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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사도행전 제22강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말씀 / 사도행전 25:1-26:32
요절 / 사도행전 26:18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비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한 뉴스에서 전 세계 유튜브 구독자 1위인 사람이 1,000명의 눈을 뜨게 해주었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던 사람 1,000명의 수술비 전액을 지원해 주었습니다. 눈을 뜬 사람들이 감격하고 기뻐하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눈을 뜨게 해준 이 유튜버도 감격스러워했습니다. 눈을 떠서 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기쁜 일인가 다시금 느끼게 됩니다.
오늘 말씀에는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된 다메섹 도상의 경험을 말하면서 주님께 부여받은 자신의 소명이 무엇인가 아그립바 왕 앞에서 당당하게 말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바울의 소명은 이스라엘과 이방 영혼들의 영적인 눈을 뜨게 해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영원한 하늘 기업을 얻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바울의 변론 속에서 바울의 소명의식과 이를 감당하는 바울의 자세를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불어 바울의 변론 속에 농축된 바울의 참된 소망과 신앙 가치관을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25장 1절을 보십시오. 벨릭스를 이어 베스도가 유대 총독으로 부임합니다. 베스도는 부임하자마자, 사흘 만에 예루살렘을 방문합니다. 유대 대제사장들과 지도자들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원활하게 업무를 수행하려면 이들의 협조가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신참내기 총독을 구슬려 무엇을 하고자 합니까? 가이사랴에 잡혀 있는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데려오려고 합니다. 암살단을 매복시켜놓았다가 바울을 죽이려는 것입니다. 그들은 벨릭스 총독 때 바울 암살 작전에 실패한 후,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신임 총독이 유대 원주민들의 부탁을 거절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스도 총독은 정식 절차를 밟아 고발하도록 조치합니다.
바울이 가이사랴 법정에 다시 서게 되었습니다. 베스도 총독 앞에서 재판을 받게 됩니다. 바울에 대한 거짓 고발들이 쏟아집니다. 그러나 증거는 하나도 없습니다. 여러 ‘썰’만 무성합니다. 바울은 어떻게 자신을 변론합니까? 그는 율법을 무시한 적도, 성전을 모독한 적도 없고, 로마 황제에 대해 역심을 품은 적은 더더욱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변명을 들은 베스도 총독도 바울에게 죄가 없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당연히 풀어줘야죠. 그러나 총독은 어떻게 합니까?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으려고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 재판을 받아보지 않겠느냐고 물어봅니다. 베스도는 정의보다는 정치적 유익에, 한 사람의 생명보다는 자신의 성공에 마음이 가 있습니다. 이때 바울이 꺼낸 카드가 무엇입니까? 11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총독의 제안을 거부하고, 대신 로마 황제에게 직접 상소합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수일 후에, 유대 지역 분봉왕인 아그립바와 누이 버니게가 총독에게 인사하러 가이사랴 총독 관저에 왔습니다. 이때 베스도는 바울의 일로 고민이 많았습니다. 유대인들의 고소로 바울을 체포했긴 하지만, 자신이 보기에 바울에게 아무런 죄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흥분한 유대인들 때문에 바울을 그냥 풀어주기도 힘들었습니다. 바울이 로마 시민권자로서 황제에게 상소해 로마행을 결정했지만, 황제에게 어떻게 보고서를 써 보내야 할지 난감했습니다. 베스도는 유대 분봉왕인 아그립바가 그래도 유대 사정에 밝을 것이라 생각하고 바울 문제에 대해 자문을 구합니다.
26장 1절을 보십시오. 아그립바 왕이 직접 바울을 신문합니다. 바울의 발언을 허락하자, 바울이 변론합니다. 바울은 그동안 총독 벨릭스와 베스도 앞에서 변론을 했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이방인이라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깨닫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아그립바는 유대교로 개종한 헤롯 가문의 왕이라 총독들과 달리 유대인의 풍속과 문제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어찌하든 복음을 전하려는 바울에게는 반가운 일이었습니다.
바울이 어떻게 복음을 전합니까? 4-23절까지 나타나 있듯이 자신의 인생 경험을 간증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앞서 성전 앞에서 유대인들을 향해서도 간증한 적이 있습니다. 이 바울의 간증에는 바울의 소망과 믿음이 농축되어 있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어릴 적 예루살렘으로 유학 와 당대 석학 가말리엘에게서 배웠습니다. 바울은 율법을 지키는 일에 가장 엄격한 바리새파에 속해 있었습니다. 바울은 누가 봐도 정통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러면 지금은 어떻습니까? 지금은 자기 민족을 배신한 변절자입니까? 6,7절을 보십시오. “이제도 여기 서서 심문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니 이 약속은 우리 열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김으로 얻기를 바라는 바인데 아그립바 왕이여, 이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가 유대인들에게 고소를 당하는 것이니이다.” 바울은 여전히 하나님이 조상들에게 약속한 것을 소망합니다. 현재 바울의 소망은 온 이스라엘이 고대하던 소망입니다. 그 소망이 무엇입니까? 그 소망이 무엇인지에 대해 바울의 말 속에 명확하게 나와 있진 않습니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소망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가 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후손 중, 너희를 구원할 메시야를 보내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메시야가 오셔서 공의와 자비로 다스리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것이 이스라엘의 기대이자, 소망이었습니다.
어둠 가득한 이 땅 위에 빛이 비치고 자유와 평화를 가져올 메시야에 대한 기대와 소망! 바울은 이 소망 때문에 자신이 유대인들에게 고소당하고, 지금 이 자리에서 심문 받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바울의 말에 의하면, 자기나 유대인들이나 같은 소망을 가진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서로 싸울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왜 고발하고 죽이려고 난리 칩니까? 이는 같은 소망을 공유한 것 같으면서도 분명 다른 부분이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바울과 유대인들의 소망은 어떤 점에서 달랐을까요? 바울은 하나님이 약속하셨던 메시야가 이미 오셨고,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증언합니다. 또 메시야의 통치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까지 온 세계에 이르게 된다고 말합니다. 반면, 유대인들은 메시야는 아직 오지 않았고, 예수는 절대 메시야일 리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또 메시야는 수많은 민족 중에서 택함 받은 오직 유대인만을 구원하러 오신다고 믿었습니다. 지금도 유대인 상당수는 이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습니다. 그럼, 누구 말이 맞는 것일까요?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메시야가 아니라는 증거로 무엇을 내세웠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기 때문에 메시야일 리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하나님께 버림받고 저주받아 죽은 자가 어떻게 메시야가 될 수 있느냐고 반문합니다. 메시야라면 로마를 상대로 통쾌한 승리를 거두어야지, 예수 같은 패배자는 결코 우리의 구원자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제시한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증거는 무엇입니까? 8절을 보십시오.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을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 예수님이 약속된 메시야라는 증거는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유대인들의 말처럼 예수님이 정말로 버림받고 저주받은 실패자라면 하나님이 예수님을 다시 살리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셔서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조상들과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토록 오래 소망했던 바를 이루는 메시야임을 입증하셨습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회개하는 사람은 죄 사함을 받고 사탄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얻게 되며, 장차 부활하여 영생을 누리게 됩니다. 바울은 이 예수님에 대한 소망 때문에 유대인들로부터 핍박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메시야가 이미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영접하지 않는 유대인들이 안타까웠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데 왜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있을 수 없는 일로 여기며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는지 답답할 뿐이었습니다.
소망의 문제는 바울과 유대인들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있어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소망 없이 살 수 없습니다. 크든 작든 어떤 소망 가운데 우리의 삶은 이루어져 갑니다. 오늘의 고난을 참을 수 있는 것은 내일의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 소망이 어떤 소망이냐는 것입니다. 왜냐면 소망이 우리를 배신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간절히 바라던 그 소망이 잘못된 소망이고,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릴 소망이라면 어떻게 될까요? 헛된 소망을 부여잡고 인생을 거기에 올인했다면 어떻게 될까요? 소망은 순식간에 절망으로 바뀌고 말 것입니다. 인간의 딜레마는 소망 없이는 살아갈 수 없지만 내가 붙들고 있는 소망이 제대로 된 소망일까 늘 고민할 수밖에 없다는 점입니다. 우리를 배신하거나 결코 실망시키지 않을 소망, 삶과 죽음을 뛰어넘을 수 있는 절대적인 소망이 과연 있을까요?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그런 소망이 되십니다. 예수님이 왕이 되셔서 다스리시는 하나님 나라가 그런 소망입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 있는 부활과 영생이 그런 소망입니다. 이 소망은 신실하신 절대자 하나님의 약속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결코 우리를 배신하거나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도 이 소망을 가리켜 ‘산 소망, living hope’라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3,4절,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그러면 바울이 처음부터 예수님께 대한 이런 소망을 가진 사람이었을까요? 원래 바울도 다른 유대인들처럼 영적 무지로 인해 어둠 속에 살던 자였습니다. 앞장서서 예수님 믿는 성도들을 옥에 가두고 죽이고자 했습니다. 그것으로도 성에 차지 않아 외국까지 원정박해를 다녔습니다. 뒷발길질하는 거친 황소처럼 혈기와 자기 의에 사로잡혀 예수님을 대적하던 복음의 원수였습니다. 이런 바울이 어떻게 예수님을 메시야로 영접하고 복음 전파자가 되었을까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 과정은 사도행전 9장과 22장에 나왔기 때문에 우리에게 낯설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전에는 언급하지 않았던 부분들이 몇 있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첫째, 예수님이 바울에게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하신 대목입니다. 이 말은 인간이 절대자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비유한 당시 자주 쓰이던 속담입니다. 가시채는 끝에 뾰족한 쇠나 뼈를 박은 막대기를 말합니다. 밭을 갈 때 소가 말을 듣지 않고 성질부리면 때리거나 쿡쿡 찌르기 위해 사용했습니다. 만약 매를 맞은 소가 반항하며 뒷발길질하면 주인이 어떻게 할까요? “미안해. 많이 아팠지!” 합니까? “아니, 너는 소니까 우격다짐!” 더 때릴 것입니다. 가시채를 향해 뒷발길질하는 소만 더 고통받게 됩니다. 이 말씀은 바울이 아무리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나름대로 혈기를 부려보아야 소용없다는 의미입니다. 혼자 용써봤자 고통만 더해진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바울이 주님께 받은 소명이 무엇인지 상세히 기록합니다. 주님이 바울에게 두신 뜻이 무엇입니까? 17,18절을 읽겠습니다.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바울은 그동안 무지하고 성난 소처럼 거칠게 반항했지만 부활하신 주님께서 빛으로 찾아오셔서 그의 무지를 깨우쳐주시고 그를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 돌이켜주셨습니다. 예수님 믿고 죄 사함 받아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얻게 하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주님은 바울을 주님의 종이요, 증인 되게 하셨습니다. 바울은 이제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가서 동일하게 영적 무지와 어둠 속에 있는 자들을 눈 뜨게 하여 빛으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바울은 이런 예수님의 뜻을 거역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고 곧바로 다메섹과 예루살렘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들에게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복음을 전했습니다. 고난과 핍박, 심지어 순교의 위험이 뒤따랐지만, 하나님은 그를 섬세하게 보호하시고 지금까지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증언하게 하셨습니다.
바울은 이 소명을 가리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이라고 표현합니다(19). 바울이 유대 온 땅과 이방에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한 것은 모두 하늘에서 내려주신 사명에 순종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바울이 이 말을 하는 이유는 지금까지 자신이 행한 일은 나름대로 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바울의 증언을 듣는 아그립바 왕을 비롯해 그 자리에 있던 고위관료들이 더 이상 예수님을 대적하지 말고 복음을 영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항할 수 없는 은혜(Irresistible grace)’라는 말이 있습니다. 칼빈주의 5대 교리 중 하나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택하시면 하나님은 은혜의 능력으로 어떤 저항도 다 이겨내고 굴복시키신다는 것입니다. 과거 바울은 가시채를 뒷발질하듯 완강히 저항하던 자였습니다. 하지만 저항하면 할수록 자신을 파멸의 길로 이끌어갈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주님이 정오의 태양보다 더 밝은 빛으로 그를 사로잡아주셨습니다. 마침내 바울을 은혜로 굴복시켜서 부활의 증인, 복음 전파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저항할 수 없는 은혜로 찾아오십니다. 우리는 저항하지만, 결코 하나님의 은혜를 이길 수는 없습니다.
과거 저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이고 분석적인 사람이라 도저히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이성적인 사람이 초이성적인 내용이 많이 담긴 성경을 믿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저는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고백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저는 전임 목자로 사역할 줄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교회 목회보다는 일반 사회 사람들과 어울리는 그런 삶을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사람들을 섬기는 전임 사역자가 되었습니다. 이는 누구의 강요나 억압으로 된 일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크신 긍휼하심과 저항할 수 없는 은혜가 저를 사로잡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완고한 형제자매들이 변화될 수 있을까? 자녀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될 수 있을까? 반복해서 죄에 넘어지는 나 자신이 변화될 수 있을까? 더 이상 소망 둘 수 없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저항할 수 없는 은혜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은혜가 임하면 박해자 바울이 복음 전파자 바울이 되듯 어떤 사람도 변화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끈질기게 말씀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하는 이유도 저항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믿기 때문입니다. 저항할 수 없는 은혜로 가시채를 뒷발질하던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요, 양들을 섬기는 목자로 변화시키신 주님의 능력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바울의 변론을 들은 총독과 왕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24절을 보십시오. 베스도 총독이 소리 지릅니다.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을 만났다니 베스도는 바울이 미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베스도에겐 아직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들을 귀가 없었습니다. 바울은 총독 대신 아그립바 왕에게 집중하고자 합니다. 27절을 보십시오.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을 아나이다.” 만약 아그립바가 선지자를 믿는다면 선지자들이 예언한 그리스도를 당연히 믿어야 했습니다. 눈치 빠른 아그립바는 바울이 변론을 통해 자신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음을 알아채고 바울을 몰아쳤습니다.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28).” 그러나 바울은 어떻습니까? 29절을 읽겠습니다.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지금 바울 앞에 있는 사람들의 사회적 위치가 어떻습니까? 높아도 보통 높은 분들이 아닙니다. 왕, 왕족, 총독, 뭐 다들 상당히 높은 사람들입니다. 돈과 명예와 권력을 마음껏 주무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반면 바울은 별 볼 일 없는 죄수 신분에 불과합니다. 바울이 ‘아그립바 왕처럼 되고 싶다’라고 해야 정상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모두 다 나처럼 되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처럼 되기를 바란다니!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과연 얼마나 있을까요? 대개 사람들은 나보다 잘 나가는 사람들을 부러워하며 따라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모두가 자기처럼 되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이는 바울에게 사람들의 겉모습만 보지 않고 속을 보는 눈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그립바 왕이 겉으로는 화려해 보였지만 내면은 어둠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마음대로 살며 자유로워 보였지만 실상은 죄와 사탄의 노예입니다. 당시 아그립바 왕을 비롯한 헤롯 가문이 다스리는 나라는 유대가 멸망하는 AD70년까지 이제 10년도 안되어 지도에서 사라질 나라였습니다. 증조부는 예수님을 죽이려 했고, 할아버지뻘 되는 분은 세례요한을 죽였고, 아버지는 야고보 사도를 죽였습니다. 자신도 누이 버니게와 성적 추문이 끊이질 않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말하는 ‘나와 같이’에서 ‘나’는 어떤 ‘나’일까요? 영적인 눈을 떠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온 나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 사함 받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분깃으로 상속받은 나입니다. 더 나아가 그런 삶을 다른 사람에게 살도록 성경을 가르치고 증언하는 증인이요, 성경선생이요, 목자인 나입니다. 바울은 모든 사람이 자기처럼 구원받고 영적인 눈을 떠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아가기를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권력자들이 부럽지 않습니다. 그들이 가진 부와 권력과 명예, 사회적 특권들이 부럽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그립바 왕이 어서 빨리 자기처럼 하나님의 저항할 수 없는 은혜로 구원받고 복음 전파자의 복된 삶을 살게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과거에 대한 후회 때문에, 현재에 대한 불만 때문에,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존감 없이 살아갑니다. 기가 죽어 지내거나 비교의식 속에 살아갑니다. 자신있게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합니다” 말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신명기 33장 29절을 보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합니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했듯이 하나님의 구원을 얻은 것이 얼마나 크고 완전한 행복입니까? (자신의 이름을 넣어) “스데반아,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자가 누구냐?”
여러분! 우리도 바울처럼 예수님 만나 영적인 눈을 뜨고 구원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 믿고 죄 사함 받아 하늘의 영원한 기업을 간직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세상 재물과 권력보다도 더 크고, 가치 있고, 영원한 보화이신 예수님을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사명자이며, 복음으로 생명을 살리는 복음 전파자들입니다. 왕 같은 제사장이며, 거룩한 나라 백성입니다. 우리가 이 같은 분명한 정체성과 소명의식을 가지고 살아야겠습니다. 우리가 처한 상황과 환경에 상관없이 삶의 현장 속에서 “여러분도 저처럼 예수님 믿고 구원받아 빛된 인생, 행복한 인생 사세요” 당당하게 말하며 예수님 전하는 삶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한 주간도 바울처럼 우리에게 임한 하나님의 저항할 수 없는 은혜 속에 살아가는 복된 삶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