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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월 31일 금요일[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
제1독서 : 히브 10,32-39
복 음 : 마르 4,26-34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26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27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28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줄기가,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다음에는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
29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곧 낫을 댄다. 수확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30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31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32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
33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이처럼 많은 비유로 말씀을 하셨다.
34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당신의 제자들에게는 따로 모든 것을 풀이해 주셨다.
<오늘의 묵상>
김동희 모세 신부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저절로 자라나는 씨의 비유와 겨자씨의 비유,
이 두 비유의 핵심은 ‘자라나는 것’ 곧 성장에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너와 나, 우리가 하느님 안에서 성장해 가는데 그 핵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성장에는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바로 그것이지요.
씨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자신이 죽어서 자신 안에 있는 참 생명을 틔우지 못하면,
그렇게 먼저 자신이 싹을 틔우고 그 씨를 성장시키는 양분이 되지 못하면
그 씨는 돌덩이와 다름 없습니다.
흙 곧 땅은 씨앗을 감싸고 그 씨앗이 스스로 열도록 수분과 온기를 건네며 기다립니다.
씨앗은 여기에 화답하여 자신을 열고, 내주며, 스스로 죽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장하기 위하여 자신을 죽인다는 것은,
나 자신 그대로 있고자 하는 안온함과 익숙함을 버리는 것입니다.
나 스스로 성장하려는 터무니없는 욕심을 버리는 것입니다.
나를 참으로 감싸고 있는 땅과 나의 내밀한 이야기가 필요합니다.
내가 열리기 시작하면 나와 우리의 성장은
예측하지 못할 정도로 빠르고 거대하게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마르 4,32)
이 말씀 그대로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요한 보스코 성인은 자기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넓은 그늘을 드리우고 격려의 손길을 건넨 분입니다.
많은 젊은이를 품고 돌보았는데,
모두 저마다 각별한 사랑을 체험하였다고 합니다.
풍성한 열매를 맺은 참으로 놀라운 사랑입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성당 꼬마들이 제게 다가와서는
“신부님, 로제 알아요? 에스파는 알아요? BTS는 아시죠?
세븐틴 멤버 이름 알아요?” 등의 질문을 하곤 합니다.
이 질문에 저는 “당연히 모르지.”라고 답합니다.
진짜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모르는 저를 이해하기 힘들다면서 이런 말도 하더군요.
“장원영 모르는 사람, 처음 봤어요.”
제 나이 또래에게 물어보면 앞서 꼬마들의 질문에 다 안다고 말할까요?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꼬마들이 연예인들을 잘 아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관심이 있고, 그래서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관심 없으면 좋아할 수도 또 재미도 없습니다.
연애하는 이유도 상대방에게 관심을 갖고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알아가는 재미를 갖습니다.
학창 시절에 공부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책을 읽어야 한다는 말을 들어도 독서는 재미없었고, 나와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책상 앞에 앉아 있음이 행복하고, 책 읽는 것이 재미있습니다.
당연히 공부도 재미있습니다. 왜냐하면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에 대해서도 관심이 있으면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가 재미있고 여기서 기쁨을 갖게 됩니다.
하느님을 조금씩 알아가면서 설레기도 합니다.
스스로 하느님과 맞지 않는다고 단정 지어서는 안 됩니다.
내 쪽에서 관심을 두려고 하지 않았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없는 관심이 영원히 없을까요? 아닙니다.
자기에게 꼭 필요한 분임을 깨닫는 순간, 관심이 생기고 그 관계에 기쁨을 갖게 됩니다.
성인이 된 자녀들이 냉담 한다고 걱정하는 부모님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 걱정도 주님께 맡기십시오.
부모님보다 더 열심한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의 힘을 우리는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불가능한 일도 가능한 일로, 또 당연한 일도
당연하지 않은 일로 만드실 수 있는 분이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대해 말씀해 주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자고 일어난 사이에 싹을 틔우고 자라는 것처럼 커진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어떻게 그리되는지 잘 모른다고 하시지요.
맞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하느님만이 아실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면서 고통과 시련을 참고 견뎌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앞서 말씀드렸던 하느님을 알려는 관심입니다.
그 관심 안에서 하느님 나라의 기쁨을 알게 됩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지만,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를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가시적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나라’는 결코 외부에서부터 이루어지는 변화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을 듣고 받아들여 안으로부터 오는 나라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하느님 나라가 우리 안에서 어떻게 건설되는 걸까요?
오늘 복음은 이에 대한 해답을 가르쳐줍니다.
그것이 바로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와 ‘겨자씨의 비유’입니다.
곧 ‘하느님 나라’는 씨앗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마르 4,27)
그렇습니다.
분명 씨앗은 자신 안에 싹을 틔우고 잎으로 자라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먼저 우리 안에 뿌려진 ‘씨앗’(말씀)의 권능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레고리우스 교종은 말합니다.
“성경(말씀, 하늘나라)은 읽는 이(응답하는 이) 안에서 자란다(성장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놀랍고 신비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씨가 우리 안에 뿌려지면,
그것이 어떻게 우리를 변화시키고 또 어떻게 성장시키는지를 우리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매 순간 하느님의 힘이 작용하여
‘하느님 나라’가 자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햇살을 받은 나뭇잎이 광합성을 못 알아들으면서도
그것을 채워가고 푸르러가듯이 말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하느님 나라’ 안에서 나날이 그 신비를 마시며 살아가는 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마르 4,31)
‘겨자씨’는 비록 작은 씨앗이지만, 자라나서 큰 나무가 됩니다.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이게 됩니다.
마치 십자나무처럼, 모든 인류를 끌어안은 큰 나무가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십자나무에 인간이 거처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셨듯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비록 작은 ‘겨자씨’지만,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
썩기만 하면, 바로 이곳에서 모든 사람들이 와서 깃들일 수 있는 큰 나무로 자랄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자고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싹이 트고 자라나는 이 놀라운 신비에 순응하게 하소서.
저의 힘이 아니라 당신의 권능으로 싹을 틔우고 자라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마르 4,31)
주님!
당신은 겨자씨처럼 작은 자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사랑하는 이 위에 군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낮추어 종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것이 사랑하는 방법이고 사랑의 길인 까닭입니다.
오늘 제가 형제들 앞에서 작아지게 하소서!
십자나무에 인류의 거처를 마련하듯, 제가 형제들의 거처가 되게 하소서! 아멘.
지금 여기서 하느님 나라를 살아야 한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한 유치원 원장님이 아이들에게 꽃씨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제일 예쁜 꽃을 피워온 아이에게는 멋진 선물을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아이들은 서로 ‘내가 제일 예쁜 꽃을 피워야지!’ 하며 신이 났습니다.
그리고 몇 달 후 아이들은 꽃이 활짝 핀 화분을 들고 왔습니다.
그러나 원장님의 표정은 이상하게도 밝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중 한 아이가 빈 화분을 들고 울먹이며 말했습니다.
“저는 게을러서 꽃을 못 피웠어요!”
원장님은 그제야 환하게 웃으시며 그 아이에게 멋진 선물을 주었습니다.
나누어준 씨앗은 싹이 나지 않는 가짜였던 것입니다.
정말 싹을 틔워야 할 것은 우리의 진실한 마음입니다.
사실, 씨앗이 생명력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면 아무리 기다려도 싹은 트지 않습니다.
또한 씨앗 자체의 신비로운 힘을 믿지 않는다면
씨앗에서 싹이 트고 새싹이 돋아나도록 땅을 가꿀 이유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를 희망하면서도
지금 여기서 하느님 나라의 삶을 살지 않는다면 그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희망하는 만큼 오늘을 최선으로 살아야 합니다.
씨앗이 땅에 묻혀 모든 것이 끝나고 정지된 것처럼 보일 때
땅속에 있는 씨앗은 은밀하게 싹을 틔우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내가 행하는 모든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면
지금 당장 밝히 드러나지 않는다 해도 그것은 싹을 틔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회가 좋든 나쁘든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지금 여기서 하느님 나라를 가꾸어야 합니다.
사랑은 사랑을 낳고, 사랑이 있으면 천국이고 사랑이 없으면 지옥입니다.
나의 수고와 땀, 희생 봉헌이 미약해 보일지라도
결코, 작지 않음을 기뻐해야 합니다.
겨자씨가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씨의 크기는 0.95-1.6밀리미터=보니까 아주 먼지 같아요!)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되듯이(마르 4,32)
우리의 정성도 선한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저절로 자라나는 씨앗의 비유’와 ‘겨자씨의 비유’는
‘하느님 나라의 시작은 비록 작고 보잘것없는 것처럼 보여도
그 끝은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가르침을 줍니다.
실제로 예수님과 그 제자들의 무리는 작고 초라하게 시작되었지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을 포함하는 교회공동체로 성장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흔들림 없는 믿음으로 선을 행하고 진리 안에 자유로워야 하겠습니다.
겨자씨 한 알이 눈에 잘 띄지 않지만, 무한한 가능성이 들어있듯이
우리의 사랑과 희생도 무한한 가능성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실 참으로 “사람은 하늘이 주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받을 수 없습니다”(요한3,27).
“누가 먼저 무엇을 드렸기에 주님의 답례를 바라겠습니까?
모든 것은 그분에게서 나오고 그분으로 말미암고 그분을 위하여 있습니다”(로마11,35-36).
불신이 가득한 이 세상에 빈 화분을 들고 눈물을 지을 수 있는
진실함으로 하늘나라를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이 있으면, 진실함이 있으면 바로 그 자리가 하느님의 나라요,
불신과 거짓으로 서로를 경계하면 그곳이 지옥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았으면 합니다.
우리 마음 안에 하느님의 나라가 쑥쑥 자라길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달라스는 ‘눈’이 내리면 학교도, 성당도 문을 닫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지난 1월 9일에 달라스 지역에 눈이 내렸습니다.
전날 이미 학교는 문을 닫는다고 공지했습니다.
저는 처음 경험하는 일이라서 상황을 지켜보았습니다.
오전부터 내리던 눈은 오후에도 계속 내렸고,
교우들의 안전을 고려해서 성당 미사도 중단했습니다.
달라스가 눈 때문에 성당 문을 닫아야 했다면
캘리포니아 지역에는 엄청난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많은 재산 피해가 있었고, 소중한 인명이 다치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제가 있던 뉴욕에서는 눈이 온다고 학교 문을 닫거나,
성당의 미사가 중단되는 예는 없었습니다.
눈에 대한 대비책이 잘 되어 있고, 눈이 내려도 제설차가 눈을 치우기 때문입니다.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라야 한다고,
달라스에 왔으니, 달라스의 상황을 따르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미사가 중단되었고, 약속도 취소되었습니다.
그렇게 이틀 동안 평소에 시간이 없어서 읽지 못했던 책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트렌드 코리아 2025’을 읽었습니다.
책 내용 중에 ‘옴니보어(Omnivore)’라는 말이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옴니보어라는 말은 형식, 세대, 성별, 나이로 구분되던
삶의 유형이 통합된다는 의미입니다.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사람의 평균 수명이 늘어났기 때문입니다.
인터넷과 AI의 결합으로 세상의 모든 사람이 실시간으로 소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유년기,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라는 삶의 과정을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그런 삶의 과정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100세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청년기에라도 ‘스타트업’으로 큰 사업을 할 수 있습니다.
노년기에도 ‘인턴’으로 스타트업에 입사해서 자기의 경험을 나눌 수 있습니다.
맞벌이로 바쁜 부모를 대신해 조부모가 손자와 여행을 가기도 합니다.
조부모의 건강과 능력이 뒷받침되기 때문입니다.
스포츠 관람도 예전에는 남성이 많았지만, 요즘은 여성 관객이 더 많습니다.
남성이 여성이 하던 일을 즐겨하기도 하고, 여성이 남성이 하던 일을 즐겨하기도 합니다.
‘옴니보어’의 시대에 시간은 직선으로 흐르지 않고, 순환하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 쉼표를 찍어 놓은 곳을 우리가 마음대로 마침표를 찍을 필요가 없습니다.
‘옴니보어’의 원조는 누구일까요?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Omnibus Omnia)’이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한때 자신이 지니고 있었던
육체적인 힘과 재능과 엄청난 에너지를 자랑하고 다녔습니다.
정통 유다인이자 동시에 로마 시민권자, 전도유망한 율법 교사로서 자부심도 대단했습니다.
바오로 사도 안에는 세상 것들에 대한 욕심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의 극적인 만남을 통해 바오로 사도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회심 이후 바오로 사도가 한 첫 번째 일은
자신 안에 가득 차 있었던 세상의 것들을 말끔히 비워내는 일이었습니다.
비워낸 그 자리에 전혀 새로운 가치관인 예수 그리스도로 가득 채우는 일이었습니다.
그 결과 바오로 사도는 ‘모든 이에게 모든 것’(Omnibus Omnia)이 될 수 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런 마음으로 ‘이방인을 위한 사도’가 될 수 있었습니다.
‘옴니보어’의 원조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는 선한 사람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하나를 더 기뻐하신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착한 목자는 우리에 있는 아흔아홉 마리의 양보다 잃어버린 양을 찾아 밤을 새운다.
잃어버린 양을 찾은 착한 목자는 더 기뻐한다.”
사제는 성찬의 전례에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해 내어줄 내 몸이다.”
교회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해야 합니다.
교회는 모든 이의 모든 것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초대교회는 바로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
씨앗은 싹이 트고 자라나지만, 사람은 모른다.
조욱현 토마 신부
우리가 우리 마음에 좋은 뜻을 품는다면, 그것은 땅에 씨를 뿌리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 씨가 어떻게 싹이 터서 자라는지 자신은 알지 못한다.
자기 안에 심어져 자라나고 있는 덕이 얼마나 성장했는지 아직 헤아릴 수 없다.
땅이 은총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열매를 맺듯이, 인간도 그렇게 스스로 선행의 열매를 맺는다.
그 열매들이 영글면 곧 낫을 댄다. 추수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31절)
하느님 말씀의 씨앗에서는 커다란 나무와 같이 자라며,
이 나무는 바로 세상 곳곳에 세워진 교회이다.
이 교회에 하늘이 새들, 곧 하느님의 천사들과 사람들이 그 가지에 깃든다.
주님은 겨자씨였다. 그러나 백성들은 그분을 겨자씨로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분은 당신이 누구신지를 보여주시려고 잘게 부서지기를 원하셨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나라이다.
겨자씨처럼 동정녀의 태라는 정원에 뿌려지신 그분은 십자가 나무로 자라셨고,
그 가지들은 온 세상으로 뻗어나갔다.
수난의 절구에 빻아진 그분의 열매는 그분과 관계를 맺는 살아있는
모든 피조물이 맛을 지니고 보존될 수 있도록 넉넉한 양념이 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당신이 빻아짐으로써
당신 안에서 우리 모두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모든 것이 되셨다.
그분은 당신 정원, 교회에 씨를 뿌리셨다.
교회는 온 세상으로 퍼져가는 정원이다.
복음의 쟁기로 갈고, 가르침과 규율의 말뚝으로 울타리를 치고,
사도들의 노고로 온갖 해로운 잡초를 제거한 정원이다.
이 정원에 향기롭고 사랑스러운 영원한 꽃들인 동정녀들의 백합과 순교자들의 장미꽃이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모든 이의 푸른 풀밭과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이의 부드러운 초목 가운데 자리 잡은 아름다운 정원이다.
이들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당신 정원에 뿌리신 겨자씨이다.
그분은 성조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씨를 뿌리셨고,
예언자들은 싹을 틔웠고, 사도들은 크게 자라게 하였다.
그 씨앗은 교회 안에서는 큰 나무가 되어, 선물 즉 은총을 실은 수많은 가지를 뻗었다.
우리에게 있는 씨는?
큰맘 먹으면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놓으면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한다.”
비유의 이 말씀을 들으며 저는 이런 생각이 대번에 들었습니다.
나는 씨만 뿌리면 되는구나!
왜냐면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놓으면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르는 채 저절로 열매를 맺게 된다고 하니 말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쉽습니까?
씨만 뿌리면 되니 이 얼마나 쉽습니까?
그런데 이 쉬운 것조차 왜 하지 않을까요?
이런 생각은 어제 묵상의 연속입니다.
어제 저는 이런 요지로 묵상하였지요.
“하려는 사람에게 은총도 주어집니다.
아무것도 할 생각이 없는 사람에겐 은총도 필요 없고,
그래서 은총을 바라지도 청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은
아무리 은총이 주어져도 그리고 아무리 쉬운 것이어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비유의 경우엔 좀 더 들여다봐야 할 것이 있을 것입니다.
그 씨가 우리 입에 들어갈 열매의 씨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씨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을 사는 우리가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라는 씨를 뿌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의 씨를 제가 뿌리고 싶고
여러분이 뿌리고 싶은가 그것이 관건인 셈입니다.
이런 묵상을 하면서 적절하지 않을지 모르는데 한 예가 생각났습니다.
동물의 왕국을 보면 수컷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자기 씨를 뿌리려고 그렇게 애쓰는 것입니다.
자기 씨를 뿌리기 위해 경쟁자와 싸우다 목숨을 잃기까지 합니다.
우리도 그런 면이 있지 않을까요?
하느님 나라보다 내 나라를 건설하려고 하고,
하느님 나라의 씨보다 내 씨를 뿌리려 하지 않을까요?
그러면 하느님 나라 씨 뿌리기는 당연히 관심 없거나
아무리 쉬울지라도 도무지 하고 싶지 않고,
그러니 발심 자체가 쉽지 않습니다.
발심(發心)이란 불교적인 표현인데,
마음을 일으킴 곧 불도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을 일으킴을 뜻하지요.
우리 경우 이 세상이라는 밭에 하느님 나라의 씨를 뿌리기만 하면
하느님께서 다 싹이 나게 하고 키우고 자라고 열매 맺게 하셔도
그 마음을 일으키는 발심 자체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불교에서 대발심(大發心)이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도 큰맘 먹으면 됩니다.
이 세상에서 소시민으로 편히 살려는 작은 마음을 먹으면 안 되고,
이 세상에서부터 저세상 곧 하느님 나라를 마음에 품고,
작게는 나의 행복과 구원을 위해 크게는 세상 구원을 위해 살기로
마음을 먹기만 하면 작은 마음을 먹고 사는 것보다 차라리 쉽습니다.
한겨울 따듯한 아랫목을 파고드는 마음을 떨쳐내는 것이 힘들지
분연히 문을 열고 한번 뛰쳐나가면 그다음부터는 세상이 열리며
작은 마음이 큰마음이 되기에 오히려 쉬우며 은총도 내립니다.
항상 그렇습니다.
큰맘 먹는 사람에게 세상이 열리고,
용기 내는 사람에게 은총이 내립니다.
참사랑은 지칠 수 없는 이유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첫 번째는 하느님 나라는 땅의 씨가 누구도 모르게 자라듯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는 내용이고,
두 번째는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아서 어떤 것보다 작지만,
땅에 뿌려지면 큰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들이 깃들일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관한 같은 내용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행복입니다.
행복은 그 씨앗이 뿌려져 저절로 자라게 되고 그 열매를 맺게 되면
많은 이들에게 쉼과 도움이 되는 존재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씨앗은 사랑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이들에게 사랑은 마치 씨앗처럼 떨어지고 그것이 나중에 열매를 맺게 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다가 지치는 이유는 사랑이 씨를 뿌리는 행위이지,
그것을 자라게 하는 것은 하늘이 하는 일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교사 K씨는 학급의 문제아 A군을 변화시키려 열정을 쏟았습니다.
그러나 A군이 1년 동안 변하지 않자 ‘내 능력 부족’이라 생각하며 포기했습니다.
훗날 A군은 K씨에게 “선생님이 매일 말 걸어준 게 제게 희망이었습니다.”라고 고백했지만,
K씨는 이미 교직을 떠난 후였습니다.
교사 K씨는 자신이 씨도 뿌리고 열매도 맺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열매만 바라고 있으니, 씨를 뿌리는 것에서부터
가치가 있었던 일이었음을 깨닫지 못하고 지쳐버렸던 것입니다.
이런 일은 부부 사이에서도, 친구 사이에서도, 모든 관계에서 일어납니다.
제임스 그레고리와 넬슨 만델라의 이야기입니다.
그레고리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교도관으로, 아파르트헤이트 정책 아래에서
흑인들을 열등하게 보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넬슨 만델라를 감시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고,
처음에는 그를 단순한 ‘범죄자’로 여겼습니다.
“넌 그냥 테러리스트일 뿐이야!”라고 말하며 냉담하게 대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레고리는
만델라의 인간적인 면모를 발견하기 시작했습니다.
만델라는 그레고리에게 존중과 친절로 대하며,
그의 아들에게 줄루어를 가르쳐 주기도 했습니다.
그레고리는 점차 만델라의 리더십과 인간성에 감화받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만델라가 수감 생활 중에도 희망과 용기를 잃지 않고,
동료 수감자들과 교도관들에게까지
존중과 사랑을 베푸는 모습을 보며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용서는 분노와 증오의 쇠사슬을 끊는 것이다,”라는 만델라의 말은
그레고리에게 사랑이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시간과 인내를 요구하는 실천임을 깨닫게 했습니다.
그레고리는 만델라와의 교류를 통해 자신의 편견을 완전히 버렸고,
두 사람은 평생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나는 만델라를 통해 진정한 인간성을 배웠다.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희생과 인내를 요구하는 실천임을 깨달았다.”라고 그레고리는 고백했습니다.
넬슨 만들라는 지치지 않았습니다. 그저 씨를 뿌릴 뿐이었습니다.
넬슨 만델라는 27년의 수감 생활을 마치고
남아공 대통령이 되었을 때 취임식 날 그레고리를 초대하였습니다.
그가 이런 열매를 기대하고 사랑하고 용서했다면 분명 지쳤을 것입니다.
27년을 버티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사랑은 그저 씨앗을 뿌리고 나머지는 주님 뜻에 맡기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지치지 않았고 그래서 때가 되었을 때 많은 소출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 예로, 마더 데레사와 빈민굴 청년의 이야기를 들 수 있습니다.
마더 데레사는 인도 콜카타의 빈민굴을 방문하며 가장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들을 돌보았습니다.
어느 날, 그녀는 한 청년을 만났습니다.
청년은 술에 찌들어 방탕한 삶을 살고 있었고, 방 안은 어둠에 싸여 있었습니다.
마더 데레사가 그의 방에 들어가 등잔불을 켜려 하자, 청년은 화를 내며 등불을 껐습니다.
그러나 마더 데레사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청년의 방에 등잔불을 켜 놓고 떠났습니다.
마더 데레사가 다시 방문했을 때 청년은 등잔을 창문 밖으로 던져 깨버렸습니다.
하지만 마더 데레사는 다시 새로운 등잔을 사서 방에 가져가 불을 켜 놓고 떠났습니다.
10년이 지난 어느 날, 마더 데레사 사랑의 선교 수녀회의 한 젊은 수녀가 그 빈민굴을 방문했습니다.
그곳에서 수녀는 그 청년을 다시 만났습니다.
청년은 이제 깨끗한 옷을 입고 직장도 다니며 정상적인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청년은 수녀에게 말했습니다.
“그 키 작은 그 수녀에게 전해주시오.
그때 그분이 내 방에 켜 놓은 빛이 아직도 내 마음 안에서 빛나고 있다고.”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시간과 인내를 요구하는 실천입니다.
우리가 상대방이 즉각적으로 변하지 않아도 꾸준히 사랑을 베풀 때,
그 사랑은 절대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라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은 나의 일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은 씨를 뿌리는 것과 같습니다.
열매가 늦게 맺어질지라도, 우리는 실망하지 말고 끝까지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만델라와 마더 데레사처럼,
우리도 상대방이 즉각적으로 변하지 않아도 꾸준히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그러면 사랑은 식을 수 없습니다. 농부는 주인이 주는 씨를 뿌리면 그만입니다.
뿌리지 않으면 의무를 다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인은 계속 씨를 주십니다.
그러니 주님이 지치지 않는 이상 그 씨를 뿌리는 이도 지칠 수 없는 것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