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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2월 3일 연중 제4주간 월요일
제1독서 : 히브 11,32-40
복 음 : 마르 5,1-20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1 호수 건너편 게라사인들의 지방으로 갔다.
2 예수님께서 배에서 내리시자마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무덤에서 나와 그분께 마주 왔다.
3 그는 무덤에서 살았는데, 어느 누구도 더 이상 그를 쇠사슬로 묶어 둘 수가 없었다.
4 이미 여러 번 족쇄와 쇠사슬로 묶어 두었으나,
그는 쇠사슬도 끊고 족쇄도 부수어 버려 아무도 그를 휘어잡을 수가 없었다.
5 그는 밤낮으로 무덤과 산에서 소리를 지르고 돌로 제 몸을 치곤 하였다.
6 그는 멀리서 예수님을 보고 달려와 그 앞에 엎드려 절하며, 7 큰 소리로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느님의 이름으로 당신께 말합니다.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8 예수님께서 그에게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9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시자,
그가 “제 이름은 군대입니다. 저희 수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0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 자기들을 그 지방 밖으로 쫓아내지 말아 달라고 간곡히 청하였다.
11 마침 그곳 산 쪽에는 놓아기르는 많은 돼지 떼가 있었다.
12 그래서 더러운 영들이 예수님께,
“저희를 돼지들에게 보내시어 그 속으로 들어가게 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13 예수님께서 허락하시니 더러운 영들이 나와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이천 마리쯤 되는 돼지 떼가 호수를 향해 비탈을 내리 달려, 호수에 빠져 죽고 말았다.
14 돼지를 치던 이들이 달아나 그 고을과 여러 촌락에 알렸다.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려고 왔다.
15 그들은 예수님께 와서 마귀 들렸던 사람, 곧 군대라는 마귀가 들렸던 사람이
옷을 입고 제정신으로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그만 겁이 났다.
16 그 일을 본 사람들이 마귀 들렸던 이와 돼지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들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17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께 저희 고장에서 떠나 주십사고 청하기 시작하였다.
18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마귀 들렸던 이가 예수님께 같이 있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19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집으로 가족들에게 돌아가, 주님께서 너에게 해 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
20 그래서 그는 물러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해 주신 모든 일을 데카폴리스 지방에 선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
<오늘의 묵상>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오늘 복음은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인간의 비참함과
그에게서 풀려나 제정신으로 돌아온 인간 사이의 차이를
극적과정으로 매우 뚜렷하게 보여 줍니다.
그 과정에 예수님께서 지니신 절대적 권능이 마귀에게 작용합니다.
예수님을 보고 달려와 신앙고백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마르 5,7)라며
그분의 권능이 개입하지 못하도록 막으려던 더러운 영들은
결국 자기들이 살길을 예수님께 간청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군대라는 이름의
더러운 영들에 사로잡힌 사람을 살리시려고 그 청을 들어주십니다.
사실 악령은 인간에 대한 권한이 없습니다.
예로니모 성인의 말대로 주님께서는
‘전적으로 당신 소유인 사람’을 사로잡고 있는 악령을
제 가고 싶은 곳으로 보내시어 그를 해방시키시려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의 소유인 인간의 해방을 위하여
돼지 2천 마리를 잃는 것쯤은 대수롭지 않은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머물러 계셔야 하는 사람 안에 더러운 영이,
머무르는 것을 허용하시지 않고 그 영을 내보내십니다.
사실 사람 안에 악령이, 예수님께 어울리지 않는
어떤 것이 머무른다는 것은 그분에 대한 모독입니다.
인간에게 육신을 마련해 주시고 그 안에 머무르시는 분은 바로 주님이십니다.
우리 몸은 그분의 몫이니 다른 어떤 영도 우리 몸을 소유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군대라는 이름의 더러운 영이든, 돈과 허영과 탐욕이라는 세속의 영이든 말입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성공의 과정에는 모멘텀의 법칙이 적용됩니다.
외부의 방해를 차단하고 내면의 목소리에만 귀를 기울이면
목표를 향한 동기는 절대 줄어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작심삼일(作心三日)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굳게 마음을 먹고 행하지만, 외부의 방해 때문에 쉽게 포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살을 빼고 싶다면 다이어트를 시작하고
2주 동안은 몸무게를 재지 말라는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분명 변화가 일어나고 있지만
겉으로는 아무런 변화가 보이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실망감을 안겨주고 자포자기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식단을 조절하고 운동을 해도 나는 아무런 변화가 없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힘이 빠집니다.
그러나 2주가 지나고 몸무게가 줄어드는 것이 눈으로 보이는 순간부터는 자신감이 붙습니다.
‘확실히 효과가 있구나. 할 수 있어. 노력할 가치가 있다고!’라는 생각이 들고
이때 누군가가 “혹시 살 빠졌어?”라고 묻기라도 하면 성공으로 향하는 모멘텀은 더 커지게 됩니다.
모든 것은 믿음에 따라 모멘텀이 커지고 성공으로 나아갑니다.
주님과 우리의 관계로 그렇습니다.
외부의 방해로 우리는 그 관계를 너무 쉽게 포기합니다.
모멘텀을 키우기 위해 더 큰 믿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호수 건너편 게라사인들의 지방에 갔습니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을 마주하게 되지요.
사람들은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사람에게 괴로움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이 영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잘 알고 있었기에 이렇게 말합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
말씀 한마디로 마귀 들린 사람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군대라는 마귀들은 이천 마리의 돼지 떼 속으로 들어갔고,
돼지 떼가 호수를 향해 비탈을 내리 달려 모두 호수에 빠져 죽고 말지요.
돈벌이가 되는 돼지 떼들의 죽음으로 마을 사람들은 크게 실망하지요.
그리고 다음에도 그런 일이 생겨 손해를 볼지 두려워서
예수님께 자기네 고향에서 떠나 주십사고 청합니다.
마귀를 쫓아내는 예수님을 직접 보았고,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외부의 방해가 작동했습니다. 바로 재산의 손해였습니다.
그리고 이 방해에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하는 길을 포기하고 맙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없애는 외부의 방해를 따를 때가 얼마나 많았을까요?
그 결과 예수님께서 주시는 은총과 사랑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외부의 방해에 대해 “당장 내게서 나가라.”라고
명령할 수 있는 용기와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첫 이방인지역 나들이인데,
게라사인 지역에서 더러운 영을 쫒아 내시는 장면입니다.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거센 돌풍’을 잠재우시고 호수를 건너오셨습니다.
하지만, ‘또 다른 거센 돌풍’을 마주하게 됩니다.
마치 모세가 갈대 바다를 건너왔지만,
여전히 사막에서 또 다른 거센 돌풍을 마주했듯이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다에 부는 거센 돌풍을 잠재우셨듯이,
이제는 또 다시 인간에게 부는 거센 돌풍을 잠재우십니다.
곧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이 족쇄나 쇠사슬로 묶어둘 수 없을 만큼
거센 돌풍에 휘둘려 밤낮으로 소리 지르며 무덤을 헤집고 다녔습니다.
그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은 무덤에서 나와 예수님께 마주 왔습니다.(마르 5,2)
그리고 이제 그에게서 영들의 군대가 나가고,
그는 '옷을 입고 제 정신으로 앉아'(마르 5,15) 있었습니다.
곧 더러운 영에 들렸던 왜곡된 인간성을 버리고, ‘제 정신이 든’ 것입니다.
‘제 정신이 들었다’는 것은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와 같이,
‘제자리로 돌아왔다’(루카 15,17-20)는 것,
곧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새사람으로 되었다.’(에페 4,21-24)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옷을 입었다’는 것은 이제 바오로 사도의 표현을 빌리면,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었다'(갈라 3,27)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마귀를 내쫓는 이 이야기는 병을 고치는 다른 이야기들의 범위를 넘어서,
사탄의 왕국에 대한 예수님의 승리를 보여 줍니다.
그리고 돼지 떼들의 익사는 이 고장에 대한 마귀들의 권세가 끝났음을,
곧 그곳이 더러움에서 해방되었음을 말해줍니다.
그렇지만 이곳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배척을 받으셨습니다.
어둠은 빛을 반기기보다 오히려 배척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 들렸던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집으로 가족들에게 돌아가,
주님께서 너에게 해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마르 5,19)
이렇게 그는 첫 ‘이방인 선교사’로 파견됩니다.
곧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알리는 ‘자비의 선교사’로 파견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물러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해 주신 일을
데카폴리스 지방에 선포하기 시작'하였습니다.(마르 5,20)
오늘 우리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해 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알려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먼저 '주님께서 우리에게 해 주신 일과
자비를 베푸신 일'을 깨달아야 할 일입니다.
그래야 우리도 ‘주님께서 하신 일’과 ‘자비’를 베풀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죽은 이들의 무덤 가운데가 아니라,
살아계신 주님의 사랑 가운데 앉아 있어야 할 일입니다.
제 정신으로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그리스도의 말씀 앞에 앉아 있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먼저 베풀어지고 선사 되는 하느님의 사랑’을 수락하고,
그를 증거 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그들은 그분을 보고 저희 고장에서 떠나가 주십사고 청하였다.'(마르 5,17)
주님!
어둠을 몰아내소서.
제 안에 돼지 떼가 판치지 않게 하소서.
저는 본래부터 주님의 거처이니, 제 안에 빛을 밝히소서.
오늘도 죽은 이들의 무덤이 아니라,
살아계신 당신의 사랑 가운데 살게 하소서. 아멘.
예수님을 만나면 인생이 바뀝니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그날의 기분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습니다.
마음에 둔 사람을 만나면 기쁨이 크고, 보기 싫은 사람을 만나면 가슴이 아픕니다.
좋은 스승을 만나 훌륭한 사람이 되기도 하고,
못된 사람 만나서 잘못된 길을 걷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면 운명이 바뀔 수도 있습니다. 만남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만나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인생이 바뀝니다.
그분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6)이시기 때문입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예수님께 마주나왔는데 그것은 큰 은총입니다.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무덤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무덤이란 곧 죽음을 의미하는데 사랑이 없는 미움과 시기, 질투, 분노, 적개심, 무관심 등으로
지옥같이 사는 상태를 말합니다.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이 족쇄와 쇠사슬에 묶여 있었다는 것은
무질서와 혼란 상태에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소리를 지르며 돌로 제 몸을 치곤 하였다는 것은
분노와 자학으로 괴로워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그 어둠에서 나왔으니 얼마나 큰 은총이겠습니까?
그는 결국 제정신으로 돌아왔습니다(마르5,15).
제정신으로 돌아왔다는 것은 새 삶을 시작하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그분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로마12,2)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 새 삶을 시작하게 되었고
예수님 곁에 같이 있고 싶어 하였습니다.
반면,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이 자기 고향에서 떠나 주기를 바랐습니다.
심지어 벼랑까지 끌고 가 떨어뜨리려고 하였습니다(루카4,28).
더러운 영이 들렸던 사람도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저를 괴롭히지 말아주십시오”(마르5,6).하고 외쳤습니다.
여기서 악령의 속성을 볼 수 있습니다.
악령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정확히 알고 인정하였지만,
그분과 소통하고 친교를 나누는 일은 거부합니다.
이렇게 악의 세력은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 잘 알면서도
그릇된 삶에 고집스레 집착하고 거기에서 벗어나기를 극도로 싫어합니다(손희송).
그런데 제정신이 들자, 예수님께 “같이 있게 해 주십시오”(마르5,18) 하고 청하였습니다.
이 청은 제정신이 들기 전과는 전혀 다른 청원입니다.
“이제 낡은 것은 사라지고 새것이 나타난 것”(2코린 5,17)입니다.
예수님께 “같이 있게 해 주십시오” 하는 청은 곧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제정신이 들어 청원한 기도이니만큼 우리도 기도 할 때 제정신으로 해야 합니다.
그래야 무턱대고 청하지 않고 효과적인 기도, 꼭 이루어지는 기도를 할 수 있으며
주님의 뜻에 의합한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는 기도’가 아니라 ‘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때로는 기도가 들어지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적 유익을 위해서 거절하신 것으로 믿고
주님께 대한 신뢰를 잃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더러운 영이 들렸던 사람이 주님을 만나 새 생활을 시작하였듯이
우리도 주님을 만나 ‘새로 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지상 것들에 마음을 두지 말고,
천상 것에 마음을 두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누군가가 나를 만나서 기쁨을 간직할 수 있는 날이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오징어 게임 시즌 2를 보고 있습니다.
3년 전에 오징어 게임이 처음 나왔을 때도 보았습니다. 코로나 팬데믹 시기였습니다.
넷플릭스 상영 순위 1위를 기록하며 많은 사람이 보았습니다.
한국 사람에게 친숙한 게임을 보여 주었고,
인간이 자본이라는 거대한 괴물 앞에 한없이 약하다는 것도 보여 주었습니다.
오징어 게임은 적자생존, 약육강식, 승자독식이라는 이기적인 세상의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 게임에는 자비와 양심은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오징어 게임에 열광했던 것은
그 게임이 현실 세계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오징어 게임 시즌 2는 오징어 게임에서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주인공은 오징어 게임을 만든 사람을 찾아가서 그 게임을 더 이상 못 하게 하려고 합니다.
그 방법이 실패하면서 주인공은 다시 오징어 게임이 있는 곳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선포’합니다. 이 게임은 비인간적인 게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게임을 하면 단 한 사람만 남고 모두가 죽는다고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이 받게 될 상금은 옆에 있는 사람의 목숨값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게임을 중단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주인공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비슷한 이야기를 성서에서 볼 수 있습니다. 부자와 라자로의 이야기입니다.
부자는 세상에서 좋은 옷 입고, 맛있는 음식 먹고 신나게 살았지만,
죽어서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이 타오르는 지옥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집 앞에서 빌어먹던 라자로는 세상에서 종기투성이로 배고프게 살았지만,
죽어서는 아브라함 품 안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부탁했습니다.
이 세상의 삶이 끝나면 영원한 생명의 세상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기를 청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라자로와 같은 거지를 도와주어야 한다고 알려주기를 청합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그들이 마음을 바꾸지 않으면,
죽은 사람이 가서 이야기해도 듣지 않을 거라고 이야기합니다.
욕망의 덫에 걸리면, 열등감의 덫에 걸리면, 게으름의 덫에 걸리면
영원한 생명이 눈앞에 있어도 알아보지 못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용기 있는 사람만이 영원한 생명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포도원 소작인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주인이 먼 길을 떠나면서 포도원 소작인에게 포도원을 맡겼습니다.
소작인들은 포도원을 돌보면서 주인에게 소작료를 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시간이 가도 오지 않았고,
소작인들은 포도원이 이제 자기들의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주인은 때가 되어도 소작료를 보내지 않자, 하인을 보냅니다.
소작인들은 겁도 없이 주인이 보낸 하인을 때리고, 쫓아냈습니다.
주인은 아들은 알아볼 거로 생각했습니다. 주인은 아들을 보냈습니다.
소작인들은 아들을 죽이면 포도원이 영원히 자기들의 것이 될 거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주인이 보낸 아들마저 죽여버렸습니다.
주인은 화가 났습니다. 소작인에게서 포도원을 빼앗았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소작인에게 포도원을 맡겼습니다.
소작인들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이 있는 지옥으로 갔습니다.
포도원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세상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드려야 할 소작료는 무엇인가요?
겸손과 인내입니다. 나눔과 헌신입니다.
그렇게 하면 이 세상은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는 하느님의 나라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아끼는 돼지들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악령을 쫓아내는 것보다, 병든 사람을 치유하는 것보다
자신들의 재산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사제들이 독신의 의미를 온전히 깨닫고,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사제들이 교회의 가르침보다 자신의 신념과 세상의 것들을 전하려고 한다면,
사제들이 교회의 권위를 따르지 않는다면,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보다는 자기의 뜻을 먼저 이루려고 한다면
이는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던 마을 사람과 다를 바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귀에 걸린 사람은 치유를 받았습니다.
고마운 마음에 건강을 회복한 사람은 예수님 곁에서 시중을 들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치유의 대가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이제 건강을 회복하였으니, 가족들에게 돌아가서 예전처럼 지내라고 하셨습니다.
‘사랑과 비움’은 우리를 건강하게 해 주는 선물입니다.
내 마음에 원망과 미움이 있다면, 근심과 걱정이 있다면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이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보여 주셨던 나눔과 비움을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마음은 곧 따뜻해지고, 행복해질 것입니다.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조욱현 토마 신부
예수님께서는 게라사로 가셨다.
이 지방의 본이름은 게르게사인데 성경을 필사하면서 잘못 옮긴 이름이다.
게르게사는 쫓아낸 자들이 사는 곳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마귀 들린 사람을 만나신다.
악령 들린 사람은 무덤에 거처하면서 쇠고랑과 쇠사슬로 묶여 있으면서
밤이나 낮이나 산에서 소리를 지르고 돌로 제 몸을 짓찧곤 했다는 것은
그가 더는 비참해질 수 없는 삶을 살고 있었다.
마귀들은 그분이 하느님이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본다.
“하느님의 아드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7절).
예수께서는 악령 들린 사람에게 구원의 손길을 펴주신다.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8절).
마귀들은 그에게서 나와 돼지 떼들에게 들어갔고 돼지들은 물에 빠져 죽었다.
마귀에게 사로잡혔던 사람은 성한 몸으로 예수님을 따르려고 한다.
마귀들의 군대가 자기에게서 쫓겨난 것을 알았다.
이제는 모든 것을 잊고 오로지 주님의 발치에서 마냥 쉬고 싶다고 한다.
그러나 주님은 그 사람의 뜻과는 달리 이렇게 말씀하셨다.
“집으로 가족들에게 돌아가,
주님께서 너에게 해 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19절).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데는
지금까지의 나의 생활에서 어떠한 근본적으로 변화해야 한다.
이 변화는 나의 희생과 노력의 결과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못 알아들을 때, 우리도 그 주민들처럼 예수님께 떠나 달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도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 나 자신의 희생이 따를 때,
그 희생을 꺼려 예수님께 “나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하는 마음의 자세가 아니고
그것을 기쁜 마음으로 수용하고 주님께 감사드릴 수 있는 자세를 갖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전 재산을 잃고 떠돌이가 되어도?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마귀 들렸던 이가 예수님께 같이 있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오늘 복음은 군대라는 더러운 영에 사로잡혔던 사람이
주님의 도움으로 멀쩡하게 되는 얘기로 더러운 영이란
어떤 존재인지 여러 번 제가 다룬 바가 있는 얘기입니다.
곧 더러운 영이란 비록 더러울지라도 영적 존재이기에
당시 아무도 모르는 주님의 정체를 잘 알고 있다는 것,
그러나 주님이 자기를 쫓아내려고 오시는 것을 알기에
주님이 자기 영역에 들어오는 것을 거부하는 영이라는 것,
더러운 돼지들 속에서라도 자기 영역을 떠나지 않으려
정말 더럽게도 집착하는 영이라는 것 등등을 봤습니다.
그래서 오늘 더러운 영에 관한 얘기는 이 정도로 하고,
이후 벌어진 일들과 사람들에 대해서 나눠볼까 합니다.
오늘 독서는 구약의 예언자들을 칭송하는 얘기를 합니다.
그들은 “더 나은 부활을 누리려고 조롱과 채찍질을 당하고”,
“칼에 맞아 죽기도 하고” “궁핍과 고난과 학대를 겪었으며”
양가죽이나 염소 가죽만 두른 채 광야와 산과 들을 돌아다녔는데
“그들에게는 세상이 가치 없는 곳이었기” 때문이라고 얘기합니다.
이것은 오늘 복음의 마을 사람들과 대조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더러운 영들만 주님을 거부한 것이 아닙니다.
그 사건 후 마을 사람들도 주님을 거부하고 떠나달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자명합니다.
자기들 전 재산인 수천의 돼지를 주님 때문에 잃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수천의 돼지를 죽게 만든 주님의 처사는
이들의 입장에서 보면 잘못돼도 너무도 잘못된 것이었지요.
그러니 이렇게 만든 주님을 때려죽이지 않고
순순히 떠나달라고만 한 것이 오히려 다행이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어쨌거나 이런 이유로 그들도 더러운 영처럼 주님을 거부했는데
그런데 같은 경우를 우리가 당하면 나는 어떻게 할 것 같습니까?
전 재산을 잃어도 주님을 영접할까요?
주님을 모시기 위해 전 재산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르기 위해 히브리서의 예언자들처럼 떠돌이가 될까요?
사실 주님을 영접한 사람들을 보면 비록 자기가 원치 않았지만
전 재산을 잃고 난 뒤에야 영접했고 우리도 대부분 그랬습니다.
이 세상을 포기하지 않고 저세상을 가질 수 없고,
전 재산을 잃지 않고 주님을 영접할 수 없습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가 또 봐야 할 사람은 더러운 영에 사로잡혔던 사람입니다.
마을 사람들과 달리 그는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가 이러는 것은 당연하지요.
그는 잃을 게 더 없을 정도로 이미 다 잃었고
그래서 오히려 구원을 체험하였으니 말입니다.
사실 모든 구원은 비 구원의 상태에서 구원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이 사람을 보며 나를 봐야겠습니다.
나는 지금 비 구원 상태에 아직도 있음을 알고 구원을 찾는 사람인가?
여전히 모르는 채 구원을 찾지도 주님을 따라나서지도 않는 사람인가?
전 재산을 다 잃고 떠돌이가 되어도 주님을 따라나설 사람인가? 아닌가?
악령이 활개를 치는 순간!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수를 건너 배에서 내리시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무덤에서 나와 그분께 다가왔습니다.
그는 무덤가에서 홀로 살고 있었는데,
당시 유다 문학 안에서 무덤은 ‘악령의 집’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수많은 악령들이 수시로 활개를 치니
한 인간으로의 기본적인 삶은 끝났다고 보면 정답입니다.
충혈된 눈, 온몸의 상처, 기괴한 몰골, 엄청난 파괴력, 음산한 분위기...
사람들은 다들 그를 보면 무서워서 줄행랑을 치곤했습니다.
왕따도 그런 왕따가 없었습니다.
자연스레 그의 거처는 인간 세상에서 멀리 떨어진 무덤 속 토굴이었습니다.
악령의 괴롭힘으로 고통받는 그의 모습이 너무나 안타까웠던 예수님께서
악령에게 이름이 어떻게 되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아주 특별한 대답이 입에서 흘러나왔습니다.
“제 이름은 군대(軍隊)입니다. 저희 수가 많기 때문입니다.”(마르 5,9)
악령의 이름은 독특하게도 ‘군대’입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 로마 군대는 6,100명의 사병과 726명의 기병,
합해서 총 6,826명의 군사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군대라는 표현은 그 사람 안에 수많은 악령이 활개 치고 있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한 마리 두 마리, 열 마리 스무 마리가 아니라
수많은 악령들의 무리가 그 사람에게 들어가 있었습니다.
악령들은 수가 엄청나게 많음에도 불구하고 똘똘 뭉쳐
그 사람 안에 들어가 괴롭히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 안에 들어있는 수많은 악령들을 쫓아내시어
근처에 있는 돼지 떼 속으로 들어가게 하십니다.
그리고 이천 마리나 되는 악령 들린 돼지 떼들은
호수를 향해 비탈을 내려 달려 빠져 죽고 말았습니다.
수많은 악령들의 무리, 군대라는 표현을 묵상하며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 안에 존재하는 무수한 악령들을 바라봅니다.
악령은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비약적인 경제성장 그 이면에 깃들어진 죽음의 문화가 곧 악령들입니다.
극단적 이원화, 부익부 빈익빈의 현실, 집단이기주의, 물질만능주의, 경제지상주의,
학벌주의, 외모지상주의, 왕따 현상, 마약, 자살에의 유혹...
이 모든 악령들이 우리 주님의 권능과 자비에 힘입어 하루빨리 사라지기 바랍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선이 악의 세력을 물리치기 바랍니다.
군대라는 악령 집단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은 그야말로 인간의 끝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한 인간의 끝에서 당신의 일을 시작하십니다.
이 한 세상 살아가다 보면 우리도 악의 세력에 휘둘릴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악령이 활개를 치면서 한 인간을 극단으로 몰고 갈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내 인생에서 하느님이 부재(不在)하실 때입니다.
내 삶에서 성령께서 부재하시는 순간이 곧 악령이 활동하는 순간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자비하신 하느님 현존 체험 안에 머물러야겠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하느님 그분과 나 사이의 가느다란 끈을 끊지 말아야겠습니다.
때로 하느님께서 아니 계신 듯 여겨지는 부재 체험 가운데서도
언제 어디서든 하느님께서 내 곁에 현존하고 계신다는 진리를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때로 여기가 끝인가 보다 느껴질 때도
하느님께서 개입하실 순간이 멀지 않았음을 꼭 기억해야겠습니다.
성령을 받아들이는 법: 시험에 들어보라!
전삼용 요셉 신부
찬미 예수님.
오늘은 마르코복음 5장에 나오는 게라사 지방 주민들의 이야기를
다시 한번 깊이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귀신 들린 이에게서 악령을 쫓아내시자,
수천 마리에 달하는 돼지 떼가 호수에 빠져 몰살당했는데,
그 광경을 본 주민들은 놀라고 두려워하여
예수님을 자기네 고장에서 떠나 달라고 청합니다.
왜 그들은 ‘하느님의 권능을 직접 목격하고서도’ 예수님을 배척해야만 했을까요?
바로 손에 잡히는 재산(돼지 떼)을 잃는다는 두려움이,
구원과 은총을 놓고 저울질했을 때 더 크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자주 반복됩니다.
세속·육신·마귀가 제공하는 그럴싸한 유혹이 너무 익숙하고 실체감 있어 보이기에,
영원한 가치를 제시하는 성령을 뒤로 미루거나 아예 포기해 버리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하느님께 특별한 은총을 받았다가,
욕망에 빠져 이를 스스로 내려놓고 만 인물들의 예가 많이 나옵니다.
먼저 사울을 살펴보면, 그는 이스라엘의 초대 임금으로서
기름 부음을 받고 출발했지만(1사무 10장 참조),
점차 자신의 권력에 도취 되어 교만해집니다.
1사무 13장과 15장에 보면,
그가 사제로서의 권한도 아닌데 마음대로 제사를 집전하고,
주님의 명령을 어겨 전리품을 챙기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내가 왕이니 이 정도쯤이야” 하는 교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사무엘이 “주님께서 당신을 버리셨습니다.”(1사무 15,26)라고 선언할 정도로,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과 사명을
사울이 스스로 무너뜨렸다는 사실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이 사울의 교만한 행보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몰락과도 닮았습니다.
나폴레옹은 뛰어난 군사적 재능으로 유럽을 호령하며 황제 자리에까지 올랐지만,
점차 자신의 절대 권력에 빠져 무리한 원정(특히 러시아 침공)을 감행함으로써
결국은 파멸로 치달았습니다.
겸손히 한계를 인정하기보다 자신을 절대화하면,
하느님이 부어 주시는 은총의 그릇이 거꾸로 뒤집혀 버리는 것이지요.
그는 교회에 의해 씌워지던 황제의 왕관을 자신이 직접 쓴
최초의 황제가 됨으로써 교회에서 오는 은총을 스스로 단절해 버렸습니다.
다음으로 다윗을 떠올려 봅시다.
“당신은 내 마음에 드는 사람”(1사무 13,14 참조)이라는 칭찬을 받을 정도로
하느님께 사랑받던 임금이었지만,
2사무 11장에서 밧세바의 아름다움에 눈이 멀어 간음죄를 범하고,
그 남편 우리야까지 제거해 버렸습니다.
한순간의 육체적 욕망이, 하느님께 받은 뛰어난 은총과 왕으로서의 위엄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는 회개를 통해 다시금 하느님께 돌아가지만,
가정사에서부터 정치적 분열까지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이는 잉글랜드의 헨리 8세와도 흡사합니다.
헨리 8세는 자신의 결혼 문제(육체적 욕망과 후계 문제 등)를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
교황청과 불화를 일으키고, 결국 영국 국교회를 분리시키며
파란만장한 역사를 만든 인물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열쇠는 교황에게 있지만, 성공회를 교황과 단절되게 함으로써
자기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도 교황한테서 오는 성령의 은총을 단절시켰습니다.
솔로몬 역시 지혜의 왕으로 불릴 만큼 은총을 받았으나,
재물과 쾌락에 집착하다가 영적 중심을 잃어버립니다(1열왕 11장).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사치와 이방 아내들이 늘어가면서,
하느님을 버리고 이방 신까지 섬기는 어리석음을 범합니다.
이것이 훗날 이스라엘 왕국이 남북으로
갈라지는 원인이 되었다는 점은 두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러한 몰락은 영화 「월 스트리트(Wall Street)」에서 잘 드러납니다.
1980년대 뉴욕 증권가를 배경으로,
주인공인 젊은 주식 중개인 버드 폭스(Bud Fox)는 부와 성공을 좇다가,
‘탐욕은 선(Greed is good)’을 외치는 대부 격인
고든 게코(Gordon Gekko)의 꾐에 빠져 불법과 비리를 저지릅니다.
처음에는 급격히 성장하는 듯 보이지만,
결국 모든 진실이 폭로되면서 재산과 명예를 잃고,
스스로도 깊은 자괴감에 빠지게 됩니다.
결국 “돈이 곧 행복을 보장해 줄 것”이라는 착각이 얼마나 위험하고 허망한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사람이 얼마나 영혼의 평화와 정직을
포기하게 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 줍니다.
이처럼 교만, 육체적 욕망, 재물에 대한 집착이 크면,
눈에 보이지 않는 성령의 은총보다
눈앞의 돼지 떼가 훨씬 더 커 보이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제가 직접 체험해 보니,
이 벽은 ‘한 번도 내려놓아 보지 않았을 때’ 더욱 견고하게 느껴질 뿐,
막상 용기를 내어 내려놓으면 정말 큰 자유와 기쁨이 찾아옴을 알게 됩니다.
저 자신도 세속을 이기기 위해 처음 십일조를 결심할 때
“이러다 생활이 힘들어지면 어쩌지?” 하고 걱정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처럼 “나를 시험해 보아라.”(말라 3,10)를 실제로 해 보니,
오히려 돈에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마음이 생기고,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하느님께서 채워 주시는 경험을 했습니다.
또 사제로서 여자 없이 살아야 한다는 것이 한편으로 두렵기도 했지만,
그 길 위에서 오히려 더 폭넓게 사랑하고 자유롭게 기도할 수 있게 되었음을 체감했습니다.
한 여인을 사랑하거나 사랑하고 싶은 욕구에 사로잡혀 있을 때가 오히려 감옥처럼 느껴집니다.
그리고 술 역시 “피부병 때문에 안 마셔야 한다.”라고 결심하고
한 달을 안 마시고 살아 보니, 몸도 좋아졌을 뿐 아니라
“왜 그동안 술의 즐거움에 애써 의존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마음이 가뿐해졌습니다.
결국에는 ‘해 보기 전에는 두렵고,
한번 내려놓아 보면 예상치 못한 은총이 열린다.’라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게라사인들이 돼지 떼를 지키려 예수님을 내쫓은 사건은,
결국 하느님께서는 “너희는 나를 시험해 보아라.”(말라 3,10)라고 하신
말씀을 듣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며칠만 예수님께서 함께 계셨다면 분명 더 성령의 열매,
곧 기쁨과 평화가 샘솟아 행복해짐을 느끼지 못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너무 서두르고 시험해 볼 생각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자기 생각이 맞는다고 교만해 있었던 것입니다.
성령은 분명 세.육.마.를 이기는 만큼 내 안에 들어와 나에게 은총의 성물을 주십니다.
그런데 세.육.마.를 이기는 방법은 한 번 시험해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짜 행복해지는지 느껴보는 것입니다.
해 보고 안 되면 돌아오면 됩니다.
그러나 해 보지도 않고 물리치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십일조부터 1년 동안 시험해 봅시다.
돈도 넉넉해지고 성령도 자신 안에 넉넉해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