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주년, 3.15 마산의거일이죠.
옛날에 썼던 글을 오늘에 되살려 갖고와봅니다.
1950
년대 중반 이래,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체제가 점점 공고화되자 우리나라의 많은 뜻있는 자유 민주주의자들은 그에 맞서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이범석 장군처럼 국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독재를 용인한 사람도 있었지만, 김성수 선생 같은 양반은 유명을 달리하는
순간까지도 '독재를 막아야지'라고 했다 하죠. 신익희 선생과 조병옥 선생이 선거 직전에 서거하는 일이 일어나자, 이러한
분위기가 1960년에 이르러 무르익어, 자유당에서 이런저런 야비한 수단으로 다시 한 번 정권을 연장하려 하자 국민들은 참지 못하고
들고일어나게 됩니다. 게다가 이승만의 공과 과는 서로 컸을지언정, 자유당은 완전히 부패 그 자체였으니까요.
당시
동아일보에 연재되던 선거관련 소식통인 <3.15 카르텔>을 보면 지금 같으면 생각할 수도 없는 백색테러가 다수 발생하고 있었습니다. 50년대 중반까지는 '전쟁통에, 비상시국이니...' 하며 묵인(용인이 아닙니다)하던 국민들도, 슬슬 이때쯤
해서는 '이건 아니다'싶은 기류가 형성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민의는 2월 28일, 대구에서 학생의 손으로 폭발하게 됩니다.
2.28 학생시위는 4.19 혁명의 서곡이었습니다.
"인류 역사 이래 이런 강압적이고 횡포한 처사가 있었던가. 근세
우리나라 역사상 이런 야만적이고 폭압적인 일이 그 어느 역사 속에 끼어 있었던가. 우리는 배움에 불타는 신성한 각오와 장차
동아를 짊어지고 나갈 꿋꿋한 역군이요, 사회악에 물들지 않은 백합같이 순결한 청춘이요, 학도이다. 백만 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
신성한 권리를 위하여 서슴치 말고 일어서라!"
- 하청일(당시 경북고 중퇴) 작성, 이대우(경북고 학생회장) 발표 선언문 중에서.
그리고 마침내 정/부통령 선거일인 3월 15일이 되자, 마산에서 '이런 이상한 선거는 용인할 수 없다'며 민주당 마산지부가
선거포기를 선언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투표용지조차 받지 못한 사람이 부지기수였고, 봉인을 뜯지도 않은 투표함에 미리 작성된
자유당 표가 나뒹굴었으니까요. 이에 민주당 당원뿐만 아니라 김용실(당시 마산고 1)등 여러 학생들이 항의시위를 하러 창동으로 뛰쳐나갔습니다.
많은 시민들이 그에 동조하여 항의를 하였는데, 한 학생이 경찰서장의 핸드마이크에다 대고 '자유'를 외치자 그 서장이 학생을 무참히
곤봉으로 두들겨패버리는 일이 일어납니다. 지금의 코아양과-삼성생명 사이의 그 어귀입니다.
마산 사람들 한번 열받으면 무섭습니다. (아직도 번개시장 같은 데 가 보면 나이많은 아재들이 막걸리 한사발 하고서는 "양 산(山: 부산마산을 지칭)이 뿔받으모 나라가 마 뒤비지뿐다안캐샀느나." 하고들 계십니다.) "공부하는 학생을 마 그래 주 뚜디패나!" 하고 흥분한 시민들의 목소리가 높아집니다. 분위기가 심각해지자 경찰 당국에서는 시위대를 해산시키려고 하는데, 이 때 소방차를 동원한 것도 모자라 '반공청년단'을 사줗서 할머니고
여고생이고 간에 대단히 강도높은 폭력을 행사하여 강제해산시켰습니다. (막말로, 개패듯이 두드려 팼단 얘깁니다)
군중의 흥분은 이때쯤해서 차가운 분노로 바뀌어가고 있었습니다. '내 표 돌려내라는 데 내가 왜 맞아야 되나, 학생이 바른말을 하는데
왜 두들겨맞아야 하나.' 게다가 삼팔따라지 피난민들 - 대부분 극렬 반공 - 을 "빨갱이"라며 두드려팼으니 그 분노는 하늘을 찌를밖에요. 개표가 시작되는 오후 7시에 마산시청 앞에서 모이기로 사람들 사이에는 암묵적인 약조가 되었고, 해가 지자 사람들이
마산시청(현 세무서 자리) 앞에 몰려가서 항의시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녁 7시경, 출동한 소방차가 그만 무학초등학교 앞 전신주를 들이받았고 이 여파로 신마산
일대가 정전이 되어 버립니다. 때를 같이하여 경찰의 발포가 시작되었고 학생과 시민 여럿이 쓰러졌습니다. 김주열 열사는 사실 시위에
조직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이날 최루탄을 왼눈에 직격당해 즉사했고(원래 교범상 사람보고쏘면 안 됩니다), 경찰서장은 뒤늦게 발견된 시신을 도립병원으로 옮기지 않고 신포동 중앙부두 앞에 빠뜨려 은폐하려 했습니다.
이외에도 경찰은 도립병원(현 마산의료원)에 안치된 시체의 옷 주머니 속에 '인민공화국 만세' 같은 삐라를 날조해서 집어넣는
짓을 하는 듯 많은 은폐, 날조공작을 시도했습니다. 도망치던 시위군중은 자유당사와 남성동파출소 등에 불을 지르는 등 흥분했고
마산시내는 암흑천지에 총성만 오갔지요. 재밌는 것은 이 때 남성동파출소에 있던 경찰들은 어느 민주당원의 집 지하실에 숨어 있었죠.
'이들이 총질을 한 것이 아니다. 쓸데없는 희생은 피해야 하는 것 아닌가.' (나중에 이 경찰들은 고문과 폭력이 횡행하던 경찰서
취조실에서 이 사람을 구해줍니다.)
한편 3.15
의거의 열기가 점차 식어가던 다음달 11일, 신포동 부두에서 시체가 하나 떠오릅니다. 김주열 열사였죠. 시위현장을 수습하던
경찰서장이 시체를 보자 얼른 은폐를 해버린 것인데, 이게 매달아다둔 돌이 빠지면서 떠올랐던 거죠. 후에 AP통신이 서울발로 보도한
기사는 이렇습니다.
"낚시꾼은 굉장히 큰 놈이 물린거라고 생각하고 기분 좋게 낚싯줄을 당기기 시작했으나 얼마 후 물
위에 나타난 것을 보고 그만 벼락이라도 맞은 듯이 몸이 굳어져 버렸다. 더러운 마산항의 수면으로 떠오른 것은 열여섯 살 난
김주열이라는 소년의 시체였던 것이다... 마산 시민들은 눈앞에 끌어올려진 시신을 보고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AP, 1960.
5. 2)
혈기왕성한 마산 뱃사람들은 그 처참한 몰골을 보고서는 분노를 폭발시킵니다. 당시 김주열의 어머니 권찬주 여사가 행방불명된 아들을
찾겠다고 마산시내를 온통 수소문하고 다녔기 때문에 마산시내 분위기는 꽤 좋지 않았죠. 당시 제 부친의 기억으로는 시신이 시청 뒤 저수지에 있다는 소문이 돌았고, 물을
모두 퍼내고 수색을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 날 시위와 김주열 시신의 사진은 부산일보 허종 기자에 의해 제1보로 알려지고, 이어 마산에 특파원으로 내려와 있던 동아일보
이만섭 기자(그 이만섭 맞습니다...)가 기사를 써서 전국에 특종으로 타전함으로서 전국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자유당의 부정부패에 진절머리가 나 있던 국민들은 독재를 공고히 하려는 그러한 비민주적 행태에 분노를 폭발시키고 말았죠. 게다가 4월
15일, 이승만은 '마산 시위는 공산당의 소행이다'라는 망언을 하여 사람들을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하여 4월 18일 고려대에서 벌어진 학생시위를 필두로, 시위는 마침내 서울까지 번졌습니다. 이 날 고려대학교 학생들은 선언문을 발표하고 항의시위를 벌입니다. 이른바 '4.19'(고려대학에서는 4.18)의 서막이 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
이제 질식할 듯한 기성 독재의 최후적 발악은 바야흐로 전체 국민의 생명과 자유를 위협하고 있다. 그러기에 역사의 생생한 증언자적
사명을 띤 우리들 청년 학도는 이 이상 역류하는 피의 분노를 억제할 수 없다. 만약 이같은 극단의 악덕과 패륜을 포용하고 있는 이
탁류의 역사를 정화시키지 못한다면 우리는 후세의 영원한 저주를 면치 못하리라. .... 우리 고대는 과거 일제하에서는 항일
투쟁의 총본산이었으며 해방 후에는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사수하기 위하여 멸공 전선의 전위적 대열에 섰으나 오늘은 진정한 민주
이념의 챙취를 위한 반항의 봉화를 높이 들어야 하겠다. .... 기성 세대는 자성하라! 마산 사건의 책임자를 즉시 처단하라!
우리는 행동성 없는 지식인을 배격한다! 경찰의 학원 출입을 엄단하라! 오늘의 평화적 시위를 방해치 말라."
- 고려대학교 학생선언문 중에서 발췌.
그러나 경찰은 반공청년단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이정재 같은 정치깡패를 동원했습니다.
한 가지 야사가 있다면... 4.19 당일 발포로 인한 고려대생들의 피해가 의외로 적은 이유는 이 4.18때문이란 얘기가 있습니다. 4월 18일 가두집회에는 고려대와 인근 서울상대(현 서울사대부고 자리)가 나섰는데, 정치깡패들이 고대생들을 두들겨패서 신설동 로타리에서 고려대까지 학생들이 밀려오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약간 샌님같은 이미지의 서울대와 달리 그 당시의 고대란 그야말로 막걸리문화 그 자체라, 학우가 두들겨맞는 걸 학교 코앞에서 본 학생들은 오히려 정치깡패들을 동대문까지 쫓아가서 두들겨패버립니다.(....) 그러고는 막걸리를 거나하게 마시고 잠들었다가 다음날인 19일 정오쯤 하나 둘씩 일어나서 오후에 다시 시위에 합류했는데... 이 때는 이미 광화문 앞에서 경찰 발포가 일어난 다음이었다는 겁니다(4.19는 5.18과 달리 조직적인 군사작전이 일어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쨌든 이 4.18 시위의 과정에서 수십 명 - 특히 서울대 상과대생과 문리대생들 - 이 부상을 입었고, 당시 사회적으로
고결하고 존경받던 위치에 있던 '대학생'을 '깡패'를 불러다 두들겨팼다는 사실에 시민들은 대단히 분노했습니다. 전쟁의 후유증으로 신음하던 세계에서 제일 가난한 나라에서 제일 믿을 만한 자원들은 엘리트 대학생뿐이었으니까요.
그리하여, 이튿날인 4월 19일에는 모든 시민과 학생들이 전부 들고일어나게 됩니다. 경무대(현 청와대)로 가서 이승만과 면담을 요구한
서울시내 대학 연합 학생시위대를 경찰은 조준사격으로 응대했습니다. 평화적 시위를 벌였던 많은 시민들이 피를 흘렸습니다.
특히 동국대의 경우 선봉에 서 있었기 때문에 피해가 컸습니다. 노희두(동법 '59)열사는 그 자리에서 사망, 28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그 외에도
일반 시민들의 희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대학생들은 당시 경찰과 반공청년단(정치깡패)측의 폭력진압에 대응, 다가올 수 없게 수도관을 굴리며
전진하였는데, 최루탄에 원거리 실탄조준사격으로 응사해 왔던 겁니다. 학생들은 전차와 소방차를 탈취해서 저지선 쪽으로 밀고들어가 바리케이트를 뚫어 무력화한 후, 그 혼란의 틈을 타서 겨우 후퇴했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신문기사로 실린 그날의 기록을 언론은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
동국대생을 필두로 한 2천여 명의 데모대는 노도와 같이 경무대쪽으로 돌진해 갔다. 돌진! 돌진이다. 연막탄으로 덮인 저쪽에서 수백
발의 총성이 들리고 실탄이 비오듯 날아온다. 이 순간 바로 기자 옆에 서 있던 학생이 가슴에 손을 대고 쓰러졌다." (동아일보)
"데모대는 물러섰다. 하지만 동국대학 플래카드를 지키고 있던 네 명의 기수는 물러서지 않았다. 이날 학생측 사상자는 수백명.."(한국일보)
이외에도, 당시 침묵을 지켰던 HLKA(현 KBS 제1라디오)와 달리 민영 CBS는 시위 관련 속보를 빵빵 날려댑니다. 지금과 달리 당시만 해도 미국 기독계열 지분과 미 CBS 본사의 투자도 좀 있었기 때문이라는 이유가 있죠. (전두환이 언론통폐합하면서 DBS와 CBS의 보도기능을 무력화시킨 이유가 있습니다. DBS는 한일회담시위 때, CBS는 4.19때 보도의 첨병이었기 때문. 이 당시 MBC는 아직 부산의 지역 민간 라디오방송이었음.)
이 새빨간 플래카드는 아직도 동국대 중앙도서관 로비에 그대로 걸려 있다더군요.
이후 격렬한 시위는 잠시 잦아들었지지만 항의의 거리행진 자체는 날마다 끊이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초등학생들이 '언니들을 쏘지
마세요'라며 가두행진을 하는 형편이었습니다. 대한민국과 공고한 동맹관계에 있던 미국의 주한 대사조차 '시민의 피해가 크다'며
우려의 목소리를 높였고, 이승만의 내각제 주장에 대해 '내각제는 미봉책일 뿐'이라며 실질적으로 하야를 권고하였다고 합니다.
이에 이승만은 군대에 의한
원만한(?) 해결을 내심 바랐으나 군부는 '시민을 지켜야 한다'며 중립을 표하였습니다. 사실 3.15, 4.19 당시 시민의
분노를 산 가장 큰 요인 중 하나가 나라 지키는 사람들이 왜 죄없는 시민을 쏘아 죽였느냐는 점이었죠. 이는 최근 무바라크 정부에 대한 이집트 군부의 태도와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습니다.
사태는 이승만의 바람대로 가라앉기에는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되어 갔습니다. 4월 23일에는 장면
부통령이 항의의 뜻으로 사의를 표명하고, 다음날인 24일에는 권력의 핵이던 이기붕이 부통령 당선자 자격을 포기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의 분노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이윽고 4월 25일, 이항녕 교수를 대표로 한 전국의 대학교수 258명은 성명서를 발표합니다.
"
이번 4.19의거는 이 나라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중대한 계기다. 이에 대한 철저한 규정 없이는 이 민족의 불행한 운명을
도저히 만회할 길이 없다. 이 비상 시국에 대처하여 우리는 이제 전국 대학 교수들의 양심에 호소하여 아래와 같이 우리의 소신을
선언한다.
1. 마산, 서울 기타 각지의 학생 데모는 주권을 빼앗긴 국민의 울분을 대신하여 궐기한 학생들의 순진한 정의감의 발로이며 부정과 불의에 항거하는 민족 정기의 표현이다.
2. 이 데모를 공산당의 조종이나 야당의 사주로 보는 것은 고의의 곡해이며 학생들의 정의감의 모독이다.
3. 평화적이요 합법인 학생 데모에 총탄과 폭력을 기탄 없이 남용하여 대량의 유혈, 참극을 빚어낸 경찰은 '민주와 자유'를 기본으로 한 국립 경찰이 아니라 불법과 폭력으로 정권을 유지하려는 일부 정치 집단의 사병이었다.
4. 누적된 부패와 부정과 횡포로서의 민족적 대참극, 대치욕을 초래케 한 대통령을위시하여 국회의원 및 대법관 등은 그 책임을 지고 물러나지 않으면 국민과 학생의 분노는 가라앉기 힘들 것이다.
5. 3.15선거는 불법 선거이다. 공명 선거에 의하여 정,부통령 선거를 다시 실시하라.
6. 3.15 부정 선거를 조작한 주모자들은 중형에 처해야 한다.
7. 학생 살상의 만행을 위에서 명령한 자 및 직접 하수자는 즉시 체포 처형하라.
8. 모든 구속 학생은 무조건 석방하라. 그들 중에 파괴 또는 폭행자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동료 피살에 흥분된 비정상 상태하의 행동이요, 폭행 또는 파괴가 그 본의가 아닌 까닭이다.
9. 정치적 지위를 이용 또는 권력과 결탁하여 부정 축재한 자는 관, 군, 민을 막론하고 가차없이 적발, 처단하여 국가 기강을 세우라.
10. 경찰은 학원의 자유를 보장하라.
11. 학원의 정치 도구화를 배격한다.
12. 곡학 아세하는 사이비 학자와 정치 도구화하는 소위 문인, 예술인을 배격한다.
13. 학생 제군은 38선 넘어 호시탐탐하는 공산 괴뢰들이 군들의 의거를 선전에 이용하고 있음을 경계하라. 그리고 이남에서도 반공의 이름을 도용하던 방식으로 군들의 피의 효과를 정치적으로 악이용하려는 불순 분자를 조심하라.
14. 시국의 중대성을 인식하고 국가의 장래를 염려하여 학생들은 흥분을 진정하고 이성을 지켜 속히 학업의 본분으로 돌아오라.
- 단기 4293년 4월 25일, 대학교수단"
사회적으로 지성인의 자리에 있는 대학교수들이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라"며 들고일어난 사실은 대단히 충격적인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4월 26일, 이승만은 하야를 선언하고 하와이로 망명하기에 이릅니다. 떠나는 대통령에 대해서 국민들은 독립운동과 건국의 공을 생각해서 떠나가는 길까지
막지는 않았습니다. 반면 실질적인 권력의 핵이자 부정부패의 중심이었던 이기붕은 자신의 양아들의 총에 맞아 죽고, 양자 자신을
비롯한 온 가족이 살해당합니다.
허정의 과도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도 일부 시위대가 계속 난동을 부리는 등 잡음이 있었던 건 사실이었습니다만, 대부분의 군중들은 평온과
질서를 되찾았습니다. 마산에서는 타 지역에서 '원정 시위대'가 와서 난동과 행패를 부리는 통에 마산측에서 시위를 하던 사람들이
이들을 오히려 달래고 재워서 집으로 보냈다고 하죠.
이후 역사는 알려진 대로입니다. 민주당이 압도적인 지지 속에 정권을 잡았지만 정책 추진과 발포관련 책임자 엄벌은 지지부진했고 그
와중에 장면과 윤보선을 필두로 하는 신/구파로 갈라져 권력싸움을 일삼았죠. 국민들은 '자유당이 다시 돌아오는 거 아니냐'며 염증을
냈고, 급기야는 이듬해 5월 16일, 박정희 소장 이하 30여명의 군부세력이 쿠데타를 일으키고 권력을 잡게 됩니다. - 이 때
군부세력이 민중의 지지를 받게 된 큰 요인 중의 하나가 '3.15, 4.19 청산을 확실히 해치웠다'는 점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물론 1964년 예편 후 윤보선과 맞붙은 대통령선거에서 전남 도서지역 몰표(...)로
당선되었던 박정희는, 꼭 10년 후 1974년 <유신헌법>을 제정하면서 그 스스로가 독재자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만.... 민중이 원하는 걸 알고 그로 인해 지지를 얻었던 사람이 스스로 독재자가 되었고 영구집권을 꿈꾸었으며, 말년에는
유혈진압까지 기도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3.15 의거탑. 창원시 마산합포구 서성동 소재
유신독재와, 다시 일어난 신군부의 쿠데타로 인해 미완의 혁명으로 남았던 4.19는 6월항쟁이 성취된 1987년에 와서야
일단락되었다고 볼 수는 있겠죠. 하지만 그로부터 51년, 꼭 반세기가 지나 다시 우리를 돌아보면, 우리는 지금 어느 정도 민주화된 대한민국 사회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을까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아니, 대한민국 국민들은 자유 민주주의라는 것의 의의를 아직 기억하고 있을지, 오늘을 기해 다시 되새겨 봅니다. 그리고 아직 배우는 후배들을 위해 제가 아는 것을 이렇게 주절주절 써 봅니다.
그 때 "선배"들은 자기 말할 자유, 자기 권리 행사할 자유를 위해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걸고 싸웠습니다. 사실 제가 이 당시의 역사를 들고 파게 된 직접적인 이유 또한 그것이었습니다. 우연히 모교의 도서관에서 발견한 기록들을 읽다가, 그 시위 최일선에 있다 총 맞아 죽은 사람이 수십년 전 내 또래의 고등학생, 그것도 학년도 반도 심지어 반장이라는 것까지 똑같은 겁니다. 이 시점에서, 내가 그라고 가정했을 때, "그래 너는 누가 너한테 폭압하면 총 앞에서 떳떳하고 용감하게 나설 수 있겠느냐?" - 못하겠더라구요.
저는 그 때 역사란 게 죽은 옛 기록이 아니라 현실감으로 확 다가오는 놀라운 경험을 했던 겁니다. (이 얘기를 지인에게 하니 광주 사는 그놈 왈 "뭘 그갖고 그냐. 나 고등학교 선배들은 탱크 앞에서 싸웠는디...")
P.S.
매년 3월 15일이 되면 남쪽 항구도시의 몇 군데 학교들은 수업을 하루 쉬고 체육관에 모여 추념식을 가집니다.
솔직히 제가 있던 그 때에 그냥 기념식 가라니까 가서 만세 삼창 부르고, 교복입은 채 그 당시를 기리는 행진에 참가한 것도, 이성에 대한 호기심(...) 반쯤 해서 참가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 행진은 옛날 의거 현장에 나왔던 학교들의 후배가 모인 것이었으니, 마산고, 마산상고(현 용마), 마산여고, 성지여고, 제일여고, 창신고... 딱 행사 끝나고 창동이나 댓거리에서 딱 미팅하기 좋았던지라.(...)
그래도, 반쯤은 멋도 모르고 참가한 가두행진이었지만 그 당시에도 그게 의미깊은 거라는 것은 알고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대개는 대학생이 되거나 혹은 그 이후에 의식화가 되면서 아, 우리가 정말 뜻깊은 행사에 참가를 했었구나 하고 훗날에 되새기게 되긴 합니다만.
그리고 희한하게도 3월 15일의 날씨는 을씨년스럽습니다. 희끄무레하게 개거나, 혹은 흐리거나. 비가 오는 경우는 드물지만. 심지어 1960년 3월 15일 당시의 날씨도 꾸무룩했다 하더군요. 어쨌든 확실한 건 꼭 이 날만 되면 꽃샘추위가 찾아와 쌀쌀해진다는 겁니다. 올해도 그렇군요.
첫댓글 생생한 소식 감사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내일 학교가서 저 플랜카드 찾아봐야겠네요.. 도서관 가면서 못봤는데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