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D0z5_jGMksU?si=FewPUmGb6d6wWJ4B
Sento nel core-Alessandro Scarlatti-테너 Tito Schipa
티토 스키파는 작은 성량에 레퍼토리도 좁은 성악가였지만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톡특한 미성을 가지고 있었고 자기가 선택한 레퍼토리에서는 최고였다. 그는 테너의 역사 중 특별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데, 그를 우수한 테너로 꼽는 것은 그의 스타일, 가창법, 테크닉, 개성 때문이다. 우선 그의 개성을 대해 얘기하자면, 특이한 목소리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무대에서의 공연 및 매너에 관해서도 좋지 않은 평을 거의 들어본 적이 없다. 하지만 그를 성공으로 이끈 원인에 대해서도 뚜렷한 설명은 없다. 그것은 단지 목소리의 성질로서만이 설명된다. 그 목소리의 성질은 깨끗하고 순수하며 둥글다. 그리고 비루투오소의 테크닉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의 테크닉은 그의 가벼운 목소리를 세계의 가장 유명한 오페라 극장들에 울려 퍼지게 했다. 그의 스타일에 대한 감각은 균형잡힌 것이었다. 그의 프레이징은 눈에 뜨일 만큼 길지는 않았지만 비범한 특성을 가지고 있었고 그의 밝으면서도 다소 그늘있는 음색은 자연히 한정된 레퍼토리를 지니게 만들었으나, 그 레퍼토리 안에서는 완벽했다. 그리고 활동 시기도 길어서 1950년대 중반까지 정상급의 실력과 최고의 명성을 누렸다.
티토 스키파는 1911년에 데뷔하여 그가 73세 되던 1962년의 마지막 콘서트를 끝으로 은퇴했다. 그에 관한 대부분의 책들은 그의 생년월일을 1888년 1월 2일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의 전기를 쓴 Ranzo d'Andrea에 의하면 그는 그 해의 마지막에 태어났는데 그의 아버지는 병역을 연기하려고 그를 1989년 1월 2일에 출생신고를 했다고 한다. 그가 태어난 곳은 이태리의 레체였고 거기에서 소년 합창단원으로 주목을 받았으며 레체의 음악원을 졸업했다. 그리고 그는 밀라노에서 성악을 공부하고 1911년 22세의 나이로 <라 트라비아타>의 알프레도 역으로 베르첼리에서 데뷔했다. 그는 순수한 리릭 테너로서의 명성을 확립했다. 다음해에 그는 로마로 가서 노래를 불렀고 1913년에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있는 콜론 극장, 2년 이내에 라 스칼라 극장에 데뷔했고 1920년에는 그가 오랫 동안 노래했던 시카로 오페라 극장에 <리골레토>의 만토바 공작 역으로 데뷔했다. 그리고 1917년에 몬테 카를로 극장에서 푸치니의 오페라 <제비>에서 성공을 거두었다는 것도 주목할 만한 일이었다. 1932년에는 메트로폴리탄에 <사랑의 묘약>의 네모리노 역으로 데뷔했고 대단한 성공을 거두어 35년까지 출연했다.
세계 제2차 대전이 일어나자 파시스트의 지지자로 낙인찍힌 질리가 미국에서 인기를 잃은 것과는 반대로 스키파는 1940년, 41년에 다시 메트로폴리탄으로 돌아가 부르토 발터의 객원 지휘 때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에서 돈 오타비오 역을 노래했고 도니제티와 푸치니의 오페라에서도 변함없는 노래를 들려 주었다.영국에서 그는 오페라가 아닌 콘서트만 했었는데 1928년 로얄 알버트 홀에 처음으로 등장했고 1958년에 페스티발 홀에 등장한 것이 마지막이었다. 전후에 그가 등장한 오페라는 <베르테르>를 비롯한 몇몇 작품들이었는데, 1953년 그의 고향인 레체에서 <사랑의 묘약>을 끝으로 오페라 무대는 떠났다. 하지만 리사이틀을 통해 계속 노래를 불렀고 호주, 러시아 등지로 연주 여행을 가기도 했었다. 뉴욕으로 돌아와 살다가 1965년 12월 16일에 세상을 떠났다.
스키파의 주요 배역은 <사랑의 묘약>의 네모리노, <람메르모르의 루치아>의 에드가르도, <돈 파스쿠알레>의 에르네스토, <몽유병의 여인>중 엘비노, <라 트라비아타>의 알프레도, <베르테르>의 베르테르, <리골레토>의 만토바 공작 역 등 리리컬한 역이었다.스키파가 활동하던 당시에는 그 유명한 질리와 마르티넬리, 페르틸레, 라우리 볼피 등의 전설적인 명테너가 활동하던 시대였지만 스키파는 그의 고유한 영역인 리릭 레지에로의 레퍼토리에서 독자적인 위치를 점했다. 그는 부드럽고 서정적인 노래투,메짜 보체와 피아니시모의 효과적인 사용법으로 그만의 독특한 연주를 들려 주었다. 그리고 자기의 목소리와 음악성, 표현력이 맞지 않는 곡이면 노래하지 않았다. 이렇게 철저한 자기관리로 그는 노년까지 목소리를 유지할 수 있었고 실제로 그의 비결을 들어보면 "나는 언제나 건강을 유념해왔고 젊었을 때 철저한 음악 및 성악 훈련을 받았으며, 또 오페라에서 절대로 오케스트라와 경쟁해서 큰 소리로 무리하게 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라고 했다. 이렇게 자기 목소리 관리에 철저했던 성악가를 꼽으라면 알프레도 크라우스가 있을 것이다. 이렇게 그는 자신의 예술 세계를 완성시키는 데에 최선을 다했던 성악가였다.
스카를라티 (Pietro Alessandro Gaspare Scarlatti)
이탈리아의 작곡가.
국적 : 이탈리아
활동분야 : 예술
출생지 : 이탈리아 팔레르모
주요작품 : 《꼭 닮은 사람:Gli equivoci nel sembiante》(1679) 《제비꽃》
팔레르모 출생. 특히 오페라의 작곡가로서 역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는 유려한 선율, 완 ·급 ·완의 형식에 의한 이탈리아 서곡 및 아리아와 레시터티브의 본리 등을 특징으로 하는 나폴리파 오페라의 양식을 확립하였다.
이름난 음악가 집안에 태어나, 소년시절 팔레르모로부터 로마로 옮겨 G.카리시미, B.파스퀴니 A.코렐리 등을 알게 되었다. 초기의 로마시대에는, G.레그렌치나, A.스트라델라 등 베네치아파의 영향하에 오페라와 오라토리오를 작곡하였으며, 19세 때 재능을 인정받아 스웨덴의 크리스티아나 왕비의 궁정악장으로 임명되었으며, 로마의 교회악장도 겸임하였다.
그의 115곡의 오페라 중 명성을 떨치게 한 첫 작품 《꼭 닮은 사람:Gli equivoci nel sembiante》(1679)은 1684년 그를 제1궁정 악장으로서 나폴리로 초빙하게 하였고 그 후 수년간의 로마시대를 제외하고는 나폴리를 중심으로 활약하였다. 아들 도메니코를 비롯하여 이탈리아의 제미니아니, 독일의 J.A.하세 등 뛰어난 음악가를 기른 공적은 매우 크다.
작품에는 오페라 이외에도 약 660곡의 실내 칸타타 및 종교음악, 그리고 기악곡도 적지 않다. 그의 오페라나 칸타타는 오늘날 거의 연주되지 않으나, 《제비꽃》 《갠지스강에 해는 돋고》 등의 일부가 가곡으로서 아직도 애창되고 있다.
글출처: 웹사이트
https://youtu.be/GDcoW6VXya8?si=68R3w0vrWB1j473n
Renato Bruson -Sento nel core - Alessandro Scarlatt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