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효온(南孝溫, 1454년~1492년)은 조선 초기의 문신이자 서예가이다. 자는 백공(伯恭), 호는 추강(秋江) · 행우(杏雨) · 최락당(最樂堂) · 벽사(碧沙), 본관은 의령(宜寧)이다.
영의정 남재(南在)의 5대손이고, 부친은 생원 남전(南恮), 글씨를 잘 쓴 이조정랑 남제(南悌)의 조카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고 김일손과는 동문이다. 김굉필(金宏弼) · 정여창(鄭汝昌) · 김시습(金時習) 등과 함께 수학하였다.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이다.
1478년 성종이 토우(土雨) 등 자연 재난으로 여러 신하들에게 직언을 구하자, 25세의 나이로 장문의 소를 올렸다.
그 내용 중에 세조에 의해 물가로 이장된 단종의 생모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능인 소릉(昭陵)의 복위를 주장하여, 당시 국정을 맡고 있던 도승지 임사홍(任士洪), 영의정 정창손(鄭昌孫) 등 훈구파(勳舊派)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1480년 모친의 명으로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그 뒤 다시는 과거에 나가지 않았다. 또한 신영희(辛永禧) · 홍유손(洪裕孫) 등과 죽림거사(竹林居士)를 맺고 가까운 벗들과 함께 명산대천을 유람하면서 글짓기를 좋아하였다.
이에 전국 각지의 명승지에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고 「유금강산기(遊金剛山記)」를 비롯한 수많은 시와 기행문을 남겼다.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금기에 속한 박팽년(朴彭年) · 성삼문(成三問) · 하위지(河緯地) · 이개(李塏) · 유성원(柳誠源) · 유응부(兪應孚) 등 사육신들의 행적을 기린 「육신전(六臣傳)」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사후 1504년 갑자사화 때에는 김종직의 문인이었다는 것과 소릉복위를 상소했다는 이유로 부관참시(剖棺斬屍)까지 당하였다.
중종반정 이후 사림파(士林派)가 정계에 진출하게 되면서 1511년 비로소 문집 간행이 허가되었고, 1513년 소릉이 추복(追復)되면서 신원되었다. 좌승지에 추증되고 1782년 다시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인물됨이 영욕을 초탈하고 지향이 고상하여 세상의 사물에 얽매이지 않았으며 문장 특히 시를 잘 짓고 글씨를 잘 썼다.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의 쌍계사의 진감국사비(眞鑑國師碑)를 보고 평한 시가 있는데 "용사처럼 치닫는 가는 글씨에 경탄하며, 글씨가 백영처럼 취중의 정취를 얻었다."고 평가하였다.
但驚細筋龍蛇走 書得伯英醉中趣
《생 · 사육신서첩(生 · 死六臣書帖)》 등에 글씨가 수록되어 전한다.
저서로는 『추강집(秋江集)』, 『추강냉화(秋江冷話)』, 『귀신론(鬼神論)』 등이 있다. 고양 문봉서원(文峰書院) · 함안 서산서원(西山書院) · 장흥 예양서원(汭陽書院) · 영월 창절사(彰節祠) · 의령 향사(鄕祠) 등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죽은 사육신의 대비하여 목숨을 잃지 않고 살았지만 평생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초야에 묻혀 살았던 사람을 생육신이라 하는데, 김시습(金時習)·원호(元昊)·이맹전(李孟專)·조려(趙旅)·성담수(成聃壽)·남효온(南孝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