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이 다반사라 했지만
막동리에서 차茶라는 것은
일상적이라 할 수 없는
아주 드문 희귀한 문화코드다.
보리차 생강차 유자차 칡차 등
茶나무 잎차와는 다른
뿌리나 줄기 열매 등의 차나
한방의 약차 등
일명 대용차만이 있어
주방 그릇의 연장선에 있는
쟁반 상 대접이나 사발 컵 등을 사용했기에
다반이나 다탁 다도구의 개념도 없었다.
茶문화는 그저 나만의 기호가 되어
호응없이 홀로 홀짝거리다간
스르르 접히고만 문화였었다.
어느 순간 시류를 탔는지
호기심과 호응이 일기도 하였지만
단발적으로 끝났었는데...
딱 한 사람이 더해져
이토록 茶를 두고 마주앉아
우리고 나누고 음미하며
주거니 받거니 즐겨하니
이번 막동리 겨울엔
찻자리가 일상화되어 가고 있구나.
차맛좋아님과 더불어 오고가며
일상다반사 그 문화코드의 매력을
새삼 그윽히 더불어 나누다.
감사하여지이다~~~
그에 더하여
어머니와 도란도란
"아줌마 파마머리"에 대한
이야기를 지펴보기도...
이렇게 지난 주간
겨울 한파를 보내고 있었다.
- 1月의 끝에서 산울림 drea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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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아래는 '파마'에 대한 펌글>
파마란?
영구적 곱슬머리를 말하는 영어 Permanent Wave(퍼머넌트 웨이브)가 변한 말이다. 1906년경 영국의 유명한 미용사였던 찰스 네슬러가 화학약품인 붕사에 적신 머리카락을 봉에 감아 열을 가하면 영구적인 곱슬이 된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것이 현대 파마의 시초다. 1941년 미국의 맥도너프가 열을 가하지 않아도 되는 화학약품을 개발함으로써 이른바 냉(冷) 파마 시대를 열었다.
세계 파마의 역사
5000년 전 이집트서 시작
파마의 기원은 고대 이집트로 거슬러 올라간다. 약 5000년 전 이집트에서는 모발에 진흙을 바르고 둥근 나무봉을 말아 일광열로 건조시켜 웨이브를 처음 연출했다. 이는 토양의 알칼리성을 이용한 것으로 스트레이트 머리에서 벗어나 새로운 멋을 연출할 수 있다는 점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프랑스 루이 14세 때에는 웨이브가 있는 모발을 가장 아름답다고 여겨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동그랗게 감아 올린 가발이 유행하기도 했다. 1875년에는 프랑스의 마샬이란 미용사가 아이론을 이용해 일시적인 웨이브를 만들기도 했다.
진흙-놋쇠 롤러-냉(冷)파마
그리스, 로마에서는 불에 달군 둥근 쇠막대기에 머리를 둘둘 감아 모양을 냈다. 물론 이 같은 퍼머기술로는 그 형태를 오랜 시간 유지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현대적 의미의 파마는 1906년 독일인 헤어드레서 칼 네슬러에 의해 처음 등장했다. 그는 영국으로 건너 와 런던 옥스퍼드 거리에 미용실을 열고 아내를 대상으로 ‘실험’에 들어갔다. 수산화나트륨에 적신 머리카락을 섭씨 100도로 달군 놋쇠 롤러로 단단히 말아 5시간을 유지한 것. 길이 30㎝, 무게 900g에 이르는 길고 무거운 놋쇠 롤러는 전기 샹들리에에 연결돼 있었는데 놋쇠 롤러가 떨어져 두 차례나 머리를 지질 위기를 모면한 뒤에야 오늘날의 ‘파마’가 완성됐다. 이처럼 우여곡절 끝에 탄생한 현대 파마는 1938년에 이르러 비로소 화학약품을 사용하는 ‘냉(冷) 파마’로 발전했다.
70년대에 접어들어 파마는 영국 프리미어리그 축구 선수들 사이에 붐이 일기 시작했고 이후 데이비드 보위, 캐서린 제타 존스 , 맥 라이언, 존 본 조비 등 패셔니스타들에 의해 세계적으로 대유행을 타게 됐다. 이처럼 대중의 사랑을 받아 온 파마도 한때 ‘위기’에 봉착했다. 1990년대 말 인기 TV시트콤 ‘프렌즈’의 제니퍼 애니스톤 이 선보인 찰랑거리는 스트레이트 헤어가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큰 인기를 모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행은 돌고 도는 법. 곧은 머리에 싫증이 날 무렵 2006년 헤어트렌드는 다시 ‘웨이브’로 회귀했다.
우리나라 파마의 역사
1930~1940년대
우리나라에서 파마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37년이다. 당시 파마는 여성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최초로 파마를 한 여성으로는 영화배우 이월화, 소설가 김명순, 이화학당 출신의 문마리아·정애식 등으로 기록이 엇갈리지만, 대개 신여성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파마 값은 5∼6원. 쌀 두 가마니를 살 수 있을 정도로 비쌌다. 1940년대 초에는 서양의 퇴폐풍조라며 사치품금지령에 의해 파마가 금지되기도 했다.
하지만 파마는 부유층 여성들을 중심으로 유행처럼 퍼져갔다. 당시 국내에 최초로 문을 열었던 오엽주의 ‘화신 미용실’(1933년)에서는 부인과 첩이 싸우는 일까지 벌어졌다고 한다. 당시 파마 스타일은 아이론을 이용해 곱슬거리는 느낌을 살리는 정도였다.
1950~1960년대
해방 이후 1950∼60년대에는 전기가 부족해 숯을 얹어 머리에 열을 가하는 ‘숯파마’가 등장했다. 숯으로 파마 집게를 데워 은박지를 대고 머리에 꽂는 방식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파마 도중 숯가루가 떨어져 옷에 구멍이 나거나 머리카락이 타는 경우도 있었다. 그 당시에는 파마를 6개월이나 1년에 한 번씩 했기 때문에 최대한 뽀글뽀글 말아서 풀리지 않게 해달라는 주문이 쇄도했다. 그래서 일명 ‘아줌마 파마’가 이렇게 탄생된 것이다.
당시 용산 해방촌의 ‘진달래미용실’처럼 유명한 곳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번호표를 들고 몇 백m씩 줄을 서있기도 했다. 한편 1960년대에는 정수리 부위를 최대한 부풀린 스타일이 유행했다. 고(故) 육영수 여사의 헤어스타일이 바로 그것.
1970~1980년대
1970년대는 커트의 전성기였지만, 중반 이후 소위 ‘바람머리’(바깥으로 뻗치는 파마머리)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여성의 사회진출이 활발해지면서 활동적이고 손질이 간편한 스타일을 선호하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파마가 전성기를 맞은 것은 1980년대이다. 머리카락 길이가 길든 짧든 웨이브를 넣었다. 헤어 무스, 젤, 스프레이 등 미용제품도 보급되었다. 파마와 함께 다양한 색상의 염색을 하는 여성들도 많았다.
1990~2000년대
1990년대 후반부터는 유행하는 파마의 트렌드가 없었다. 각자 원하는 스타일을 직접 연출하고자 하는 욕구가 넘쳐났기 때문이다. 이때 등장한 파마가 ‘스트레이트 파마’다. 스트레이트 파마는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을 반영구적으로 찰랑거리는 직모(直毛)로 만드는 파마의 일종이다. 특히 1999년에 등장한 ‘매직 스트레이트’는 긴 머리의 혁명이었다. 한 듯 안 한 듯한 자연스러움을 강조하는 시대 분위기를 타고 마치 다리미로 다린 듯 머리카락을 폈기 때문이다.
첫댓글 내 어릴적 머리는 줄곳 길러서 양갈래로 땋아서 허리춤까지 기르다가 중학교 들어가 단발머리에 교복입고 학교다녔지. 고등학교에 올라서 다시 기르기시작해서 양갈래로 땋아서 어깨및 10센치.
그리고 여고 졸업후 뽀글뽀글 파마했던 기억이 너무 아줌마같아 확 남자처럼 밀어버리고 아버지한테 혼나고 쭉 기르기시작, 결혼하고 나서 손에 꼽을정도로 몇번 파마후 자른 후 지금이넹.
헤헤
마음거울님 머리스타일 역사도
심풀하셨네요^^
ㅋㅋㅋ 산울림님의 지식이 날로 넓어지시는군요~
나중에 잡학사전 하나 출간하심이~
예전에 애니 레보비츠 사진전에서 봤는데, 미국도 뽀글이 파마 시대가 있었더라는~~~그거 보고 뽀글이 파마 원조는 펌이 나와서 미국으로 건너가서 였나~~? 했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