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달래
내고향님 안녕하세요? 먼저 주왕산을 찾아주심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다음에 기회가 되시면 또다시 찾아주시기를 부탁드리고요 주왕산에 관련 전설을 짧게 소개해 드릴까합니다 예전 중국 당나라의 주도(주왕)가 왕의 패륜 정치에 불만을 품고, 그 자신을 후주천황이라 칭하고 군사를 일으켰다가 패하자 이곳 주왕산으로 피신하게 되었답니다. 이에 당나라에서는 신라에 주왕을 없애달라고 압력을 넣자, 신라의 마장군 오형제가 이곳까지 추격하여 주왕은 마장군 형제의 화살에 맞고 최후를 맞았다는 큰 줄거리입니다. 주왕산의 원래 명칭은 석병산, 대둔산, 주방산이라고 불렀는데 주왕이 온 후론 모든 명칭이 주왕과 관련한 주왕산으로 바뀌게 되었답니다. 주왕이 당나라에서 군사를 일으킬 당시, 당나라 왕에게는 연화공주라는 딸이 있었는데, 이 연화공주는 공교롭게도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려한 주도(주왕)를 그전부터 사랑을 하게 되었답니다. 우리나라 자명고의 전설이나 외국의 로미오와 줄리엣의 줄거리와 비슷하지요. 그래야 이야기가 긴박하게 진행되고 전설을 듣는 사람에게 흥미를 줄테니까요. 주도는 난이 실패하자 휘하의 군사들과 야반도주를 하게 되는데, 자신을 사랑하는 연화공주는 미처 데려오지 못합니다. (참고로 주왕은 그 당시 자식이 남매가 있었는데 아들은 대전도군이고, 딸은 백련이었습니다. 친모는 백련을 낳자마자 죽었다고 전해옴. 남매는 피신할 당시 주왕이 남매를 데려왔다는 설도 있고, 늦게 연화공주가 주왕을 만나로 올 때 함께 데려 왔다는 설도 있습니다. 어쨌든 연화공주는 당나라 조정에서 아버지 덕종황제가 신하들과 나누는 정보들을 (신라에 압력을 넣어 주도의 목을 참하여 오라는 사실 ) 미리알고, 비록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려 한 주왕이지만, 너무도 사랑을 했기에 이런 사실을 알리고 피신하라는 소식을 전하기 위해 이곳 주왕산까지 우여곡절 끝에 먼 길을 오게 됩니다. 마침내 주왕이 은거하고 있던 지금 현재 주왕굴에 당도하여 그토록 그리워하던 주왕을 먼발치에서 보게 됩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순간 마장군과 휘하의 장수들도 몰래 숲속에서 주왕을 향해 화살을 겨누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연화공주는 주왕에게 피하라고 소리치는 찰나의 순간, 마장군 휘하의 화살 수 십 개가 주왕의 몸에 박혀 주왕은 현장에서 죽게 되었다고 합니다. 연화공주는 그토록 그리워 했던 주왕의 목 없는 시신을 끌어 안고 며칠 밤낮을 울던 끝에 너무도 슬픈 나머지 자신마저도 주왕의 시신 옆에서 긴 칼로 자결을 하였다고 합니다. 전설에 의하면 주왕과 연화공주의 흘린 피가 주왕계곡을 며칠이 지나도록 멈추지 않고 흘러내리자 주왕의 아들 대전도군과 딸인 백련공주는 두 사람의 한을 달래고자, 그 자리에서 머리를 삭발하고 두 사람이 죽은 자리에 (지금의 주왕암) 작은 암자를 짓고, 기도하기를 백 일째 되는 날 신기하게도 붉은 핏물이 감쪽같이 멈추더니 핏물이 흘러넘치던 그 계곡에는 그해부터 붉디붉은 수달래 꽃이 피어났다고 합니다. (수달래꽃은 진달래과에 속하며 혹은 수단화라고 부르기도 하며 진달래나 철쭉에 비해 매우 붉은 빛깔을 띠고 있는 것이 특징이며 이와 유사한 연산홍도 있으나 종류는 확연히 다르고 유독 주왕산에만 서식하고 있는 희귀종으로 알려지고 있음) 그 후 두 남매는 계곡을 서로 마주보며 대전도군은 지금의 대전사 터에 절을 지어 이름을 대전사라 하고 백련공주는 바로 맞은편 건너에 절을 지었는데 백련사라 하여 죽을 때까지 한 맺힌 두사람의 넋을 달래고자 기도하며 생을 마쳤다고 합니다
청송군수님 인사말씀
축제의 흥을돋으기 위해 거리에서 부터
주왕산을 찾은 모든분들에게 안녕을위해 천지 신명께 제래의식
주왕이가 신라 마장군에 쪽겨 주왕굴로 피신하로가는 장면
마장군의 군사들이 주왕에게 화살을 쏘는장면
화살에 맞아 죽음에 이르는 주왕의모습 슬퍼하는 연하공주
아버지를잃은 두남매 백련 공주와대전도군 낮에는 사람의 눈을피해 숨어 있다가 달뜨는밤이되면 이곳에올라와 아버지를 그리워 하던 망월대
연화공주오 백련공주
숲속음악회
장병들 점심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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