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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세 때 (1777년)에는 후에 병세집(竝世集)의 바탕이 되었던 중주십일가시선(中州十一家詩選)을 엮었고,이듬해 봄에는 유명한 이십일도회고시를 지었다.이 해에 이덕무와 박제가가 연행을 다녀왔고,가을에 자신도 삼양(瀋陽)을 방문하여 처음으로 중국 땅을 밟았다.그가 32세이던 1779년 6월 1일에 검서관(檢書官)에 임명되어,마침내 관료로서의 활동기에 접어들게 된다.35세 되던 늦봄에는 강화도 외규장각에 머물면서 서적들을 조사하였다.
이윽고 37세 때 (1784년)에 검서관을 그만두고 포천현감(抱川縣監)으로 나가면서 지방관 생활을 시작하였고,이 무렵 포천이 고향인 12세 아래의 성해응(成海應)과 교유가 시작되었던 듯하다.이 해 윤 3얼에는 발해고(渤海考)를 저술하였다.이듬해에는 양근(楊根,지금의 양평)군수로 옯겼다가 42세 때인 1789년에 사임하고 서울로 돌아와 광흥창(廣興倉)주부(主簿)로 있었고,다시 이듬해 5월에는 사도시(司도寺)주부로 옮겼다.자리를 옮기자마자 청나라 건륭제의 80세 생신 축하사절의 알원으로 뽑혀서 박제가와 함께 연경을 다녀오게 되니,이것이 1790년의 1차 연행이다.5월 27일에 서울을 출발하여 열하(熱河)와 연경(燕京)을 방문하고 여러 문사들과 교유한 뒤,10월 10일 압록강을 건너왔으니,이 여정을 글로 남긴 것이 난양록(灤陽錄)이다.
연행에서 돌아온 뒤인 47세 (1794년)에 가평(加平)군수로 부임하였다.그러나 다음 해에 임지에서 일어난 지득운(池得雲)의 딸 사망 사건을 잘못 다루었다고 하여 6월에 파직당하였다.
서울로 돌아와 7월에 다시 검서관에 임명되었고,49세 때인 1796년 8월에 통정대부(通政大夫,정 3품)에 올라 오위장(五緯將)에 임명되었으며,처인 전주 이씨는 숙부인(淑夫人)의 작(爵)을 받았다.그러나 그가 언제 혼인하였는지는 기록에 나타나 있지 않다.
53세 (1800년)에 풍천도호부사(豊川都護府使)로서 지방관으로 나갔으나,이 해 6월에 정조가 승하하게 된다.그는 정조가 승하하기 직후인 7월에 왕으로부터 하사받은 책 목록을 작성하였는데,모두 308권이라고 적고 있다.그를 아꼈던 정조가 돌아가자 결국 이듬해 정월에 부사의 직을 그만두고 서울로 돌아왔다.
풍천에서 돌아와 막 쉬려고 할 즈음인 1801년 정월 말에 왕명에 의해서 주자서(朱子書) 선본(善本)을 구하러 2차 연행 길에 오르게 된다.그해 2월 25일 서울을 출발하여 4월 1일에 연경에 들어간 뒤 32일간 머물고 6월 11일에 서울로 돌아오기까지 도합 107일이 소요되었다.이 여향에서 돌아온 뒤 연대재유록(燕臺再游錄)을 저술하였다.
연행에서 돌아온 뒤인 8월 5일에 그에게는 커다란 정신적 저주였던 모친이 사망하게 되는데,그 후로는 그의 행적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다만 서울 근교와 한강 상류를 유람하고 여러 문사들과 교유하면서 만년을 여유 있게 지냈던것으로 추측될 뿐이다.
그는 60세를 일기로 1807년 9월 1일에 세상을 떠나,성해응이 은거하던 포천 향산(香山)에서 남쪽으로 20리 떨어진 양주(揚州) 송산(松山,지금의 의정부시 송산동)에 묻혔으니,이 곳은 그의 부친이 묻힌 곳이기도 하다.그의 슬하에는 장남 본학(本學),차남 본예(本藝)와 2녀를 두었는데,두 아들 모두 검서관을 역임하였다.특히 유본에서는 서울의 지리지인 한경지략(漢京識畧)을 저술하였으니,경도잡지(京都雜志)를 지은 그의 부친으로부터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2.역사 인식과 저술
그는 역사라기보다는 시인이었기 때문에 자연히 그의 역사 인식은 문학론에서 바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다른 북학파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훌륭한 시를 짓기 위해서는 고금과 동서를 막론하고 모든 문학 작품들을 섭렵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고,그런 가운데 우리 여가와 관련된 사료에도 주녹하게 되었다.그의 저서들의 중국고 서적들이 다영하게 인용되어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더욱이 그는 사실성이 뛰어나고 음향성이 탁월한 시를 지었는데,이것을 글자의 속성과 소리에 대한 정통함이 없이난 불가능하다.글자 하나하나에 대한 관심은 그로 하여금 고증학적인 태도를 가지지 않을 수 없게 하였을 것이다.물론 여기에는 청나라 고증학ㅇ로부터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그가 지은 엯서에 이러한 태도가 곳곳에 배어 있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그가 문헌을 두루 섭렵하고 글자의 속성과 소리에 관심을 기울인 결과,우리 역사와 관련된 새로운 자료들을 자주 찾아내곤 하였다.예를 들어 이십일도회고시에서 한(韓)을 주제로 삼을 때에는 미처 언급하지 못하였다가 말년인 1798년에 와서 시경(詩經)에 기록된 한후(韓侯)를 비로소 발견하고는,우리 나라 사람으로서 3한을 논하면서 이를 다룬 사람이 없다고 지적하였다.
한편,그는 중국과 조선 외에 다른 나라들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그가 언급한 것만 하여도 만주,몽고,회회(回回),안남(安南베트남),남장(南掌,라오스)면전(緬甸,미얀마),대만,일본,유구(琉球)가 있고,서양의 홍모번(紅毛番,영국)과 아란타(阿蘭陀,화란)도 있다.그의 세계관이 넓어짐에 따라 중국 일변도의 관념을 극복할 수 있게 되었고,그 결과 발해고에서 일본 사료까지 인용할 수 있었다.
첫댓글 우리 지호 잘 한다. 변하지 말고 해봐. 항상 너를 지켜 보고 있어. 괜히 신교수가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