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1nGKJNMefgM?si=3TWFWIBApqxaP-Mc
Domenico Scarlatti - Fandango
스카를라티 Domenico Scarlatti 1685~1757
이탈리아의 작곡가 겸 하프시코드 연주자. 알렉산드로 스카를라티의 6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나 주변사람으로부터 작곡을 배웠으리라 추측된다. 1701년 나포리 궁정예배당 오르간 주자로 활동하였고, 1709~14년 폴란드 여왕의 궁정음악가로 재직하였으며, 1714년 이후 로마 주재 포르투칼 대사 데 폰테스 후작의 궁정음악가가 되었다.
1719년 리스본 대사교좌 교회의 악장이되어 포르투칼 국왕 및 그 공녀 마리아 바르바라의 음악교사가 되었다. 바르바라가 스페인 황태자와 결혼하여 스페인으로 떠나게되자 그녀와 함께 가서 25년간 마드리드 궁정악장을 맡기도 하였다.
그는 바흐, 헨델과 동시대의 인물로 아버지의 음악양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나, 그의 재능은 아버지와는 달리 건반음악에서 발휘되어 이탈리아파 건반 음악을 절정에 올렸으며, 작품은 대위법적이라기 보다는 화려하고 장식적인 단음악작품에 뛰어났다. 또한 그의 건반음악 작품은 A.롱고, R.커크패트릭, G.페스텔리에 의해 정리되어 번호를 붙이고 있는데, 그 순서는 결정적인 사료가 결여되어 있어 창작 연대순이라고 보기 어렵다.주요작품으로 오페라 《나르시소》 소나타곡 《고양이의 푸가》 《클라브생》 《카프리치오》 이외에 500여곡의 쳄발로 소나타가 있다.
그의 건반악기 작품인 소나타는 모두 1악장 구성으로 형식은 항상 2부형식으로 각부가 원칙적으로 되풀이되고 또 각 부의 끝은 항상 동일했다(제1부는 속화음이나 그것을 대신하는 것으로, 제2부는 주화음으로 끝난다).그러나 고전파의 소나타 형식과 본질적으로 다른 것은 소나타의 서두가 제2부에서 되풀이되는 예가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그래서 제2부의 서두가 종종 〈전조적 전개부〉의 역할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재현부〉의 느낌은 상당히 약화되었다.그의 소나타는 대략 2개의 형으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2개의 부분이 유사한 〈닫혀진〉 형식의 것이고, 하나는 주제와 조성에서 2개의 부분이 서로 다른 열려진 형식의 보다 역동적인 것이다.스카를라티는 어떠한 전조를 앞에 놓고도 굴복하지 않고 지극히 떨어진 조성을 갑자기 대립시켜 전격적인 이명동음적 전조를 사용했고 또 다조성으로까지 나아가고 있다. 그는 불협화음에 관해서 역동적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그의 소나타는 바흐와 헨델 또는 라모의 작품들보다 훨씬 극적인 사건의 연속이 되고 있다. 이 점이 빈고전파를 가까이에서 예고했다고 할 수 있다.
이탈리아 작곡가. 나폴리 출생.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의 열 명의 아들 중 6번째 아들. 그의 대모는 총독부인이었으며, 1701년 그는 아버지 처럼, 탁월한 오르간 주자 겸 작곡가가 되었다. 1702년 아버지와 함께 토스카나의 궁정을 방문했고 나폴리에 돌아온 후 곧 계속해왔던 3편의 오페라 옥좌에 돌아온 오타비아 L'Ottavia ristituita al trono(1703), 주스티노 Il Giustino(1703), 이레네 L'Irene(1704)를 작곡했다.
https://youtu.be/MfuZL_RZwIw?si=iBcNnaK4EEmqvFYU
Domenico Scarlatti - Harpsichord Sonatas - Igor Kipnis (Part 1)
1705년 알레산드로는 페르난도 데 메디치 앞으로 다음과 같은 추천장과 함께 도메니코를 베네치아로 보냈다."이 아이는 날개 달린 독수리입니다. 둥지 속에 가두어 둘 수 없습니다.그가 날아가지 못하게 할 권한이 내게는 없습니다".
베네치아에서 그는 프란체스코 가스파리니 밑에서 공부했는데, 그를 통해서 프레스코발디의 예술에 인도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1709년부터 1719년에 걸쳐서는 로마에서 지내면서 헨델을 만났다. 도메니코는 이때 전설적인 경연을 하여 오르간에서는 헨델이, 쳄발로에서는 도메니코가 승리했다.
또 그곳에서는 약 20년 후에 그의 초기 오페라를 런던에서 보급시키기 위해 많은 협력을 하게 되는 영국의 음악가 토머스 로진그레이브도 만나게 된다. 우선 그는 1714년까지 망명한 폴란드 여왕의 예배당 악장으로 있었으며 1713년 12월부터 바티칸의 줄리아 예배당에서 일하게 되었다. 1714년 폴란드 여왕이 로마에서 떠나자 그는 포르투갈 대사인 데 폰테스 De Fontes의 예배당 악장이 되었다. 미제레레 G조와 10성의 장려한 스타바트 마테르는 이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때에 작곡한 것으로는 이밖에도 칸타타와 수많은 오페라가 있다. 그 가운데 중요한 것으로는 톨로메오 Tolomeo(1711), 오를란도 Orlando(1711), 아울리드의 이피게니아 Ifigenia in Aulide(1713), 타우리드의 이피게니아 Ifigenia in Tauride(1713), 암블레토 Ambleto(1715), 인테르메쪼 디린디나 Dirindina(1715) 등이 있다. 그의 마지막 오페라는 베레니체 Berenice(1718)이다.
1719년 도메니코 스카를라티의 평생의 대전환기가 찾아온다. 그 해 그는 포르투갈 국왕 조앙 5세의 예배당 악장으로서 리스본으로 옮겨 갔다. 오랫동안 1719년에 스카를라티가 영국으로 건너간 것으로 믿어왔으나 랠프 커크패트릭*은 그것이 사실무근이라고 했고, 리스본으로의 이주가 그때까지 생각했었던 것보다 수년 앞섰다는 것이 사실임을 밝혔다. 리스본에서 스카를라티는 국왕의 동생 돈 안토니오 Don Antonio와 특?왕녀 마리아 바르바라 Maria Barbara의 음악교육을 담당했다. 그의 소나타의 대부분은 그녀를 위해서 작곡한 것이다. 그가 이탈리아에 돌아온 것은 1724년(로마), 1725년(나폴리, 이때가 아버지와 재회한 마지막이 된다), 그리고 1728년(이때 로마에서 첫번째 아내 마리아 카탈리나 젠틸리 Maria Catalina Gentili와 결혼했다) 등 세 차례에 지나지 않는다. 이 세 차례의 여행을 제외한다면 그는 말년의 36년간 이베리아반도를 떠난 적이 없었다.
1728년에 포르투갈 왕녀 마리아 바르바라는 스페인 왕, 후의 페르디난도 6세와 결혼했다. 도메니코는 그녀를 따라 마드리드에 갔고 그곳에서 살았다. 이때부터 그는 최후의 작품이라고 추정되는 소프라노와 현악기를 위한 살베 레지나 외에 쳄발로곡 밖에는 작곡하지 않았다. 1738년 포르투갈의 조앙 5세로부터 산티아고 기사훈장을 받은 그는 그 답례로 왕에게 유명한 쳄발로 연습곡집을 헌정했다. 같은 해 런던에서 출판된 이 곡들은 커크패트릭에 의해서 붙여진 작품번호 중 처음 30개의 소나타이다. 1739년 아내가 죽자 1742년에 재혼했으며 9명의 아들 중 4명만 살아남았으나 음악가가 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스카를라티가 이탈리아에 있을 때에는 아버지가 지배하고 있었던 나폴리파 오페라 분야의 보통 작곡가 한 사람에 불과했고, 이 시기에는 기악 앙상블을 위한 17곡의 신포니아를 작곡했다. 포르투갈로 떠난 것이 그를 오페라의 세계에서 해방했고, 자기 자신의 체험을 축적시킴으로써 이것을 위해서 그가 태어났다고 할 수 있는 쳄발로 소나타를 발견하게 했다. 바흐, 헨델과 같은 해에 태어났고 라모보다 두 살 밑인 스카를라티는 사실상 모든 시대를 통한 쳄발로의 대가이다.
연습곡집의 서문은 스카를라티의 것으로 남아있는 2개의 텍스트의 하나인 만큼 다음에 인용해 두겠다.
"독자여, 여러분이 〈애호가〉이든 전문가이든 이 곡에서 어떤 심오한 가르침을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쳄발로의 장엄성에 친숙해지기 위한 예술을 기대해야 합니다. 내가 이것을 출판하게 된 것은 이익을 위한 것도 야심을 위한 것도 아니고 단순히 순종하는 마음에서일 뿐입니다. 이 곡이 귀하의 마음에 들었으리라고 기대하고 싶습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나는 다른 주문에 대한 것보다 쉽고 보다 변화에 찬 상냥한 양식으로 귀하를 즐겁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라건대 비판적이기보다 인간적이고 싶습니다. 그렇게 됨으로써 당신의 즐거움은 배가 될 것입니다. 손의 위치에 관해서는 D는 오른손을, M은 왼손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아두기 바랍니다. 아듀"
커크패트릭이 본 스카를라티의 555곡의 소나타 (이 가운데 미완성이거나 또는 진정으로 그의 작품인지 의심되는 것은 10곡이 채 안 된다)의 자필보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작곡자의 생전에 출판된 것은 그 수가 매우 적으며, 당시의 거의 모든 판은 영어판으로서 모두 스카를라티가 직접 서명한 유일한 출판, 즉 1738년의 30곡의 〈연습곡〉에 기초하고 있다. 이것은 1739년에 토머스 로진그레이브가 12곡을 더하여 모두 42곡이 되었다. 1742년 암스테르담에서 연습곡집의 신판이 나왔고 또 1741년부터 1746년에 걸쳐서는 파리에서 지극히 한정된 수의 몇 곡의 소나타가 간행되었다. 19세기 초 스카를라티가 에피소드와는 다른 어떤 흔적을 남겼을 당시 이탈리아 유일의 작곡가 무치오 클레멘티는 영국에서 스카를라티의 쳄발로 또는 피아노 포르테를 위한 걸작 Scarlatti's Chefs d'oeuvre, for the Harpsichord or Pianoforte이라는 작품집을 출판했다. 또 1839년에는 체르니가 200곡의 소나타를 출판했는데, 이것은 손가락 연습을 하는데 유용한 연습곡으로 간주된, 당시의 취미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1906년이 되어서야 겨우 최초의 전집이 나왔다. 알레산드로 롱고의 손에 의한 것으로 총 544곡의 소나타가 조성마다 〈조곡〉의 형태로 그룹지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작곡된 시기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지극히 자의적인 것이었다. 롱고판은 후기 낭만파적 경향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권위를 지켜왔다. 그가 붙인 작품번호는 커크패트릭에 의한 것이 나올 때까지 유효했었다. 커크패트릭의 작품번호에 기초한 전집은 1970년대에 케네스 길버트*에 의해 실현되었다. 때때로 의심스러운 점이 있는 작곡 연대순으로 분류를 하기 위해서 커크패트릭은 우리가 알고 있는 스카를라티의 기본적인 자료에서 도움을 얻었다. 주로 1742년(1752년의 가능성도 있다)부터 1757년 사이에 병행해서 옮겨 기록한 마리아 바르바라가 소지했던 각기 15권으로 이루어진 두 그룹의 수고보에 의한 것이다.
그 중 하나(총 496곡의 소나타를 수록한 I에서 XIII까지의 번호가 있는 13권과 번호가 없는 2권)는 베네치아의 성 마르코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고, 다른 하나(총 463곡의 소나타를 수록한 15권)는 파르마의 왕실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원래는 번호가 없었지만 커크패트릭이 XIV와 XV의 번호를 붙인 베네치아의 두 권은 각기 1742년과 1749년에 카피되었다. 거기에는 1738년의 30곡의 〈연습곡〉을 비롯하여 가장 오래된 소나타가 수록되어 있다. 반대로 가장 새로운 것은 베네치아의 제13권과 파르마의 제15권으로 모두 1757년에 옮겨 기록한 것이며, 뮌스터의 포르투나토 산티니 Fortunato Santini 신부(17781862)가 소장하고 있던 수고보집인 또 하나의 다른 자료에는 도메니코 스카를라티가 1756년과 그가 사망한 해인 1757년에 작곡한 마지막 쳄발로 소나타곡들이라고 소개한 소나타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뮌스터의 5권본에는 총 349곡의 소나타가 수록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요하네스 브람스가 소지했던 총 308곡의 소나타가 수록된 7권본은 현재 빈 악우협회가 보관하고 있다.
베네치아와 파르마의 수고보의 유래는 상당히 분명하다. 스카를라티와 같은 시대에 파리넬리라고 불렸던 유명한 카스트라토 카를로 브로스키가 마드리드 궁정에 있었다. 1737년 스페인에 도착한 파리넬리는 그곳에서 페르디난도 4세가 세상을 떠난 해인 1759년까지 살았다. 그는 바르바라 왕비로부터 가장 아름다운 쳄발로뿐만 아니라 스카를라티 소나타의 수고보까지 받았다. 파리넬리는 그의 생애를 이탈리아에서 마쳤고, 각각 15권으로 이루어진 2개의 곡집이 베네치아와 파르마에 당도하게 된 것은 그의 중개에 의한 것임에 틀림없다.
자료출처: 웹사이트
https://youtu.be/KjRJti9HP60?si=IMJPK3ezsSRlG5s_
Scarlatti - 7 Sonatas - Gilels London 19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