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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2월 8일 연중 제4주간 토요일
제1독서 : 히브 13,15-17.20-21
복 음 : 마르 6,30-34
그때에 30 사도들이 예수님께 모여 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하였다.
31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
32 그래서 그들은 따로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떠나갔다.
33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모든 고을에서 나와 육로로 함께 달려가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다다랐다.
34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오늘의 묵상>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사도들이 자기 사명을 수행하고 나서 예수님께 돌아와
“자신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마르 6,30)을 보고하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한적한 곳으로 가서 음식을 먹고 쉬도록 배려하시는
오늘 복음의 이야기는 따스하고 사랑이 넘치는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열심히 일한 뒤 형제들끼리 보내는 오붓한 휴가는
어떤 것에도 방해를 받고 싶지 않은 소중한 순간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군중을 피하여 외딴곳으로 떠나지만,
군중은 더 긴 육로를 통해서도
지름길인 뱃길보다 먼저 도착해서 그들을 기다립니다.
예수님 일행을 따라잡으려고 많은 군중이
호수 주변의 길을 바르게 달리는 모습을 상상해 봅시다.
그만큼 그들의 갈망은 절박하였던 것이지요.
오늘 복음은 배에서 내리시자마자 그런 군중을 보신 예수님께서
“가몂은 마음이 드셨다.”(마르 6,34)라고 전합니다.
‘측은히 여기다’로도 옮기는 그리스말의 이 낱말은
본래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곳으로 이해되던 창자가 움직인다는 뜻입니다.
우리말로 ‘애타다, 애달다’와 비슷한 이 표현은
바로 어머니의 마음이요 예수 성심의 사랑을 잘 나타내는 낱말입니다.
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은 계획대로 쉬게 하시고
당신 혼자 군중을 상대하신 듯합니다.
돌보아 줄 이 없는 군중을 보시고 창자가 움직일 만큼
연민이 끓어오르신 예수님께서는
식사와 휴식 그리고 제자들과 보내는 오붓한 시간 등
당신의 모든 계획과 필요를 잊으시고 군중의 필요에 몰두하십니다.
자기 사정을 잊고 상대의 사정에 부응하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마음을 닮는 지름길입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이어령 선생님이 돌아가시기 전,
평소 선생님을 존경해 왔던 분이 병문안을 갔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선생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는 평생 존경을 받았지만, 사랑받지 못했어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다 받지 않으셨습니까?”
“아니요. 스승의 날이 되어도 제 연구실에는 꽃을 들고 찾아오는 제자가 없었습니다.
제가 어려웠던 거지요. 그래서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사람들에게 존경은 받았지만 사랑받지는 못했구나.”
자신과 너무 멀다고 생각하면,
존경할 수는 있어도 사랑하기는 어려운 존재가 됩니다.
이어령 선생님은 이 시대의 석학이고 천재라고 불리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많은 사람이 존경했지만, 사랑하기는 힘들었던 것이지요.
사랑을 주고받으려면 어딘가 빈구석이 있어야 하고,
실수도 하고 어리석은 면도 있어야 했습니다.
너무 완벽하면 사랑이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선생님의 이 말씀에 예수님께서 왜 그렇게 부족한 모습을 보였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의 전지전능함만을 보여 줄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깜짝 놀랄만한 기적만을 행하시고,
그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척척 들어주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상태로는 사랑으로 넘어가지 못한다는 것을 아셨던 것이지요.
그래서 인간적인 나약함도 보여 주셨고, 실제로 십자가 죽음을 통해 인
간이 겪는 죽음까지도 직접 겪으십니다.
존경의 차원을 넘어 사랑의 차원에 함께 머물기 위해서였습니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다고 복음은 이야기합니다.
쉼의 시간이 필요해서 따로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갔지만,
많은 사람이 육로로 함께 달려가 그들보다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많은 군중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보이신 마음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이 마음이 사랑의 마음이었습니다.
목자 없는 양들처럼 영적으로 목말라하는 군중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기에,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십니다.
이 사랑 때문에 사람들은 예수님 곁에서 함께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을 나의 것으로 간직해야 함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사실 저 역시 완벽해지려고만 노력했음을 반성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늘 제 곁에서 멀리 앉으려고 하나 봅니다.
식당에서도 멀리, 성당에서도 멀리….
같이 어우러지는 편안한 사랑의 자리가 나의 자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존경받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참된 목자'이신 예수님의 마음을 세 가지로 그리고 있습니다.
첫째는 지친 제자들을 향한 ‘배려의 마음’이요,
둘째는 몰려든 군중들을 향한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요,
셋째는 양들을 가르치는 ‘스승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파견 받았던 사도들이 돌아오자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마르 6,31)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을 만큼 군중이 몰려왔건만,
예수님께서는 지친 제자들에게 ‘가서 좀 쉬어라’고 배려하십니다.
“쉬어라”는 이 말씀에서,
“하느님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
하느님께서 이렛날에 복을 내리시고 거룩하게 하셨다.”(창세기 2,3)는
<창세기>의 울림을 듣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쉼'은 하느님께서 창조된 모든 것에게
‘복을 내려주시고’, ‘거룩하게 하셨음’과 같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쉬게 하고,
그들이 한 모든 일에 복을 내리고 거룩하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쉼’ 안에서 당신이 바로 ‘주님’임을 알게 하시는 일입니다.
<시편> 작가는 말합니다.
“너희는 멈추고(곧 쉬고) 내가 주 하느님임을 알아라.”(시편 46,11)
또한, 두 번씩이나 반복되는 '외딴곳으로 가서'라는 말씀에서
<호세아서>의 울림을 듣습니다.
“이제 나는 그 여자를 외딴곳 광야로 데리고 가서 다정히 말하리라.
~ 너는 나를 ‘내 남편’이라 부르리라.
~ 내가 너를 아내로 삼으리니, 네가 주님을 알게 되리라.”(호세 2,16-22 참조)
그러니 '외딴곳'에서 벌어질 일은 바로 이 일,
당신을 낭군이라 부르게 되고 ‘주님’을 알게 되는 일입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피곤함에 지친 제자들은 쉬게 하시면서도,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습니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과 같았기 때문입니다.(마르 6,34)
이는 <민수기>(27,15-17)의 표현을 연상시켜줍니다.
거기서 모세는 하느님 백성이 '목자 없는 양처럼'(민수 27,17; 1열왕 22,17) 되지 않도록
한 사람을 세워달라고 간청합니다.
목자의 주요 업무 중 하나는 양 떼를 위한 음식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마치 모세가 광야에서 만나를 불러들이고(탈출 16장),
엘리사가 백 명을 먹이기 위해 빵의 양을 늘렸듯이(2열왕 4,42-44),
예수님께서도 이제 그러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먹을 음식을 마련하기에 앞서,
먼저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기 시작하였습니다.(마르 6,34)
그들이 진정으로 굶주리고 목말랐던 것은
바로 ‘진리’인 ‘생명의 말씀’이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양들을 '진리'에로 인도하는 이가 바로 '참된 목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먼저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참된 양식’을 받아먹는 ‘양’이어야 합니다.
오늘 진정 우리가 그분의 ‘양’이라면,
우리를 ‘측은히’ 여기시는 그분에게서 ‘진리인 말씀의 양식’을 얻을 것입니다.
그리고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마르 6,31)
주님!
저를 외딴곳, 당신의 거처로 데려가소서.
당신 안에 쉬게 하소서.
그 쉼 안에서 사랑에 젖게 하소서.
당신 사랑을 알게 하소서.
그 사랑 안에서 당신을 낭군이라 부르게 하소서.
당신만이 진정한 쉼이오니,
당신 사랑의 속삭임 안에 쉬게 하소서! 아멘.
너무 바빠서 기도합니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사람은 때때로 쉬고 싶어 합니다.
지금 하는 일과 환경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리고자 합니다.
그런데 맘먹고 쉬려고 하면 꼭 일이 생기고 맙니다.
그러니 때로는 지금 자리를 떠나는 것이 필요하고,
어느 특정한 날을 정하여 쉬는 것보다, 일상 안에서 쉬는 법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도 좋지만
지금 하는 일을 즐기는 법을 터득해야 오래도록 지치지 않을 것입니다.
20세기 위대한 별이었던 슈바이처는
“현대인이 하루에 단 몇 분이라도 밤하늘을 쳐다보며 우주를 생각한다면
현대 문명이 이렇게 병들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이 바쁘게 지냈습니다.
그래서 배를 타고 외딴곳을 찾아 떠났습니다.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께서 창조를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습니다.
그리고 이렛날에 복을 내리시고 그날을 거룩하게 하셨으니(창세2,2-3) 휴식은 재충전의 기회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예수님과 제자들이 가는 곳에 이미 도착하여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배를 타고 이동하였는데 모든 고을 사람이 육로를 통해 이동하였다는 것은
어떤 어려움도 기꺼이 감당하였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동시에 그들의 적극적인 태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고을에서 나왔다는 것은 자기들의 삶의 현장을 떠났다는 것을 말해 주는 데
그만큼 예수님께서는 인기가 좋았습니다.
스스로 내 세워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그분을 둘러쌌습니다.
바깥에 있으려 해도 사람들이 그분을 중심에 모셨습니다.
그분에게 매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측은한 마음이 드시어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습니다.
가르쳐 주셨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고기를 잡아 일시적으로 먹여 주시는 것이 아니라
고기를 잡는 방법을 알려주셨다는 것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가르침을 통해서 영적인 갈증을 채우게 됩니다.
세례를 받으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지내시는 분이 많은 데 사실은 이제 시작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고 또 부족한 것은 다시 배우고 ……
주님께서 가르쳐 주셔야 할 것도 많고, 우리가 배워야 할 것도 많습니다.
한 번에 모든 것을 이룰 수는 없는 법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예수님께서는 주변에 사람이 많아서 너무 고달프셨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랑 자체이시고 우리에 대한 사랑이 크시기에
모든 수고로움을 수고로움으로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도
“사랑에 불타는 영혼은 조금도 피로하지 않고
또 남을 피로하게 만들지도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측은한 백성과 함께할 수 있음이 오히려 기쁨이요, 행복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원동력은 외딴곳에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산에 들어가 밤을 새우시며 기도하셨습니다(루카6,21).
이른 새벽, 동트기 전 외딴곳에서 당신을 파견하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는 시간을
결코 소홀히 한 적이 없으셨습니다.
주변에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되셨던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기도를 소홀히 할 수 없음을 생각합니다.
오히려 너무 바빠서 기도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진정한 휴식은 주님과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해도 내 일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일을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11,28).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그들은 목자 없는 양과 같았다.
조욱현 토마 신부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31절)
제자들은 예수님께 파견을 받고 나갔다가(6,6-13) 돌아와서 그들이 한 일을 보고하고 있다.
그때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한적한 곳으로 가서
조용하게 쉬면서 그 보고를 듣고 싶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조용히 쉴 시간이 없었다. 군중들이 많아서 그들은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다.
주님 안에서는 항상 휴식이란 없음을 보여 준다.
하여간에 사도들은 다시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을 찾아 떠나지만(32절),
군중들은 그 배가 이미 어디로 갈 것을 알고는 육로로 예수님의 일행을 앞질러 그곳으로 갔다(33절).
예수께서 배에서 내리시면서 그 군중들을 보시고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여러 가지로 가르쳐 주셨다(34절).
그들을 불쌍히 여기신 것은 “목자 없는 양과 같은”(34절)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다.
신앙인의 삶이란 조용한 곳에서 하느님 앞에 머무르는 것과
사람들 속에서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것이 서로 엇갈리는 삶을 조화롭게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믿음을 가졌다고 하면서 많은 사람이 잘못하는 것은
하느님 앞에 조용히 쉬며 머무르는 시간을 가지지 않기 때문이며,
또한 예수님과 함께 휴식하며 받을 힘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시지만 가끔 하느님 아버지와의 조용한 시간,
즉 기도의 시간을 자주 가지셨던 것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 기도를 통하여 더욱 아버지와 하나임을 확인하시고
기도를 통하여 당신의 사명을 더 잘 완수하실 수 있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시간이 필요하다.
그분과의 일치를 체험함으로써 더욱 다른 사람들에게 훌륭한 가르침을 전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살이 바쁜 속에 그럴만한 시간이 어디 있느냐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어디서나 몸과 마음의 휴식을 주님 앞에 가질 수 있는 여유는 가져야 한다.
우리가 기도를 게을리한다면 활동의 의미를 잃을 수 있다.
이때 우리의 삶은 달라질 수 있으며 주님은 그때 우리에게 필요한 지혜와 힘을 주실 것이다.
이로써 영적인 갈망에 젖어있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삶의 지혜를 가르쳐줄 수 있을 것이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이 있습니다.
원효대사가 당나라로 유학하러 가기 위해 길을 떠나던 중,
밤이 되어, 한 동굴에서 잠을 자게 됩니다.
한밤중에 갈증을 느낀 원효대사는 옆에 있던 물을 발견하고 그것을 마십니다.
물은 상쾌하고 갈증을 해소해 주었기에 큰 만족감을 느낍니다.
그러나 아침이 되어 주변을 보니, 자신이 물을 마신 것은
실제로 해골 속에 고여 있던 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순간, 그는 극도의 혐오감과 구토를 느낍니다.
원효대사는 이 경험을 통해 깨달음을 얻습니다.
자신이 밤에는 해골이라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물이 상쾌하고 만족스럽게 느껴졌지만,
낮에 해골임을 알자 혐오스럽게 느껴졌다는 점에서,
현상의 아름다움과 추함, 좋음과 나쁨은 외부 대상 자체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이해하게 됩니다.
즉,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만들어낸다"라는
‘일체유심조’의 깊은 진리를 체험적으로 깨닫게 된 것입니다.
데카르트는 유명한 명제를 우리에게 남겼습니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말을 통해
생각하는 마음(정신)을 존재의 근거로 삼았습니다.
그는 감각이나 외부 세계가 의심스러울지라도,
생각하는 주체로서의 '나'는 의심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데카르트는 세계를 이해하려면 생각하는 주체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불교는 모든 세계가 마음의 투영이라고 보았습니다.
이 둘 다 마음(정신)을 경험과 존재의 본질로 삼습니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라는 사유를 통해 세계를 인식하고 존재를 확인했다면,
불교는 "일체유심조"를 통해 세계 자체가 마음의 작용임을 드러냅니다.
데카르트는 자아의 확실성을 통해 존재를 증명하고자 했고,
불교는 자아를 초월하여 마음의 본질을 탐구하고자 했습니다.
일이 많았던 날이 있었습니다.
성당 컴퓨터를 새로 설치하는데 문을 열어 주면 좋겠다는 문자를 받았습니다.
제가 워낙 일찍 일어나니 그런 부탁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성당에 관리인이 없고, 이른 시간이라서 기꺼이 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봉사하려는 마음이 고마웠습니다.
사제관 난방에 필요한 ‘필터’를 갈아야 한다는 말을 듣고 기다렸습니다.
필터는 6개월에 한 번은 갈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고맙게도 형제님이 필터를 갈아주었습니다.
93세 어르신을 위한 병자성사가 있었습니다.
건강하셨던 어르신인데 이제는 거동이 불편해서 요양병원으로 옮겼다고 합니다.
부주임 신부님이 성지순례 가서 토요일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청년들과 만날 기회가 적었는데
토요일에 있는 청년 미사를 봉헌하니 청년들을 만나서 좋았습니다.
미사를 마치고 나니, 구역모임이 있었습니다.
지난 송년, 구역 장기 자랑에서 1등 한 구역이 뒤풀이한다고 모였습니다.
덕분에 저녁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정말 마음먹기에 달렸습니다.
일이 많다고 짜증 내면, 아침부터 문 열어 달라는 부탁에
짜증을 내면 하루가 길고 힘들었을 겁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면
모든 것이 하느님의 사랑이요, 하느님의 뜻으로 여겨집니다.
매일 강론을 준비하는 것도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거라 생각하니 감사할 일입니다.
성당의 문을 여는 것도 제게 열쇠가 있기 때문이니 감사할 일입니다.
짚신 장수와 우산 장수의 어머니는 비가 오면 짚신 장수 아들을 걱정했습니다.
짚신이 팔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날이 맑으면 우산장수 아들을 걱정했습니다.
우산이 팔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생각을 바꾸면 비가 와도 좋습니다.
우산장수 아들이 우산을 팔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날이 맑아도 좋습니다. 짚신장수 아들이 짚신을 팔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을 바꾸면 세상이 바뀌는 겁니다. 동양의 현인 장자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들보나 기둥 재목은 성벽을 무너뜨리는 데는 유용하지만, 구멍을 막는 데에는 소용 없다.
그것은 쓰임이 다르기 때문이다.
천리마는 하루를 달릴 수 있지만, 쥐를 잡는 데에는 고양이만 못하다.
그것은 재주가 다르기 때문이다.
올빼미는 밤에는 벼룩을 잡고 터럭 끝도 볼 수 있지만,
낮에 나와서는 눈을 뜨고도 큰 산조차 보지 못한다.
그것은 본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제게는 큰 울림을 주었던 말입니다.
세상 모든 것은 다 쓰임이 있습니다. 세상 모든 것은 다 재주가 있습니다.
세상 모든 것은 다 본성이 있습니다. 그 쓰임과, 재주, 본성이 다를 뿐입니다.
남과 비교해서 교만할 필요도 없습니다. 남과 비교해서 아쉬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많은 분이 세례를 받았지만, 신앙인이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참된 평화와 참된 행복을 만나면 좋겠습니다.
귀소본능의 아름다운 모습을 우리는 루가복음 15장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집을 떠났던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옵니다.
우리는 그것을 회개라고 부릅니다.
아버지는 초라한 모습으로 돌아온 아들을 따뜻하게 맞이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렸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진정한 쉼은 주님 현존 안에 머물 때 가능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아무리 나이를 먹어가도, 또 아무리 노력해도 잘 안되는 부분이 제게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적절한 균형 감각입니다.
기도와 일 사이의 균형, 일과 쉼의 안배, 말과 침묵의 균형, 밀고 당길 줄 아는 능력...
그러다 보니 언제나 막판 몰아치기의 전문가, 언행 불일치의 대표주자가 되는 것 같습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모습은 참으로 눈여겨볼 만합니다.
공생활을 시작하시는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직감하셨습니다.
그래서 분주히 움직이셨습니다.
이 고을, 저 고을 옮겨 다니셨습니다.
몰려드는 군중의 필요성을 원 없이 충족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다 보니 예수님뿐만 아니라 제자들까지 상습 피로에 시달렸고,
이러다 과로사하겠다는 위기감까지 들 정도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 입에서 나온 말씀이 이랬습니다.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마르 6,31)
세상살이에 지친 우리들, ‘나와 다른 그’로 인해 지친 우리에게도 휴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일 한 가지는, 아무리 하루 온 종일 아무것도 하는 일 없이
드러누워 뒹굴거리고 있어도, 더 피곤한 건 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참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는 쉼터 같은 존재,
선물 같은 존재와 시간을 보내야 될 것입니다.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따뜻해지는 존재,
더불어 보내는 시간이 힐링이 되는
그런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것이야말로 참 휴식일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편안한 대상이라 할지라도
우리 모두 나약한 인간들인지라 언제나 한결같지는 않습니다.
환대받던 존재에서 환멸의 대상으로 전락하기란 순식간입니다.
그래서 관계 안에서 더 많은 배려와 예의, 친절과 존중이 필요한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결국 진정한 휴식, 참된 쉼, 깊은 마음의 평화를 주시는 분은
인간 존재가 아니라 주님이시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궁극적, 최종적으로 나아가 머물 곳은 주님 면전임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주님, 그분 앞에 편안히 앉는 것이 참된 휴식입니다.
그분과 눈을 마주치고, 그분 앞에 머무는 것이 참된 쉼입니다.
그분께 내 모든 상처 보여드리고 맡겨드리는 것이,
참된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한 비결입니다.
하느님께 찬미, 이웃에게 선행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예수님을 통하여 언제나 하느님께 찬양 제물을 바칩시다.
그것은 그분의 이름을 찬미하는 입술의 열매입니다.
선행과 나눔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이러한 것들이 하느님 마음에 드는 제물입니다.”
오늘로 히브리서 독서가 끝나는데 당부 말씀으로 끝을 맺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언제나 하느님께 찬양 제물을 바치라는 것과
이웃에게 선행을 하고 나눔을 실천하라는 것인데
둘을 합치면 하느님과 이웃에게 할 도리를 하라는 말입니다.
먼저 위로 하느님께 해야 할 도리로 언제나 찬양 제물을 바치라고 하는데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어떻게 언제나 찬양 제물을 바칠 수 있을까 생각됩니다.
‘언제나’는 참 어려운 것이고 성인에게나 가능하거나 성인도 쉽지 않은 것입니다.
‘언제나’는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언제나’ 이고,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언제나’라는 말이잖습니까?
그런데 더 생각해 보면 하느님께 찬양 제물을 바치면
괴로울 때도 이미 괴롭지 않게 되고 슬플 때도 이미
그 슬픔이 전혀 슬픔이 아닐 것입니다.
사실 그러기 쉽지 않아서 문제지 그럴 수만 있다면
괴로울 때 찬양 제물을 바치는 것은 괴로움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이고,
괴로움에 매이거나 머물지 않고 눈을 들어 하느님을 보는 것이며
그래서 괴로움을 넘어 이미 하느님께 가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하느님께 찬양 제물을 바치는 것은
하느님께 대한 도리가 아니라 나의 유익이고,
나에게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연중 공통 감사송 4>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아버지께는 저희의 찬미가 필요하지 않으나
저희가 감사를 드림은 아버지의 은사이옵니다.
저희 찬미가 아버지께는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으나
저희에게는 주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 도움이 되나이다.”
두 번째 도리인 이웃 사랑도 이 면에서는 마찬가지입니다.
선행과 나눔을 실천하는 것이 이웃에게 도움 되는 측면이 없지 않겠지만
사실은 그에게 도움 되는 것보다 훨씬 더 나에게 도움이 됩니다.
선행과 나눔을 실천하려고 하는 순간 사랑이 들어와 내 안에 머물고,
선행과 나눔을 실천하고 나면 더더욱 사랑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선행을 실천하느라 힘이 빠져나가고,
나눔을 실천하느라 돈이 빠져나갈지라도
사랑이 들어오고 보람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느님 사랑 까닭에 한다면
하느님 사랑이 내 안에 들어오기에 더더욱 충만하고 보람될 것입니다.
오늘 히브리서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루게 해 주시기를” 빌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 마음에 드는 것을 우리에게 해 주시기를” 비는데
하느님 뜻과 하느님 마음에 드는 것이 바로 이것임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四端의 마음씨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오늘 복음은 파견된 제자들의 복귀와 활동을 보고,
그리고 쉴 틈도 없이 바로 이어지는 예수님의 활동 상황을 소개하고 있다.
우리는 지난 목요일 복음으로 예수께서 12제자들을 파견한 사실을 들었고,
어제 복음으로는 세례자 요한의 수난과 죽음에 관한 기록을 접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치유와 구마의 능력을 주어
마을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선포하도록 아주 엄중한 여장규칙과 함께 파견하였고,
파견된 제자들은 실제로 수많은 병자들을 치유하고
마귀들을 쫓아내며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였다.
마르코는 제자들이 마을을 돌아다니며 활동하는 동안에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관한 과거 기사를 들추어 보도하였다.
이는 제자들이 돌아올 때가지의 시간을 벌기 위한 편집상의 묘기로 볼 수도 있고,
예수의 정체에 관하여 헤로데를 포함한 사람들의 오해와 착각을
拂拭시키는데 一助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 사이에 제자들은 다시 예수께로 돌아왔고,
그들의 활동애녁(6,13)은 이미 복음에 언급되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행한 활동들에 대하여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상기되었을 터이고, 더러는 꽤나 피곤했을 것이다.
이 시점에서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휴식과 재충전이다.
그런데 찾아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다는 것이 당시의 상황이다.
그러므로 재충전이란 한적한 곳으로 떠나
좀 쉬면서 음식도 먹고 편안하게 묵상하며 기도하는 것이리라.
이렇게 한편으로는 예수와 제자들이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으로 떠났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예수의 일행을 찾아 혈안이 되어 있었다.
예수의 일행이 이동의 수단으로 배를 이용했으니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군중은 영악했다. 그들은 여러 동네에서 나온 사람들과 함께 육로를 이용하여
예수의 일행을 앞질러 배가 닿을 곳에 이미 가 있었다.
이렇게 예수와 군중은 다시 만나게 된다.
이 만남은 곧 펼쳐질 ‘오전 명을 먹인 빵의 기적’(6,35-44)을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육신의 배고픔을 위한 빵을 먹기 전에 먼저 먹어야 할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말씀의 빵이다.
무릇“사람은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하는 것”(마태 4,4)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여러 가지로 군중을 가르치셨다.
예수께서 자신은 물론이고 제자들까지 피곤해하여 휴식을 필요로 함을 알고 계시면서도,
말씀의 빵을 내리신 이유는 군중에 대한 惻隱之心이다.
말씀의 빵은 인간의 靈的인 배고픔을 충족시킬 것이다.
그러나 肉身을 위한 빵도 빼놓을 수 없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직접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6,37)고 명하신 것이다.
불쌍한 군중에 대한 예수님의 마음이 바로 이런 것이다.
이 예수님의 마음은 또한 모든 사목자가 몸에 익혀야 할 기본적 소양이리라.
사목자가 몸에 익혀야 할 소양에 관하여는
유교교설의 四書 중 하나인 孟子에서도 엿볼 수 있다.
맹자에는 사단(四端)이라는 대목이 있다.
사단은 사람의 본성인 仁⋅義⋅禮⋅智에서 우러나오는
惻隱⋅羞惡⋅辭讓⋅是非의 네 가지 마음씨를 말한다.
측은지심은 사람의 형편을 불쌍하고 가엾게 여기는 마음이요,
수오지심은 자신의 옳지 못함을 부끄러워하고 남의 옳지 못함을 경계하는 마음이요,
사양지삼은 겸손하여 不義를 받지 않거나 이에 응하지 아니하는 마음이요,
시비지심은 사물의 옳고 그름을 밝히고 따지는 마음이다.
이들 마음은 예수님처럼 행동에 옮겼을 때 비로소 아름다운 것이겠지만,
중요한 것은 우선 이런 마음을 우리 가슴에 사무치도록 새겨 넣는 것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