹션 8:
에이어(A. J. Ayer)의 논의는 감각-자료 이론가들이 ‘소여’ 개념의 애매성에서 발생하는 모순을 피하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한 가지 대안이다.
에이어는 “x는 F이다(x is F).”를 “x는 F로 보인다(x looks F).”로 환원시키고자 한다.
이 경우 감각-자료 이론가들은 ‘인과적 관계’라는 사물의 비인식적 측면을 포기하면서도, 여전히 ‘소여’를 지식의 근거
로써 주장할 수 있게 된다. 그의 주장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a)다른 믿음들의 토대가 되는 비추론적 믿음들의 계열이 존재한다.
b1)우리는 “내 앞에 빨간 삼각형이 있다(is).”라는 점에 대해서는 실수할 수 있지만, “내 앞에 빨간 삼각형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looks).”라는 점에 대해서는 실수할 수 없다.
b2)우리는 ‘실재(reality)’에 대해서는 실수할 수 있지만, ‘현상(appearance)’에 대해서는 실수할 수 없다.
b3)다른 믿음들의 토대가 되는 비추론적 믿음들은 “나에게 지금 ……처럼 보인다(It looks to me now that ……).”
라는 지각적 보고로 구성된다,
c)“S는 F인 감각자료를 가지고 있다(S is having a sense datum that is F).”는 곧 “S에게는 그가 어떠한 F를
감각하는 것처럼 보인다(It seems to S that he senses something F).”라는 의미이다.
섹션 9:
셀라스는 먼저 “x는 F이다.”와 “x는 F로 보인다.”가 논리적으로 동치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어떠한 대상이 다각형으로 보일 수 있다고 하여서, 그 대상이 곧바로 다각형일 수는 없다.
다각형이기 위해서는 확정적인(determinate) 면의 수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확정적인 면의 수를 가진 것처럼 보인다
는 것과 실제로 확정적인 면의 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구별되어야 한다.
섹션 9 다시:
셀라스는 “x는 F이다.”를 “x는 F로 보인다.”로 환원하려는 시도가 결국 다른 종류의 감각-자료 이론과 마찬가지의
문제에 빠진다는 점을 지적한다.
“x는 F이다.”가 “x는 F로 보인다.”로 환원되기 위해서는 전자에 비해 후자가 더 근본적인 설명 층위에 놓여 있어야
한다. “x는 F이다.”는 비추론적 믿음이므로, “x는 F로 보인다.”는 비추론적 믿음보다도 한 차원 아래에 있는 직접적
소여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경우 “x는 F로 보인다.”는 사실상 ‘물리적 대상’으로부터 ‘감각 내용에 대한 감각함’이 인과적으로 발생하는
과정과 별반 다르지 않게 되어버리고 만다.
‘인과적 질서’로부터 어떻게 ‘추론적 질서’가 도출될 수 있는가라는 핵심적인 문제가 여기서도 여전히 제대로 해명되
지 못하는 것이다.
섹션 17:
셀라스는 문장의 사실-진술적 사용이 보고적 사용에 선행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자신의 주장이 지닌 장점을 두 가지
로 설명한다. 첫째로, 이 주장은 ‘질적(qualitative)’ 바라봄과 ‘실존적(existential)’ 바라봄 사이의 구별을 설명할 수 있다.
둘째로, 이 주장은 단순히 ‘유적(類的, generic)’ 바라봄, 다시 말해 단순히 ‘확정가능한(determinable)’ 바라봄의 가능
성을 설명할 수 있다.
1. 셀라스의 주장은 ‘질적’ 바라봄과 ‘실존적’ 바라봄 사이의 구별을 설명할 수 있다. 다음의 세 문장들을 고려하라.
(i)저기 있는 사과는 빨갛다.
(ii)저기 있는 사과는 빨갛게 보인다.
(iii)저기 마치 빨간 사과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다(is).”를 “……로 보인다(looks).”로 환원시키고자 하는 데카르트주의적 인식론에서는 세 문장 사이의 차이
를 설명할 수가 없다.
반면 셀라스는 “……로 보인다.”가 오류가능한 상황 속에서 “……이다.”라는 승인 제시를 보류하기 위한 진술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세 문장을 구별한다. 셀라스에 따르면, (i)은 사과의 ‘실존(existence)’과 빨간 ‘질(quality)’을 모두 승인
한다. (ii)는 사과의 ‘실존’은 승인하지만, 빨간 ‘질’에 대해서는 승인하지 않는다. (iii)은 사과의 ‘실존’과 빨간 ‘질’ 모두
승인하지 않는다.
2. 셀라스의 주장은 ‘확정적(determinate)’ 개별자들에 대해 ‘확정가능한(determinable)’ 바라봄이 가능한 이유를 설명
할 수 있다.
가령, 사과는 ‘진홍색’이나 ‘다홍색’과 같은 매우 구체적인 빨강의 색조를 지닌다. 우리는 이러한 구체적인 색조를
파악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과를 ‘빨간색’으로서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특정 도형은 ‘119개의 면’이라는 매우 구체적인 면의 개수를 지닌다. 우리는 이러한 구체적인 면의 개수를
파악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도형을 ‘많은 수의 면’으로서 볼 수 있다.
즉, 개별자들은 완전히 ‘확정적’인 반면, 우리는 개별자를 ‘확정가능한’ 대상으로서 바라본다.
데카르트주의적 인식론은 이 사실을 설명하지 못한다.
직접적 소여를 통해 “……로 보인다.”라는 진술을 설명하고자 시도하는 이상, 인식의 대상은 ‘확정적’이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셀라스는 이 사실을 아무런 문제없이 설명해 낸다.
그에 따르면, “……로 보인다.”는 승인 제시를 보류하는 진술이다. 우리는 사과의 색조에 대해 ‘진홍색’이나 ‘다홍색’
같은 확정적 진술을 제시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이유가 없는 상황에서 ‘빨간색’이라는 확정가능한 진술을 사용한다.
우리는 도형이 지닌 면의 개수에 대해 ‘119개’라는 확정적 진술을 제시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이유가 없는 상황에서
‘많은 수의 면’이라는 확정가능한 진술을 사용한다.
섹션18:
‘섹션13’에서 제시된 데카르트주의 인식론의 정의는 참이다. 그 정의란 다음과 같다.
x는 빨간색이다. = df. x가 표준적인 조건에서 빨간색으로 보인다.
단, 셀라스에 따르면, 이 정의는 ‘빨간색이다(is red)’에 대한 정의가 아니다. 오히려 ‘표준적 조건(standard conditions)’
에 대한 정의이다. 즉, ‘표준적 조건’이란 우리가 “……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충분한 ‘이유’를 확보하고 있으며, 이
때문에 우리의 진술에 ‘승인’을 줄 수 있는 상황을 의미한다. 우리가 우리 진술에 대해 ‘이유’를 제시할 수 있을 때, “……
로 보인다.”라는 진술은 “……이다.”라는 진술과 동일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섹션19-20:
셀라스는 일종의 전체론(holism)을 주장한다. “……로 보인다.”를 숙달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능력이 필요하다.
(1)특정한 환경적 상황에서 규칙적인 방식으로 행동하는 능력, (2)추론을 통해 진술에 대해 이유를 제시하는 능력.
각각은 ‘비인식적 기술’과 ‘인식적 기술’이라고도 할 수 있다.
즉, 우리는 특정한 상황 속에서, 이유들을 제시하거나 이유들에 대해 질문하는 활동을 수행하는 가운데, “……로
보인다.”라는 진술을 사용한다. “……로 보인다.”라는 진술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이미 여러 비추론적인 개념들이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
다른 여러 비추론적인 개념들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어떠한 개념도 획득할 수가 없다. “……로 보인다.”라는 진술은
전체 ‘이성의 논리적 공간’, 곧 ‘이유들의 논리적 공간’ 안에서만 기능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경험주의의 관찰 개념에 대한 반박을 함의하고 있다. 경험주의는 관찰적 사실과 관계하는 근본적인
개념들이 다른 개념들과는 논리적으로 독립성을 지닌다고 보기 때문이다.
섹션21-22:
셀라스는 현상을 설명하는 두 방식을 구별한다.
첫 번째는 관찰로부터 이론을 구성하여 현상을 설명하는 방식이다. 두 번째는 이론을 관찰에 적용하여 현상을 설명
하는 방식이다.
(i)관찰을 일반화함으로써 현상을 설명하는 방식: 가령, 가스 샘플을 일반화하여 PV 법칙을 도출함으로써
가스 압력 변화를 설명
(ii)이론적 존재자를 상정함으로써 현상을 설명하는 방식: 가령, 가스 분자를 상정하여 가스 운동 이론을
구성함으로써 가스 압력 변화를 설명
섹션27-28:
셀라스는 로크, 버클리, 흄과 같은 경험주의자들을 비판한다. 이들은 ‘확정적 감각 반복자들(determinate sense
repeatables)’과 ‘확정가능한 감각 반복자들(determinable sense repeatables)’ 사이의 관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였다.
가령, ‘진홍색’은 확정가능한 ‘빨간색’ 중에서도 더욱 확정적인 색조이다.
‘빨간색’은 확정가능한 ‘색깔’ 중에서도 더욱 확정적인 색조이다.
이때 우리는 최대한 확정적인 대상에 대해서조차 반복가능한 유형(type)을 부여한다. 즉, 개별자는 확정적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를 확정가능한 대상으로서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경험주의자들은 우리가 어떻게 경험을 이렇듯 확정가능한 반복자로서 유형화하여 파악할 수 있는가에 대해
질문조차 제기하지 않았다.
섹션29:
셀라스는 경험주의에 반대하여 ‘심리적 유명론(psychological nominalism)’을 주장한다. 모든 반복자들은 언어적
사건이다. 이 때문에 반복자들은 언어의 획득과 기능에 앞서서 선재될 수가 없다. 즉, 경험을 통해 언어의 획득과
기능을 설명하고자 하는 시도는 성공할 수가 없다.
셀라스는 또한 ‘자각(awareness)’에 대한 언어적, 사회적 이론을 제시한다. 그는 여기서 ‘직감(sentience)’과 ‘지혜
(sapience)’를 구별한다. ‘자각’은 분류적 활동이지만, 반응에 의한 단순 분류를 넘어서는 활동을 요구한다.
즉, ‘자각’은 반응적 성향에 의해 일어날 뿐만 아니라, 이유들을 제시하거나 이유들에 대해 질문하는 게임에 따라
이루어지는 개념적인 활동이다. 훈련된 앵무새가 반응적 성향에 따라 빨간 사물들을 특정한 방식으로 분류하기만
하는 활동은 자각이 아니다.
섹션30:
셀라스에 따르면, 선언어적 자각을 통해 언어의 획득을 설명하고자 하는 모든 시도는 ‘소여의 신화’에 빠지고 만다.
‘자각’은 분류적 활동인 동시에, 개념적 추론 속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이기 때문이다. 즉, ‘자각’이란 이유들을 제시
하거나 이유들에 대해 질문하는 게임 속에서, 주장에 대해 약속·자격·보증·정당화를 주는 ‘규범적(인식적)’ 영역 속
에서, 이성의 논리적 공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이기 때문이다.
개념의 소유나 배열과 독립하여서 개별적인 중요성을 지니는 무엇인가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단지 허구에 불과하다.
섹션31:
셀라스에 따르면, 우리는 이미 자각하고 있는 사실을 언어적 상징과 연결시킴으로써 언어의 의미를 배우게 되는 것이
아니다.
셀라스는 이러한 연결 없이도 언어의 의미가 이해될 수 있다는 사실을 설명한다.
이때 “(독일어의) rot은 (영어의) red를 의미한다.”라는 문장이 예로 제시된다. 독일어와 영어에서 rot과 red는 각각
동일한 개념적·기능적 역할을 수행한다.
이 때문에 두 단어의 의미는 서로 통용될 수 있다. 즉, rot과 red가 모두 ‘빨간 질’을 의미하기 때문에 두 단어가 동일한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