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기독교 선교역사는 1884년 2월 미국 북장로 선교회가 보낸 알렌 의사로부터 시작된다.
호남지방은 미국 남장로교회가 1892년에 테이블, 레이놀즈, 전킨, 메티 테이트(테이트 여동생),
데이비스, 레이번(전킨부인), 볼링(레이놀즈 부인) 등 7인을 우리나라에 보냄으로 시작된다.
미국 남장로회 소속 선교사들이 가장 먼저 디딘 호남땅은 전주와 군산이었다.
전남은 최초로 유진벨 선교사와 해리슨 선교사가 1897년 봄 나주로 왔다.
나주에 도착하여 성안에 초가 한채와 성밖에 넓은 대지도 구입하였으나
나주사람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혀 초가와 대지를 팔고 나주를 떠나게 되었다.
때마침 1897년 10월에 목포가 개항한다는 소식을 듣고 목포로 내려왔다.
이들은 만복동(현재의 양동)에 천막을 치고 교회를 시작하였다.
1898년 가을에는 유진벨 선교사 가족과 오웬 선교사 가족이 목포로 이사하였다.
1899년에는 여선교사인 스트레퍼가 합류하였다.
이미 목포에는 외지에서 이주해온 교인(이미 타지역에서 예수를 믿고 이주하여 온
변창연,노학주,김만실등 20여명)들이 있어 이들과 함께 목포교회가 시작되었다.
오른쪽 말위에 타신 분이 유진벨 선교사
벨 목사는 전도사업을 했으며,
오웬 의사는 의료 선교사업,
여선교사 스트레퍼는 교육선교를 담당하였다.
유진벨 선교사와 오웬 선교사의 헌신적인 노력에 의해
성장하던 목포교회에 위기가 닥친다.
1901년 유진벨 선교사의 부인 위더스푼이 과로로 사망하자
유진벨 선교사가 어린 자녀 둘을 데리고 일시 귀국하였으며,
오웬 의사 마저 격무로 인한 건강훼손으로 특별휴가를 얻어 미국으로 돌아갔다.
따라서 목포에는 스트레퍼 선교사만 남겨지자
남장로교 선교회에서는 그녀를 철수시키고 당분간 목포 선교부을 폐쇄하였다.
6개월후 안식년을 마치고 돌아온 레이놀즈 목사가 목포 선교부를 맡게 하면서 재개되었다
1903년에는 프레스톤(변요한) 목사 내외가 도착하여 선교사업에 합류하였다.
양동의 언덕에 천막을 두르고 처음 시작한 이 교회는
그 이듬해인 1898년 6월 10일경에 첫 번째 예배당을 지었다고 하며,
그 후 신도수가 늘어나 1900년 가을에 한식 와가 한채와
14평 남짓 한 교회당을 근접지에 다시 신축했다는 기록이 있다.
현재 양동 127번지의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는 양동교회 건물은
계속해서 늘어나는 신도를 수용하기 위해서 1911년에 건축한 것이다.
호남지역 최초로 교회가 세워지고
가장 오래된 교회당과 가장 오래된 교육기관 등이 남아있는
목포지역의 선교유적을 답사하기 위해 목포를 향했다.
가장 먼저 유달산 아래 위치한 양동교회를 찾았다.
언덕위에 위치하여 길에서는 올려다보아야했다.
가파른 경사길을 올라 양동교회에 들어섰다.
우리 교회는 올해가 백주년이다.
그래도 역사와 전통이 있다는 자부심이 있었는데
이 교회는 2004년에 선교 107주년이란다.
하기사 1897년에 처음 시작되었으니....
으미 기죽어.......
선교 107주년이라는 돌비 바로 옆에 있는 순교하신 목사님을 기리는 비석이다.
순교비에서 엿볼 수 있듯이
3.1만세운동 당시에 양동교회 청년들이 앞장서서 만세를 부르다가 투옥되기도 했으며
일제말기에 신사참배가 강요되고 교회들이 통폐합되는 와중에서도 흔들림이 없이
교회의 역할을 감당해온 귀한 믿음의 유산을 가진 교회이다.
네모 반듯한 돌들로 건축된 교회 건물은
1911년에 세워졌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튼튼한 모양을 하고 있다.
지금도 여전히 주일날 찬송가가 울려퍼지고 있는데
당시에 이와 같은 큰 규모의 예배당을 지은 성도들의 믿음의 열정이 대단하다.
반석과도 같은 믿음을 보여주듯 100여년이 지난 지금도 튼튼한 모습이다.
지금도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교회당은
성도들이 유달산의 돌을 가져다가 손수 지은 건축물로
남녀가 따로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출입문이 4군데나 있다.
교회 마당에서 바라다보이는 유달산.
아름다운 유달산 봉우리들이 손에 잡힐듯이 가까이 있다.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서면 바로 오른쪽 담장밑에 세워져 있는 선교기념비
1987년
선교 100주년을 맞아 개항이후 처음으로 목포의 모든 교회가 연합하여
1986년 부활절예배를 드리고 그 헌금으로 선교기념비를 세웠다고 써져있다.
양동교회에서 유달산과 반대방향으로 100m 정도 내려가면 정명여학교가 나온다.
이 정명학교는 1898년 목포에 온 스트레퍼선교사가 1903년 9월 9일
선교사의 부속 건물에서 여자 10명으로 목포 여학교를 시작한 것이 그 첫 출발이었다.
1903년 9월 15일 정식 인가를 받아 개교하게 되는데
초대 교장에는 서여사 (Miss F. E Straeffer)가 취임한다.
1906년 3월 프레스톤 부인(邊夫人)이 2대 교장에 취임.
1907년 3월 해리슨 부인(河夫人)이 3대 교장
1908년 3월 제4대 교장 마율리 여사 (Miss J.A.Martin) 취임
1911년 3월 제5대 교장 유애나 선생 (Mrs J.S.Nisbet) 취임
1919년 3월 제6대 교장 명애다 선생 (Miss A.McCallie)
1923년 3월 제7대 교장 김아각 박사 (Dr. D.J. Cumming) 취임
1924년 8월 제8대 교장 유서백 박사 (Dr. J.S. Nisbet) 취임
1925년 3월 제9대 교장 조마구례 선생 (Miss M. Hopper)이 차례로 취임하였다.
제가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에게 별로 흥미도 없을 것 같은
이 사람의 이름을 왜 열거하느냐면
제가 양림동 선교묘역을 답사하면서 묘지의 주인공들을
알게 되었는데 정명여학교 홈페이지에서 역대 교장들의
이름을 살펴보다가 친숙한 이름들이 나오길래
반가운 마음에 줄줄이 열거하게 되었다. 양해하세용 ㅎㅎㅎ
1911년에 석조 건물 2층으로 105평을 착공하여 이듬해인 1912년 완성하였고,
유애나 선생은 학교의 규모를 갖춘 후에 보통과 4년,
고등과 4년제의 학교를 만들고 이름을 정명(貞明)여학교라 하여 인가를 얻었다.
그후 선교사 메칼리(명애다 선생)의 협조로 미국 메칼리의 본가에서 기부금을 받아
석조 건물 3층으로 2백 40평을 신축하였다.
본격적인 교세의 발전은 이때부터 이루어진다.
그러나 당시의 교육용 건물은 다 없어지고
선교사 사택으로 쓰였던 석조건물 2동(1912년 건축)만 남아
한동은 정명여중 도서관으로 사용하고
한동은 100주년 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100주년 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선교사 사택
1층은 음악실
2층은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었다.
100주년 기념관 동판.
2층 박물관 내부
정명여중 도서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사택 중의 한동
100주년 기념관의 뒷면
울창한 나무들이 학교의 오랜 연륜을 말해주는 듯 하다.
정명여학교는 목포에 있어서 여자 교육기관 중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100주년 기념관 옆 울창한 나무아래서
개학한 학생들이 옹기종기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다.
1983년 2월 14일 정명여중 교내 선교사 사택 천장을 수리하던 중에
3.1 독립만세운동 참가에 관한 독립운동에 관련된 문서가 발견되었다.
독립운동의 자취를 말해주는 두가지 독립선언서와 독립가사, 결의문
그리고 당시의 일을 알리는 지하신문이 발견되었고
현재는 독립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로써 목포의 3·1운동의 중심지가 바로 정명여학교였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고
이를 기념하여 1985년 12월 에 독립기념비를 건립하였다.
독립기념비
정명여학교는 3·1운동 당시 목포 투쟁사의 본거지였다.
운동의 주모자로부터 참가자가 대부분 정명여학교 학생들이였으며
1937년 9월 2일에는 일본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여 한때 폐교까지 당하기도 했다.
100주년 기념관과 독립기념비를 답사하고
마침 지나가는 이 학교의 어떤 선생님에게
또 다른 선교초기의 흔적이 없는지 여쭤보았더니
정명여고에 남아있는 건물을 가르쳐주신다.
마침 그 때가 12시가 조금 넘은 점심식사 시간이어서
커밍홀로 식사하러 가는 중이었다.
친절하게 가르쳐주는데 그치지 않고 함께 점심먹으러 가잔다.
어디 쉽게 베풀 수 있는 친절인가.....
어떤 선생님이신지는 몰라도 그런 선생님에게서 배우는
학생들이 복받은 학생들이다.
CUMMING HALL로 이름붙여진 이 건물은
구내식당이 있고 고교교실로 이어져 있다.
이 건물은 제 7대 교장이었던 김아각 박사(Dr. D.J. Cumming)를
기려 지어진 건물이었다.
이 동판에는 김아각박사가 50년 이상 학생들을 위해서
헌신했다고 쓰여져 있다.
또 정명여고 가는 길옆에는 타요한 목사와 인도아 목사의 공적비가 세워져 있었다.
유진벨 선교사의 사위 윌리엄 린턴 선교사에게는 네 아들이 있는데
그중 네째아들이 인도아(Thomas Dwight Linton) 목사이다.
넷째 아들 드와이트(Linton, Thomas Dwight, 한국명: 인도아)는
전주에서 1927년 12월 4일 출생하여 광주에서 교육자 및 순회복음 선교사로
그의 부인 Margie와 함께 1978년 귀국할 때까지 31년간 활동했다.
타요한 목사는 한남대학교 설립에 관여하였고
한남대학교 2대 학장과 대전신학대학교 제 5대 교장을 지낸 분이다.
타요한 선교사
유달산이 바라다 보이는 곳에
아늑하게 자리잡은 정명여학교는
100여년 전에 낮설고 물설은 이곳 조선땅에 와서
그것도 반도의 가장 남서쪽 외진 곳에서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헌신적으로 수고하신 선교사들이
당시 천대받고 억압받았던 조선의 여성들을 위해 세운 귀한 학교이다.
제가 답사했던 정명여학교는 빛나고 소중한 신앙의 유산을
그런대로 잘 간직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역력한 학교였다.
되돌아나오는 내 발걸음이 가볍고
그동안 이 신앙의 유산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신
여러 선생님들의 수고에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2008. 8. 29. 오 영 석
첫댓글 호남선교역사 답사기 정말 잘 보았습니다. 귀한 노력에 박수를 보냅니다. 정명여학교 천장에서 발견된 3.1 독립운동 자료는 여학생들과 교인들이 태극기를 들고 앞장섰다니, 그 시절 독립에 그랬듯이 오늘날 통일과 생명운동을 웨해 종교를 떠나 앞장서야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제가 신앙생할을 하기 때문에 선교유적에 관심이 많아 이 글을 올렸는데 아무 댓글이 없으셔서 혹시 카페의 성격과 맞지 않아서인줄 알고 글을 내릴까 했었습니다. 그게 아닌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