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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가 이상해요’ 불길한 예감 적중
80년대는 우리나라가 민주화를 향해 나아가는 격동기였다. 연일 각종 시위가 이어졌고 도심 곳곳에서는 최루탄 냄새가 코를 찔렀다.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게임 등 대규모의 국가적 이벤트들이 잇따라 열리는 등 외적인 면에서는 화려한 성과를 거뒀지만 내적인 면에서는 민주화 운동과 함께 각종 욕구와 불만이 분출되면서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이러한 시대적 혼란과 맞물려 사회 뒤편에선 엽기적인 범죄들이 자주 일어났다.
당시 서울경찰청 강력계에서 근무했던 경찰청 김원배 범죄수사연구관은 이 시기를 “역동적인 사회발전의 이면에서 지능적이고 무서운 범행수법들이 본격적으로 뿌리내리기 시작한 때”라고 진단했다. 그는 이 시절 국내에서 발생한 모든 강력사건들을 보고받고 취합하는 자리에 있었다. 무려 7000여 건의 강력사건 수사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김 연구관은 이 같은 오랜 수사경험을 집대성해 <한국의 살인범죄 실태와 수사>라는 방대한 파일을 작성했다. 여기엔 사건 발생부터 범인 검거에 이르기까지의 수사의 전 과정이 담겨있다.
‘잊을 수 없는 사건’은 이번 호부터 김 연구관의 수사파일들을 토대로 연재될 것이다. 사건에 대한 김 연구관의 입체적인 분석과 함께 전하는 생생한 회고는 독자들에게 긴박감을 더해줄 것으로 믿는다. 김 연구관이 소개하는 첫 번째 사건은 평범한 가정주부의 탈을 쓰고 자신의 주변인물들을 차례로 독살한 희대의 여성연쇄살인마에 대한 얘기다.
1986년 10월 30일 서울 중구 신당동의 한 대중목욕탕 탈의실에서 한 중년 여성이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목욕을 마치고 나온 김점순 씨(가명·49)였다. 갑작스런 김 여인의 경련과 발작에 놀란 사람들은 다급히 그녀를 인근 병원 응급실로 옮겼지만 이미 숨이 멎어 있었다. 사인은 놀랍게도 맹독성 약물인 독극물 중독이었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당시 목욕탕에 있던 손님들을 모두 조사했으나 김 여인의 사망과 관련된 특이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혹시 자살은 아니었을까. 하지만 김 여인의 가족들은 김 여인이 자살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고 유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당시 가족들과 주변 인물들을 상대로 탐문조사를 하던 수사팀은 중요한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사건 당일 숨진 김 여인이 이웃집 여인이자 같은 계원인 김용선 씨(가명·49)와 함께 목욕탕에 갔다는 사실이었다. 사망자의 가족들은 김 여인이 뜬금없이 목욕을 하러 가자고 제안한 것이나 그때 지니고 간 진주목걸이 등 패물이 없어진 것이 이상하다며 의문을 제기했다. 하지만 김용선은 혐의를 부인했고 범죄를 입증할 만한 증거도 발견되지 않아 풀려나게 된다.”
그로부터 약 5개월이 지나 또 한 건의 이상한 사건이 발생한다. 1987년 4월 4일 용산 인근을 지나던 시내버스 안에서 50대 여인이 갑자기 경련과 발작을 일으키며 쓰러진 것이다. 여인은 급히 가까운 대학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숨을 거두고 말았다. 사망자는 신당동에 사는 전희숙 씨(가명·50)로 국과수에서는 이번에도 독극물 중독이라는 소견을 보내왔다.
경찰은 버스 승객들을 조사했지만 사건 전 수상한 조짐이나 의심 가는 사람은 없었다. 건강에 아무 이상이 없던 전 여인이 갑자기 쓰러져 숨을 거둔 것과 몸에서 청산염이 검출된 것으로 보아 타살임이 분명했지만 이번에도 증거가 없었다. 현장에서는 사인으로 밝혀진 청산염도 발견되지 않았고 사건은 또다시 미궁으로 빠지게 된다. 하지만 이내 수사팀은 뭔가 석연찮은 점을 발견하게 된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이 사건을 담당한 용산서 형사들이 5개월 전 신당동에서 발생했던 사건에 대해 알게 된 것이다. 두 사건의 사인이 모두 청산가리 중독이라는 점에 주목한 수사팀은 두 사건의 관련성 여부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두 사건은 발생한 지역이 달랐기 때문에 각기 다른 관할서에 배당되어 있었지만 전 여인 사건을 담당한 용산서 형사들은 두 사건은 연관이 있을 거라고 판단하고 수사를 진행했다.”
그 결과 신당동 사건 당시 유력한 용의선상에 올랐다가 증거가 없어 풀려난 김용선과 사망한 전 여인이 같은 계원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특히 전 여인이 사망 직전 김용선과 만났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이어지는 김 연구관의 얘기.
“유가족들은 사건 당일 전 여인이 같은 계원인 김용선에게 빌려준 돈을 받으러 간다고 집을 나섰다고 진술했다. 김용선은 전 여인에게 700만 원의 빚이 있었다. 이에 유족들은 김용선이 범인이라고 진정을 냈다. 수사팀이 살펴보니 5개월 전에도 꿔준 돈을 받으러 김용선을 만나러 나갔던 계원이 의문사한 사건이 있었던 게 아닌가. 김용선을 유력한 용의선상에 올린 형사들은 그녀를 상대로 집중조사를 실시했지만 이번에도 증거를 찾지 못했다.”
전 여인이 사망한 지 10개월이 지난 어느날 또 한번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신당동에 사는 김순애 씨(가명·46)에게 이웃집 여인 김용선이 찾아온 날은 1988년 2월 10일이었다. 김 여인에게 102만 원의 채무가 있던 김용선은 “돈을 빌려준 사람에게 오늘 돈을 받기로 했다. 그 돈을 받아 빌린 돈을 갚을 테니 같이 가자”며 김 여인을 데리고 은평구의 한 다방으로 향했다. 하지만 약속시간이 지나도 김용선에게 돈을 갚기로 했다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기다리다 못한 김 여인은 자리에서 일어났고 김용선은 손수 율무차를 타주며 “차나 마시면서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고 설득했다. 율무차를 마시며 한참을 기다렸지만 채무자는 오지 않았고 결국 두 사람은 다방을 나왔다. 김 여인의 몸에 이상징후가 나타난 것은 택시에 탄 직후였다. 김 여인은 갑자기 ‘속이 울렁거린다’며 괴로움을 호소했고 김용선은 ‘차멀미를 하나보다. 드링크제를 먹으면 진정될 것’이라며 택시를 세웠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하지만 김 여인은 김용선을 따라 내리지 않고 그대로 택시를 출발시켰다. 천만다행이었다. 김용선을 따라 내렸더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집에 도착할 동안 수차례의 구토를 한 김 여인은 택시기사에게 세차비를 지급하고 집으로 와서 자리에 드러눕고 말았다. 그런데 잠시 후 김 여인의 집에 김용선이 찾아와서 ‘몸은 좀 어떠냐’며 안부를 묻더니 빌려갔던 102만 원을 주고 돌아가는 게 아닌가. 기대 않았던 돈을 돌려받게 된 김 여인은 신고할 생각까지는 못했다. 이 사건은 나중에서야 ‘살인미수’라는 아찔한 상황이었음이 밝혀지게 된다.”
그로부터 한 달 보름여가 지난 1988년 3월 27일, 딸 김용선과 경기도 이천의 친척 잔치에 다녀오던 김충복 씨(가명·73)가 버스 안에서 딸이 건넨 드링크제를 마신 후 어지럼증과 구토증세를 호소하다가 의식을 잃었다. 김 노인은 급히 성남의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사망했다. 당시 담당의사는 ‘푸른 반점에 폐기능 약화증상이 있는 것으로 보아 독극물에 의한 사망일 수도 있다’는 소견을 보였으나 김 노인이 고령인 데다가 사고 발생 장소가 사람들이 많은 버스 안이었다는 점, 더욱이 당시 친딸과 함께 있었다는 점 등으로 인해 별다른 의혹을 사지 않은 채 유족들에게로 시신이 넘겨졌다.
아버지가 사망한 지 달포가 지난 88년 4월 29일에는 급기야 김용선의 여동생 김용숙 씨(가명·43)가 사망했다. 언니 김용선과 함께 버스를 타고 가다 언니가 건네준 드링크제를 마신 후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때마침 옆에 있던 재수생 두 명이 김 여인을 들쳐업고 병원 응급실로 달려갔으나 너무 늦었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청년들과 함께 병원 앞에 도착한 김용선은 여동생을 놔두고 ‘급한 일이 생겼다’며 갑자기 사라졌다. 김용선이 향한 곳은 동생 용숙 씨의 집이었다. 김용선은 동생의 집을 뒤지다 조카에게 걸리고 만다. 조카가 의심하자 김용선은 ‘네 엄마가 입원을 해서 급히 돈이 필요하다’고 둘러댄 뒤 집을 빠져나왔다. 수사팀은 사건 당일 김용숙 씨의 집에 있던 패물이 없어졌고 그녀의 핸드백이 뜬금없이 집근처 공터에서 발견되었다는 점을 확인했다. 가족들도 의문을 제기하며 김용선을 의심하는 눈치였으나 김용선은 오히려 화를 내며 큰소리를 쳤다. 결국 가족들이 더 이상 문제제기를 하지 않아 이 사건도 유야무야돼버렸다.”
김용선 주변에서 벌어지는 기괴한 사건들은 계속됐다. 동생 용숙 씨가 사망한 지 3개월 후인 8월 8일 112로 또 한 건의 변사사건이 접수된다. 의식을 잃고 버스에서 쓰러진 여인은 손정숙 씨(가명·46)로 김용숙의 먼 친척 시누이였다. 부검 결과 손 씨의 몸에서도 독극물이 검출되었고 손 씨의 사망 전 행적을 추적하던 수사팀은 손 씨가 김용선과 마지막으로 만났다는 사실을 파악하게 된다. 손 씨의 유족들은 김용선이 손 여인에게 ‘좋은 집을 싸게 사주겠다’며 숭인동의 다방으로 불러냈다는 증언을 하며 김용선을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했다.
김용선을 예의주시하던 용산경찰서 수사팀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는 판단하에 압수수색영장을 발부받아 8월 말 김용선의 집 수색에 들어갔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김용선의 집에서는 숨진 여동생의 다이아반지 등 피해자들의 귀금속이 발견됐다. 또 김용선의 계좌에선 피해자들이 사망한 날 다른 사람 이름으로 돈을 입금해놓은 사실도 드러났다. 하지만 김용선은 빌려준 돈을 받은 것뿐이라고 둘러댔다. 그녀는 마지막 피해자였던 시누이건에 대해서도 ‘215만 원을 빌려줬는데 일부를 돌려받은 것’이라며 한사코 변명했으나 ‘사건 발생 며칠 전에도 숨진 손정숙 씨가 오히려 김용선에게 100만 원짜리 5장을 빌려줬다’는 주변인들의 진술로 인해 거짓임이 탄로났다. 하지만 김용선은 펄펄 뛰며 끝까지 버텼다. 수사 결과 문제의 수표들에는 한 사찰의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는데 김용선이 다니던 절이었다. 이번에도 김용선은 ‘그런 절은 모른다’며 펄쩍 뛰었지만 빼도박도 할 수 없는 물증이 있었으니 바로 김용선의 집에 걸려있던 문제의 사찰 달력이었다. 나중에 김용선의 집에서 사용하다 남은 독극물이 발견되면서 사건은 사실상 마침표를 찍었다.”
그렇다면 김용선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놀랍게도 그녀는 남편과 장성한 세 아들을 둔 평범한 가정주부였다. 페인트공으로 일하는 남편이 벌어다주는 수입으로 빠듯한 생활을 하고 있던 김용선은 어느날부터인가 카바레 출입이 잦아지면서 유흥과 향락에 빠지게 된다. 남편의 수입만으로 헤픈 씀씀이를 감당할 수 없게 된 김용선은 가족과 친지, 이웃들에게 돈을 빌리게 된다. 김용선은 빚독촉에 시달리다 결국 일을 지지르고 만다. 범행에 사용된 청산가리는 85년 말 약품회사에 다니는 지인을 통해 구한 것이었다.
1988년 9월 2일 구속된 김용선은 살인 및 살인미수 혐의 등으로 사형을 확정받고 1997년 겨울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