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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2월 4일 연중 제4주간 화요일
제1독서 : 히브 12,1-4
복 음 : 마르 5,21-43
그때에 21 예수님께서 배를 타시고 건너편으로 가시자 많은 군중이 그분께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 호숫가에 계시는데, 22 야이로라는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을 뵙고 그분 발 앞에 엎드려,
23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 하고 간곡히 청하였다.
24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와 함께 나서시었다.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르며 밀쳐 댔다.
25 그 가운데에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는 여자가 있었다.
26 그 여자는 숱한 고생을 하며 많은 의사의 손에 가진 것을 모두 쏟아부었지만,
아무 효험도 없이 상태만 더 나빠졌다. 27 그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군중에 섞여 예수님 뒤로 가서 그분의 옷에 손을 대었다.
28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29 과연 곧 출혈이 멈추고 병이 나은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30 예수님께서는 곧 당신에게서 힘이 나간 것을 아시고 군중에게 돌아서시어,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셨다.
31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반문하였다.
“보시다시피 군중이 스승님을 밀쳐 대는데, ‘누가 나에게 손을 대었느냐?’하고 물으십니까?”
32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누가 그렇게 하였는지 보시려고 사방을 살피셨다.
33 그 부인은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알았기 때문에,
두려워 떨며 나와서 예수님 앞에 엎드려 사실대로 다 아뢰었다.
34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
35 예수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는,
“따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스승님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36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말하는 것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37 그리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동생 요한 외에는 아무도 당신을 따라오지 못하게 하셨다.
38 그들이 회당장의 집에 이르렀다.
예수님께서는 소란한 광경과 사람들이 큰 소리로 울며 탄식하는 것을 보시고,
39 안으로 들어가셔서 그들에게,
“어찌하여 소란을 피우며 울고 있느냐? 저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40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다 내쫓으신 다음,
아이 아버지와 어머니와 당신의 일행만 데리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셨다.
41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말씀하셨다.
“탈리타 쿰!” 이는 번역하면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는 뜻이다.
42 그러자 소녀가 곧바로 일어서서 걸어 다녔다.
소녀의 나이는 열두 살이었다. 사람들은 몹시 놀라 넋을 잃었다.
43 예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이 일을 알리지 말라고
그들에게 거듭 분부하시고 나서,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이르셨다.
<오늘의 묵상>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오늘 복음은 하나의 이야기 안에 다른 이야기가 들어가 엮인 전형적인 액자식 구성을 보입니다.
별개의 두 이야기이지만 믿음이라는 주제로 일관성 있게 짜여 있습니다.
그런데 두 이야기에서 믿음의 형태와 주님의 행동 방식은 사뭇 다르게 드러납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주님에 대한 믿음으로 직접 찾아와 용감하게 치유를 간청합니다.
하혈하던 여인은 예수님 앞에 감히 나타날 생각을 못한 채
군중 틈에 끼여 소심하게 뒤에서 그분의 옷자락에 손을 댈 뿐입니다.
오직 믿음 하나로, 과연 여인은 예수님의 의지 없이도 바라던 바를 얻었습니다.
어떤 교부의 말대로 이 ‘거룩한 도둑질’은 도둑맞으신 분에게서
오히려 칭찬과 축복을 받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의지가 아니라 바로 여인의 믿음이 그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인 분께 얼핏 불필요해 보일 수도 있는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마르 5, 30)라는 질문은
어쩌면 그 믿음을 사람들 앞에 드러내시려고 하신 것일지도 모릅니다.
한편 야이로에게는 결국 딸이 죽고 말았다는 절망적 현실에서 믿음이 더욱 굳건해지도록 요구됩니다.
“믿기만 하여라.”(5,36)라고 그에게 말씀하신 주님께서는 소녀에게 직접 단호하게 명령하십니다.
“탈리타 쿰!”(5,41) 여인의 치유와는 반대 양상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열두 해 동안 계속된 고통 속에서 더욱 간절해진 여인의 믿음과
어린 딸의 죽음 앞에서 도약하는 아버지 야이로의 믿음 사이 어디쯤 자리할까요?
조명연 마태오 신부
신부가 된 지 몇 년 안 되었을 11월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자동차 문을 닫다가 허리에 큰 통증이 찾아왔습니다.
그냥 주저앉았고 그 자리에서 일어설 수가 없었습니다.
다행히 근처에 사는 신부에게 전화해서 도움을 청했고,
이 신부의 도움으로 바로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신학생 때 테니스를 무리하게 쳐서 허리를 다쳤었는데, 그 자리였던 것입니다.
입원 후 치료받으면서 다시 일상생활을 할 정도가 되어 퇴원했습니다.
그런데 그다음 해에도 병원에 또 입원했습니다.
이번에도 11월이었고, 물건을 들다가 주저앉은 것입니다.
그다음 해에는 어떠했을까요? 맞습니다. 또 11월에 또 입원했습니다.
그다음은 어떠했을까요?
다행히 그 뒤 허리 때문에 입원한 적은 없습니다. 허리 운동을 꾸준히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종합검진 때, 허리 검사를 했는데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허리 근육이 잘 발달하여서 이제 허리 아플 일은 없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 말을 들어서일까요? 더는 허리 때문에 병원 신세를 지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왜 11월이 되면 입원했을까요?
아마 ‘허리가 또 아플 거야.’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람은 생각하는 대로 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 제한적 믿음이 실제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올바른 믿음이 중요합니다.
부정적 믿음을 갖게 되면, 여기에서 탈출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은 믿음의 중요성을 이야기해 줍니다.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는 여자는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해도 구원받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자기 믿음대로 출혈이 멈추고 병이 나았습니다.
회당장에게 딸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따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스승님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마르 5,35)
이런 말에 예수님께서는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마르 5,36)
사람들은 예수님을 비웃었습니다.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믿는 사람은 절대로 예수님의 일을 비웃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현실적으로 도저히 불가능한 일도 하느님의 뜻이라면
가능한 일이 될 수 있도록 하시는 주님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의 논리를 앞세워서 부정적 믿음을 계속 만들어 갑니다.
그래서 심지어 예수님을 향해 비웃음도 던지고 있습니다.
주님을 통해 가능한 것을 부정적인 믿음으로 불가능한 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하혈병을 치유 받은 여인 이야기'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의 소생 이야기'입니다.
오늘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의 소생 이야기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야이로는 회당장으로서 명예와 존경을 받는 자였지만,
죽어가는 어린 딸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 속수무책의 슬픔과 절망 속에서 야이로는 예수님께 와 엎드려 간청을 드립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마르 5,23)
죽어가는 딸을 살리기 위한 아버지의 이 애틋한 사랑과 믿음에 예수님께서는 그를 따라나섭니다.
비로소 딸을 살릴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막 길을 돌아서는데, 사람들이 소식을 전합니다.
“따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스승님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마르 5,35)
참으로 모든 희망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입니다.
깊은 절망과 슬픔에 빠져드는 순간입니다.
오로지 한 곳, 하느님께 희망을 두었는데,
그 희망이 이루어지는가 싶더니 와르르 무너져 버린 참담한 순간입니다.
그야말로 하염없이 넘어지는 절망의 순간, 억울함과 원망이 밀어닥치는 순간입니다.
이러한 순간을 맞이하면 우리는 어찌하는가?
이 절망의 순간, 억울함과 원망이 밀어닥치는 이 순간,
하염없이 넘어지고 말 것인가, 아니면 더 깊은 데서 물을 길어 올릴 것인가?
사실 바로 이 순간이 우리가 응답해야 할 순간입니다.
바로 이 순간이 더 깊은 곳으로부터 믿음을 퍼올리는 기회의 순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마르 5,36).
그렇습니다.
바로 이 죽음의 순간이 더 깊은 곳으로부터 믿음을 길러 올리는 순간이었습니다.
생명을 들어 올리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위기의 순간이 믿음의 시련이기도 했지만, 바로 기회의 순간이었습니다.
‘따님이 이미 죽었으니, 스승님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없다’는 사람들의 말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는 예수님의 말을 따를 것인가 라는
결단의 바로 이 순간이 믿음이 성장하고 성숙해지는 순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서도 야이로의 믿음을 끌어올리십니다.
딸의 병을 고쳐주실 분으로 믿었던 예수님을,
이제는 이미 죽은 딸을 살려내실 수 있는 분으로
그 믿음을 끌어올리시는 순간입니다.
바로 이 순간이 믿음이 자라나는 순간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더 깊은 믿음에로 이끄신 까닭입니다.
참으로 믿음은 우리의 능력을 넘어서 있습니다.
우리가 끝났다고 여길 때, 바로 그때 하느님께서는 일을 시작하십니다.
우리가 절망적이라고 여길 때, 바로 그때가 구원의 때요, 은총의 때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마르 5,41)
하오니, 주님!
오늘 저희가 일어나게 하소서!
말씀을 듣고 일어나게 하소서!
믿음으로 일어나게 하소서!
당신과 함께 일어나게 하소서!
일어나 진리 안을 걷게 하소서!
<오늘의 말 · 샘 기도>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마르 5,30)
주님!
군중 속에 있지만 말고 당신 옷에 손을 대게 하소서!
쫓아다니지만 말고 당신 옷을 꼭 붙들고 따르게 하소서!
간절함과 믿음으로 말씀의 옷깃을 꼭 붙들게 하소서!
당신 말씀의 옷을 입히시어 당신 생명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믿음으로 무릎을 꿇자.
반영억 라파엘 신부
어려서의 기억입니다. 배가 아프다고 하면 어머니께서는
놋쇠 밥그릇 뚜껑을 따듯하게 하여 배에 올려놓고 쓰다듬어 주셨습니다.
때때로 “내 손이 약손이다”하시며 배를 만져주시면 곧 통증이 멈추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일반적으로 배를 차게 하면 탈이 나니까
밥그릇 뚜껑을 이용해 따뜻하게 해 줌으로써 그 원인을 치료해 주었던 것입니다.
거기에다 어머니의 사랑과 믿음이 담긴 약손이었으니 낫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려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마을 사람들에게서 명예와 존경을 받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회당장이 “예수님을 뵙고 그분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누구 앞에 엎드린다는 것은, 항복한다는 것이요, 모든 것을, 맡긴다는 의미입니다.
그럼에도 무릎을 꿇었다는 것은 그의 믿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어린 딸이 병으로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에게 다가온 큰 고통이 회당장을 무릎 꿇게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주님의 능력을 만났습니다. 그렇다면 고통도 은총의 한 부분입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의 시련과 역경, 고통, 눈물을 거두어 주리라!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라. 믿음으로 승리하여라!
일반적으로 회당장처럼 높은 직책을 가지고 있으면 근심 걱정거리가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회당장의 내면을 보면 감당할 수 없는 아픔을 안고 있었습니다.
회당장은 그 고통을 통하여 그동안 보지 못했던 곳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고
자신의 무능력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결국 무릎을 꿇고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마르5,23). 하고 간곡히 청하였습니다.
만약에 회당장이 죽어가는 어린 딸을
절망과 슬픔 속에서만 바라보고 있었다면 아이를 살리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지위도 있고 부러워할 것 없는 회당장이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어린 딸에 대한 한없는 사랑은 그보다 더한 일도 하게 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가능케 합니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합니다.
우리는 일상 안에서 남모르는 근심 걱정거리를 안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말 못 할 고민이나 근심 앞에서 회당장처럼 무릎을 꿇는지,
아니면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마르4,39) 하고
두려워하는 태도를 보인 제자들의 모습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시련과 고통, 어둠 속에서도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내 안에 자리를 잡고 당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나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것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
그리고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로마5,3-5).
오늘은 믿음의 손이 그리운 날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페루에서 선교하시는 수녀님이 왔습니다.
잠시 머물려고 했는데 어느덧 27년이 지났다고 합니다.
수녀님은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가정 방문을 하면서 어린 딸과 함께 사는 눈이 먼 엄마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집에는 먹을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수녀님은 먹을 것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미국에서 온 후원자와 다시 방문했을 때입니다.
후원자는 수녀님께 엄마를 병원에 데려가 보라고 했습니다.
혹시 볼 수 있다면 기꺼이 도와주겠다고 했습니다.
수녀님은 엄마를 데리고 병원에 갔습니다.
의사는 검사한 후에 빛을 받아들이기에 수술하면 다시 볼 수 있을 거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의사가 수녀님에게 물었습니다.
수녀님은 이 자매와 어떤 사이인데 이렇게 데려왔습니까?
수녀님은 선교사라고 했고,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이기에 모두가 한 가족이라고 했습니다.
수녀님의 말을 들은 의사는 수녀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도 그 엄마의 눈을 뜨게 하는데, 도움을 주고 싶습니다.
한쪽 눈을 뜨게 하는 비용을 도와주고 싶다고 했습니다.
나중에 하늘나라에 가면 하느님께 자기도 착한 일을 하였다고 말하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엄마는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수녀님이 엄마에게 물어보았다고 합니다.
눈을 떠서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입니까?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딸의 얼굴을 보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딸을 위해서 음식을 만들고 싶습니다.
수녀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한 일도 전염이 됩니다.
후원자의 따뜻한 마음이 의사의 마음을 움직였고, 눈이 먼 엄마는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저는 수녀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예전에 영어 시간에 배웠던 글이 생각났습니다.
동네 길가에 뾰족하게 나온 돌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지나다니면서 그 돌 때문에 넘어지곤 했습니다.
그런 어느 날입니다.
마을의 한 청년이 곡괭이를 가지고 와서 뾰족하게 나온 돌을 캐기 시작했습니다.
빙산의 일각처럼 돌의 일부만 나온 것이지, 커다란 돌이 묻혀있었습니다.
청년이 돌을 캐내기 시작하니, 마을 사람들이 힘을 모아 돌을 치웠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넘어지는 일 없이 길로 다닐 수 있었습니다.
45년이 지났는데도 그때 읽었던 글이 생각나는 건, 제게 무척이나 인상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도 길가에 떨어져 있던 타이어를 옮긴 적이 있습니다.
차들이 다니는 길이고, 자칫 타이어 때문에 사고 날 수 있기에 옮기면서 기분이 좋았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많은 증인이 우리를 구름처럼 에워싸고 있으니,
우리도 온갖 짐과 그토록 쉽게 달라붙는 죄를 벗어 버리고,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
복음을 보면 따뜻한 마음을 지닌 사람들의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자기가 데리고 다니는 종을 위해서 예수님께 치유를 청했던 백인대장이 있습니다.
백인대장은 예수님께 굳이 오시지 않고, 한 말씀만 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이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을 도와주었던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제와 레위는 강도당한 사람을 외면했지만,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당한 사람을
여관에 데리고 가서 치료받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었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율법 학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신앙을 갖는다는 건, 증인이 되는 겁니다.
교회가 2000년을 이어올 수 있는 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한 증인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탈리타쿰’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일어나라.’라는 뜻입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일어나는 겁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일어나는 겁니다.
두려움에서 담대함으로 일어나는 겁니다.
나태함에서 성실함으로 일어나는 겁니다.
기적이 있어서 믿는 것이 아니라, 믿으면 기적이 따라오는 겁니다.
오늘은 중용 23장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작은 일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정성스럽게 되면 겉에 배어 나오고
겉에 배어 나오면 겉으로 드러나고
겉으로 드러나면 이내 밝아지고
밝아지면 남을 감동하게 하고,
남을 감동하게 하면 이내 변하게 되고 변하면 생육 된다.
그러니 오직 세상에서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걱정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조욱현 토마 신부
회당장은 죽어가는 딸을 위해 주님께 도움을 청한다.
이것은 모든 부모의 자녀들에 대한 사랑의 마음일 것이다.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23절)
회당장이 이렇게 청하자, 예수님께서는 그와 함께 그의 집으로 가고 계셨다.
많은 군중 틈에서 12년 동안 하혈하던 여인이 등장한다.
여인은 의사들에게 병이 낫기 위해 가진 것을 모두 쏟아부었다.
오랜 투병 생활로 그의 심신은 피폐해졌고, 죽음에 가까이 이르고 있었다.
그녀의 생명까지도 쇠약해졌기 때문이다. 여인은 고통 속에서 주님께 부르짖었다.
주님의 옷을 만진 것은 믿는 마음의 부르짖음이었다.
육체로는 스스로 부당하다고 여긴 여인은 마음으로 다가가 믿음으로 하느님께 손을 댄다.
여인은 그 순간 치유되었음을 느낀다. 아드님의 치유 능력을 통하여 여인의 믿음이 드러났다.
주님께서는 여인의 숨은 믿음을 보시고, 눈에 보이는 치유를 선사하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건강해져라”(34절).
회당장의 딸이 죽었다고 소식을 전해왔을 때,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36절).
회당장은 믿었고, 딸은 되살아났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데리고 집으로 가시어 사람들을 다 내쫓으셨다.
“저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말씀하시고 나서,
아이 아버지와 어머니와 세 사도와 함께 아이가 있는 방으로 들어가셨다.
소녀를 깨우실 수 있는 분에게는 소녀가 그저 자고 있었을 뿐이다.
예수님께서는 아이의 손을 잡고
“탈리타 쿰!”,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41절) 뜻이다.
주님의 목소리에 소녀의 숨이 곧바로 돌아왔다.
소녀는 깨어났고 살아난 아이를 부모에게 돌려주셨다.
소녀는 되살아난 몸으로 일어났고,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음식을 먹었다(43절).
우리 자신 역시 주님 앞에 나아가기 부당한
하혈하는 여인과도 같을 수 있으며, 잠을 자는 소녀와도 같다.
주님이 말씀 한마디로 치유 받을 수 있도록 믿음으로 주님께 다가갈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일어나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
신앙의 정곡의 길을 히브리 서간의 저자는 다음과 같이 안내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도 온갖 짐과 그토록 쉽게 달라붙는 죄를 벗어 버리고,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
그러면서 우리 믿음의 영도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히브 12,1-2)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잊지 말아야 할 지침인 것이지요.
바로 세상 살면서 여러 가지 장애와 주춤함이 있다해도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살아간다면 이 세상을 신앙인으로 잘 살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서간의 저자는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성실하신 그분의 삶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앞에 놓인 기쁨을 내다보시면서,
부끄러움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견디어 내시어,
하느님의 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히브 12, 3)
서간의 표현대로 주님이야말로 어떠한 부끄러움에 구애됨이 없이
십자가의 수치까지 겪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에 대한 한없는 사랑이신 것입니다.
죽음의 순간과 병 고통에서 지친 한 여인에 대한 치유의 손을 내미신
주님에게서 그 사랑을 나눌 수 있습니다.
회당장은 모두가 우러러보는 사람이었습니다.
얼핏 보기에는 그에게 어떤 아쉬움도 없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그도 그의 사랑하는 딸의 죽음의 위기 앞에 한탄 아버지였습니다.
그의 주님 앞에서의 간청은 너무나 간절했기에
누구에게도 무릎을 꿇은 적이 없는 그였지만, 자신도 모르게 그분 앞에 엎드려
자신의 딸을 살려주십사 애걸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의 청을 들어주시려 길을 떠나십니다.
그 길에서 열두 해나 하혈하는 부인을 만납니다.
그 부인도 주님을 깊게 신뢰하지만, 자신의 병이 부끄러워 주님의 옷자락을 만집니다.
주님께서는 그러한 여인을 사랑하시고 끝내 손을 내밀어 사랑을 전하십니다.
이야기는 죽음의 절망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죽었기 때문에, 더 이상 예수님이 필요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그 소녀를 잡으시고 일으켜 세우십니다.
주님께서는 병의 처참함, 희망에서 절망의 상황에서도 그곳에 계십니다.
모두가 떠난 것 같은 허황한 곳에서 주님께서는 손을 내밀고
치유와 사랑을 베풀어 일어나게 하십니다.
바로 그들의 절망을 십자가의 수모와 십자가의 고통에서
이미 다 겪으시며 이기셨습니다.
한 옹큼도 안 되는 세상의 위로를 찾지 말고
무한하신 주님의 사랑을 찾고
그 사랑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용기를 찾읍시다.
우리는 이 시대 또 다른 예수님이요, 하느님의 손가락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하혈하는 여인의 치유뿐만 아니라
이미 숨이 끊어진 회당장 딸의 목숨까지 소생시키신
예수님의 전지전능한 모습에 사람들은 너무 놀라 그야말로 넋을 잃을 지경이었습니다.
‘넋’은 다른 말로 ‘혼(魂)’, ‘혼백(魂魄)’, 영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넋이라는 것은 죽어야 사라지는 것이지만,
갑작스레 큰 충격을 받을 경우, 모든 생각이나 사고가 일시 정지되는데,
이런 상태를 넋이 나갔다고 표현합니다.
그만큼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진 치유나 구마, 소생은
충격적인 것이었으며, 역사상 전무후무했던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놀라운 능력은
그분 안에 하느님께서 역동적으로 활동하고 계심을 드러내는 표지였습니다.
은혜롭게도 잠시나마 예수님과 함께했던 사람들은
어쩌면 그들이 그토록 고대했던 하느님 나라를 잠시나마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이 대목에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하나 던져봅니다.
왜 우리 시대에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놀라운 치유와 구마, 소생 현상을 찾아보기 힘든 것인가?
왜 우리 사제들과 수도자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러한 능력이 주어지지 않는 것인가?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꼭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방식이 좀 다르지만, 예수님 시대 그 역동적이고 충격적이었던
치유와 구마, 소생 현상은 오늘도 우리 가운데 계속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손가락을 통해 이루어지던 놀라운 일들이 지금,
이 시대에는 또 다른 선인들과 의인들을 통해 지속되고 있음을 저는 볼 수 있습니다.
오랜 세월 잘 준비된 의료진들과 누군가의 피나는 연구 끝에 발명된 최첨단 의료기기들이
질병으로 인해 고통받고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치유시키고 살려내고 있습니다.
질병으로 고통받는 이웃들을 그 고통에서 해방시키고 싶은
선한 의지를 지닌 의료진들의 얼굴은 이 시대 또 다른 예수님의 얼굴입니다.
전쟁터에서 죽어가는 어린이들, 그 누구도 환영하지 않는 난민들을 돕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고, 그들을 존중하고 지지하며 후원하기 위해
나를 희생하는 사람들은 제2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주변을 살펴보면 얼마나 많은 이웃들이 소리 없이 죽어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너무 아프고 견디기 힘들어서
겨우겨우 통증을 참아내고 신음소리를 내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시대 또 다른 예수님이요,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2천 년 전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그 사랑의 기적을
각자에게 적합한 방식으로 계속해 나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죽음이 생명으로 가는 현장 체험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예수께서 ‘군대’라는 마귀가 들린 사람을 고쳐주시고,
그 마귀의 무리를 2,000마리 돼지 떼에 불어넣어 물에 빠져 죽게 하신 일로
더 이상 게라사(게르게사)에 머무를 수 없었다.(마르 5ㅡ1-20)
자초지종을 모두 알게 된 마을 사람들은 마귀 들렸던 사람이
치유됐다는 사실을 기뻐하기보다 막대한 손해를 입은 일을 더 아깝게 여겼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께 떠나달라고 간청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이방인의 지방 게라사에 한나절도 채 계시지 못하고
배를 타고 다시 호수 건너편으로 가셔야만 했다.
예수와 제자들은 떠났지만 이곳에는 마귀의 억압으로부터 자유를 찾은 이가
또 다른 제자가 되어 예수의 복음을 계속 선포할 것이다.
예수께서 배를 타고 다시 돌아오신 곳은 비유설교(4,1-34)를 행하셨던 바로 그 호숫가이다.
예수께서 그곳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큰 군중이 몰려들었다.
군중 속에는 예수님의 자비를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오늘 복음은 두 편의 기적 사화를 전해주고 있는바,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되살린 소생기적사화와
그 중간에 하혈병을 앓던 부인이 예수의 옷자락에 손을 댐으로써
스스로 치유를 받는 치유기적사화가 그것이다.
이 두편의 기적사화는 본디 따로 전해오던 것을
마르코가 한데 묶어 햄버그 형식으로 편집한 것으로 보인다.
햄버그 형식의 편집은 일종의 話術로서
긴장감을 고조시켜 새로운 頂上을 일구어내는 기법이다.
그 기법은 심하게 앓고 있는 아이를 살려달라는 간청을 향한 발걸음 도중에,
엉뚱한 하혈병 여인이 치유되고, 그 사이에 죽은 아이에게
생명을 다시 선사하는 소생기적으로 마무리된다.
어긴 딸이 죽어가는데 아버지의 체면이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당시 유대사회에서 제법 높은 지위를 가진 회당장 야이로는
예수의 발 앞에 사정없이 무릎을 꿇었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마귀 들린 사람을 치유하실 때(1,21-28),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었을 때(3,1-5) 바로 그 자리에 있었을 것이고,
예배를 주관하고 감독하는 직책을 맡은 회당장 야이로가
다른 바리사이파와 헤로데 사람들과 함께 예수를 제거하려는
謀議에 가담했을지도(3,6) 모르는 일이다.
아무튼 오늘은 그가 예수께 자기 딸을 고쳐 달라고 간곡히 부탁을 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無言으로 청을 받아들여 회당장의 집을 향하셨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둘러싸고 밀어대며 따라가는 장면이 돌발사태를 예고한다.
12년간 투병에 육체적 심리적 고통은 말할 것도 없으려니와
가산마저 탕진해 버린 한 여인, 그녀에게 삶이란 곧 죽음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엎치락뒤치락 떠밀려 가는 군중 속에서
마지막 남은 한 가닥 믿음을 예수님의 옷자락에 걸고 따라가고 있었다.
여인의 믿음은 빗나가지 않았다.
옷자락을 통한 치유의 힘은 여인을 낫게 하였고,
이어 예수님의 말씀은 죽어가는 여인에게 생명을 선사했다.
“여인아,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34절)
죽어가는 여인의 삶에 생명이 선사 되는 동안 다른 살아있던 생명이 죽음을 맞이하였다.
수많은 병자들과 마귀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치유하시고
바람과 풍랑까지도 다스리시는 예수께서
죽음만은 어찌할 수 없다고 사람들은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예수께 죽음이란 잠시 지나가는 잠과도 같다.(39절)
예수께서 죽은 소녀의 손을 잡고
“탈리타 쿰”(Talitha cumi), “thsudi, 일어나라”(41절) 하고 말씀하시자,
소녀는 마치 잠에서 깨어나듯 벌떡 일어나 걸어 다녔다.
부활한 것은 아니나 소녀는 소생하였다. 죽음에 생명이 선사 된 것이다.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잠자고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코웃음을 치는 사람들에게
죽음이 생명으로 바뀌는 현장 체험은 허락되지 않았다.
오직 예수께서 택하신 사람들, 예수 앞에 무릎을 꿇었던 아버지(부모)와
나중에 거룩한 변모의 산(마르 9,2)과 죽음의 피땀을 쏟은 게쎄마니(마르 14,33)에서도
스승과 함께 있을 베드로, 야고보, 요한에게만 그 현장 체험이 허락되었다.
이 제자들은 未久에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을 체험하게 될 것이고 또 증인이 될 것이다.
예수의 부활은 예수께서 진정 생명의 주인이며 생명을 선사하는 분임을 증명하는 사건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緘口 되어야 하며,
오직 믿음을 가진 자의 마음속에만 참 생명의 의미와 고마움이 있을 뿐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