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책과 관련이 없지만 조금 더 본질적인 이야기(노동자 에세이)
“공부를 못했으니까 몸으로라도 때워서 자식들 먹여살리는 거잖아요? 그런 분들도 존중 받아야 되죠.“ 사실 이런 종류의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고 말았다. 어쩌면 무의식에 외침이었고 혹은 지금까지 익혀오던 것이 자연스럽게 들어난 것이었다. 나름 옳았다고 생각했다. 존중은 받아야 한다. 그점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공부를 못했으니까 몸으로라도’ 한국 사회에 뼈 깊이 자리잡고 있는 한가지 생각으로 인한 지독한 머리속 질병이다. 국영수. 학교에서 가르치는 이 모든 학문에 대한 아니 사실 학문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그 주입식 교육과 끝없는 시험의 결과라는 공부만이 모든 가치 판단과 길의 연결로 이어진다.
”노동자라는 키워드가 부정적이다. 반면 근로자는 우호적이다.” 이런 말에 반박할 수 없던 것은 실제로 나의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를 배우거나 여러 사회 이슈들을 보며 노동자를 비롯한 노동조합과 그들의 파업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부정적인 시선과 살짝 낮은 사람들을 대하는 듯한 생각을 걷을 수 없었다. 우리는 노동자가 된다. 심지어 대부분이 비정규직 노동자가 된다. 하지만 노동자의 권리와 비정규직의 불의에 대한 인식과 배움은 비교적 너무나 부족하다. 책에서는 이런 노동자들의 권리와 비정규직의 불의를 보다 본질적이면서도 비교를 통해 우리나라와 대한민국인의 인식을 확실히 규명한다. 노동조합이 주도하는 파업과 노조들을 볼 때 책은 보다 본질적인 것을 보기를 강조한다. 특정 노동자들의 파업이 일어났을 때 이로 인하여 발생하는 자신의 불이익과 잠시의 불편함, 잠깐의 사건에 주목하는 것이 아닌 왜 노동자들이 파업을 할 수 밖에 없었으며, 이 파업이 성공이 되었을 때 사회적으로 얻을 이익, 또한 후에 자신이 저런 상황에 처 해 있을 때를 생각한 이해에 주목하라는 충고이다. 굉장히 중요한 요점이자 이해관념이다. 조금 더 자기 비판을 해보자면 애초에 노동자 파업에 대해 잘 모르고 생각 하지도 않았지만 가끔씩 뉴스에 흘러나오는 이야기를 들을 때 그런 종류의 노동자 운동은 왠지 모르게 폭력적이게 보였고, 또한 무언가 뒷손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누군가가 노조들의 편을 들건 안 들던 모든 부분에서 정치적 개입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또한 이런 파업이 기업에게는 얼마나 해가 될까, 사회에는 얼마나 해가 될까 하는 대답할 생각 없는 물음을 던지기도 했다. 이건 매우 이기적인 생각으로 모든 활동을 인식한 것이었고, 또한 기업적으로 바라보며 단 한 번도 노동자들의 시선과 그들이 말하는 바에 이해를 가지려는 노력은 결코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난 여기서 보다 더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려고 한다. 왜 사람들은 노동자 조합, 노동자 파업은 물론이고 “노동자”라는 것에 관심이 없는 체 사는 것일까? 특히 학창시절을 보내고 있는 나이기에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어째서 난 노동자에 관한 관심이 전혀 없을 수 있을까? 그저 취업을 하고, 내가 노동자가 되어서 살기 전까지, 심지어는 그 후에도 아무런 인식과 관심이 없은 체 살 수는 없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살고 있다. 따지자면 이는 사람으로 살면서 몸의 구조를 모르고 사는 것이고, 자연 속에 살면서 생물들의 인과관계를 모르고 사는 것이다. 사회로 나아가 자신의 위치에서 보다 활동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경로를 스스로 박탈하는 것이며 사회 전반에 흐르는 반복되는 불의에 대응할 수 있는 박식한 생각을 스스로 금하는 것이다.
이럴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책에서도 언급된 바 있는 교육의 문제인 것이 분명하다. 사람의 생각이 아무리 위대하다 하여도 한 번도 배우지 않은 사실을 깨우치고 심지어 반대의 경우, 이번 일로 따지자면 기업 입장에서의 논리만을 자연스럽게 주입 당한 시점에서 모든 것을 뛰어넘어 새로운 관점. 노동자의 시선을 깨우치기란 쉽지 않다. 특히 이런 것을 사회전반에 기대한다면 그야말로 미친 것이다. 사실 교육 과정에서 기업과 노동자에 대해 말하는 바를 보면 기업의 편을 들고 노동자의 시선으로 사회를 보지 않기를 바라는 듯한 의도성을 띄고 있다는 생각을 할 수 밖이 없다. 이런 의도성은 교육에서 끝나지 않는다. 기사와 뉴스를 비롯한 언론과 이에 반응하는 여론조차 기업에게 우호적이고 노동자에게는 적대적인 시선을 품고 있다. 이런 종류의 큰 흐름 있는 한국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흐름에 휩쓸려 산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교육의 내용 먼저일까 혹은 교육 자체가 먼저일까. 노동자에 대한 교육의 내용 만큼 한국 사회는 “교육”자체에 큰 병을 가지고 있다. 책에서는 기본적으로 사람이 “나 또한 노동자”라는 인식을 가지지 않는다고 언급한다. 학생도 결국은 자신이 원하는 종류의 노동자가 되기 위해서 공부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사회는 노동자에게 대한 언급을 하지 않는 것을 넘어서 일종의 분류를 한다. 내가 한 생각처럼 “몸을 쓰는 사람은 노동자.” “조금 지적이고 수준 높은 곳에서 일하는 사람은 근로자” 하는 정의를 가슴 깊이 확신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 열심히 산 사람은 근로자로써 사람 답게 살고 어린 시절 놀면서 산 사람은 노동자로써 사는 것이 당연하다. 현장에서 막노동을 하는 사람은 무언가 한심에 보이고 사무실에서 컴퓨터를 두드리고 있는 사람은 무언가 현명해 보인다. 이런 것은 학교에서 교육시키지 않는다. 하지만 모두가 이 시선에 교육되어 있다. 학교가 아닌 사회에 철저히 교육되어 있는 것이다. 언론? 여론? 이런 것도 아니다. 원숭이는 나무를 타고 살고, 고래는 바다에서 사는 것을 굳이 국가 차원에서 교육시키지 않는 것처럼 자연을 보며 우리가 살아가는 이 환경을 보며 아는 것이다.
여기서 한국 교육의 문제가 들어난다. 한국 학생들은 일종의 시한부 인생을 산다. “수능”이라는 죽음에 맞춰 “천국”에 갈지 “지옥”에 갈지 평가 받는 “공부”를 한다. 아주 열심히 하며 죽음 후 천국에 가면 평생 천국에서 살 것이고 지옥에 가면 평생 지옥에서 살 것이라고 생각한다. 혹은 최소한 인생을 살아가는 기반이 달라져 “천국적인 기반이냐, 혹은 지옥적인 기반이냐”가 달라질 것이라 생각한다. 임종에 다와서 반나절 동안 종이에 글자를 적고 천국행 티켓과 지옥행 티켓을 끊는다. 그렇게 천국행 티켓은 근로자의 나라로 사람들은 인도하고 지옥행 티켓은 노동자의 나라로 사람들은 인도한다. 이런 식의 머리 속 그림이 조금이나마 모든 학생에게 있다. 물론 자신이 노력한 만큼 본인이 원하는 삶에 가까워 지거나 본인이 원하지 않는 삶에서 멀어질 수는 있다. 그렇지만 모두가 똑같은 기반에서 사람의 삶을 살 권리는 기본적으로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누구는 좋은 기반, 누구는 안 좋은 기반으로 갈 것을 강요하고, 인생의 짧은 시간으로 평생의 기반을 평가한다. 그리고 좋은 기반에 있는 사람에게만 기본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의 삶”이 허락된다. 이것이 근로자의 삶이다. 반면 좋지 않는 기반의 사람은 “사람의 삶”을 살 수 없다. 사람 다운 직장, 사람 다운 결혼, 사람 다운 지식, 사람 다운 삶 이것은 오로지 천국행 티켓을 끊은 사람들에게만 허락 되는 도전이다. 지옥행 티켓을 끊은 사람은 도전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또한 이 도전의 종류가 너무나 좁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에게 대학 목표를 물어보면 전부 “서울대 의대”다. 물론 한국 교육 최상위에 도전한다는 목표는 존경 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전부 똑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다. 선택지를 늘린다 하여도 고려? 연세? 이 뿐이다. 천국 중에 천국행 티켓을 끊은 사람의 목표가 대부분 같은 것이다. 그리고 이것에서 벗어나려 하면 무언가 탐탁치 않은 시선을 받아야 한다.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경찰이 되고 싶을 수 있다.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군대에 들어가고 싶을 수 있다.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그저 노래를 들으며 일할 수 있는 벽돌 나르는 일꾼이 되고 싶을 수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복지와 인식이 마련 돼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이런 시선으로 세상을 볼 수 있는 망원경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사실 아예 천국과 지옥 이런 것 자체가 없을 수 있다. 그리고 없다고 말하는 어른들이 많다. 수능의 결과가 모든 삶을 증명하지 못한다고. 혹은 천국 위에 천국이 있다고 말하는 어른들이 있다. 지옥으로 꺼지는 사람들은 그냥 그렇게 기반부터 잘 못되는 것이고 천국 티켓을 끊은 수능도 그저 시작일 뿐이라며 아이들에게 절망을, 그런 삶을 살아가는 자신들에게는 이상한 우울감을 말하는 어른들이 있다. 왜, 무슨 목적인지는 몰라도 그렇게 말하는 어른들이 있다. 하지만 결국 봐야 할 것은 학생들의 입장이다. 학생들이 어른의 시각으로 교육을 바라보기를 바라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이제 태어나 뒤집기에 열중인 아이에게 이건 시작에 불과해 걷기는 더 힘들어 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혹은 뒤집기를 잘하지 못해도 걸을 수 있다고 하는 것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이에게는 이 뒤집기를 성공하지 못하면 오로지 지옥이 있다고 밖에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지옥이 바로 사회에서 말하는 “노동자”의 길로 가는 것이다.
이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학생의 수가 많지는 않을 지 모른다. 하지만 상당 부분 존재한다. 하지만 이보다 본질적인 문제는 학생들이 “자신들은 경험하지 못한 그 누군가의 경험”에 너무 많이 의지하고 있는 점이라고 생각이 든다. 이는 학생에 국한될 것이 아니다. 어떤 선생의 말, 어떤 회사원의 말, 어떤 어른의 말. 내가 아무리 신뢰를 하고 있는 사람이던, 대다수의 경험에 비롯된 말이던 간에 나는 나일 뿐이다. 누군가의 교육관, 누군가의 결혼관, 누군가의 인생관에 사로 잡혀 그대로 인생을 살려 하는 그 움직임이 사회 대부분이 말하는 직업관에 따라가는 이 문제의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이는 나의 길을 갈 줄 알아야 한다. 하지만 그러지 못한다. 사실 어떤 이가 아닌 모두가 나의 길을 가야 하지만 “어떤 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이 사실을 회피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 사회는 대부분이 말하는 경험에 맞춰 짜여 있기 때문이다. 그럴 수 밖에 없다. 사람들이 많이 지나간 길일수록 평탄하고 앞이 보일 따름이다. 하지만 그 길에 모든 사람이 쏠린다면 아무리 넓다 해도 사람으로 미여 터질 것이며 앞이 보이지 않을 거고, 자신의 의지 없이 그저 사람들의 발걸음에 따라 떠밀려 가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또한 샛길로 가는 사람을 무턱대고 조롱하고, 욕하며, 미련하게 볼 것이며 그들은 존중하는 법이나 방법에 대해 생각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다 길에서 튕겨 떨어지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럼 그 사람들은 갑자기 샛길로 갈 수밖에 없을 것이고 자신들이 샛길에 대고 했던 모든 행동을 그대로 받아낼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애초에 길이 하나로만 집중되지 않게 조율하고, 여러 길을 존중하며 평탄하고 훤하게 만들려고 노력해야 한다. 또, 이해해야 하며 모두가 똑 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여러 길들을 이제 걸음마를 땐 아이들에게 하나씩 보여주며 제시해야 하고 거부할 기회도 여럿 챙겨주어야 한다.
그렇지만 나는 나이고 나의 입장으로 밖에 세상을 바라보지 못한다. 이점을 인지해야 한다. 만약 이 글 또한 동의가 되지 않는다면 그저 버리면 될 뿐이다.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면 당신은 이미 누구도 아닌 자신의 길을 갈 수 있을 것이고 그 길이 사람들이 말하는 천국인지, 지옥인지, 근로자인지, 노동자 인지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타인의 평가와 생각 없이 나의 길을 가는 것. 이것이 필요한 시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