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년 2월 1일 연중 제3주간 토요일
제1독서 : 히브 11,1-2.8-19
복 음 : 마르 4,35-41
35 그날 저녁이 되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 하고 말씀하셨다.
36 그래서 그들이 군중을 남겨 둔 채, 배에 타고 계신 예수님을 그대로 모시고 갔는데,
다른 배들도 그분을 뒤따랐다.
37 그때에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다.
38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39 그러자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다.
40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41 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서로 말하였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오늘의 묵상>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오늘 독서와 믿음에 대하여 말합니다.
때때로 믿음은 우리에게 오감과 경험으로 인지하는 것을 넘어서게 합니다.
부르심을 받고 믿음으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떠난”(히브 11,8) 아브라함과,
아이를 가질 수 없고 나이까지 많음에도 믿음으로 아들을 낳은 사라가 전형적인 예입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호수 저쪽”(마르 4,35)으로 건너가자고 초대하십니다.
군중을 가르치시면서 하루를 보내신 뒤 피곤하시어
돌풍으로 요동치는 배 안에서까지 곤히 주무시면서도
왜 예수님께서는 그냥 머무르시던 자리에서 쉬시지 않고
늦은 시간에 굳이 ‘호수 저쪽’으로 가자고 하셨을까요?
그 이유가 무엇이든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것을 요구하셨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 ‘호수 저쪽’으로 부르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새로운 삶, 공동체의 쇄신, 새로운 임무를 향하여 익숙하고
안정된 현실을 떠나 돌풍이 몰아치는 밤에 위험을 감수하고 떠나라며 부르시는 경우입니다.
그때 요구되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주님 말씀에 대한 신뢰, 특히 그분께서 그 위험 속에서도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믿음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 하나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호수 저쪽으로 떠난 이유는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 “도성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히브 11,10)입니다.
믿음의 본질은 현실을 부정하거나 인간적인 것을 무시하는 데 있지 않고,
영원한 궁극적 가치를 향하는 데 있습니다.
구약의 성조들은 “더 나은 곳, 바로 하늘 본향을 갈망”(11,16)하였다고
히브리서의 저자가 밝혀 주는 대로입니다.
하느님께서 과연 그 믿음대로 “그들에게 도성을 마련해 주셨습니다.”(11,16)
조명연 마태오 신부
2019년, 호주 전역에 대형 산불이 났습니다.
산불이 나자마자 어떤 사람이 100만 호주달러(약 8억 5천만 원)를
구호 기금으로 내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이 발표로 사람들은 이 기부자에게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칭찬을 받았을까요?
아니었습니다. 그는 가차 없이 엄청난 뭇매를 맞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기부자의 이름 때문입니다.
그가 바로 아마존 CEO로 최고 부자인 제프 베조스이었거든요.
그가 기부한 돈은 그가 5분마다 버는 금액이라고 합니다.
일반 사람에게는 분명 적지 않은 돈이지만,
그가 버는 돈에 비할 때 너무나 성의 없는 기부였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 제프 베조스와 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이 정도면 충분하다면서 봉헌하는 모습,
자기 어려움이 더 크다면서 누릴 것 다 누리고 나서 봉헌하겠다는 모습,
세상을 도울 힘이 있음에도 상관없다는 듯 외면하는 모습 등등….
할 수 있음에도 하지 않는 것은 주님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모습이 아닙니다.
실제로 우리는 주님께 많은 것을 받고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과 은총이 우리 삶 안에서 계속 주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감사하기보다는 당연히 누려야 할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감사하지도 못하고, 주님의 계명인 사랑 실천에 늘 소극적인 것입니다.
혹시 사랑을 입으로만 외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과 제자들이 호수 건너편으로 배를 타고 건너고 계셨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지요.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된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자들의 행동은 무엇이었을까요?
예수님을 깨우면서 말합니다.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마르 4,38)
예수님께서 지금까지 보여주셨던 기적을 떠올렸다면
그래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렇게 불안에 떨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겁을 내고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 4,40)
이 상황에서 제자들의 노력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냥 예수님께 무엇이든 다 해 달라는 식입니다.
제자 중에는 어부 출신이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탓만 하는 제자들이었던 것입니다.
할 수 있음에도 하지 못하는 이유를 찾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믿음에 우리의 노력을 더 해서 주님의 일을 이 세상에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비유들을 통해서
하늘나라에 대해 가르치시고, 저녁이 되자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마르 4,35)
저녁이 되어 어둠이 닥쳐오는데도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할 때도 저녁이었습니다.
그리고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는 ‘새로운 출애굽’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어둠을 가르고 나아가는 이 여행에
거센 돌풍이 일고,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쳤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가지만,
동시에 온갖 환란과 위험과 함께 갑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십니다.
제자들의 위험에 수수방관으로 그냥 침묵하고 계십니다.
제자들이 죽게 되었는데도 말입니다.
대체 예수님의 이 침묵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
예수님의 이 침묵은 믿음이 흔들리는 순간이지만,
동시에 믿음이 요청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사실 풍랑 속에서 주무신다는 것은 아버지께 대한 ‘전적인 신뢰’를 나타냅니다.
<시편> 작가는 노래합니다.
“자리에 들자마자 단잠이 깊사오니 든든히 살게 하심 홀로 주님 덕이오이다.”(시편 4,9)
그러니 이는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신뢰하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전적으로 아버지께 신뢰를 두고 계시는 당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실 잠들어 있는 이는 예수님이 아니라, 바로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현존에 깨어있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이 바로 잠들어 있는 이들인 것입니다.
그러니 막상 깨어나야 할 이들은 제자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하느님께서 우리의 청에 응답해 주지 않으신다고 투덜대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가 우리가 잠들어 있을 때라는 사실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바로 그때가 현존하신 그분께 의탁하고 믿음으로 응답해야 할 때임을 말입니다.
시편 작가처럼, 주님께서
“뒤끓는 바다를 호령하시고 솟구치는 물결을 붙잡으시는 분”(시 88,9-10)이심을
믿고 의탁해야 할 때입니다.
그것은 언제 어디서나, 어떤 상황에서나,
주님께서 ‘함께 계시며 동행하심’에 대한 믿음과 의탁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불신을 깨우쳐주시고, 당신께서 하느님이심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곧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마르 4,39)하시며 광풍을 잠재웁니다.
우리의 온갖 두려움과 걱정과 불신을 잠재우시고, 믿음으로 깨우십니다.
‘새로운 출애굽’을 통해 어둠을 건너, 새로운 생명으로 이끄십니다.
사실 '예수님의 침묵'은 나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의미합니다.
마치 십자가에서의 '아버지의 침묵'이 예수님께 대한 믿음과 신뢰였듯이 말입니다.
바로 이 믿음이 예수님께서 그 거센 돌풍 속에서도 간직할 수 있었던 평화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 4,40) 하시며
제자들의 믿음을 일깨우십니다.
그러니 우리도 <시편> 작가처럼
‘함께 계시는 주님’께 믿음의 노래를 불러야 할 일입니다.
주님, “비록 죽음의 그늘진 골짜기를 간다해도,
당신 함께 계시오니 무서울 것 없나이다.”(시 22,4)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 4,40)
주님!
잠들어 있는 이는 당신이 아니라 저 자신입니다.
깨어나야 할 이는 당신이 아니라 저 자신입니다.
당신이 함께 계시건만 불신으로 제가 두려워합니다.
주님, 풍랑을 맞아 가라앉으면서야 비로소 제가 키잡이가 아님을 봅니다.
풍랑 속에서 잠들어 계셔도 바람과 호수를 복종시키시는 분, 당신이 저의 주님이십니다.
당신은 주무셔도 주님이시요, 깨어 계셔도 주님이십니다. 아멘.
믿음의 사람이 되어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배 안에 있었는데 마침 거센 바람이 일었습니다.
배 안으로 물이 들이쳐서 위험에 처해 있는데도 예수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마르4,38) 하고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의 믿음의 수준을 드러내 줍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웠지만, 사실은 깨어나야 할 사람은 제자들입니다.
거센 돌풍을 잠재우실 능력의 예수님과 함께하면서도
주님이 계시지 않은 것처럼 사는 이 연약한 믿음의 삶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배를 함께 탄 것은 운명을 같이하겠다는 동의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돌풍이라는 환난이 옴으로써 그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결국 처음에 가졌던 순수한 마음을 잃어버린 탓입니다.
제자들은 그 믿음을 회복해야 했습니다.
우리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돌풍이 이는 바람과 호수를 향해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4,40)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나와 함께 있는데 왜 무서워하느냐?
아직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신뢰하지 못하느냐?”는 질문입니다.
“세상의 풍파에 조급하게 허둥대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믿음을 가지고
하느님이신 당신께 온전히 의탁하시길 원하십니다.”
그러니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믿음을 간직하고 희망을 접지 마십시오.
폭풍 속에서도 주님은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는 능력으로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그러므로 “모든 걱정을 그분께 내맡기십시오.
그분께서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1베드5,7).
“당신은 그분의 것이고 그분은 당신을 잊지 않으십니다”(십자가의 성 요한).
우리는 일상생활 안에서 겪는 여러 어려움 속에서 주님이 함께하신다면
왜 이런 시련과 고통을 주느냐고 원망할 때도 있고,
예수님을 믿어서 나아진 게 무엇이 있느냐고 하소연할 때도 있습니다.
요즘 반복되는 비행기 사고를 보면서
하느님의 손길은 어디 있는가? 의문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정말 침몰의 위기에 처한 배에서 주무시던 모습
그대로인 것 같아 야속하기 한이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도대체 무엇을 하시고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열심히 살려고 애쓴 이들은 버려두고
제멋대로 사는 사람은 더 누리고 사니 속이 불편합니다.
그래도 당신의 안배와 섭리를 믿어야 하나요?
사람의 부주의가 가져오는 피해가 너무도 큽니다.
인간의 힘만으로는 두려움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어둠의 세력을 이길 수 있습니다.
집회서를 보면,
“주님께서 이루신 모든 위업은 너무나 훌륭하고
그분의 모든 분부는 제 때에 이루어지리라.
아무도 ‘이게 무어냐? 어찌 된 일이냐?’ 고 말해서는 안 된다.
모든 것은 제 때에 풀리기 때문이다.
그분의 말씀으로 물이 모여들고 그분의 말씀 한마디로 그 물이 저수지가 된다.
그분께서 명령하시면 뜻하시는 바가 모두 이루어지고
아무도 그분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막지 못한다”(집회39,16-18). 고 적혀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확고히 믿고 겁내지 말며 우리에게 다가오는 어려움을 이겨냅시다.
주님과 함께!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대한독립’이라고 외치면 다음에 나오는 말로 떠오는 단어가 있습니다.
무슨 말일까요? 그렇습니다. ‘만세’입니다.
‘만세(萬歲)’라는 말은 원래 황제에게만 쓰는 단어였습니다.
황제가 영원히 살라는 축복입니다.
황제가 건강해지라는 의미입니다. 황제가 영원히 다스린다는 의미입니다.
만세라는 말을 황제 이외의 사람에게 하면
역모와 역적의 혐의로 죽임을 당할 수 있었습니다.
이 단어가 황제 이외의 곳에서 처음으로 사용된 적이 있습니다.
언제일까요? 1919년 3월 1일 ‘삼일운동’ 때입니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사람들은 거리로 나왔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대한독립 만세!’
사람들이 말한 대한독립은 대한제국(大韓帝國)이 아니라, 대한민국(大韓民國)이었습니다.
대한민국은 어떤 나라였을까요?
황제가 다스리는 제국이 아니었습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모든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민주주의의 나라입니다.
그 대한민국은 성별로, 빈부로, 세대로, 이념으로, 귀천으로 차별되는 나라가 아니라,
모든 이가 동등한 권리와 책임을 다하는 평등한 나라였습니다.
그런 나라를 꿈꾸었기에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거리로 나와서 ‘만세’를 외쳤습니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人乃天)의 세상을 꿈꾸었습니다.
만세는 ‘믿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
1784년 이승훈 베드로가 북경에서 세례받으면서 조선의 천주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양반을 중심으로 서학이라는 학문을 연구하면서 천주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유교의 나라, 성리학의 나라였던 조선은
낯선 종교인 천주교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박해하였습니다.
곧 끝날 것 같았던 천주교회가 박해의 엄중한 칼날을 견뎌내고
뿌리내릴 수 있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그것은 엄격한 신분사회였던 조선에서,
평생 노비와 백정으로 지내야 했던 백성들이
천주교회에서 ‘만세’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천주교를 믿으면 노비도, 백정도, 여인도, 장애인도, 서자도
아무런 차별 없이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천주교 안에서는 고귀한 왕족도, 지체 높은 양반도, 가난한 천민도, 백정도,
여인도, 서자도 모두 한 형제요, 자매라고 부를 수 있었습니다.
만세를 꿈꾸었던 많은 신앙인이 재물을 빼앗겨도,
목숨을 빼앗겨도 신앙을 증거 할 수 있었고, 천국에서 빛나는 별이 되었습니다.
2000년 교회의 역사를 보면 사람들은 교회를 신뢰하였습니다.
교회에서 사람들을 치료하였고, 병원이 시작되었습니다.
교회에서 사람들을 가르쳤고, 학교가 시작되었습니다.
마을의 중심에는 높은 첨탑의 교회가 있었습니다.
밀레의 그림 ‘만종’에서 보듯이 교회의 종소리를 듣고 하루의 일을 마쳤습니다.
신앙이 생활이고, 생활이 신앙이었습니다.
박해의 시련을 겪으면서 ‘교우촌’은 신앙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박해를 피해서 지친 몸을 의탁하는 장소였습니다.
함께 모여서 기도하고, 나누는 장소였습니다.
기도와 생활이 둘이 아니었습니다.
교우촌을 중심으로 많은 성소가 있었습니다.
자녀들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이 영광이었기 때문입니다.
혼인의 조건은 재물, 능력, 학식이 아니었습니다. 세례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세례를 받아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재물, 능력, 학식이 부족해도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2025년입니다.
천주교 신자이기 때문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일을 맡길 수 있을까요?
천주교 신자이기에 믿고 혼인을 시킬 수 있을까요?
천주교 신자이기에 주어진 일을 충실하게 할 거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요?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입니다.
신앙과 생활이 하나가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부족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천주교 신자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충실하게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천주교 신자의 모습에서 어쩌면 ‘양치기 소년’을 보는지 모릅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믿음’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믿음으로써, 아브라함은 장차 상속 재산으로 받을 곳을 향하여
떠나라는 부르심을 받고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그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떠난 것입니다.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이 외아들을 바치려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죽은 사람까지 일으키실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가장 소중한 것까지도 봉헌하는 믿음입니다.
죽음의 골짜기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입니다.
믿음 때문에 가진 것을 빼앗길 수 있고, 믿음 때문에 건강을 잃어버릴 수 있고,
믿음 때문에 목숨을 바칠 수 있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믿음입니다.
“하느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네.”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가셨던 예수님을 봅니다.
묵묵히 그분의 십자가를 지고 갔던 시몬을 봅니다.
예수님 얼굴에 흐르던 피와 땀을 닦아 드리던 베로니카를 봅니다.
십자가에 매달려 ‘주님 저를 기억해 주세요.’라고 했던 죄인을 봅니다.
믿음은 함께 할 때 현실이 되고, 함께 할 때 비로소 이루어집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풍랑을 가라앉히시다.
조욱현 토마 신부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35절).
여기서 저쪽이라고 하면 지상의 것에서 천상의 것으로,
현재의 것에서 미래의 것으로 건너가자는 말씀이다.
하느님의 것은 당신을 따르는 이들을 덕을 향하게 하므로,
호수 저쪽으로 건너갈 필요가 있다.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다.”(37절)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38절).
주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는 동안에도 제자들을 시험하신다.
주님께서 깨어나시어 호수를 꾸짖으시자, 돌풍이 잔잔해졌는데,
호수를 꾸짖으신 분은 피조물이 아니라, 창조주시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
이렇게 그들이 구원되어 주님의 기적을 증언하고 있다.
주님께서는 주무시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분은 우리와 함께 계시며 구원해 주시는 분이다.
예수님은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신다.
그 모습은 아무 힘없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무덤에 묻히신 분을 연상케 한다.
예수님의 모습과 아우성을 치는 제자들의 모습은 대조적이다.
그분은 그들을 두려움 속에 내버려두신 채 주무신다.
닥쳐올 일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도록 그들의 감각을 날카롭게 하려는 뜻이었다.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39절). 그러자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다.”(39절).
이렇게 하느님의 능력을 갖추신 분이 누구신지를
제자들은 이 풍랑의 기적에서 읽을 줄 알아야 한다.
인간을 죽음의 위협에서 구출해 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
이처럼 교회와 신앙인은 끊임없이 위협을 받는다.
우리는 모든 삶의 모든 사건 안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어야 하고,
그분의 현존과 그분의 능력을 읽을 수 있는 눈이 필요하다.
많은 경우 우리는 우리에게 닥치는 조그만 풍랑에도
절망하며, 원망하고 그분을 찾으려고 하지 않는다.
이러한 자세가 아니라,
주님께 우리 자신을 맡기고 그분을 의지하는 마음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그날 저녁이 되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 하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들이 군중을 남겨 둔 채,
배에 타고 계신 예수님을 그대로 모시고 갔는데, 다른 배들도 그분을 뒤따랐다.
그때에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서로 말하였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마르 4,35-41)
1) 이 이야기는
“예수님은 바람과 호수까지도(자연계까지도) 지배하시고
복종시키시는 주님”이라는 증언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죽게 되었다고 무서워하는 제자들의 모습과
편안하게 주무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너무나도 대조적입니다.
예수님께서 주무신 것은 제자들의 상황을 모르셨기 때문도 아니고,
관심이 없었기 때문도 아닙니다.
바람과 파도 때문에 고생은 조금 하겠지만,
그것 때문에 제자들이 죽거나 다치는 일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눈앞의 위험만 보고 있지만,
주님이신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보고 계시고 다 알고 계십니다.
<나중에 최후의 만찬 때, 제자들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저희는 스승님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누가 스승님께 물을 필요도 없다는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
이로써 저희는 스승님께서 하느님에게서 나오셨다는 것을 믿습니다.”(요한 16,30)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그러나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두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흩어질 때가 온다.”(요한 16,31-32)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기 전까지는,
제자들의 믿음은 아직도 부족한 상태였고,
부활, 승천, 성령 강림 후에 믿음이 완성됩니다.>
2) 제자들은 죽게 되었다고 무서워하면서 예수님을 깨웠다가 믿음이 부족하다고 혼났지만,
나중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로 강한 믿음을 갖게 됩니다.
“헤로데가 베드로를 끌어내려고 하던 그 전날 밤,
베드로는 두 개의 쇠사슬에 묶인 채 두 군사 사이에서 잠을 자고 있었고,
문 앞에서는 파수병들이 감옥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더니 감방에 빛이 비치는 것이었다.
천사는 베드로의 옆구리를 두드려 깨우면서, ‘빨리 일어나라.’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의 손에서 쇠사슬이 떨어져 나갔다.”(사도 12,6-7)
사형 집행 전날 밤인데도 베드로 사도는 아주 태평한 모습으로 잠들어 있었습니다.
그 모습은 주무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닮았습니다.
천사가 옆구리를 두드려서 깨울 정도로 베드로 사도가 깊이 잠들어 있었다는 것은,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음을 나타내고, 또 ‘믿음의 완성 단계’에 도달했음을 나타냅니다.
3) 복음 말씀의 이야기를 해석할 때,
“예수님께서 지켜 주시니 우리는 죽지 않는다.” 라고 해석하거나,
“예수님께서 항상 우리를 지켜 주시고, 죽지 않게 해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라고
해석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너무 단순하고 초보적인 해석입니다.
<혹시라도 “믿음이 있으면 죽을 위험에서도 살아난다.”라고 해석한다면,
그것은 잘못 해석하는 것입니다.>
여객선 침몰이나 비행기 추락으로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은
사고들의 경우를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켜 주시지 않아서 그런 사고가 생겼을까?
그 사고로 목숨을 잃은 이들은 전부 다 믿음 없는 사람들이었을까?
예수님께서 사랑하시지 않은 사람들이었을까?
그런 사고를 당해도 죽지 않고 사는 것만이 주님의 뜻일까?
물론 그런 사고로 죽는 것 자체가 주님의 뜻일 수는 없습니다.
어떻든 무슨 병에 걸렸을 때나 어떤 사고를 당했을 때
‘주님의 뜻’이라는 말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믿음’이라는 말도 너무 남용하면 안 됩니다.
4)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가운데에는 자신을 위하여 사는 사람도 없고 자신을 위하여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로마 14,7-8).”
베드로 사도가 사형 집행을 앞두고서도 태평하게 잠을 잔 것은
‘자포자기’도 아니고, 반드시 살아난다고 믿었기 때문도 아니고,
살고 죽는 것을 모두 주님께 맡겼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생사를 초월한 모습입니다.
죽는 것보다 사는 것이 좋은 일이지만, 항상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생사의 갈림길에 섰을 때, 주님께서 원하시면 살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냥 그대로 데려가시는 것이 주님의 뜻일 수도 있습니다.
신앙인은 육신의 목숨이 아니라(‘무병장수’가 아니라)
영혼의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고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믿음을 촉구하십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마르 4,38)
예수님과 제자들이 호수 한가운데에서 함께 배 안에 있을 때,
돌풍이 일어 물이 배 안까지 거의 가득 들어차는 위급한 상황이 닥칩니다.
제자들 중에 물일에 익숙한 뱃사람들도 끼어 있었지만, 다들 혼비백산한 것 같습니다.
주무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관상합니다.
제자들이 외부에서 일어나는 돌풍과 파도 이상으로
내면과 영혼까지 출렁이며 뒤집어질 때,
예수님의 내면은 고요와 평화 그 자체 십니다.
아무리 하느님의 아드님이시지만 인간 육신의 모든 조건을 지니셨기에
천재지변이 아무 위협도 되지 않을 수 없을 텐데 그러십니다.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다."(마르 4,39)
제자들의 간청에 예수님께서 일어나 바람을 꾸짖으십니다.
그리고 이 한 말씀으로 방금, 전까지 사납게 날뛰던 바람이 바로 복종하지요.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 4,40)
문제는 믿음이었습니다.
제자들 입장에서는 자기들을 뒤흔든 두려움과 혼돈이 거센 바람과 들이치는 물 등
외부적 상황 때문이라고 여겼겠지만, 예수님께서 보실 때는 사실 불신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어느 삶도 완벽히 무탈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견딜 수 있을 만큼의 크고 작은 진동과 돌풍 속에서
적당히 흔들리며 힘껏 중심을 잡고 나아가는 중이지요.
그러다 때때로 우리 존재와 그간 이뤄놓은 삶의 터전을
집어삼킬 듯 범람하며 우리를 위협하는 고통을 맞닥뜨리기도 합니다.
아이러니 같지만, 믿음이 발휘되는 건 그런 순간입니다.
믿음은 평온하고 안정적이며 아쉬울 것 없는 삶에서가 아니라
추락과 침몰, 해체와 죽음의 돌풍 앞에서 증명되는 진실이니까요.
제1독서에서 히브리서 저자는 신앙 선조들의 믿음을 반복해 강조합니다.
"믿음으로써"(히브 11,8.9.11.17)
아브라함은 "믿음으로써" 길을 떠났고,
"믿음으로써" 영원한 도성을 기다리는 이방인으로 남았으며,
"믿음으로써" 이사악을 바쳤습니다.
사라도 "믿음으로써" 이사악을 잉태하였지요.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히브 11,1)
믿음은 결과가 눈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
손에 쥐어지거나 쥐어지지 않거나 관계없이
존재 깊숙이 자리하는 확신입니다.
믿는 바대로 그 결과는 이미 완성이 됩니다.
믿음 자체가 보증이고 확증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믿음을 발휘해야 하는 순간은
오늘 범람과 침몰의 위기 앞에 허둥대는 제자들의 상황처럼,
그리 만만히 다가오지 않습니다.
주일미사 때 습관적으로 읊는 신앙고백문이 진짜 삶으로 옮겨질 때는
거센 현실의 파도 앞에서 나름의 포기와 결단과 선택이 따라야 하기 때문이지요.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순교의 증거까지 요구하지 않는다 해도,
믿음을 증거해야 하는 순간은 삶의 아주 작은 디테일에 속속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달갑지 않고 반갑지 않은 천재지변, 질병과 사고, 사람과 관계의 파도 앞에서
예수님처럼 고요히 침잠할 수 있는 힘이 곧 믿음입니다.
돌풍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예수님처럼 바람을 꾸짖어 멈추는 힘은 우리 영역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믿음은 가능합니다.
믿는다면, 외부의 돌풍이 아무리 나를 뒤흔들어도 고요히 주님 안에 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각박한 세상, 녹록지 않은 삶을 지고 가면서
믿음을 부여잡고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를 응원하고 축복합니다.
복잡하고 버거운 세상일을 잠시 내려놓고,
아버지에 대한 믿음으로 주무시는 예수님 곁에서 평안히 쉬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두려움과 고요함의 교차
박상대 마르코 신부
우리는 지금까지 마르코 복음 4장에 기록된 4편의 비유 설교를 들었다.
모두가 하느님 나라의 신비에 관한 비유였다.
예수님의 도래로 말미암아 하느님 나라는 땅에 심겨진 씨앗처럼 아무도 모르게,
그러나 확실하게 그 완성을 향하여 자라나고 있다.
마치 작은 씨앗과도 같이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을 통해 자라나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께서 스스로 예수님과 함께 이 땅에 세우시는 나라이며,
그분 스스로가 다스리시는 나라이다.
하느님의 통치가 아들 예수께서 행하시는 표징을 통하여 드러나며
거꾸로 이 표징들을 통하여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통치를 현존시키신다.
예수께서 행하시는 표징을 통하여 드러나는 하느님의 통치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마르코는 비유 설교에 이어 네 가지 기적사화(4,35-5,43)를 준비하고 있다.
그것은 풍랑을 가라앉힌 기적, 게라사의 악령 들린 사람의 치유 기적,
하혈병 여인을 고치신 기적, 그리고 회당장의 딸을 살리신 기적이다.
우리는 복음서에 수록된 기적 사화를
크게 치유⋅구마 기적(이적) 사화와 자연 기적(이적) 사화의 두 가지로 나눈다.
치유⋅구마 기적 사화는 사람을 병이나 신체의 불편함이나
악령으로부터 구제하는 기적을 보도하는 것이다.
자연 기적 사화는 죽은 사람이나 사람이 아닌 생물이나 자연물을 대상으로
예수님의 神的 능력을 드러내는 기적이다.
자연 기적 사화에 관한 대표적인 예로는 蘇生의 기적, 빵, 물고기, 포도주의 기적과
물 위를 걷는 기적, 풍랑을 잠재운 기적 등이 있다.
그러나 어떤 모양으로든 이러한 기적들이
예수님의 神性을 증명하려는 수단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의 의도가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기적을 통하여 신성에로의 신앙을 강요하실 의도가 없으셨고,
오히려 함구령을 내려 자신의 신성과 메시아성을 되도록 감추려고 하셨다.
이는 무지하고 단순한 당대의 사람들에게나,
비판적이고 관학적인 사고를 탐구의 기본으로 삼는 현대인들에게나 똑같이 적용된다.
예수께서 바라시는 것은 믿음이다.
여기서 믿음은 예수께서 행하시는 기적이라는 사건 속에서
인간과 자연에게 말을 건네시는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수긍이다.
하느님의 세상에 대한 관심과 통치에 대한 믿음인 것이다.
비유설교를 마치신 예수께서 타고 계시던 배를 돌려 호수 건너편으로 가자고 하셨다.
예수께서 호숫가에 모여든 군중을 배에 앉아 가르치셨던 곳은
가파르나움 근처로 갈릴래아 호수의 북쪽이다.
잠시 갈릴래아 호수에 관하여 살펴보자.
갈릴래아 호수는 그 모양이 고구마 같기도 하고,
구약성서에서는 하프와 비슷한 모양이다 하여
‘긴네렛 호구’(민수 34,11; 신명 3,17; 여호 12,3)라고 불렀고,
신약시대에 와서는 갈릴래아 호수,
겐네사렛 호수(1마카 11,67; 마태 14,34; 마르 6,53; 루카 5,1)로
요한복음에서는 티베리아 호수(요한 6,1; 6,23; 21,1)로 불린다.
갈릴래아 호수의 호면은 지중해의 해수면보다 낮은 –212m, 깊이는 50m,
가장 긴 폭은 남북으로 22km, 동서로 14km, 둘레는 52km, 호수 면적은 약 170㎢에 달한다.
사람들은 이 호수를 바다라고도 한다.
예수께서 호수의 건너편으로 가신다고 함은 호수 북쪽에서 남쪽이 아니라
동편 골란 지방을 말한다.(이에 대하여는 다음 복음에서 다루겠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예수님과 제자들을 태운 배가
호수 동편으로 항해하던 중에 일어난 일이다.
배를 파산 직전으로 몰아붙인 세찬 바람과 풍랑은
북쪽 헤르몬산(2,814m)에서 형성된 골란고원에서 불어오는 돌풍으로
갈릴래아 호수에 종종 있는 일이다.
12제자 중에 4명(시몬, 안드레아, 야고보, 요한)은 前職이 뱃사람이라 이에 능통했을 일이지만,
다른 제자들에게는 그야말로 풍전등화의 위기였으리라.
돌풍이 몰이치고, 풍랑이 일어 배에 물이 차서 사람의 목숨이 寸刻을 다투는데
예수님은 뱃고물을 베개 삼아 주무시고 계신다.
지나치게 과장된 표현이지만 난리와 태평, 두려움과 고요함,
불신과 신뢰의 극적인 交叉를 충분히 실감할 수 있는 장면이다.
예수께서는 마치 마귀가 들린 사람에게서 악령을 쫓아내시듯,
바람과 바다를 향하여 호통을 치셨고, 이에 그들은 잠잠하고 고요해졌다.
예수님의 권위에 바람도 바다도 복종한 것이다.
그러나 막상 중요한 것은 기적보다 제자들에게 ‘아직도 없는 믿음’(40절)이다.
같은 배를 탔다면 우리도 그랬을 것이다.
그리 길지는 않지만 막 태동한 그리스도 교회가 바다 위의 배와 같이
돌풍과 풍랑에 시달리는 모습을 마르코 복음사가가 미리 내다본 것일까?
잊지 말아야 할 점은 그 배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승선하여 계시다는 것이며,
바람도 바다도 모든 자연도 하느님 통치의 손길 안에 있으며,
이들도 하느님 현존의 공간이라는 것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