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년 2월 7일 연중 제4주간 금요일
제1독서 : 히브 13,1-8
복 음 : 마르 6,14-29
그때에 14 예수님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마침내 헤로데 임금도 소문을 듣게 되었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서 그런 기적의 힘이 일어나지.” 하고 말하였다.
15 그러나 어떤 이들은 “그는 엘리야다.”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들과 같은 예언자다.” 하였다.
16 헤로데는 이러한 소문을 듣고,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 하고 말하였다.
17 이 헤로데는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붙잡아 감옥에 묶어 둔 일이 있었다.
그의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 때문이었는데, 헤로데가 이 여자와 혼인하였던 것이다.
18 그래서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다.
19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20 헤로데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말을 들을 때에 몹시 당황해하면서도 기꺼이 듣곤 하였기 때문이다.
21 그런데 좋은 기회가 왔다.
헤로데가 자기 생일에 고관들과 무관들과 갈릴래아의 유지들을 청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22 그 자리에 헤로디아의 딸이 들어가 춤을 추어, 헤로데와 그의 손님들을 즐겁게 하였다.
그래서 임금은 그 소녀에게,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나에게 청하여라. 너에게 주겠다.” 하고
말할 뿐만 아니라, 23 “네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내 왕국의 절반이라도 너에게 주겠다.” 하고
굳게 맹세까지 하였다. 24 소녀가 나가서 자기 어머니에게 “무엇을 청할까요?” 하자,
그 여자는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요구하여라.” 하고 일렀다. 25 소녀는 곧 서둘러 임금에게 가서,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고 청하였다.
26 임금은 몹시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라 그의 청을 물리치고 싶지 않았다.
27 그래서 임금은 곧 경비병을 보내며,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고 명령하였다.
경비병이 물러가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어, 28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주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주었다.
29 그 뒤에 요한의 제자들이 소문을 듣고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무덤에 모셨다.
<오늘의 묵상>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오늘 복음에서는 세례자 요한의 강직한 올곧음과
헤로데 임금의 비열한 나약함 사이의 대조가 뚜렷이 드러납니다.
하느님의 정의를 외치다가 감옥에 갇힌 사람과
권력과 탐욕과 향락을 따라 사는 사람들 사이의 대조,
자신보다는 정의를 지키려는 사람과 자신의 이익만을 위하여
모든 정의를 외면하는 사람들 사이의 대조,
두려움 없이 권력자의 죄악을 고발하는 사람의 결연한 외침과
순간의 기분대로 경솔한 맹세를 남발하면서 체면이나 원한에 이끌려
의인의 생명을 하찮게 여기는 사람들 사이의 대조입니다.
모든 이에게 회개를 요구하던 요한은 임금에게 맞선 결과가
자신에게 어떻게 돌아올지 따지지 않고 그를 꾸짖습니다.
우리는 자주 불의를 고발하고 바로잡고자 노력하기보다는
자신이 피해를 보지 않으면 ‘나와 상관없음’을 선언하고 외면합니다.
그런데 사실 한 아버지를 모시는 형제자매들인 우리는
서로의 일에 상관없는 사이가 아닙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우리가 마귀하고만 아무 상관이 없을 뿐
모든 인류와 상관이 있다고 말합니다.
오지랖이 넓다는 타박을 받으면서도 개의치 않고
부당한 것을 바로잡으려 애쓰는 사람들,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자기 일처럼 도우면서 그 상관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예언자들입니다.
헤오데와 헤로디아는 요한의 혀를 영원히 침묵시켰다고 믿었지만,
그 혀는 오늘날까지도 교회 안에서 “옳지 않습니다.”를 외치고 있습니다.
폭군은 요한의 머리를 베었지만 지금도 하느님의 예언자들 안에서 되울리는
그의 소리는 베지 못하였습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느 연인이 데이트 중이었습니다.
식사 때가 되어, 여자 친구가 남자 친구에게 “우리 파스타 먹으러 갈까?”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남자 친구는 “나는 파스타 정말 싫어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순간 여자 친구는 남자 친구가 싫어지더라는 것입니다.
자기 싫은 것을 충분히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이란 묘해서 자기가 이야기한 것을 상대방이 싫다고 하면,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싫어지는 법입니다.
저 역시 싫은 것은 곧바로 말하는 스타일임을 반성합니다.
사실 더 잘 말할 수 있었습니다. 앞서 말한 남자 친구의 경우를 볼 때,
“우리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 갈까?”라고 말할 수도 있고,
“일식은 어때?”라고 말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부정적 감정이 담긴 말을 쓰게 되면서, 관계를 무너뜨립니다.
부정적 감정은 전투할 때의 감정이라 에너지 소비가 많습니다.
그에 반해서 긍정적 감정은 평화로울 때의 감정이라
에너지 소비도 거의 들지 않고 부담도 없어지게 됩니다.
따라서 자기를 위해서도 부정적 감정을 내려놓고
긍정적 감정을 갖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싫어’를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은
자기를 싫어할 사람을 불러들이는 사람이고,
‘좋아’를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은
자기를 좋아할 사람을 불러들이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말과 행동이 결국 자기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이가 자기가 듣고 싶은 말만, 또 자기가 보고 싶은 행동만을 원하면서
부정적인 감정이 담긴 말과 행동을 너무 쉽게 합니다.
이 결과는 상대로부터 똑같이 부정적인 감정과 담긴 말과 행동을 받게 될 것입니다.
힘든 삶의 연속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상대를 수용할 수 있는 겸손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겸손의 마음이 긍정적 감정을 만들어 행복의 삶으로 인도해 줄 것입니다.
헤로데 임금은 자기 본부인과 이혼하고,
자기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합니다.
그 결과는 본부인의 아버지인 나바태아 임금이 분노하여 전쟁이 일어납니다.
유다 전 지역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는 것입니다.
임금 한 사람의 잘못이 많은 이를 고통 속으로 밀어 넣은 것입니다.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한 결과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될 것을 알고서
혼인해서는 안 된다고 간곡히 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감옥에 가둡니다.
그리고 자기 생일날, 헤로디아 딸의 춤값으로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베어 줍니다.
헤로디아 딸의 춤은 보고 싶었던 것이고, 세례자 요한의 말은 듣기 싫었던 것이지요.
실제로 그는 나바태아와의 전쟁에서 패한 후
임금에서 쫓겨나 유배지에서 쓸쓸히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겸손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내가 듣고 싶은 말과 보고 싶은 행동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긍정적 마음을 전해줄 수 있는 겸손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야 함께 기쁨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전해줍니다.
엘리야의 영과 권능을 지닌 세레자 요한은
엘리야가 아합 임금과 이제벨 여왕을 꾸짖었던 것처럼,
헤로데와 헤로디아를 무섭게 꾸짖었습니다.
그들의 결혼이 합법적인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어둠이 빛을 싫어하는 까닭입니다.
사실 더러운 이들에게 정결함은 오히려 적수가 되고,
타락한 이들에게는 고결함이 오히려 괴로움이 됩니다.
잔인한 이들은 자비를 보면 참지 못하고,
인정 없는 이들은 사랑과 진실을 참지 못하고,
불의한 이들은 정의를 참지 못합니다.
그래서 요한은 곤경에 빠집니다.
오늘 복음에는 의인과 악인의 극한 대조를 보여줍니다.
한편에는 음모를 꾸미며 속임수를 쓰며 악의에 찬 헤로디아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진실하고 강직하며, 그 어떤 거짓에도 굴하지 않는 세례자 요한이 있습니다.
한편에는 폭군이지만 무능력한 헤로데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참수당하지만, 힘 있는 세례자 요한이 있습니다.
한편에는 혀를 다스리지 못한 헤로데가 있고,
그의 혀는 잔치에서 맹세하지만 결국 타인의 죽음을 부르고 불의를 가져옵니다.
다른 한편에는 혀가 곧은 요한이 있고,
그의 혀는 감옥에 갇히지만 자신의 죽음을 허용하되 의로움을 이룹니다.
그리하여 헤로데가 받은 것은 요한의 머리지만 두려움이 되고,
세례자 요한이 받은 것은 쟁반이지만 월계관이 됩니다.
한편,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죽음을 예표 해 줍니다.
한 푼 춤값으로 팔려버린 세례자 요한의 목숨은
어찌 보면 참으로 억울한 죽음처럼 보입니다.
마치 은전 30냥에 팔려버린 예수님의 목숨처럼 말입니다.
헤로디아의 조정을 받은 소녀가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주기를' 요청하듯,
사제들과 유대 원로들의 조정을 받은 군중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외치게 될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머리가 쟁반에 올려지듯,
예수님의 온몸이 십자가 위에 올려질 것입니다.
이처럼 의인 요한의 죽음은 '주님의 종'인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 보여줍니다.
그러나 올가미에 걸려 넘어진 이는 의인이 아니라 폭군이었습니다.
거짓을 꾸미는 악인의 혀는 결국 자신이 쳐놓은 덫에 걸려 넘어지고,
진실된 의인의 혀는 영광의 관이 씌워졌습니다.
그렇습니다.
헤로데가 요한의 머리는 베었어도, 그의 소리는 벨 수가 없었습니다.
혀는 잠잠하게 만들었지만, 그 소리는 가라앉힐 수가 없었습니다.
감옥에 묶어 두어도 외치고, 죽어서 쟁반 위에서도 살아 외칩니다.
세월이 흐를지라도 폭군의 죄악을 고발하는 의인의 외치는 소리는 계속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도 진리와 정의를 위해 외치는 법을 배워야 할 일입니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무관심의 세계화’가 남을 위해 우는 법을 빼앗아 가버린 이 시대에,
남을 위해 우는 법을 배워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마르 6,18)
주님!
뼈 속에 새겨져 숨 막히게 외치고 있는 진실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힘으로 짓눌러 가라앉힐 수 없는, 그 무엇으로도 가로막을 수 없는,
진리의 말씀을 저버리지 않게 하소서.
목이 베여도 결코, 베어지지 않는 살아있는 말이 되게 하소서
울 줄을 알게 하소서.
진정으로 사랑하여 울게 하소서. 아멘.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반영억 라파엘 신부
여자는 기념일을 먹고 살고, 남자는 체면을 먹고 산답니다.
여자는 쉽게 감동하기에 그렇고 남자는 자존심을 세워주면 어깨가 으쓱해집니다.
그렇다고 자존심을 건 맹세를 함부로 할 것이 아닙니다.
헤로데 왕은 요한이라는 인물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말을 들을 때에 몹시 당황하면서도 기꺼이 듣곤 하였습니다(마르6,20).
그런데 그에게 곤란한 일이 생겼습니다.
자기 생일에 고관들과 무관들과 갈릴래아의 유지들을 청하여 잔치를 베풀었는데
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추게 되었고, 헤로디아의 딸이 손님들을 즐겁게 해 주었기에
그에게 원하는 선물은 무엇이든 주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헤로디아의 딸은 어머니의 바람대로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마르6,25).
하고 요구하였습니다. 너무도 당혹스런 일입니다.
헤로디아는 요한이 자기의 결혼에 대하여
잘못되었다고 얘기했기 때문에 앙심을 품고 있었던 터였습니다.
앙심을 품는 사람은 남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만을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자기 욕심의 노예가 되어 그 앙갚음을 딸을 통해서 하게 된 것입니다.
임금은 몹시 괴로웠지만, 이미 약속한 것이고
또 손님들이 보는 앞이라 그 청을 물리치고 싶지 않았습니다(마르6,26).
그래서 결국은 요한의 목을 베게 되었습니다.
주변 사람들도 결정권자의 입맛에 맞장구만 치는 간사한 사람으로 있었습니다.
요한을 제외한 그 모두가 잘못된 것에 대해 침묵을 지켰고,
자신에게만 피해가 가지 않는다면 아무리 의인의 죽음이라도 대수롭지 않기 마련입니다.
의인의 목숨과 자존심을 건 헛된 맹세에서 하나를 선택했거늘
그놈의 자존심이 뭔지? 체면이 뭔지? 악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누가 뭐라 하든 ‘다만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라고 만(야고5,12)해야 합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에, 의로운 일에
자존심이 좀 상하면 어떻고 체면이 좀 손상되면 어떻습니까?
요한과 헤로데, 홀로 정의를 외치다가 죽어가는 한 예언자의 모습과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의롭고 정의롭게 사는 사람의 목숨까지 빼앗아 가는
나약하기 짝이 없는 왕의 모습이 극적으로 대조되고 있습니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라는 말이 있듯이
헤로데는 자기 잘못에 대한 불안감을 마음에 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내가 목을 벤 요한이 되살아났구나.”하고 말하였습니다.
혹 내 무의식 속에 감추어둔 무엇인가가 있어 불안하다면
고해성사를 통해 그 불안을 없애야 하겠습니다. 매듭은 풀어야 합니다.
풀지 않고 놔두면 세월이 흘러도 풀리지 않은 채 그대로 있는 법입니다.
가정에서도 직장 안에서도 그리고 어떤 공동체에서든 더 큰 것을 위해서
자존심이 상하고, 체면에 손상을 입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안에 그리스도의 기쁨과 평화가 함께 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나는 어떤 처지에서도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모자라거나 그 어떠한 경우에도
잘 지내는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필리4,12-13).
어떤 처지나 여건에서도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꿋꿋하길 바랍니다.
주님을 얻으면 모든 것을 얻는 것이요, 그것이 우리의 기쁨입니다.
위신, 체면을 지켜야 할 때 지키십시오!
자존심을 내세워야 할 때 내세우십시오!
그리고 헛것인 줄 알았으면 곧 버리십시오!
서둘러 버리십시오!
정말로 승리한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고 패배한 사람은 헤로데입니다.
헤로데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과 권한을 남을 위해 사용하기보다
자신의 안일과 욕망을 위해 권력을 남용함으로써
세례자 요한을 죽이는 결과를 가져왔고, 스스로 죄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요한은 항상 예수님의 삶을 미리 닦는 선구자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당신의 모든 것을 남을 위해 사용하였습니다.
우리를 위해 목숨까지 내놓으셨습니다.
우리의 삶은 언제나 예수님을 닮기를 갈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
조욱현 토마 신부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16절)
예수님의 명성과 업적의 소문이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지고
이제는 헤로데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그는 그 소문을 듣고 당황한다. 자신이 지은 죄 때문이다.
세례자 요한을 죽인 죄책감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요한은 헤로데가 혼인의 계명을 파기하는 것을 보고, 광장에서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18절) 하였다.
헤로데는 꾸짖음을 들으면서도 그의 말을 기꺼이 들었다고 한다.
호사스러운 왕실에서 죽음의 잔치가 열리고,
평소보다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을 때, 왕비의 딸을 불러와 춤을 추게 한다.
헤로데는 무엇이든 청하는 대로 주겠다고 맹세한다.
얼마나 어리석은 맹세인가?
헤로데는 소녀의 춤 한판에 왕국을 넘겨줄 만큼 욕정에 사로잡힌 포로였다.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25절)
여인에 대한 사랑이 이겼다.
자신의 음행을 다스리려 하지 않은 탓에 그는 살인죄를 저지르고 말았다.
진절머리를 치며 내 쳤어야 할 간통한 여인을 갈망한 까닭에,
하느님 마음에 드는 인물로 알고 있던 세례자 요한의 피를 보고 말았다.
헤로데가 괴로워한 것은 참회한 것이 아니라,
자기 죄에 대한 고백을 한 것뿐이다. 손님들 때문이다.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주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주었다.”(28절)
헤로데는 자기 혀 하나도 다스리지 못하고 살인을 저지르고 만다.
그 머리를 헤로디아에게 주자, 그 여자는 심판관을 살해함으로써
모든 것을 해결했다고 기뻐했을 것이다.
여기서 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우리는 볼 수 있다.
왕의 잘못에 대해 자신의 위험을 생각지 않고
끝까지 지적할 수 있었던 그분의 예언자적 정신과 자세이다.
예언자는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항상 하느님의 뜻을 전한 사람들이다.
여기에서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예언자들은
항상 진리 편에서 그것을 증거했기 때문에 항상 박해를 받았고 죽임을 당해 왔다.
우리 자신이 이 시대의 예언자가 되어야 한다.
세례자 요한의 회개 선포는 아직도 유효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이 헤로데는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붙잡아 감옥에 묶어 둔 일이 있었다.
그의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 때문이었는데,
헤로데가 이 여자와 혼인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다.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마르 6,17-19)
“그런데 좋은 기회가 왔다. 헤로데가 자기 생일에
고관들과 무관들과 갈릴래아의 유지들을 청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그 자리에 헤로디아의 딸이 들어가 춤을 추어,
헤로데와 그의 손님들을 즐겁게 하였다.
그래서 임금은 그 소녀에게,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나에게 청하여라. 너에게 주겠다.’
하고 말할 뿐만 아니라,
‘네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내 왕국의 절반이라도 너에게 주겠다.’
하고 굳게 맹세까지 하였다.”(마르 6,21-23)
“임금은 곧 경비병을 보내며,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고 명령하였다.
경비병이 물러가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어,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주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주었다.
그 뒤에 요한의 제자들이 소문을 듣고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무덤에 모셨다.”(마르 6,27-29)
1) 세례자 요한은 ‘모든 사람’에게 회개를 선포하였고, ‘모든 사람’을 꾸짖었습니다.
헤로데와 헤로디아는 세례자 요한이 꾸짖은 ‘모든 사람’ 가운데에서 하나일 뿐입니다.
<지금 ‘우리’도 그 ‘모든 사람’ 가운데 하나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회개 선포를 싫어한 사람이 헤로데와 헤로디아뿐이었을까?
‘나는 죄가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과 스스로 의인이라고 자처하면서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모두 요한의 회개 선포를 싫어했을 것입니다.
또 세례자 요한을 죽이고 싶어 한 사람이 헤로데와 헤로디아뿐이었을까?
그 당시의 기득권층 사람들은 대부분 요한을 죽이고 싶어 했을 것입니다.
<행동으로 실행할 용기는 없었겠지만, 마음속으로는......>
헤로데가 세례자 요한을 죽였을 때,
당시의 여론은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 일에 관심이 없었던 사람들도 많았을 것이고,
헤로데가 한 짓에 동조한 자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정치적으로는 헤로데를 지지하지 않았더라도,
그가 요한을 죽인 일에 반대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사실상 살인죄의 공범이 된 것입니다.>
2) 헤로데와 헤로디아와 동조자들의 모습은 예수님의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요한 3,17-21)
헤로데와 헤로디아는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자들’이고,
‘어둠으로 빛을 덮으려고 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덮으려고 더 큰 죄를 지었는데,
그것은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구원받기를 거부한 죄이고,
스스로 심판과 멸망을 선택한 죄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심판을 받기도 전에
자기들이 스스로 심판을 향해서 간 것입니다.
“이미 심판을 받았다.” 라는 예수님 말씀은,
바로 그런 자들을 향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하느님을 등지고, 하느님에게서 멀어져 가는 모습이
곧 ‘이미 심판을 받은’ 모습입니다.
<지옥은 하느님을 외면하고 하느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으려고 하는 자들만 있는 곳입니다.
무슨 형벌을 얼마나 받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하느님에게서 떨어져 있다는 것 자체가 큰 형벌입니다.>
3) 세례자 요한이 회개를 선포하면서 사람들을 꾸짖은 것은,
심판이 아니라 사람들을 심판에서 구하기 위한 일입니다.
<회개시켜서 ‘구원의 길’로 인도한 일입니다.>
만일에 사람들이 요한의 회개 선포를 받아들여서 진심으로 회개했다면,
그가 순교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고,
예수님의 구원 사업도 순조롭게 진행되었을 것입니다.
<십자가 수난과 죽음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그러나 우리는 실제로 일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의 회개 선포를 듣지 않았고, 회개하기를 거부했고,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복음 선포를 듣지 않았고, 구원받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런 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세례자 요한이 순교한 것처럼
예수님도 십자가 수난을 당하셨습니다.
<‘필연’은 아니고, 인간 세상의 현실입니다. 오늘날까지도.>
요한은 자신이 맡은 사명을 ‘죽음’으로 완수한 예언자입니다.
그래서 그의 임무 수행은 실패가 아니라 ‘성공’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부활’로 연결되었기 때문에
구원 사업은 실패가 아니라 성공인데, 지금도 진행 중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회개 선포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우리의 회개와 구원이 아직도 미완성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의 믿음은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인생무상(人生無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 무상이라는 말도 되겠습니다.
나뭇잎이 늘 푸르지 않듯이
인생은 늘 똑같지 않고 변한다는 말이고,
인간도 늘 똑같지 않고 심하게 얘기하면 조변석개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믿을 수 없지요.
그리고 그렇기에 하느님을 믿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오늘 히브리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도
오늘도
또 영원히 같은 분이십니다.”
그런데 영원히 같은 분이시라는 것이 어떤 뜻일까요?
늙지 않고 영원히 청춘이라는 뜻일까요?
힘이 빠지지 않고 늘 힘세신 분이라는 뜻일까요?
그런 뜻을 다 포함하고 있지만,
제게는 사랑이 똑같으신 하느님이 다가옵니다.
우리가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것은 어머니의 사랑 때문이 아닙니까?
아비보다 어미를 더 그리워하는 것도 사랑 때문이 아닙니까?
어머니의 사랑이 언제나 그리고 늘 똑같기 때문이 아닙니까?
이 지점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 믿음의 문제이고
어미의 이런 사랑을 우린 믿는데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서는 어떠냐 그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일러 준 여러분의 지도자의 믿음을 본받으십시오.”라고
오늘 히브리서는 말하는데 어미의 사랑을 믿듯이 하느님 사랑을 우리가 믿느냐,
영원히 같은 사랑임을 믿을 뿐 아니라, 영원히 같이 계심도 믿느냐 그것입니다.
그렇게 믿는다면 우리는 이제 인간에게 기대거나 인간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고,
오늘 히브리서 말씀처럼
“주님께서 나를 도와주는 분이시니 나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사람이 나에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라고 할 것입니다.
헤로데의 生日과 요한의 死亡日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의 정체에 대한 사람들의 오해,
예수를 자기가 죽인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으로 단정하는 헤로데 안티파스의 착각,
그리고 세례자 요한의 수난과 죽음에 대하여 들려준다.
오늘 복음은 8월 29일 ‘성 요한 세례자 수난’ 기념일에 봉독 되는 복음이기도 하다.
마르코는 이 복음을 예수님의 공생활 가운데,
즉 12제자의 파견(마르 6,7-13)과 빵의 기적(6,30-44) 사이에 삽입하였다.
이미 과거사가 되어버린 요한의 수난기를 여기에 삽입한 이유는
사람들이 예수를 다른 사람으로 착각할 수 있는 여지를 없애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공관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 한창 복음선포에 열중하실 즈음에,
사람들은 예수를 소생한 세례자 요한, 또는 소생한 엘리야,
또는 구약의 예언자와 같은 한 예언자로 여겼다.
그런데 갈릴래아와 베레아 지방을 다스리던 헤로데 안티파스는
예수를 자기가 죽인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으로 단정하고 있다.
이니 예수게서 공생활을 시작하신 시점에
요한은 헤로데의 군사들에게 잡혀서 감옥에 갇혔고(마르 1,14)
그후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헤로데가 자신의 생일을 요한 세례자의 사망일로 만들었다.
헤로데가 요한을 잡아 가둔 이유는
”헤로데가 동생 필립보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하였다고 해서 요한이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데리고 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하고 누차 간하였기 때문“(17-18절)이고,
요한을 목베어 죽인 이유는 이에 원한을 품은 헤로디아의 꾀임(19-28절)에 넘어갔기 때문이다.
성서학자들은 17절이 기록을 誤報로 인정한다.
복음은 헤로데 안티파스가 동생 필립보의 아내 헤로디아와 재혼했다고 하지만,
헤로디아는 필립보의 아내가 아니다.
헤로데 안티파스가 아레타 4세의 딸과 이혼하여 헤로디아와 재혼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헤로디아는 헤로데 대왕의 손녀로서 대왕의 다른 아들과 결혼하였고,
여기서 딸 살로메가 태어났다.(자세한 내용은 아래 ‘헤로데 가문의 족보’를 참조)
헤로디아의 간교함에 넘어간 헤로데가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베어 쟁반에 담아오게 했으니,
그가 죽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복음서가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이 시점에서 보도하는 이유는
헤로데가 예수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세례자의 수난기는 예수님의 수난을 반영하고 있다.
예수께서도 같은 운명의 길을 가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운명에 하느님의 진리와 자비가 함께할 것이며,
정의의 외침이 운명을 대변할 것이다.
예언자는 죽임을 당하여 사라지지만 그 외침은 결코, 죽지 않는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