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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장 32~34절/성령침례
우리는 침례요한이 주님을 증거 할 때 ‘자신을 물로 침례를 베풀지만 예수님은 성령으로 침례를 베푸는 자라’(33절) 말한 것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즉, 성령침례는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말씀하는 것이고 이것은 단회적으로 일어나는 구속사적인 사건이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우리가 거듭날 때, 성령으로 침례를 받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은 성령침례를 받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또 성령침례를 주신 목적은 거듭난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 세우시기 위함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구약시대에 노아나 아브라함이나 다윗 같은 사람들이 어떻게 구원받았는가? 물론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거듭나지 않으면 구원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침례를 통해서 열려진 새로운 일이 무엇인가하면 교회가 탄생한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은 혈족집단이었기 때문에 그 자체로서 단일성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약교회는 모든 민족으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공동체입니다. 무엇이 이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겠습니까? 오직 성령님께서 믿는 각 사람에게 침례를 줌으로써 그들은 신앙을 하나로 묶어낼 수 있게 되었고 한 몸 곧 교회를 이루게 하실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약성경에서 보는 성령님의 역사는 주로 어떤 개인들에게 임하셔서 그들이 맡은 일을 능력 있게 감당하게 하는 것이 두드러진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침례를 통해서 세워진 교회는 인종이 다르고, 신분이 다르고, 사회적 여러 환경이나 조건이 다르지만 결국 신비스럽게도 한 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1. 하나님 나라에 이등 시민은 없습니다(고전 12:13; 갈 3:28; 골 3:11; 롬 10:12~13).결국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내리게 되는 결론은 하나님 나라에 이등 시민은 없다는 것입니다. 즉, 성령침례 받은 그리스도인과 성령침례 받지 않은 이등 그리스도인의 구분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는 구분입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면 그 사람은 성령침례를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교회에서 많은 비성경적인 구분과 구별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1)그리스도 안에 있는 다양한 구분과 차별들의 모습들중세 말에는 정말 심각할 정도로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별이 컸습니다. 기독교신앙의 거의 모든 영역이 이러한 구분에 의해서 이루어졌고 이러한 구분을 정당화했습니다. 일반성도의 신앙은 거의 절대적으로 사제에 의존해야만 했습니다. 종교개혁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잘못된 구분을 깨뜨린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신교 안에서도 종종 우리는 목사와 평신도를 비성경적으로 구분내지는 차별하는 것을 찾아보게 되는데 성경은 이것을 용인하지 않습니다. 이것뿐이겠습니까? 은사 받은 그리스도인과 은사 받지 않은 그리스도인의 구별도 있습니다. 여기서 은사는 주로 드러나는 것인데 방언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방언하는 사람과 못 하는 사람의 구별입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에서 이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분명하게 말씀했습니다. 또 있습니다. 교회가 요구하는 어떤 교육 커리큘럼을 이수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구별도 있습니다. 혹 이것은 제자와 일반신자의 구별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제자와 신자를 구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는 않고 먼 거리에서 예수를 믿는 사람은 성경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신자는 제자입니다. 초대교회 때부터 이런 구별을 하려는 유혹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출신배경에 따라서 유대인과 헬라인 사이에서, 혹은 할례의 유무에 의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더욱 이렇게 선언합니다.고전 12장 13절에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침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갈 3장 28절에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골 3장 11절에 “거기는 헬라인과 유대인이나 할례당과 무할례당이나 야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분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이것은 바울 사도가 공연히 한 말이 아니라, 실제로 초대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던 잘못된 구분들에 대하여 주신 말씀입니다. 이런 모든 구분은 복음의 능력 안에서 무색한 것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2)모든 신자 안에 성령님이 내주하신다(롬 8:9).우리가 여기서 다시 한 번 확인할 것은 모든 거듭난 그리스도인 안에는 성령님이 내주하신다는 사실입니다.롬 8장 9절에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이것은 너무나 분명한 말씀이고 선언입니다. 성령님은 은사는 달라도, 직분은 달라도, 교회 경력은 달라도, 모든 거듭난 신자 안에 내주하셔서 결코 그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모든 성도가 누리는 가장 놀라운 특권입니다. 사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믿기 힘든 사실이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의 더러운 육체와 마음에,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거하실 수 있으시다는 말입니까? 주님이 하신 말씀을 기억해보십시오. 요한복음 15장 5절에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그래서 바울 사도는 물었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 3:16).3)성경은 성령침례를 받으라거나 그것을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행 1:5 예외).그러므로 성령침례는 그리스도인을 두 종류로 나누는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또 하나 성경에서 보게 되는 사실은 결코 성경이 성도들에게 성령침례를 받으라고 명령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한 가지 예외는 사도행전 1장 5절에서 주님께서 오순절 성령강림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을 제외하면 말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은 주님의 십자가 죽음과 마찬가지로 반복되지 않는 구속사적인 사건이기에, 오늘 우리가 다시 성령침례를 그런 방식으로 받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다만 그날 부어진 성령침례를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될 때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 안에 적용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침례를 위해서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4)신자 개인의 신앙성숙도, 하나님과의 교제의 깊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여기서 한 가지는 지적하고 넘어가야겠습니다. 비록 그리스도 안에 구별이나 차별이 없다고 하더라도 신자 개개인이 가지는 신앙 성숙의 정도나 그가 하나님과 교제하는 정도의 깊이에 있어서는 많은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비록 우리가 이것을 가지고 어떤 성적을 매길 수는 없을지라도 우리 모두에게는 신앙 성숙의 정도와 하나님과의 교제의 깊이에 있어서 아주 큰 차이가 있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러한 것은 개인이 주님을 닮아가고자 하는 믿음의 헌신에 해당하는 것입니다.2. 성령 체험의 문제오늘 여러분과 함께 상고하고자 하는 것은 성도가 회심한 후에 가질 수 있는 성령체험입니다. 먼저 성경에서 한 가지 드러난 표현을 여러분께 소개하고 싶습니다.1)‘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은 무엇인가?(벧전 1:8)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1장 8절에서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이 서신을 받는 수신자들인 성도들 가운데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본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이 전해준 복음을 듣고 그들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주님이 주시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사도 베드로는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이것은 그냥 ‘예수 믿으니까 좋다’ 하는 담담한 어떤 생각을 표현한 것은 아닙니다. 말 그대로 ‘너무나 영광스러워서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그런 기쁨’을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의 전 존재와 영혼을 삼키는 기쁨과 같은 것입니다. 제가 묻고 싶은 것은 여러분은 이런 기쁨을 알고 계신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인지 경험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2)무기력하고 증거와 확신이 없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오늘날 정말 무기력하고 증거와 확신이 없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보게 됩니다. 여기에 물음표를 다는 것은 그가 무기력함과 그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과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에 대한 아무런 증거도 없으며 확신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정말 그리스도인일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런 그리스도인이라면 핍박과 박해가 일어난다면 신앙과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게 되지 않을까요? 더 부유해지고, 더 출세하고 성공하기 위해서, 혹은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 기독교를 선택한 사람들이라면 어떻게 고난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증거 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교회가 전하는 복음이 번영의 복음이라면 그것은 성경이 말씀하는 복음은 아닌 것입니다. 그런 복음은 평화로운 시기에 교회당 안에 구름같이 많은 사람들을 모이게 할 수는 있을지라도 시련이 닥칠 때에는 다 떠나가고 말 사람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3)성령을 받고 은혜를 체험하고 내적 변화(성화)의 과정을 경험하기 시작한 사람들이 교회 안에 소수라면 어떻게 교회가 교회될 수 있겠는가?제가 오늘날의 교회를 보면서 심각하게 고민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성령을 받고 은혜를 체험하고 내적 변화의 과정을 경험하기 시작한 사람들이 교회 안에 너무나 소수라는 사실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교회를 다닌다고 하지만, 그들 안에 아무런 증거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냥 믿음의 형식과 겉모양을 갖추었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내면에서는 거룩함을 향한 꺼지지 않는 갈망과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은혜를 깊이 사모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거듭난 증거가 무엇입니까? 단지 교회를 다니고 있다는 것, 교회에서 직분을 갖고 있다는 것이겠습니까? 참으로 은혜를 체험하고 거룩한 변화가 그 안에서 일어난 사람들이 교회 안에 소수라면 어떻게 교회가 참 교회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저 교회에 많은 사람들이 오고 있다는 사실 하나로 만족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목회를 하는 저에게 있어서, 그리고 이 시대의 교회들을 바라보는 한 사람의 신자로서 가지는 심각한 고민인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말씀한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를 아는 자들이 얼마나 되는 것입니까?4)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지, 확신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다시 한 번 제가 여기서 말해야만 하는 것은 지금 그리스도인들을 이런 체험을 가진 사람과 가지지 않은 사람으로 구분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지, 확신으로 구원 얻는 것이 아닙니다. 즉,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구원 얻은 것이 아닙니다. 비록 작은 믿음이지만, 내가 죄인임을 인식하고 구주의 도우심이 없이는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를 피할 수 없는 자임을 알고 그리스도께 나아옴으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로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런 체험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3.회심 이후의 성령 체험은 존재한다.분명히 이런 체험, 회심 이후에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과 그 존재를 깊이 체험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을 굳이 성령체험이라고 말하자면, 이런 것은 신자의 삶 속에 존재합니다. 제가 이것을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의 글에서 소개하려고 합니다.먼저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체험입니다.1739년(21세 때)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할수록 긍휼이 필요한 내 자신과 은혜를 입고 있는 내 자신을 깨닫게 된다. 나는 자신의 관심거리만 가지고 기도했을 뿐, 하나님의 영광에 관심을 둔 기도는 거의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음을 알았다. 이제야 나는 나의 기도와 하나님이 긍휼을 베푸심 사이에는 필연적인 관련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내가 드린 자기중심적인 기도에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은혜 베푸실 의무가 없었다...바다 한 가운데서 '손으로 노를 대신하여 젓는 것'보다 더 무기력한 기도라 할 수 있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데서 우러나오는 기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실로 수차례 생각을 거듭했다고 자부했으며 금식하고 기도하며 하나님 앞에 헌신적인 사랑을 쌓아온 줄 알았다. 그런데 사실 나는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데 열중했을 뿐, 그 밖에 하나님의 영광은 한 번도 고려하지 않았다. 하나님을 위해 어떤 일을 해본 적이 결코 없었으며 하나님 앞에서 어떤 일에 관하여 긍휼을 바랄 수도 없었다. ......기억나는 바로는 이런 심정의 상태가 금요일 아침부터 주일의 저녁(1739년 7월 12일)까지 계속되었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무력하고 망연자실해 있던 자신을 발견하고 정신 차린 후 한적한 장소를 또 산보하고 있을 때였다. 비록 침통한 우울에서 벗어나지는 못하였지만, 여기서 기도를 해보려고 애썼다. 그러나 기도나 어떤 다른 일도 하고 싶은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하나님의 영이 아주 나를 떠나 버리셨나보다 생각했다. 그렇지만 아직 절망적 상태까지 빠져있지는 않았다. 단지 천하에 나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아 여전히 울적했던 것이다. 그래서 무척 무미건조하고 변변찮은 기도였지만 반시간 가량은 힘써 했다. 어둡고 울창한 숲속을 걷고 있는 바로 그 때, 시야가 확 트이는 것 같더니, 이루 형용할 수 없는 영광이 나의 심령을 사로잡았다. 나는 그것을 외적 광명(External Brightness)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삼층 천이나 그런 세계에 존재할 것 같은 어떤 발광체란 뜻도 아니다. 나는 그런 것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이전에 한 번도 이런 체험을 해본 적이 없었을 뿐 아니라 조금 비슷한 일조차 겪어보지 못했었다. 나는 경이로움과 탄복할 수밖에 없는 그 영광에 압도당한 채 잠잠히 서 있었다. 이렇게 특이하고 아름다운 일에 비견할 만한 것을 나는 본 적이 없었다. 이제껏 하나님께 대해서도 성스러운 일에 대하여 내가 품어왔던 관념과는 너무나 달랐다.나는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어느 한 위격에 대해서도 특별한 깨달음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때 본 체험은 하나님께 대하여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신령한 영광처럼 느껴졌다. 이 빛나고 성스러우신 분, 하나님을 본 듯한 말할 수 없는 기쁨이 영혼 속에 넘쳤다. 나는 영원히 우리 가운데 왕 노릇하신 분을 본 듯한 만족감으로 차 있었다. 하나님의 탁월하시고 위대하시고 아름다우시고 또 완전무결하신 품에 내 영혼은 황홀히 안겨 있는 듯 했다. 나는 자신의 구원에 관한 생각까지 잊어버릴 정도였다. 내가 피조물이란 사실까지 망각하고 있었다. 온 우주의 왕으로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신 궁극적 목적은 모든 영광과 존귀와 찬송을 한 몸에 받으시기 위함이로구나! 이 내밀한 기쁨과 평화는 밤이 깊어가도 감동 깊게 가슴 속에서 부풀고 있었다. 나는 저녁 시간에 내가 체험한 이 일을 검토해 보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것은 다음 날 저녁까지도 온통 내 마음을 차지하고 감미로움을 주었다. 내 자신이 새로운 세계에 있는 것 같았고 모든 일들이 나에게는 전에 해온 것들과는 전혀 판이한 양상으로 나타났다.저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경험을 하나 더 소개하겠습니다.1737년(34세 때)나는 건강을 위해 숲속으로 말을 타고 가서, 보통 때처럼 깊은 묵상과 기도를 위해 산책을 하고 한적한 곳에서 말에서 내렸다. 그때 나는 이상한 광경을 보았다. 그것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이신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에 대한 것이었으며, 그분의 모습은 훌륭하고 위엄과 충만함과 순수함 그리고 은혜와 사랑, 온유하고 부드러운 겸손으로 가득하였다. 아주 조용하고 아름답게 보이는 그 은혜는 하늘보다 더 크고, 그리스도의 인격은 말로 나타낼 수 없게 훌륭하여 그 뛰어남은 모든 사상과 개념들을 모두 삼켜버릴 만큼 위대하게 보였다. 그 광경은 내가 판단하기로는 대략 한 시간 동안 지속되었는데, 나는 그 시간의 대부분 동안 눈물바다와 큰 소리로 보냈다. 나는 영혼의 열정이 텅비어버리고 없어져 버리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거룩하고 순수한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믿으며 그리스도를 의지해 살고 그리스도를 섬기며 따르고 싶었다. 하나님과 천국의 순수함으로 완전히 성화되고 순수하게 되고 싶었다. 나는 다른 때에도 여러 번 이와 비슷한 체험을 했는데 그때마다 같은 감동을 받았다.여러분은 이런 대단한 목사들이나 그런 체험을 했을 것이라고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사랑했고 하나님께서 은혜 베푸시기를 기뻐하셨던 많은 성도들은 그들의 회심 이후에 이런 은혜의 체험을 가지곤 하였습니다. 다만 이런 신학자나 목사들은 그 기록을 매우 정확하게 묘사할 수 있었다는 점이 다를 것입니다. 이런 체험을 성령침례라고 그들은 말하지 않습니다. 이런 은혜를 체험하게 될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날까요?1)확신을 줍니다.제일 먼저 말할 수 없는 확신이 찾아옵니다. 부인할 수 없고, 억제할 수 없는 그런 확신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뜨겁게 경험하게 됩니다. 성령님께서 이런 체험에서 하시는 일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되었음을 확신케 하심으로 우리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게 하시는 것입니다(롬 8:15~16). 이런 체험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어떤 고난도 감당하게 해주는 힘이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도행전에서 사도들과 초대교회의 성도들로부터 보게 되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자기가 믿는 줄 알고 있다가 갑자기 어떤 체험을 한 후에 성령 침례를 받았다고 말할 수 있는데, 이것은 사실상 중생 후에 성령침례가 아니라 그가 중생하면서 얻게 되는 성령침례의 체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은혜를 체험하게 되면 이전과 이후는 매우 다른 차이를 가지게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과 예배의 기쁨, 하나님과의 관계의 즐거움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회심 후에 이런 체험을 하게 될 때 그것을 굳이 설명하자면, 성령 충만의 체험이라고 하는 것이 가장 성경적이고 옳은 것이 될 것입니다.2)능력을 줍니다(성경의 사례들 눅 4:1,14)이런 성령 충만의 체험은 확신을 주는데서 끝나지 않고 성도로 하여금 능력을 얻어서 하나님을 섬기게 합니다. 주님께서도 성령의 충만함을 입으셔서 40일의 금식을 감당하셨습니다(눅 4:1). 사도 베드로는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서 산헤드린 공회에 모인 지도자들 앞에서 능력있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였습니다.(행 4:8). 성도들이 함께 모여서 기도할 때 모인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증거하였습니다.(행 4:31). 스데반 집사는 성령이 충만하여 돌에 맞아 순교하는 현장에서도 하늘 문이 열리고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를 보고 고통을 견딜 능력과 평강을 얻었습니다(행 7:55). 바울 사도도 성령이 충만하여서 복음을 능력 있게 증거 할 수 있었습니다(행 13:9). 이처럼 성령의 충만함은 성도로 하여금 능력 있게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합니다. 주님을 섬길 수 있는 능력을 줍니다. 우리 가운데 이 은혜를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3)교회의 하나 됨을 지키게 합니다(엡 4:3)성령 충만의 체험은 교회의 하나 됨을 힘 있게 지켜줍니다. 성령침례는 이미 교회를 한 몸으로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성령 충만의 체험은 우리로 하여금 교회의 하나 됨을 능력 있게 지켜나가게 하는 힘을 줍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에베소 교회에게 이렇게 권면했습니다.엡 4장 3절에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4)부흥(Revival)을 이루게 하십니다.제가 성령 충만의 체험과 관련하여 한 가지를 더 부연하고 싶은 것은 바로 부흥이라는 축복입니다. 부흥은 몇몇 사람들 가운데 임하는 성령 충만이 아닙니다. 이것은 교회의 모든 성도 가운데 임하는 성령 충만의 체험입니다. 성령 충만한 성도가 평상시와는 비교할 수 없는 비상한 확신과 능력을 얻듯이, 온 교회가 성령으로 충만해지게 될 때에는 교회가 이 세상을 향해서 놀라운 능력을 드러내게 됩니다. 그런 은혜가 교회의 역사 속에서는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미국교회의 역사 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1907년 평양의 장대현 교회에서 일어났었습니다. 이런 부흥의 은혜는 그 도시 혹은 그 민족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주님을 믿게 되고, 그 사회의 도덕적 수준에도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오늘날처럼 우리가 부흥의 은혜를 간절히 구해야 할 때가 또 언제였겠습니까? 오늘날의 교회는 자기 힘으로 개혁하거나 돌아갈 수 없을 만큼 부패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령으로 소성케 해주시는 은혜만이 우리가 회복될 수 있는 길인 것입니다.4. 성령 충만을 받으라(엡 5:18).그러므로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면서 여러분께 한 가지를 권면하고 싶습니다. 성령 충만을 받으라고 사도 바울이 에베소교회에 권면한 그 말씀입니다. 성령침례가 아니라, 성령 충만을 받으라고 사도는 명령하고 있습니다.1)명령의 의미: 단회적이 아니라 반복적이다. “계속해서 성령 충만을 받으라.”이 명령의 의미는 일생에 한 번 성령 충만을 받으면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 사용된 동사가 의미하는 것이 ‘계속해서 성령 충만을 받으라.” 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반복적으로 계속해서 하나님께 구해야 할 기도의 제목입니다. 여러분, 이 불신앙의 세상에서 능력 있게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우리의 신앙을 보일 수 있는 힘과 확신은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바로 성령 충만의 은혜가 있을 때입니다.2)성령 충만의 결과: 능력 있는 사역, 기쁨의 예배, 하나님과 깊은 교제와 순종을 경험하게 됩니다(사도행전과 엡 5~6).여러분께서 성령 충만하시다면 능력 있게 교회를 섬기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처해있는 건강의 상태, 직장이나 직업의 상황, 가정의 문제 그 무엇 하나라도 주님을 섬기지 못하는 이유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성령 충만하게 되면 여러분이 드리는 예배는 달라질 것입니다.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게 되실 것입니다. 성령 충만하다면, 여러분은 기도하라고 해서가 아니라 기도하며 하나님의 지성소로 나아가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불평이 아니라 감사함이 가슴 속에서 넘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어려워서 순종하지 못하는 일이 없을 것이며 그 말씀 앞에서 절대적인 순종으로 반응하시게 될 것입니다. 성도들이 서로 간에 자기를 주장하지 않고 피차 복종하게 되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 충만을 받으라는 명령 뒤에 바울 사도가 묘사하는 모습들입니다(엡 5:19~21).성령 충만의 체험이 반드시 은사와 관련을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가령, 성령체험을 하면 꼭 방언을 하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그렇게 하게 될 수 있지만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상태에 계십니까? 성령 충만한 상태를 살고 계십니까? 아니, 그런 은혜를 아직 모르고 계십니까? 아니면 그런 은혜를 경험한 것이 너무나 오래 지난 일이 되고 말았습니까? 지금 성령 충만을 받으라고 주님은 우리에게 권고하십니다. 오늘이 가기 전에 그 은혜를 주님께 나아가 구하십시오.5.주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엡 4:30).말씀을 맺기 전에 저는 한 가지 주의사항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절대로 믿는 자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근심하시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여러 가지로 성령님을 근심하게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안에 계시는 성령님을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히 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인생을 향해 가지고 계시는 목적과 바람을 의심하거나 무시하고 자기 방식으로 자기의 원하는 것을 추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께 여러분의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히 여기라고 권면합니다. 매일 그 말씀을 읽으십시오. 거기서 하나님의 뜻을 찾으시고 그 뜻을 추구하며 사십시오.또한 우리는 온갖 죄를 지음으로써 성령님을 근심하게 합니다.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히 12:4).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삶의 중심이 되는 삶을 사시지 않는다면 그 모든 삶에서 성령님은 근심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성령님은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에서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지 않으신다면, 그리스도께서 우리 삶의 전부가 되시지 않는다면 성령님은 슬퍼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삶 속에서는, 그런 삶을 추구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면, 우리는 절대로 성령 충만의 은혜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도 구하고 찾는 자들에게 주어진 축복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성령을 구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주시겠다고 약속해주셨습니다(눅 11:13). 성령 충만은 곧 그리스도로 충만해지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구하셔야 할 것은 어떤 대단한 체험이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령님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고 여러 성도님들께 부탁을 드리면서도 한 가지 위로는 드려야겠습니다. 비록 우리가 수없이 성령님을 슬프게 하고 근심하게 하지만, 성도들 가운데 오셔서 내주하시는 성령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떠나지 않으신다고 약속하셨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큰 위로이며, 이것이 오늘날까지도 우리가 주의 은혜 가운데 살고 있다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는 근거인 것입니다. 성령 충만을 받으라. 이것이 여러분과 저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