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례라는 의식은 모세 율법의 근거를 전혀 가지지 않는다. 레위기나 다른 모세 5경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1세기의 유대인 서민들에게는 침례라는 의식이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러면 침례라는 의식은 어디에서 출발했을까? 이에 관한 역사적 근거가 전무하지만 우리는 사람들의 본능이 갖는 종교심을 통해서 추론해 볼 수 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여 애굽에서 나와 광야생활을 할 때, 회막을 지어 그곳에서 번제나 기타 희생제물을 드림으로써 백성의 죄를 사하는 의식을 제정하였고, 그 후 솔로몬 시대에 성전이 완성되어 제사장을 통한 동물이나 식물을 바침으로써 백성의 죄와 허물을 사하는 의식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기원전 587년에 바빌론의 느부갓네살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됨으로 인해서 더 이상 그러한 제사장을 통한 성전의식이 이행이 불가능해졌다. 바빌론으로 유배된 많은 유대인들은 그들의 죄의식을 해결할 전통적 수단이 없어졌지만, 종교심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들의 죄를 사할 대체 수단을 찾게 되는 것이다. 바빌론 성은 유브라데 강줄기를 방어로 이루어진 요새였기에 유대인 유배자들은 그 강에서 몸을 씻는 일이 빈번하였고 몸을 씻는 데서 마음의 죄를 씻는 상징성에 착안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이 유배생활을 하면서 성전의식 대신에 유브라데 강에 몸을 담금으로써 그들의 종교적 마음을 나타내게 된 것이며, 고토로 돌아온 후에도 이러한 관습은 계속되었는데, 성전의식에 비하면 비용이 들지 않아 서민들에게는 그야말로 적절한 의식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물론 성전의식이 사라진 것은 아니며, 성전에서 의식을 치를만한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수고하는 제사장에게 예의로써 약간의 선물을 마련할 수도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침례를 받는 당사자는 베푸는 이에게 감사의 표현으로 약간의 선물을 하는 것이 관행화 되어 부작용을 낳기도 하였다. 따라서 요한은 순수한 하나님의 숭배와 백성을 위한 봉사정신으로 임하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는 일반 사람들과는 달리,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지낸 것은 사람들에게 침례를 위해 어떤 감사의 표현을 물질적으로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로 보아야 한다.(막 1:6) 예수는 자신이 좋은 소식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먼저 자신이 완전한 회개를 표현해야 했으므로, 스승격인 요한에게 침례를 받았다. 이에 대해 침례는 회개와 죄사함을 나타내는 의식이고 이러한 완전한 회개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이 임하게 되는 것인데, 누가는 마가나 마태와 달리 그의 기록을 약간 편집하였다. 그것은 요한에게서 받은 침례가 성령을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예수께서 기도함으로써 비로소 성령이 임했다고 편집한 것이다. 사실상 요한의 침례는 비용이 들지 않는다는 점 뿐이지, 그 의미는 대제사장에게서 받는 속건제나 다름 없었기 때문에 성령과는 무관한 것이다. 요한이 직접 말하기를 "나는 물로 침례를 주지만 오실 그분은 불로써 침례를 베푼다" 고 함으로써 예수의 침례가 회개와 죄사함의 깊이에서 훨씬 감동이 클 것이라는 것을 말한 바 있다. 성령이 임한다는 것은, 깊은 감동으로 인하여, 참 믿음을 형성시켜 인생의 방향을 전환시키는 역할을 의미하는 것이다. 대제사장의 성전 의식이나, 요한의 침례도 이러한 의미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깊이가 특별히 강조되지 않았던 까닭이다. 그래서 사도행전의 필자인 누가는 요한의 침례를 단순히 '회개의 침례'로 격하시키고 예수의 이름으로 받는 침례는 성령이 수반됨을 강조했던 것인데, 이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사도행전의 기록을 살펴 보고자 한다.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 2:38) 사도행전에 언급되는 침례를 다섯 종류로 나누면 다음과 같다. 즉, (1) 침례를 받고 성령을 받은 경우( 행 2:38; 16:15, 33-34; 19:5-7), (2) 침례 요한이 준 죄사함의 침례를 받은 경우(13:24; 19:1-4), (3) 성령을 먼저 받고 난 후 침례를 받은 경우(9:17-18; 10:44-48), (4) 성령을 받았지만 예수의 침례를 받지 않은 경우 (18:24-25), (5) 예수의 침례를 받지만 성령을 받지 않은 경우 (8:14-16, 26-39) 등이 있다. 위의 유형들은 사도행전에 의하면 침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해지며 죄의 용서와 성령의 선물을 약속한다. 한편으로는 침례자 요한의 회개의 침례가 초기교회 시절에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러므로 이러한 내용을 볼 때, 사도행전 전체에서 침례가 죄사함, 회개, 성령, 구원과 같이 동시에 나오지는 않지만 침례를 중심으로 나머지 요소들이 순환적으로 등장하며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그 관계성을 알아보기로 한다. 1. 침례를 받고 성령을 받은 것이 암시된 경우( 행 2:38; 16:15, 33-34; 19:5-7) 사도행전 2 37-40절에서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청중들이 “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을 때, 베드로는 약속된 성령을 받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으라고 명령한다. 여기에서 침례와 성령 받는 것은 함께 나타난다. 그러나 2장에서 사도들과 제자들은 오순절에 성령을 받았지만(2:1-5), 이들이 이 사건 이후에 다시 침례를 받았다는 보도가 없는 것을 볼 때, 그들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침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한편 베드로의 명령은 세계 각국에서 온 경건한 유대인들에게 한 것이고 이 말을 들은 삼천 명이 침례를 받았다는 보도는 있지만 이들이 성령을 받았다는 구체적인 내용은 없다. 다만 구원을 받으라는 베드로의 말을 따라서 그들은 침례를 받고, 제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많은 기사와 이적을 나타내며 모든 물건을 서로 나눠 쓰는 이상적인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 준다 그래서 비즐레이 머레이(G. R. Beasley-Murray)는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마음의 찔림을 받아 침례를 받은 3천 명은 당연히 회개를 하였기 때문에 성령도 선물도 받았을 것이라고 주장한 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바울과 그의 일행은 로마의 식민지로서 마게도냐 지방의 중요한 도시인 빌립보에서 며칠을 머무는 중에 안식일에 기도할 곳을 찾아 강변으로 간다(행 16:11-13). 그곳에서 그들은 두아디라 도시의 자색 옷감 장사를 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 여인 루디아를 만난다 바울의 말을 주의 깊게 들고 있었던 루디아는 마음을 열고 자신과 자신의 식구들과 더불어 침례를 받는다(행 16:14-15). 루디아는 바울이 말하는 것을 믿었고 예수를 주(主)로 시인했으므로 그녀는 유럽에서 바울의 첫 번째 개종자가 “ 되었다.” 루디아는 바울 일행을 자신의 집에 머물라고 강권함으로써 그녀의 믿음을 나타내었다. 루디아와 그녀의 집에 속한 모든 사람들이 침례를 받을 때 성령을 받은 것에 대한 정확한 언급은 없다. 그러나 그녀는 예수를 주로 인정하고 복음을 받아들였다는 측면에서 성령을 함께 받았을 것이다( 행 16:14-15). 또한 빌립보의 간수도 그의 온 가족들과 함께 침례를 받을 때 성령을 받았는지에 대한 명확한 언급은 없지만 그들의 집을 가득 채 운 기쁨은 성령을 함께 받았음을 암시한다 ( 행16:33-34). 비슷한 관점에서 에베소의 열두 제자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 행 19:5-7) 침례와 안수를 받은 후 성령을 받는다. 물론 여기에서 이들은 침례를 받고 곧장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니라 바울이 안수를 할 때, 성령을 받았다고 나온다. 2. 침례자 요한이 준 죄사함의 침례를 받은 경우(13:24; 19:1-7) 공관복음서에서 침례자 요한의 침례는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침례이며 예수도 침례자 요한으로 ”( 막1:4; 마 3:11; 눅 3:3)부터 침례를 받았다고 기록한다. 마가와 마태에 의하면, 이때 예수가 물에서 올라올 때 성령이 비둘기처럼 예수에게 임한다. 막( 1:10; 3:16). 누가는 예수의 침례를 언급하면서 바로 앞 구절에서 요한이 옥에 갇혀있다는 사실을 집어넣는다(눅 3:20). 이러한 편집은 예수가 요한으로부터 침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감추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요한의 침례 자체가 예수에게 성령을 임하게 한 것이 아니라 예수가 침례를 받고 기도할 때 성령이 비둘기같이 예수 위에 강림했다고 변경함으로써 요한의 침례와 성령을 분리시킨다(눅 3:21-22). 그러나 예수가 침례자 요한으로부터 침례를 받은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사도행전은 요한의 침례는 철저하게 회개의 침례 라고 정의한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베드로의 형제인 안드레는 예수를 따르기 전에 이미 침례자 요한의 제자였다(요 1:35-40). 유다 대신 맛디아를 새로운 사도로 선출할 때의 중요한 고려점이 바로 요한의 침례 때부터 함께 했던 사람들 중에서 뽑는 것이었다(행 1:21-22). 침례자 요한이 회개의 침례를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전파할 때(행 3:24), 열두 사도들도 침 례자 요한의 침례를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비슬레이 머레이는 사도행전 2장에서 열두 사도를 비롯한 120명의 제자들은 침례자 요한의 침례를 받았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이들은 침례자 요한으로부터 침례를 받은 후 한참 후에 예수가 약속했던 성령을 받은 셈이다. 이와 같이 침례자 요한의 침례에 대해서 누가를 포함한 공관복음서는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침례 라고 하지만 사도행전에서는 단축형으로 “회개의 침례 ”라고 지칭한다. 이 침례는 예수의 이름으로 하는 침례와는 구별되고 예수의 침례보다 권위가 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적어도 그의 침례는 회개를 위한 것이고 죄사함을 약속한다 침례자 요한의 침례는 그리스도 교 침례 의식을 위한 출발점이기 때문에 그의 침례와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침례 사이에는 연속성이 있다. 그러나 사도행전 에서 침례자 요한의 침례는 즉각적으로 성령을 보장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사도행전 19장 1-7절에서는 에베소의 제자들이 침례자 요한의 침례는 받았지만 성령은 받지 못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런데 이들은 오순절의 120 명의 제자들과는 달리 다시 주 예수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바울의 안수를 통해서 성령까지 받는다. 침례 요한의 침례는 열 두 사도를 포함한 120명의 제자들이 성령을 받을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주지만 사도행전의 다른 ,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제공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에서 침례자 요한의 침례는 예수의 이름으로 하는 침례와는 구별되는 '회개의 침례'로 나타난다. 3. 성령을 먼저 받고 난 후 침례를 받은 경우(9:17-18; 10:44-48) 사도행전 저자는 바울이 예수를 만난 이야기를 세 번에 거쳐서 이야기 한다. 사울이 다마스쿠스의 거리에서 눈이 먼 채로 아나니아를 기다리는 이야기에서도 사울은 침례를 받고 성령을 받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사실 9장 17b-18절은 "사울이여 그대가 오는 도중에 그대에게 나타나신 주 예수께서 나를 보내셨소 그것은 그대가 시력을 회복하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도록 하시려는 것이오" 라고 말하였다 곧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져 나가고 그는 시력을 회복하였다 그리고 그는 일어나서 침례를 받았다고 보도는 하지만 그 이후에 구체적으로 성령을 받았다는 언급은 없다 아나니아는 사울을 찾아가서 먼저 그에게 안수하면서 그분이 나를 보내시며 당신의 눈을 “ 뜨게 하고 성령을 가득히 받게 하라고 분부하셨습니다 라고 선언” 한다. 하워드 마샬 은 아나니아의 안수를 통해서 사울이 성령의 선물을 받았는지 또는 침례 이전에 성령을 먼저 받았는지는 명확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사울이 아나니아의 안수를 통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사울은 성령을 충만하게 받은 후에 침례를 받았다. 이 구절을 그리스어로 보면 언제 사울이 성령을 받았는지 알 수 있다. Ἀ ῆ ὲ Ἁ ί ὶ ἰ ῆ ἰ ὴ ἰ ί ὶ ἐ ὶ π λθεν δ ναν ας κα ε σ λθεν ε ς τ ν ο κ αν κα πιθε ς ἐ ᾽ ὐ ὸ ὰ ῖ ἶ · ὺ ἀ έ, ὁ ύ ἀ έ π α τ ν τ ς χε ρας ε πεν Σαο λ δελφ κ ριος π σταλκ έ , Ἰ ῦ ὁ ὀ ί ἐ ῇ ὁ ῷ ᾗ ἤ , ὅ ν µε ησο ς φθε ς σοι ν τ δ ρχου πως ἀ έ ῃ ναβλ ψ ς κα πλησθ ς πνε µατος γ ου ὶ ῇ ύ ἁ ί . 누가는 눈을 뜨는 것(ἀ έ ῃ ) ναβλ ψ ς 과 성령으로 충만해 지는 것 (πλησθ ς πνε µατος γ ου ῇ ύ ἁ ί ) ‘ ’( 을 접속사 카이 ὶκα )로 연결하여 2인칭 단수 수동형으로 표현한다 그래서 오네일(J. C. O’ Neill)은 이때 사울이 다시 눈을 보게 되면서 동시에 성령도 받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사울은 성령을 받은 후 즉시 침례를 받는다(행 9:18). 이와 같이 성령을 먼저 받고 그 다음에 침례를 받는 예는 10장의 고넬료의 이야기 속에서도 나타난다. 고넬료는 로마 군대의 백부장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던 이방인이었는데 베드로의 설교 중에 그와 함께 했던 모든 사람들이 성령을 받는다. 4. 성령을 받았지만 예수의 침례를 받지 않은 경우 사도행전에는 아볼로라는 유대인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그런데 알렉산드리아 태생으로 아볼로라는 유대 사람이 에베소에 왔다 그는 말을 잘하고 성경에 능통한 사람이었다 . , . 그는 이미 주님의 도를 배워서 알고 있었고 예수에 관한 일을 열심히 말하고 정확하게 가르쳤다 그렇지만 그는 요한의 침례밖에 알지 못하였다(행18:24-25). 아볼로는 말을 잘하였을 뿐만 아니라 성서에도 박식했다. 그가 요한의 침례만 알고 있었다는 것은 오순절에 120 명의 제자들이 받았던 성령에 대해서는 듣지 못했지만 요한의 침례를 받았었음을 가리킨다. 그는 나중에 예수의 침례를 다시 받지는 않았지만, 예수에 관한 일들을 잘 알았을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해서 정확하게 가르쳤다 이러한 사실은 아볼로가 예수의 침례를 받지도 않은 상태에서 그리스도교 복음 전도자로 활동하고 있었음을 알려 준다. 고넬료와 마찬가지로 아볼로는 예수의 침례를 받기 이전에 성령을 받았지만 고넬료처럼 침례를 받지 않는다. 이러한 사실은 아볼로가 예수 부활의 증인이 아니었음에도 불구 하고 오순절의 제자들처럼 성령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려줌으로써 침례와 관련된 흥미로운 예를 제공해 준다 만약 아볼로가 침례자 요한의 침례를 받은 것이 확실하다면 적어도 침례자 요한의 침례를 받은 후 성령을 받은 예수의 전통을 따라서, 아볼로도 그렇게 성령을 받았을 것이다 사도행전에서는 예수의 이름으로 받는 침례와 침례자 요한의 침례를 구분하려 하지만, 적어도 아볼로가 예수의 침례 이전에 성령을 받은 것은 침례자 , 요한의 침례와 예수의 이름으로 받는 침례 사이의 연속성을 보여준다. 5. 예수의 침례를 받지만 성령을 받지 않은 경우( 행 8:14-16, 26-39) 사도행전 8장은 예루살렘 교회에 큰 박해가 오자 사도들을 제외한 그리스도인들이 사마리아와 유대로 흩어지면서 복음을 전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 중에서 빌립은 사마리아에 내려가서 . 복음을 전하며 많은 기적을 행하여 그곳에 큰 기쁨을 준다 (행 8:4-8). 이에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베드로와 바울을 보내서 그들이 성령 받기를 기도한다. 왜냐하면 사마리아 사람들은 “ 주 예수의 이름으로 침례만 받았을 뿐이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아직 성령이 내리시지 않았던 것이었다.” (행 8:14-15). “ 베드로와 요한이 그들에게 손을 얹으니 그들이 성령을 받았다.” (행 8:16) 고 기록한다. 비록 이들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았지만. 성령을 받지 못한 경우이다 그러다가 두 사도가 안수하자 성령을 받게 됨으로써 마치 두 사도가 성령 강림을 위한 안수로써 “ 확증 의식을 수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 이러한 확증 의식을 통해서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사마리아에서도 예루살렘에서와 같은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이 일어났음을 누가는 강조하여 성령이 이끄는 새로운 선교를 보여준다. 그럼에도 예수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았음에도 성령을 받지 못했다는 이 부분은 사도행전의 침례에서 매우 특이한 경우이다. 베드로와 요한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후 빌립은 주의 사자의 명령으로 가사로 내려가는 길에서 에디오피아의 내시에게 이사야의 예언을 해석해 주고 그에게 침례를 베푼다. 이방인이지만 하나님 경외했던 내시는 순회전도자로 나오는 빌립에 의해서 예수의 침례를 받지만, 명시적으로 성령을 받았다는 언급은 없다. 물론 빌립에게 내시의 마차로 바짝 다가 가라고 성령이 빌립에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내시가 받은 침례는 성령까지도 포함된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성령은 내시가 아니라 빌립에게 직접적으로 말씀했지 내시에게 말씀하지 않았기 때문에 간접적으로 성령을 받았다고는 할 수 있지만 침례 후의 즉각적인 성령을 받은 것은 아니다. 위의 여러 예에서 살펴 보았듯이 누가는 성령과 침례를 받는 순서는 뒤바꾸지만, 성령을 받는 것과 침례를 밀접하게 연관시켰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에디오피아의 내시가 단지 침례만 받고 성령에 대한 아무런 언급이 없이 끝나는 것은 이상하다. 그래서 일부 해설자들은 고넬료의 선교와 에디오피아 내시의 선교를 비교하여 성령을, 받고 침례를 받은 고넬료의 경우 그의 출신지역인 이탈리아의 , 로마로 복음이 퍼져나가게 될 것을 예상케 하지만, 침례만 받은 내시는 에디오피아로 더 이상의 선교가 언급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한 누가의 문학적 해석이라고 지적한다. 헨첸에 의하면 성령 받은 것을 직접적으로 명시하지 않은 것은 빌립이 이방선교의 합법적 창시자인 베드로를 앞지른 것이라는 사실을 감춰서 사마리아인에 대한 선교가 베드로에 의한 본격적인 이방인 선교를 위한 다리 역할을 하게 하려는 의도라고 하였다. 이상으로 우리는 사도행전에 언급되는 여러가지 유형의 침례와 성령 받음의 순서를 알아 보았는데, 요약하여 정리해보면, 침례는 의식이며 절차이다. 즉 이것은 어디까지나 형식에 속하는 문제이지 믿음의 본질적 내용은 아닌 것이다. 본질적 내용은 죄에 대한 완전한 회개와 인생의 방향전환이다. 아볼로의 경우, 그의 연설이 유창한 것은 이론에 능통하다는 뜻이며, 성령을 받지 못했다는 것은 믿음이 결여되어 깊은 감동을 전달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성령은 물건처럼 주고 받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에 의한 감동을 뜻한다. 그래서 요한의 침례와 예수의 침례를 구분하는 것이다. 예수를 '주'로 시인하는 침례는 인생의 방향전환을 의미하는 깊은 감동을 수반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비록 예수의 이름으로 침례라는 의식을 행했지만 실질적으로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는 믿음이 없다면 그것은 인생의 방향전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침례를 받더라도 단순한 형식에 그치고 만 것이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참된 믿음을 가지게 되며 동시에 불멸의 희망을 품게 되고, 나아가서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발전시키게 된다. 누가의 묘사들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한 신화적 요소들이 작용한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예를 들면 성령이 혀 모양의 불길로 임했다든지, 성령을 받으니 즉시로 방언을 하게 되었다든지의 어떤 기적이 일어난 듯은 묘사가 그러한 것들이다. 성령에 대한 오늘날 우리의 진정한 이해를 위해서는 그러한 요소들을 배제시켜야 하는 것이다. 참고 문헌: 「생명과 말씀 제32권」 (2022. 4): p162-19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