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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어제 저녁부터 몸 상태가 좀 안 좋아지더니 오늘 오전에 좀 더 안 좋아진 것 같아요. 그래서 중간중간 약간 막 미스하고 머뭇머뭇하고 한 것들이 그런 증상이라고 보시면 될 것 같아요.
오늘은 추수 감사절입니다. 보통 추수 감사절은 감사의 설계를 하는데 설교를 하는데 제가 그렇게 설교를 준비하려고 하다가 갑자기 하나님이 좀 다른 마음을 주셨어요. 그래서 물론 추수 감사절과 전혀 관계없는 건 아니지만 어떻든 말씀의 방향을 조금 바꾸게 되었습니다.
제가 지금부터 제시하는 자료는 2014년 자료예요. 지금부터 10년 넘은 자료인데 왜 이 자료를 제시하냐면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더 심각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2014년 자료를 제시합니다. 저희 총회에서 320명의 성도들을 대상으로 주일 성수에 관한 실태를 조사했어요. 조사한 결과 결석하지 않는다가 29.1%, 자주 결석한다가 34.7%, 조금 결석한다가 34.4%로 조사됐어요. 결과적으로 주의를 철저히 지키지 못하는 성도가 69.1%인 거예요. 그러니까 전체 조사한 대상의 3분의 2가 넘은 거죠.
그럼 왜 성도들이 주의를 잘 지키지 못했을까 요인을 물어봤더니 영적인 침체가 13.6%였고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 때문에 14% 경조사가 20% 학업 및 경제활동이 19.2%, 여가 및 취미 생활이 33.2%였어요.
여러분 이 데이터는 코로나 이전의 데이터예요. 그러니까 코로나 때에 주일 성수가 무너졌잖아요. 이 시기를 통과한 그러니까 코로나를 통과한 성도들이 주위를 더 잘 섬기게 됐을까요?
더 못 섬기게 됐을까요?
우리 생각에는 그 예배를 못 드리는 슬픈 경험이 있잖아요. 예배를 못 드려야 되는 강제적인 압박이 있었잖아요. 그랬으면 그런 경험이 있는 성도라면 코로나가 끝났을 때 한국교회 예배는 회복이 됐어야 돼요.
근데 여전히 아직도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안타깝게도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이 괴로움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주일 성수가 무너졌어요.
그러면 도대체 주일 성수를 무너뜨린 결정적인 사건은 뭘까?
첫 번째로 하나는 주 5일제예요. 주 5일제가 원래 주 6일제였죠. 주 5일제가 도입되면서 이제 주일 성수가 무너졌고 두 번째로는 코로나입니다. 문제는 주일 성도만 위협을 받는 게 아니라 기독교의 3대 절기인 부활절, 추수, 감사절, 성탄절까지도 도전을 받고 있다는 거예요. 그나마 이전에는 이 3대 절기는 잘 지켰어요.
절기를 잘 지킨다는 게 어떤 걸까요?
일단 예배에 많이 참석한다는 의미이고 두 번째로는 또 감사절 헌금이 많다는 그런 의미 아닐까요?
당연히 그랬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그것마저도 도전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좀 나쁘게 말하면 주일 성수와 절기가 무너진 거죠. 그러니까 불신앙의 도전에 대해서 교회와 성도들이 제대로 응전을 하지 못한 거예요. 그래서 이런 일들이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1장 24절 25절 오늘 본문이죠. 우리 같이 한번 읽어봅니다. 시작
축사하시고 때에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자는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명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그러니까 주일 성수 좀 더 상세하게 이야기하겠지만 주일 성수는 예수 그리스도의 절대적인 명령이라는 거죠. 그러니까 성만찬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절대적인 명령이라는 거예요.
근데 그것이 언제 행해졌냐 주일에 행해졌다는 거예요. 마태복음 28장 1절 그리고 마가복음 16장 2절, 누가복음 24장 1절, 요한복음 20장 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안식 후 첫날에 주일에 부활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그리고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기념하기 위해서 성만찬을 거행하기 위해서 주일에 모이기 시작했어요. 초기에는 안식일과 주일이 동시에 섬겨지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주일에만 모이게 됐습니다.
사도행전 20장 7절과 11절을 보면 안식 후 첫날에 이미 그때 정기적으로 모이기 시작했고 이 모임은 밤까지 계속되었다라고 성경이 기록해요. 그러니까 주일을 지키되 잠깐 오전만 지킨 것이 아니라 밤 늦은 시간까지 계속해서 예수님과 죽음의 부활을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는 그런 모임과 행사를 교회가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6장 2절에 보면 고린도 교회가 매주 첫날에 모였고요. 사도행전 2장 1절에 보면 안식 후 첫날에 모였고요.
주의 날 정기적인 모임에서 성령 강림의 역사가 일어난 것도 또한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장 10절에서도 주의 날에 사도 요한이 성령에 감동되었다라고 기록했고요. 사도행전 20장 16절에 보면 사도 바울이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이르려고 한 것은 그 목적이 주의 날 그러니까 주님의 날 주의를 지키기 위함이라는 것도 기록됐어요.
제가 읽은 이 성경의 자료들은 로 결말을 내리면 초대교회는 주의 날 그러니까 주일을 정기적으로 지키고 있었고 성만찬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고 있었고 주기적으로 연보도 행했고 저녁까지 이 모임이 계속됐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초대교회는 안식일보다 일이 중요한 날로 지켜졌고요. 그리고 유일한 날로 그리고 일주일에 가장 의미 있는 날로 받아들여졌고 지켜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일은 주님의 날로 지켜져야 하는 날인 거죠. 말씀의 기록이 있고 초대교회의 역사가 있고 이것이 현재까지 유지가 되고 있잖아요.
모든 예배 기독교와 관련된 신학적인 책에 주일 성서에 대한 기록이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그러니까 안식일이 주일로 안식일의 안식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주일의 안식으로 완성이 됐던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안식일이 아닌 주일을 지키는 겁니다. 그래서 주일은 또한 여러분과 저에게 축복의 날이자 기념의 날이자 안식의 날인 거예요. 그래서 주일을 지켜야 한다.
어떤 목회자가 교단 신문에 이런 기고를 했어요. a와 b라는 두 사람이 있어요. a는 도둑질을 했고, b는 주일을 지키지 않았어요. 그러면 가 a와 b 두 사람 중에 누가 더 나쁠까라는 질문을 한 거죠. 그러니까 a라는 사람은 도둑질을 했고, b라는 사람은 주일을 지키지 않았어요. 과연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더 나쁜 사람인가에 대한 이제 질문을 한 거죠.
답은 b예요. b 그러니까 주일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 더 나쁜 사람인 거죠. 왜냐하면 먼저 십계명을 보면 도둑질하지 말라는 말씀은 8계명에 나오지만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는 말씀은 사규명이라는 거죠. 그러니까 순서적으로도 앞에 있다는 거예요.
두 번째로는 두 가지를 어겼을 때 계명이 다르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처벌의 차이가 있다는 거예요. 출애굽기 22장 1절과 4절에서 도둑질한 것을 배상하라고 그랬어요. 도둑질 했으면 도둑질 한 것만큼 때로는 두 배 이렇게 배상을 했어야 돼요. 정해진 규율에 따라서 반면에 출애굽기 31장 14절 15절에 보면 안식일을 더럽힌 자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모두 죽이라 그런 거예요.
지금은 이렇게 행하지는 않죠 않지만 우리가 굳이 경중을 따진다면 경중을 따진다면 도주듯이 하는 사람이 나쁘냐 주의를 지키지 않는 사람이 나쁘냐 했을 때 말씀은 주의를 지키지 않는 사람이 나쁜 사람이라는 거예요.
물론 세상의 법정에 가면 도둑질한 게 나빠요. 여러분 도둑질하면 안 돼요. 이 말씀 듣고 부분만 들었잖아요. 목사님이 도둑질이 된댔어. 그래서 하면 안 돼요. 그러니까 비교하는 거예요. 여러분이 잘 이해하시라고 하고 말씀으로만 비교해 봐 세상의 법으로 하면 도둑질이 나쁜 거예요.
그러나 말씀으로 말씀의 원리를 따져서 봤을 때 도둑질한 것보다 주의를 어긴 것이 훨씬 더 나쁘다는 겁니다. 출애굽기 31장 14절 15절 우리 같이 한번 읽어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지니 이는 너희에게 거룩한 날이 됨이니라. 그날을 더럽히는 자는 모두 죽일지며, 그날에 일하는 자는 모두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어지리라.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누구든지 반드시 죽일지니라.
왜 이렇게 안식일을 어기는 것에 대한 처벌이 강했을까요?
그것은 도둑질은 사람에게 1차적으로 하는 죄지만 안식일을 어기는 건 1차적으로 하나님께 하는 죄예요. 도둑질도 1차적으로는 사람이지만 2차적으로 따지면 하나님에 대한 죄도 되죠.
그러나 안식일을 어기는 것은 그냥 1차적으로 바로 하나님에 대한 죄이기 때문인 거예요. 그래서 안식일을 어기는 것을 훨씬 더 무겁게 봤다.
조금 어려운 말이지만 첫 번째로 이제 첫 번째 안식일이죠. 이거는 토요일 날 지키는 안식일이에요. 이 안식일은 창조와 관련돼 있다면 두 번째 안식 우리가 주일로 지키는 이 안식일은 구속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과 관계되어 있어요.
그런데 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두 가지가 다 이루어진 거죠. 그러니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가 부활한 그리스도가 명령한 주일에 예수 그리스도가 이루신 안식을 우리가 누리게 된 거죠.
그러니까 우리가 왜 주일을 지켜야 되느냐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루어 놓은 안식의 참 의미를 주의를 지키는 것을 통해서 우리가 누리게 되고 경험하게 되고 그 축복과 은혜를 받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주일을 지켜야 하는 겁니다.
제가 최근에 월터 브루그만이라는 분이 이분이 아마 올해 돌아가셨을 거예요. 이분의 이제 책을 좀 저항하고 읽고 좀 좀 많이 주문해 놨어요. 좀 읽어보려고 제가 좀 좋아하는 이 신학자들이 있어요. 저랑 좀 색깔이 잘 맞는 부류에 해당하죠. 그래서 제 방에서는 제 특징은 그래요. 누구 좋아하면 그 사람의 책을 다 사놔요. 그래서 어떻든 영어는 잘 못하니까 한국어로 된 책은 번역된 건 다 사서 꽂아놓고 이제 빼더니 하나씩 읽어요. 이제 아마 조만간 월터 브루비만의 책을 제가 다 구입하지 않을까 이렇게 싶어요.
이 사람이 준 책 중에 안식일은 저항이다라는 책이 있어요. 주제 내용도 안식일은 저항이다 이런 거 요즘 말로 하면 주일 성수는 세상에 대한 도전이자 저항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의를 지킨다는 건 이 세상 시스템에 대해서 성도들이 저항하는 거죠. 다른 말로 하면 주 5일제로 돌아가는 세상의 시스템이 되면서 대해서 교회가 저항하는 것이 성도가 저항하는 것이 주일 성수라는 거죠.
여러분과 저의 성도들의 시스템 교회의 시스템은 주 6일째인 거예요. 그래서 6일을 일하고 주일을 시키는 것이 성도의 시스템이에요.
근데 세상은 주 5일제 시스템을 우리에게 강요하는 거죠. 근데 주일죄가 엄청 좋아 보이잖아요. 더 시기하니까 씌워도 수입은 어떤 경우에는 크게 떨어지지 않으니까 우리 생각에는 훨씬 더 좋은 시스템이라고 말하지만 이런 변화의 안에는 기독교의 이론이나 논리들이나 말씀을 거역하는 세상의 문화와 시스템들이 그대로 담겨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그냥 주일을 지킨다는 것은 주일날 왜 지켜야지 교회를 왜 가야지 이런 생각으로 살잖아요.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주의를 지킨다는 것은 교회와 성도가 잘못된 세상의 논리와 시스템에 대해서 저항한다는 그런 의미예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주의를 지키면 지킬수록 하나님의 시스템이 교회와 여러분의 인생과 세상에 자리 잡고 우리가 주의를 지키지 않으면 않을수록 주 6일째 그러니까 주 5일째 세상의 시스템이 우리의 삶과 우리 교회와 우리의 실생활을 지배하기 시작한다. 그런 의미입니다.
주 5일제는 인간을 위한 결정이라면 주 6일째는 하나님을 위한 결정인 거예요. 그러니까 주의를 지킨다는 건 세상의 시스템에 대한 도전이자 저항이라는 거죠. 그러니까 주일을 많이 지켜야 주일날 성도들이 교회 옷을 입고 많이 와야 주일날 교회에서 예배하는 것을 나 오늘 교회 가야 돼 나 오늘 일 주일 교회 가서 교사 해야 돼 주일 교회 가서 봉사해야 돼라고 말하고 그걸 섬기려고 작전 권신이 많아질수록 그것이 세상의 잘못된 논리와 시스템에 대한 저항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주의를 더욱 더 철저하게 지켜야 된다는 겁니다.
또한 주의를 지킨다는 것은 창조 역사의 반영이자 주일 구속의 역사의 반영이에요.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쉬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안식 후 첫날에 부활하셨기 때문에 구약 시대의 안식을 지키는 것이 그것은 우상과 우상 문화에 대한 저항이에요. 그러니까 의 구약 시절에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파라오와 애굽의 왕이죠. 파라오와 그리고 이방신에 대한 저항인 거예요.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지켜야 파라오의 시스템이 유대인들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막을 수 있었던 거예요.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면 이 파라오의 시스템이 이스라엘을 완전히 잡아먹어버린 거예요. 그래서 세상의 통치와 논리 속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안식일을 지키는 거였어요.
주일을 지키는 것도 동일한 의미인 것입니다. 잘못된 세상의 문화에 대한 저항이 주의를 지키는 우리는 자꾸 주일을 너무 그냥 일주일에 한 번 쉬는 날 이 개념에서만 접근하는 거예요.
주일은 피곤한 날 여러분 주일이 피곤한 날이 맞아요. 피곤하죠. 근데 안식은 내 육체가 피곤 피곤하지 않느냐가 안식을 좌우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는 자꾸 심과 안식을 내 육체가 피곤하냐 피곤하지 않느냐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일은 너무 힘든 날이 되는 거예요. 주일은 구속의 날이자 해방의 날이자 자유의 날이에요. 그것을 누리고 우리가 그 안에 은혜를 얻고 그 안에 긍휼을 누리며 살아라 간 날이 주일인 거잖아요.
그 크고 놀라운 진리는 다 내 팽개 쳐놓고 주일날 너무 힘들어 봉사하는 게 많아 나는 평생 꼼짝도 못하고 교회만 갔어. 이 논리에 젖어서 성도들이 주위를 섬길 때가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법에 대한 저항 이게 주일 성수입니다. 인간의 문화에 대한 저항 이게 주일 성수고요.
여러분 우리가 주의를 안 지키고 어디 가요? 다 그 인간의 문화잖아요. 하나님이 만든 문화가 아니에요. 내가 주의를 어기고 가서 하는 그곳에 하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문화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복 받으라고 주시는 그 문화가 아니라 인간의 문화인 거예요.
진짜 나쁘게 말하면 사탄의 문화도 많고 그래서 주의를 지킨다는 것은 잘못된 인간의 문화에 대한 저항인 거예요.
여러분 무슬림들은 이 성전의 개념이 우리랑 좀 달라요. 이 사람들은 방석 깔고 엎드리면 그냥 성전이에요. 그래서 무슬림질이 절대 약화될 수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절대 약화될 수 없는 이유 여러분 학교에도 여러분 기도처가 있어요. 공항에도 기도처가 있어요.
왜 그럴까요?
여러분과 제가 가서 기도하라고 한 게 아니에요. 그 사람들이 하루에 기도하는 그 시간들을 인정해 줘야 노동자로 쓸 수 있기도 하고요. 관광객으로 데려올 수 있으니까 어쩔 수 없이 그들의 문화를 나라들이나 기관들이 인정하기 시작한 거죠. 그 사람의 논리와 그 사람들의 이론들이 우리를 세상을 지배하기 시작한 거죠.
근데 우리에게 그 역할을 하는 게 주일 성수예요. 주의를 지키는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주의를 지키는 건 그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주의를 지키는 것은 사망 시스템 그러니까 죽음의 시스템에 대한 저항이라는 거죠.
세상의 시스템은 죽는 시스템이에요. 그것을 믿고 그것을 따르면 우리의 영원히 죽어요. 그러나 주일은 우리가 섬기고 그 안에 있으면 우리의 영혼이 살고 회복되는 날인 거예요.
이걸 어떻게 해요?
이걸 사람들이 몰라요. 그게 단순히 주를 어떻게 생겨 힘든 날 우리 교회는 뭔가 일을 많이 많이 왔었는데 괴로운 날 목회자가 욕심이 많아서 막 성도를 괴롭히는 날 이런 분은 많지 않겠지만 뭐 그런 일들도 가끔 들리니까 거짓은 아니니까 만약에 여러분과 제가 아직도 이런 생각으로 주일을 접하고 있다면 빨리 주일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바뀌어야 바꿔야 됩니다.
주일을 지킨다는 것은 왕들의 시스템, 대통령의 시스템, 독재자의 독재자의 시스템을 거부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우리가 주의를 지키지 못하도록 시스템을 만들고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할 수 없도록 시스템을 만들어요. 그러니까 그것을 강력하게 거부하는 것이 더 많은 성도가 주일을 지키고 더 많은 성도가 주일에 예배하는 것입니다.
브루그마는 그의 책에서 이 시스템을 그러니까 세상 시스템을 파라오 시스템이라 애굽의 왕이 파라오잖아요. 파라오 시스템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더 많은 벽돌을 찍어내야 되는 시스템이 파라오 시스템인 거죠.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종으로 잡아갔잖아요. 애굽이 그들을 노예로 썼어요. 노예를 안 썼다는 말도 있지만 어떻든 노예로 써서 그들을 부려 먹었어요. 그러니까 파로의 시스템은 우리를 더 압박하고 더 우리를 더 강제하고 우리를 더 힘들게 해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도록 하나님을 믿을 수 없도록 하는 게 파라오의 시스템이에요.
여러분 그게 세상의 시스템이라는 거예요. 그들 저항하는 증표가 주의를 지키는 거죠. 나는 과감히 이 땅의 문화와 이 땅의 잘못된 죽음의 시스템을 나는 저항합니다라고 선포하는 것이 주일 성수인 거예요. 그래서 완전히 다른 개념입니다.
여러분 세상은 더 많은 벽돌을 찍어야 되는 시스템이에요. 그래서 더 많은 벽돌을 찍어내지 않으면 사람들이 불안해요.더 많이 소유하지 못하면 사람이 불안해요. 더 높은 자리에 가지 못하면 세상이 불안해요. 이게 세상의 시스템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의 시스템은 교회의 시스템은 그렇지 않아요. 더 많이 소유하지 않아도 더 많이 찍어내지 않아도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하나님 나라 가운데 있으면 평안하고 안전함을 느끼는 시스템이라는 거예요.
더 나아가서 이것은 죽음과 사망의 시스템이 아니라 생명의 시스템인 거죠. 이 논리를 지키면 이것을 따르면 영혼과 육체가 사는 시스템인 것이고 이것을 버리면 영혼과 육체가 죽는 시스템인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주위를 더 열심히 지켜야 됩니다. 주일 성수는 세상에 대한 알림이자 세상에 대한 선포죠.
이런 거죠.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하나님 우리를 통치하십니다. 내 삶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공포하고 선포하는 것이 주일을 지키는 거예요. 더 많은 성도가 주의 날에 주의 성전에 와서 주를 예배하는 걸 통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세상 사람들에게
여러분 요 앞에 일하는 자매가 그래요. 좀 많이 친해졌어요. 커피숍 자매랑 아버지 어머니랑 많이 친해져서 제 목적은 전도죠. 당연히 자주 가기도 하고 대화도 많이 해요. 그랬더니 목사님 왜 이렇게 사람들이 많아요?
그런 거예요. 실은 우리가 그렇게 많지는 않은데 어쨌든 그분이 보기에는 많게 느껴졌나 봐요. 그럼 어떤 의식이 없겠어요? 교회를 가야 되나 아니면 왜 저 사람들은 저렇게 교회에 와서 예배하지 그냥 세상의 논리로 살던 사람들에게 의문을 던져주고 질문을 던져주는 것이 주의 성술을 하는 우리의 삶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사람을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때 입술로 전할 수도 있어요. 가장 강력한 은 우리의 삶이 전하는 복음인 거예요. 주일 성수는 복음의 핵심이 담겨져 있잖아요.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날 그분의 부활을 기념하기 위해서 온 백성이 모여서 부활의 영광을 누리고 즐거워하고 행복한 날이 주일이잖아요. 이 주일을 세상에 알리는 거죠.
오늘은 주일이다. 오늘은 주의 날이다. 당신의 날이 아니다. 오늘은 주님의 날이다
하는 것을 세상에 알리는 것이 주일 성수인 거예요. 그래서 주일 성수는 세상을 향한 선포이자 세상을 향한 메시지인 거죠.
여러분 우리가 주의를 지키지 않으면 세상과의 싸움에서 실패합니다. 지금 성도들이 직장이나 회사나 사회에서 실패하는 진짜 이유는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주일과 안식일을 잘 지키지 않아서인 거죠.
오늘 이 말씀을 듣고 여러분이 좀 깨달아 있음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우리는 자꾸 우리의 실패의 원인을 어디서 찾냐 내가 무능해서 내가 뭘 덜 소유해서 내가 왜 자꾸 질까 내가 실패할까 내가 왜 부족할까 여기에 쏠려 있어요. 아니라는 거예요. 말씀은 우리가 주의를 온전히 지키지 않아서 세상을 못 이긴다는 거예요.
주일은 저항인 거예요. 세상과의 싸움인 거예요. 세상에 한 선포인 거예요. 우리가 이렇게 주일을 섬기고 주일 안에 있을 때 내가 세상에서도 이겨낼 수 있고요.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주일은 단순히 그냥 주님의 나라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강력한 저항이에요. 이거 이 저항을 효과적으로 그리고 위대하게 담대하게 잘하는 사람들이 세상에서도 또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승리하면서 우리가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두 번째로 주일은 안식은 하나님의 온전한 통치로 들어간 날이에요. 우리가 대신대 교수님 두 분을 모셨죠 두 분도 약간 비슷한 이야기를 하셨어요. 그래서 두 분의 이야기에 또 제 생각과 자료들을 이렇게 모아서 두 번째 대지는 제가 준비해 봤어요. 그러니까 하나님과 온전히 연합되는 날이 주일인데요.
여러분 성도가 어떻게 살아날 수 있을까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통치 안으로 들어가면 우리가 사는 거예요. 세상의 통치 안으로 들어가면 우리는 죽고 하나님의 통치 안으로 들어가면 우리는 살아요.
여러분 내 육체가 온전한 하나님의 통치 안에 들어가면 그때 질병이 치유되고 육체가 낫는 거예요. 하나님이 완전히 나를 지배하면 하나님이 완전히 나를 딱 붙잡으면 하나님이 견고하게 나를 구속하시면 내 안에 치료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요.
그런데 그렇게 들어간 날이 하나님이 일주일에 하루를 정해놨어요. 그게 어느 날이에요?
주일인 거예요. 주일날은 나의 통치 안으로 온전히 들어와라. 나머지 6일은 세상 가운데 힘들고 어렵게 살더라도 이 주일만은 나의 통치 안으로 들어와라. 이렇게 초청하는 날이 곧 주일인 것입니다. 우리의 능력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 때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가까워질 때 생겨나요. 그러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 때에 우리에게 생겨난 능력이 있어요.
이게 뭘까요?
파괴적인 능력이죠. 하나님과 멀어진 성도에게서 나오는 능력은 파괴적인 능력인 거예요. 가정을 파괴하고 교회를 파괴하고 자기의 삶을 파괴한 능력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성도에게서 나와요.
반대로 하나님 안에 있는 성도 하나님 가까이 있는 성도에게 나오는 건 어떤 걸까요?
가정을 회복시키고 교회를 회복시키고 자기의 삶을 회복시키는 능력인 거죠.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어야 하나님의 통치 안에 온전히 있어야 창조적인 능력이 극대화되는 거죠.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던 것처럼 우리 또한 우리도 세상의 창조적으로 이 땅을 살아야 돼요. 그러니까 창조적인 능력으로 세상 안에 살아야 될 게 여러분과 저라는 거예요.
그런데 이 창조적인 능력이 자꾸 사라져요. 성도력이 사라져요. 세상을 움직여가는 성도들의 그 창조적인 능력이 성도들에게 점점 없어지고 그 자리에 누가 앉을까요?
무신론자들이 앉아요. 무신론자들이 갖은 능력은 뭐예요?
파괴적인 능력이에요. 그래서 점점 더 세상은 파괴되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에 대해서 창조적인 능력을 갖지 못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지 않는 거죠. 주일날 온전히 주의 통치로 들어가지 않아서 그래요.
여러분이 여러분의 가정과 여러분의 주변의 사람들에게 창조적인 능력을 행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주의 날에 주님의 통치 안으로 온전히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인 거죠. 그래도 감사한 것은 우리 교회 성도들이 없지 않아 좋은 분도 있지만 말씀의 집중도는 되게 높아요. 정말 높아요. 그래서 그거는 정말 제가 감사해요.
그런데 거기에서 우리가 하나라도 추가하면 말씀뿐만 아니라 앞에 찬양부터 시작해서 모든 예배와 주일이 아니는 모든 교재와 모둠의 섬김 안에 있는 하나님의 손길과 섭리한 우리가 온전히 들어가는 거죠.
우리가 교회 안에 하나님의 통치 안에 들어가지 않고 모임을 하면 어떻게 돼요?
불평이 나오고 원망이 나와요. 여러분 아셔야 될 것은 여러분이 숨만 쉬어도 제 귀에 들려요.
여러분이 숨만 쉬어도 좀 뻥을 치면 그렇습니다. 실제로 그 정도의 제가 막 이렇게 예민한 사람은 아니라서 아니지만 그렇다는 거예요. 어쨌든 여러분이 온전히 주의 통치 아래 있으면서 주방에 있어 보세요.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온전히 주의 통치 아래에 있으면서 아이들을 양육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온전한 주의 통치 아래 있으면서 찬양 가운데 있고 온전한 통치 아래에 있으면서 말씀을 듣고 온전한 통치 아래에 있으면서 우리가 교회를 섬겨요.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우리 안에 창조적인 능력이 극대화돼서 교회와 성도는 세상을 파괴하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을 창조하는 사람이 되는 거예요.
여러분 왜 교회가 회복될까? 그게 왜 희망일까요?
창조적인 능력이 회복되니까 세상은 점점 더 파괴적인 능력이 회복돼요. 이 세상을 거슬려서 이 세상을 회복시킬 유일한 희망이 왜 교회에 있냐 우리가 하나님과 가까워져서 하나님의 통치 안에 들어가면 우리의 창조적인 능력이 극대화되고 이 극대화된 창조적인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세상을 섬길 때 세상이 회복되고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쉼으로 통해서 창조가 완성되었잖아요. 우리가 안식 안에 있어야 우리의 일주일의 삶이 완성이 돼요.
여러분의 6일의 삶이 언제 완성되는지 알아요?
지금 오늘 이 자리에서 완성되는 거예요.
할렐루야 여러분 일주일의 삶의 완성이 지금 이 자리에 여기서 완성이 되는 거예요. 우리는 열심히 살았던 그 삶이 여러분의 인생을 완성하는 게 아니라 화요일날 열심히 땀을 흘려 그 삶이 여러분의 인생을 완성하는 것이나 성도의 삶의 완성은 주일날 안식일날 주의 날에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거예요.
우리가 이 사실을 알아야죠. 그러니까 주일은 그냥 단순히 괴로운 날 더 많이 일어난 날이 아니에요. 그냥 성도들이 괴로운 날이 아니에요. 이 진리를 알면 우리가 얼마나 주일날 주의 통치 하에 있을까 그래야 내 일주일의 삶이 완성되는구나. 내 일주일의 수고와 일주일의 땀과 일주일의 노력을 하나님이 받으시고 완성시켜주는구나 이 사실을 알아야 우리가 주를 더 열심히 주의 날을 숨기려고 하잖아요.
왜 삶의 완성이 없을까요? 왜 교회의 완성이 없을까요?
주의 날을 주일로 지키지 않아서 그런 거예요. 7일 중에 6일과 1일 중 어느 비중이 더 클까요? 당연히 일이죠.
왜요?
그 일이 아니면 공허하고 허무하게 인생이 끝나기 때문이에요. 주일날 그 하루가 인생의 공허를 빼앗아가고 없이 해주고요. 인생의 허물을 없이 해 주는 거예요. 그래서 주의 날을 주의 성전에서 지켜야 되는 겁니다. 이 땅이 파괴되는 것 주를 주님의 날로 지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일을 만물의 날로, 주일을 파라오의 날로
앞에 말씀드렸죠. 주일을 자본의 날로 지켰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거예요. 인류의 이상 현상은 주의를 지키지 않아서 일어나는 거죠. 쉬어야 인류가 완성이 돼요. 쉬어야 삶이 완성이 돼요. 쉬지 않는 거예요. 주님의 통치 안으로 쉰다는 건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아니라 주님의 통치 안으로 온전히 들어온다는 거예요.
완벽한 하나님의 통치 안으로 교회와 우리의 삶이 들어가는 것을 의미해요. 주일은 바로 그런 날입니다.
여러분 앞으로 우리 교회 예배가 온전한 주님의 통치 아래 들어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의 선교가 온전한 주님의 통치 안에 들어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의 삶 또한 주님의 온전한 통치 아래 들어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래야 완성이 되고, 그래야 회복이 돼요. 허무한 것, 허탈한 것, 공언한 것 주의를 지키지 않아서입니다. 뭔가를 더 채우지 않아서가 아니에요. 주의를 지키지 않아서 그런 거예요. 이게 우리 영혼의 본질이에요. 이게 우리의 삶의 본질이에요. 우리 교회가 이 회복이 일어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