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소왈명 마태복음 19장 13-15절
오늘은 임원임명예배로 드립니다. 제가 목회자여서 임원들에게 뭔가를 가르치는 입장이 아니라 우리가 한 해 동안 공동체를 함께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서로 일도 하고 돌보기도 하고 교재도 하고 살아갈텐데 어떤 마음으로 하면 좋을까의 생각들을 말씀을 통해 함께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교회뿐만 아니라 크고 작은 모임들에게 다양한 리더로써 살아갑니다. 집에서는 이미 아이들의 부모이기도 하고 직장에서는 이미 젊은 사람들이 치고 올라와 본의 아니게 어른이 되어 있기도 하구요. 다양한 모임에서도 한 말씀 해주시죠 하는 자리에 서게 되기도 합니다. 여선교회 회장도 그렇고 남선교회 회장도 그렇고 다 돌아가면서 하는 거라 이제는 나이에 상관없이 조직 전체를 이끌어가기고 하고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 예수님의 모습안에서 일하고 사람을 대하고 일을 풀어가는 지혜를 생각해 봅니다.
오늘 본문의 바로 앞부분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혹은 종교지도자들과 이런 저런 종교적인 문제에 대해 논쟁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일종에 예수님 나름대로는 목회를 하고 있는 겁니다. 특히 바로 앞부분에 나오는 것과 같은 논쟁은 몰라서 질문하는 거라기보다는 아예 시비를 걸기 위해서 하는 논쟁들입니다. 그런 것으로 봐서는 나름대로는 긴장감이나 집중력이 느껴지는 상황이기도 합니다. 저도 이쪽 지역으로 와서는 그렇지 않은데 행신에 있을 때는 종종 여호와증인이나 신천지에서 저희 교회를 방문할 때가 있었습니다. 이분들은 궁금해서라기보다는 자신들의 종교적 이해가 더 옳기 때문에 저를 설득하기 위해서 옵니다. 목적이 있기 때문에 이런 경우는 대화가 어렵습니다. 배우기 위한 대화가 아니라 서로를 설득하기 위한 대화이기 때문에 때로는 긴장감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에서도 보면 이혼문제와 관련해서 매우 긴장감이 있는 대화를 하고 계셨습니다.
그러고 있는 상황에서 사람들이 아이들과 함께 예수님께 몰려온 겁니다. 사실 지금도 뛰어난 일타 강사가 있으면 아이들 그 학원 보내서 성적 올리고 싶어하는 게 부모의 마음이지요. 그런 것 뿐만 아니라 좋은 인생의 스승이 있으면 한지 혜라도 더 얻고 그 고상한 품위나 인격을 만나게 해서 아이가 어린 시절부터 좋은 영향을 받게 하고 싶은 게 부모의 마음입니다. 당시도 그랬겠지요. 그런데 본문의 제자들의 반응을 보면 꾸짖었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여기서 '꾸짖다'는 뜻의 원어 '에피티마오'는 '책망하다', '경고하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야 이것 잘못된 일이야 하면서 그 부모들과 아이들을 나무라고 책망하고 있는 겁니다.
물론 제자들의 마음도 이해는 합니다. 일하는데 방해하지 마라. 사역에 방해가 되니 애들은 가라. 예배에 방해가 되니까 가라는 건데. 이를 테면 한참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예배 장소가 아이들 놀이터가 되어 버리면 어떻습니까? 여기에서는 민재가 비행기를 가지고 놀고 저쪽에서는 승현이가 로봇을 가지고 우리의 젠가가 나가신다 이얍하면서 붕붕 날라다니고 저쪽에서 예지와 민채와 민지가 목사님 저랑 인형놀이해요 해서 아예 예배를 드릴 수 없게 될 수도 있잖아요. 어떤 분들은 그거도 예배라 생각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 입장에서는 이게 뭐지 하시는 분들도 계실 거 아니예요. 뭐든지 때와 장소가 있는 건데 영화관에 가서 밥을 먹지는 않고 식당에 가서 영화를 보지는 않는 거잖아요. 제자들이 아이들을 사랑하지 않았던 게 아닐 수 있어요. 제자들도 아이들을 아끼고 사랑했지만 때와 장소를 구분하자는 의미에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꾸짖고 나무라고 책망하는 건 아니지요.
때와 장소를 구분하기 위해 아이들과 부모들을 잘 설명하고 설득해서 지금의 일을 잘 마무리하고 다음 일로 이어질 수 있게 도와줄 수도 있었잖아요. 아이들이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예배당에 들어오면 조용히 잘 설명해서 아이들의 욕구도 채우고 어른들의 욕구를 채워갈 수 있는 방식으로 지혜롭게 풀어갈 수도 있는 거잖아요. 일방적으로 아이들에게 핀잔을 주는게 아니라... 어쩌면 예수님도 그냥 제자들이 지혜롭게 잘 했으면 끼어들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일부러 아이들을 껴안고는 하나님 나라가 이런 어린아이들의 것이다고 하면서 예수님 스스로도 좀 과하게 반응하시는 모습이 보입니다. 대놓고 무시하니까 발끈하신 거죠. 사람 함부로 무시하지 말라고 일보다 더 중요한게 사람이라고 다 사람살리자고 하는 건데 이렇게 사람 내쳐가면서 하는 일이 훌륭하면 얼마나 훌륭하겠냐고. 그러면서 일부로 아이들을 끌어안고 손을 얹어 기도하고 쓰다듬어주시고 환대하셨습니다.
저도 지금은 안그럴려고 노력하며 살지만 옛날에는요 철없던 시절들이 있었습니다. 주일 전에 설교를 준비하려고 책상에 앉으면 사실 신경이 매우 예민해져 있습니다. 그것도 잘 풀리고 그러면 상관없는데 썼다 지우고 썼다 지우고 내가 하려고 하는 말이 정확히 뭔말인지도 모르면서 계속 헤매다 보면 그런 내 자신이 무척이나 한심해 보이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럴 때 아내가 와서 쓰레기 버려달라고 그러고 애가 와서 뭐 좀 해달라고 하면 신경질이 확 납니다. 그래서 한때 주말에 유행하는 말이~~~ 설교 준비할 때 아빠 건드리지 마였어요.
그런데 신기한게요. 저의 아내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어요. 미국에서 공부할 때보면 한 학기에 원서 50권씩 책을 읽고 그것을 요약해서 각 학자들이 말하는 방법론에 대해 발표하고 논쟁하고 그렇게 해서 배운 걸 가지고 2000년 통사를 가르칠 수 있게 준비하고 아내 등만 쳐다보고 살았거든요. 얽히고 섥혀있는 엉킨 실타래를 집중해서 막 풀고 있는데 옆에서 누가 방해하면 집중력도 흩어지고 화나잖아요? 그런데 아이가 뭐 알아요? 시도 때도 없이 엄마에게 가지요. 근데 단 한 번도 아내는 엄마 바빠 저리가 그런 적이 단 한 번도 없어요. 어떤 상황에서도 하던 일을 딱 멈춥니다. 그리고는 아이의 이야기를 다 들어요. 그리고는 해결을 해줍니다. 물론 대부분은 해결은 저에게 부탁하거나 맡기지요. 어찌했든 저는 단순해서 한참 실타래를 풀고 있을 때 말을 시키면 들리지도 않고 못들은 척도 하고 그러거든요. 그런데 절대 안그래요. 제가 그런 세월을 살아오면서 아 사람을 놓치지 않는게 저런 거구나하는 것을 배웠어요.
지난 주에 한국기독교연구소 이사회를 했는데 새길교회에 담임을 하시는 홍인식 목사님이란 분이 저희 연구소 소장님이세요. 그분이 남미해방신학을 전공하셨음에도 순천에 있는 작지 않은 교회에 초빙되셔서 목회를 하셨어요. 결국은 동성애 문제로 인하여 목회를 내려놓게 되셨는데 서울에 올라오시니 평신도 교회인 새길교회에 초빙되신 거예요. 그래서 새길교회 담임을 하시는데 새길교회가 세들어 살면서 메뚜기처럼 이곳저곳을 전전긍긍하다가 건물을 샀거든요. 그래서 좋은 일을 많이 합니다. 서대문 사거리에 건물 공간을 매입해서는 각종 기독교 사회운동을 하시는 단체에 건물을 빌려줍니다. 그런데 건물을 빌려 쓰는 단체들이 다양할 거 아닙니까 재정이 든든한데도 있겠지만 행사조차 하기도 힘든 단체들도 많이 있거든요. 그래서 그런 단체들에는 무료로 자기네 교회 이름만 넣어서 함께 주최하는 걸로 해주고 무료로 쓰게 해준다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 소문이 나서 이런 저런 곳에서 요청이 많이 들어온데요. 그런데 그 목사님이 다 무료로 해도 단 하나만은 무료로 하지 않는데요. 그게 뭐냐면 그 시간에 그공 간을 열어주고 닫아주고 모든 시스템 쓸 수 있게 해주고 마지막 청소까지 하시는 관리인에 대한 약간의 사례는 무료로 하지 않는데요. 제가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야 이분도 참 섬세한 배려가 있는 분이시구나 싶었습니다.
큰 교회도 그렇고 여러 사회단체도 그렇고 좋은 일 의미있는 일을 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그런 일을 하면서도 가장 밑바닥에서 그 모든 일을 받치고 있는 노동자들이 있는데 이분들에게까지 헌신을 강요할 때가 많거든요. 교회차원에서 좋은 일 하니까 당신들도 기쁜 마음으로 하라고... 목회자나 교회를 이끌어가는 사람들은 무료로 어려운 단체를 위해서 좋은 일을 하니까 그 자체로 폼나지만 그안에서 가장 어렵게 그 모든 뒤처리를 해주는 사람들이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을 수 있거든요. 그런데 자신들이 좋은 일을 하면서도 행여라도 그 좋은 일 때문에 또다른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일 수 있는 사람까지 놓치지 않고 살피면서 살아가시더라구요.
오늘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 목회사역으로 바쁘고 때로는 긴장되고 일에 지쳐있을 법한 상황속에서도 일에 갇히지 않고 사람을 놓치지 않습니다. 이청득심 잘 살피고 들음으로써 마음을 얻는 것처럼 자기 사고 자기 생각에만 갇히지 않고 자신 앞에 있는 사람들의 욕구와 바램을 잘 마음으로 관찰하고 귀담아 듣습니다. 일 때문에 사람을 놓치지 않고 오히려 사람을 챙기고 세워가면서 그 동력으로 사역을 만들어가십니다. 이게 예수님 사역의 힘이 아닐까 싶습니다.
인디언들 사이에서는 추장의 자격으로 크게 세가지를 요구한다고 합니다. 부족의 평화를 지켜내고 할수 있는 한 많이 증여, 나누고 베풀어서 어려운 이들을 살피고 그래서 공동체안에서 가장 많이 나누어주어서 가장 가난한 사람이 되고 공동체원을 잘 이끌어갈 수 있는 말솜씨를 요구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인문학자 고미숙씨는 평화를 지켜가는 마음, 증여와 나눔을 통해 모두를 살려가는 이런 삶, 그리고 적재적소에 정말 필요한 현명한 지혜의 말들 이 모든 스팩은 기술과 테크닉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사람 하나하나를 놓치고 싶어하지 않는 우주적 책임감안에서 비롯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올해의 사자성어로 견소왈명을 모든 임원들에게 드립니다. 도덕경 52장에서 노자는 견소왈명 수유왈강이라고 합니다. 작은 것을 볼 줄 아는 것이 밝음이고 부드러운 것을 지키는 것이 진정한 강함이라는 것입니다. 오늘이 1029참사 100일이 되는 날입니다. 사고는 언제나 날 수 있지만 사실 정부가 계속해서 참사를 키우고 있습니다. 사람이 150여분이 돌아가셨으면 이건 어머어마한 참사입니다. 참사속에서 희생된 유가족 뿐아니라 전국민들의 마음을 섬세하게 위로하고 재발을 방지하는 믿음을 줄 수 있는 정책들이 필요합니다. 큰 거 바라는게 아니거든요. 사고가 났으니 책임자는 당연히 책임을 지고 돌아가신 사람들 무슨 죄진 사람처럼 이름도 못부르게 하는 그런 짓거리들 하지 말고 충분히 애도하고 추모하고 다시는 이런 일들 일어나지 못하도록 믿음을 줄 수 있게 하자는 거잖아요.
예수님 뭐 대단한 일한다고 사람 내쳐가면서 일하지 말자고 합니다. 오히려 사소해보이지만 얼굴한번 따뜻하게 봐주고 마음 챙기고 서로 위로하며 생명을 놓치지 않는 나라가 곧 하나님 나라라 말씀해주십니다. 귀한 직분 잘 받들어 공동체 안과 밖으로 하나님 나라 세워가는 귀한 한해가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