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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백제(半島百濟)를 고발(告發)한다. (1편)
○ 신문(新聞) 기사(記事)를 보니, 또 ‘반도(半島)백제(百濟)’를 고착화(固着化)하려는 피나는 노력(努力)을 보면서, 식민사학(植民史學)의 눈물어린(?) 정성(精誠)에 감동(感動)되고, 노고(勞苦)에 마음이 아프다.
○ 아래 사진은 칼에 명문(明文)이 있다고 호들갑을 떨던 사진(寫眞)이다.
○ 이러한 것이 명문(明文)이냐? 뾰족한 물건(物件)으로 파서 만든 글자지! 한심(閒心)하기도 하고, 애처롭기도 하고, 양심(良心)을 져버린 그대들에게, 연민을 느낄 정도이니, 더 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반도(半島) 땅, 서남(西南) 모퉁이에 백제(百濟)왕조(王朝)를 만들기 위해 이렇게 까지 해야 할 필요성(必要性), 당위성(當爲性)이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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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다가 또 전라도(全羅道) 익산의 왕궁(王宮)터에서, 왕궁(王宮)에서 쓰던 부엌을 발굴(發掘)했다고 대서특필(大書特筆) 해대니, 이거야 원 창피(猖披)하고, 자존심(自尊心) 상해서 견딜 수가 없다. 누가 익산에다 왕궁(王宮)을 축조(築造)했다는 것인지? 마한(馬韓)과 진한(辰韓)과 변한(弁韓)의 78 개 나라(國)의 유물(遺物)은, 외계(外界)인들이 모조리 수거(收去)해 간 것이냐? 왜 나오는 것마다 백제(百濟)의 것이냐?
부엌에 백제(百濟)의 것이라는 명문(明文)이라도 있던가? 참 한심(閒心)한 자(者)들이다. 역사서(歷史書)에 기록(記錄)된 내용(內容)을 제대로 해설(解說)도 못하면서, 무슨 놈의 백제(百濟)유물(遺物) 발굴(發掘)이라고 떠들어 대는지, 원? 기가 막히다. 백제(百濟)가 반도(半島) 땅, 서남(西南) 모퉁이에 있었다고 하니, 우리 한 번 따져보자.
○ 삼국사기(三國史記)가 정사(正史)라고 하니, 김부식(金富軾)이 지었다는 이 기록(記錄)을 가지고, 한 번 이야기기 해보자. 삼국사기(三國史記)도 위서(僞書)라고 한다면, 너희들은 도대체 무엇으로 반도(半島)조선(朝鮮)왕조(王朝)을 이야기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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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시조(始祖) 온조왕(溫祚王) : 《百濟始祖溫祚王,其父,鄒牟,或云朱蒙.中略.生二子,長曰沸流,次曰溫祚.或云:朱蒙,到卒本,娶越郡女,生二子. : 백제의 시조 온조왕은 아버지가 추모이다. 혹은 주몽이라고도 한다. 중략. 두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맏아들은 비류, 둘째 아들은 온조(溫祚)라고 한다. 혹은 ‘주몽이 졸본에 와, 월군(越郡) 여자를 취하여, 두 아들을 낳았다’고도 한다.》고 하였는데,
➠ 도대체 월군(越郡)이 어디에 있는데, 이곳의 여자(女子)를 취(取)해 아내로 삼았다고 한 것이냐? 김부식(金富軾)이 “혹은 이르기를” 했다면, 어디에선가 기록(記錄)을 인용(引用)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대들은 월군(越郡)이란 곳이 어디라고 보느냐? 반도(半島) 땅이냐? 그 북방(北方)지대(地帶)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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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二年,春正月,王謂群臣曰:靺鞨連我北境.中略.三年,秋九月,靺鞨侵北境,王帥勁兵,急擊大敗之,賊生還者十一二 : 2년 봄 정월, 왕이 군신들에게 말했다. “말갈(靺鞨)이 우리의 북쪽 지경과 연이어져 있다. 중략. 3년 가을 9월, 말갈이 북쪽 국경을 침범하였다. 왕은 정예군을 이끌고 재빨리 공격하여 그들을 크게 격파하였다. 적군 중에 살아 돌아간 자가 열 사람 중에 한 두 명이었다. 八年,春二月,靺鞨賊三千來圍慰禮城,中略.王簡銳卒,追及大斧峴,一戰克之,殺虜五百餘人. : 8년 봄 2월, 말갈(靺鞨)적 3천명이 와서 위례성을 포위했다. 중략. 왕은 정예군을 선발하여 대부(大斧)현까지 추격하여, 일전(一戰)에 이기고, 적병 500여 명을 죽이고 사로잡았다.》고 하였다면,
➊ 반도(半島) 서남(西南) 모퉁이 한수(漢水)이남(以南) 땅에서, 말갈(靺鞨)과 어디를 경계(境界)로 대치(對峙)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냐?
➋ 백제(百濟)와 고구려(高句麗)가 패수(浿水)를 경계(境界)로, 또는 한수(漢水)를 경계(境界)로 했다는 기록(記錄)은 수없이 등장(登場)하는데, 그렇다면 패수(浿水)와 한수(漢水) 사이에 말갈(靺鞨)이 있었더냐? 말갈(靺鞨)은 흑수(黑水)백산(白山)사이에 있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흑수(黑水)와 백산(白山)은 도대체 어디냐? 반도(半島) 패수(浿水)와 한수(漢水)사이에 흑수(黑水)와 백산(白山)이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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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十年,秋九月,王出獵,獲神鹿,以送馬韓.冬十月,靺鞨寇北境. : 10년 가을 9월, 왕이 사냥하다가 신기한 사슴을 잡았다. 이를 마한에 보냈다. 겨울 10월, 말갈이 북부 국경을 침략하였다. 十一年,夏四月,樂浪使靺鞨襲破甁山柵,殺掠一百餘人.秋七月,設禿山.狗川兩柵,以塞樂浪之路. : 11년 여름 4월, 낙랑이 말갈로 하여금 병산의 목책을 습격해서 파괴한 다음 100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가을 7월, 독산과 구천 두 곳에 목책을 설치, 낙랑으로 가는 길에 성채를 두었다.》고 하였다.
➊ ‘말갈(靺鞨)이야기는 이제 그만한다. 이야기 거리가 되지 않으니 말이다.’ 그런데 위에서 보면 당시에 “마한(馬韓)”이 또 있었다. 이때의 마한(馬韓)은 어디에 있었던 것이냐? 삼국지(三國志) 위략(魏略)에서도 『마한(馬韓)의 진왕(辰王)은, 월지국(月支國)에 서울을 두고, 54개 나라를 다스렸다.』고 하였는데, 마한(馬韓)이 반도(半島) 땅으로 언제 이동(移動)하고 천도(遷都)한 것이냐?
➋ 또 낙랑(樂浪)은 어느 땅에 있었느냐? 도대체 백제(百濟)와 고구려(高句麗)가 남북(南北)으로 경계(境界)했다는 말은 무엇이고, 마한(馬韓)은 또 무엇이고, 낙랑(樂浪)은 또, 말갈(靺鞨)은 또.........반도(半島) 한수(漢水)나 패수(浿水)이북(以北) 땅에, 동서(東西)로 몇 천리(千里)가 되기에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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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夏五月,王謂臣下曰:國家東有樂浪,北有靺鞨.侵軼疆境.中略.遂畵定疆埸,北至浿河,南限熊川,西窮大海,東極走壤. : 여름 5월, 왕이 신하들에게 말했다.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다. 그들이 변경을 침공하여 편안한 날이 없다. 중략. 마침내 국토의 영역을 확정하였는데, 북으로는 패하에 이르고, 남으로는 웅천이 경계이며, 서로는 큰 바다에 닿고, 동으로는 주양(走壤)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 동(東)쪽에 신라(新羅)는 없고, 낙랑(樂浪)이 있었느냐? 북(北)쪽에 고구려(高句驪)는 없고, 말갈(靺鞨)이 있었느냐? 「북(北)쪽은 패하(浿河), 남(南)쪽은 웅천(熊川), 서(西)쪽은 바다, 동(東)쪽은 주양(走壤)까지 백제(百濟)영토(領土)」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웅천(熊川) 이남(以南)에는, 또 어떤 나라가 또 있었으며, 동(東)쪽은 신라(新羅)가 아니고, 주양(走壤)은 무엇이고, 북(北)으로 패하(浿河)라면, 패하(浿河)가 대동강(大同江)이냐? 임진(臨陣)강이냐? 한강(漢江)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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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十八年,冬十月,靺鞨掩至,王帥兵,逆戰於七重河,虜獲酋長素牟,送馬韓,其餘賊盡坑之. : 18년 겨울 10월, 말갈이 엄습(掩襲)해오니, 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칠중 하(七重 河)’에서 역습(逆襲)하여, 추장 소모를 생포하여, 마한(馬韓)에 보내고, 그 나머지는 모두 생매장하였다.》 고 하였는데,
➠ 도대체 ‘칠중 하(七重河)’가 어디냐? 칠중 하(七重河)는 ‘호로 하(瓠蘆河)’라고도 하며, 칠중 성(七重城)이 있었다고 하는 곳이며, 백제(百濟) 망(亡) 후, 이곳에서는 이근행(李謹行)과 고구려(高句驪)부흥(復興)군이 치열(熾烈)하게 싸웠다는 곳이 아니냐! 또한 칠중 하(七重河)는 고구려(高句驪) 남계(南界)에 있었다고 하였잖느냐? 또한 당(唐)군이 이곳에서 신라(新羅)군을 격파(擊破)했다고 한 곳이 아니냐?
더하여 이곳은 봄(春)과 겨울(冬)에는, 얼음이 2척 두께로 얼어, 물을 마시려면 얼음을 녹여 먹어야 한다고 했으며, 이곳은 무지하게 추운 곳이라고 했다. 반도(半島) 땅 임진강이 동토(凍土)지대(地帶)에 있느냐?
더하여 말갈(靺鞨)추장(酋長)을 생포(生捕)해, 마한(馬韓)왕(王)에게 보냈지? 이때까지도 마한(馬韓)이 상국(上國)이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냐?
➊ 新唐書 卷 108 列傳 第 33. 劉 仁 軌 傳 : 《咸亨五年,為雞林道大總管,東伐新羅.仁軌率兵絕瓠蘆河,攻大鎮七重城,破之. : 함형5년, 계림도대총관이 되어, 동쪽의 신라를 쳤다. 인궤가 병사들을 거느리고 호로하(瓠蘆河)을 막고, 칠중성(七重城) 큰 진을 공격, 깨뜨렸다.》고 하였는데, 이미 고구려(高句驪) 땅을 당(唐)이 차지하고, 평양(平壤)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두어 다스릴 때인데, 무슨 놈의 동벌(東伐)이냐? 반도(半島) 동(東)쪽의 바다 물속에 신라(新羅)가 있었더냐?
➋ 舊 唐 書 열전(列傳) 역시(亦是), 똑같다.
➌ 資治通鑑 卷202 唐紀18 / 高宗 咸亨 4年 <A. D 673년> : 《閏五月,燕山道總管,右領軍大將軍李謹行大破高麗叛者於瓠蘆河之西,胡嶠曰:黑車子之北,有牛蹄突厥,人身牛足.其地尤寒,水曰瓠蘆河,夏秋冰厚二尺,秋冬冰徹底,常燒器銷冰,乃得飲.余按唐書劉仁軌傳,此瓠蘆河當在高麗南界,新羅七重城之北.俘獲數千人,餘衆皆奔新羅.時謹行妻劉氏留伐奴城,高麗引靺鞨攻之,劉氏擐甲帥衆守城,久之,虜退.上嘉其功,封燕國夫人.中略. : 윤 5월, 연산도(燕山道) 총관, 우령군 대장군 이근행이 고려(고구려)의 반군들을 호로하의 서쪽(瓠蘆河之西)에서 크게 깨뜨리고,【호교(胡 嶠)가 이르기를 ; 호로하는 흑거 자(黑車子)의 북쪽에 있으며, 돌궐(突厥)의 소 발굽이 있으며, 사람들은 소다리 신체이며, 그 지방은 추위가 한층 더하여, 그 물(水)을 이르기를 “호로하(瓠蘆河)”라 한다. 여름과 가을에도 얼음 두께가 2척이나 되며, 가을과 겨울엔 얼음이 밑바닥까지 얼어서, 상시 기구에 얼음을 담아 불을 지펴 녹여 마신다. 당서 유인쾌전에 따르면 이 ‘호로하’는 고려(高句驪)남쪽지경에 있는데, 신라(新羅)의 칠중성 북쪽이다.】수천인을 사로잡았다. 나머지 무리들은 모두 신라로 달아났다. 이때 ‘이근행’의 처 ‘유씨(劉 氏)’는 토벌중인 노성(奴 城 : 성 이름)에서 유숙하고 있었는데, 고려(高句驪) 반군(고구려 부흥군 세력)이 말갈(靺鞨)병들을 이끌고 공격하자, 유씨는 갑옷을 걸치고 장수들을 거느리고 성을 수비하자 얼마 있다가 퇴각하였다. 상(당 고종)이 그 공을 듣고 기뻐하여 “연국부인(燕國夫人)”에 봉했다. 중략.》고 하였다.
➍ 新 五 代 史 卷 七 十 二 / 四 夷 附 錄 第 一 / 阿 保 機 : 《云 契 丹 之 先 , 常 役 回 紇 , 後 背 之 走 黑 車 子 , 始 學 作 車 帳 。 又 北 , 牛 蹄 突 厥 , 人 身 牛 足 , 其 地 尤 寒 ,水 曰 瓠 (蘆) 河 , 夏 秋 冰 厚 二 尺 , 春 冬 冰 徹 底 , 常 燒 器 銷 冰 乃 得 飲. : 아보기 : 이르기를 글란(契丹)의 선대(先代)는 회흘(回紇)에 복속되어 노역을 하던 자들로, 후에 뒤에 있는 흑거자로 도주하여, 처음으로 수레와 군막을 만들었다. 또 북쪽으로 우제돌궐이 있는데, 사람들의 신체는 우족과 같고, 그 땅은 심히 춥고, 호로하(瓠蘆河)라고 하는데, 여름과 가을에도 얼음두께가 2척(尺)이나 되고, 봄과 겨울에는 더욱 철저하게 얼어붙어, 상시 그릇에 얼음을 넣고 녹여 만들어 물을 마신다.》고 하였는데, 이는 또 후대(後代)의 기록(記錄)인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의 설명(說明)과도 똑같다.
《讀史方輿紀要.山西外夷附考:瓠盧(瓜)河,在漠外.胡嶠曰:黑車子之北有牛蹄突厥,人身牛足,其地有寒水,曰瓠<盧瓜>河,夏秋冰厚三尺,春冬冰徹底,常燒器銷冰,乃得飲雲.》라고 하였다.
➠ 이러한 곳이 반도(半島) 땅, 중간(中間)에 있는 임진강(臨津江)이라면, 반도(半島)는 동토(凍土)의 땅, 한대(寒帶)에 속한 기후(氣候)를 가졌다는 이야기다. 이때가 서력(西曆) 673년이므로, 이미 고구려(高句驪)가 망(亡)하고 난 뒤, 5년이 지난 때이다. 이때도 고구려(高句驪)영토(領土) 내(內)에서는, 고구려(高句驪) 부흥(復興)세력들이 있었으며, 그 전투(戰鬪)는 <고구려(高句驪) + 말갈(靺鞨)>병의 연합(聯合) 군대(軍隊)였다는 이야기다. 그럼 백제(百濟)는 어디에 있어야 하느냐?
➎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 하편 중에서 : 《十五年,二月,劉仁軌破我兵於七重城,仁軌引兵還,詔以李謹行爲安東縝撫大使,以經略之,王乃遣使,入貢,且謝罪,帝赦之,復王官爵,金仁問中路而還,改封臨海郡公,然多取百濟地,遂抵高句麗南境爲州郡,聞唐兵與契丹靺鞨兵來侵,出九軍待之. : (문무왕) 15년. 2월, ‘유인궤’가 아군(신라군)을 ‘칠중성(七重城)’에서 격파하였다. ‘인궤’가 군사를 이끌고 귀국하니 (황제가) 조서를 내려 ‘이근행’을 ‘안동진무대사’로 삼아 그 곳 일을 처리하게 하였다. 왕이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또한 사죄하니 황제가 이를 용서하고 왕의 관작을 회복시켜 주었다. 귀국하던 ‘김인문’이 당 나라로 돌아가자, 그를 ‘임해군공(臨海郡公)’으로 바꾸어 봉하였다. 그러나 신라는 백제의 땅을 많이 빼앗아 마침내 국경이 고구려 남쪽 지방에 이르렀고, 그 곳을 주와 군으로 만들었다. 당(唐)나라 군사가 ‘거란’과 ‘말갈’ 군사와 함께 침범한다는 소문을 듣고, 구군(九軍)을 출동시켜 이에 대비하였다.》고 하였다. 위에서 예(例)를 든, 기록(記錄)과 똑같은 이야기다.
➠ 이러한 역사적(歷史的) 기록(記錄)에 대한 것들이, 모두 오류(誤謬)라고 말할 배짱이 있다면, 당당(堂堂)하게 나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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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馬韓王遣使責讓曰:王初渡河,無所容足,吾割東北一百里之地,中略. : 마한(馬韓)왕이 사신을 보내 책망하였다. 왕이 애초에 하(河)를 건너와 발붙일 곳이 없을 때, 나(마한 왕)는 동북방의 100 리 땅을 주어 살도록 하였다. 중략.》고 설명하는데,
➊ 마한(馬韓)이 상국(上國)이었으며, 『온조왕(溫祚王)이 하(河)를 건너, 살 곳이 없자, 마한(馬韓)왕이 동북방(東北方)의 100 리 땅을 주었다』는 이야기에서, 하(河)는 어떤 하천(河川)을 말하는 것이냐? 이 하(河)를 건넜고, 이를 탁하게 여긴 마한(馬韓)왕(王)이, 동북방(東北方) 땅을 내어주었다면 : 이곳이 반도(半島) 서남(西南) 모퉁이 땅이라면 당시 마한(馬韓)왕은, 어디에 있어야 하느냐?
➋ 지금의 서해(西海)와 동중국해(東中國海)【산동(山東)성+강소(江蘇)성+절강(浙江)성의 앞 바다】에 마한(馬韓)왕이 있었고, 그 동북방(東北方) 반도(半島) 남(南)쪽 땅을 주었다면, 이 기록을 충족(充足)시킬 수 있다. 그러하다면 마한(馬韓)왕(王)과 그 백성(百姓)들은 모두 바다 속에서 사는 인어(人魚)였다는 이야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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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漢水東北部落饑荒,亡入高句麗者一千餘戶,浿.帶之間,空無居人 : 한수(漢水)의 동북(東北)부락에 흉년이 들어, 고구려로 도망간 자가 1천여 호에 달하였고, 패수(浿水)와 대수(帶水)사이에는 사는 사람이 없었다.》고 하였는데,
➠ 패수(浿水)는, 대수(帶水)는 어디에 있는 강(江)이냐? 흉년(凶年)이 들면, 반도(半島) 땅 손바닥 만 한 곳에서, 어찌 패수(浿水)와 대수(帶水)사이만 흉년(凶年)이 들 수 있었겠느냐? 이런 설명(說明)대로라면 : 한수(漢水)와 대수(帶水)사이는, 아주 넓은 곳이었다는 이야기다. 반도(半島) 땅에서 이러한 지세(地勢)를 가진 곳이 어디에 있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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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己婁王.十三年,夏六月,地震,裂陷民屋,死者多.三十五年,春三月,地震.冬十月,又震. : 13년 여름 6월, 지진이 나서 땅이 갈라지고 주민들의 가옥이 무너졌다. 사망자가 많았다. : 35년 봄 3월, 지진이 났다. 겨울 10월, 또 지진이 났다. 四十九年,新羅爲靺鞨所侵掠,移書請兵,王遣五將軍,救之. : 49년, 신라가 말갈에게 침략을 당하자 서신을 보내와 구원병을 요청하였다. 왕이 다섯 명의 장수를 보내 구원하게 하였다.》고 하였는데,
➠ 전라(全羅). 충청(忠淸). 한수(漢水)이남(以南) 땅이, 지진대(地震帶)에 속해 있어, 시시때때로 지진(地震)이 발생하느냐?
또 신라(新羅)의 북(北)쪽에도 말갈(靺鞨)이 있어, 침략(侵略)했다고 하는데, 말갈(靺鞨)은 도대체 어디에 근거지(根據地)를 두고 있었던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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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責稽王,古尒王子,身長大,志氣雄傑,古尒薨,卽位.王徵發丁夫,葺慰禮城.高句麗伐帶方,帶方請救於我.先是,王娶帶方王女寶菓,爲夫人.故曰:帶方我舅甥之國,不可不副其請.遂出師救之,高句麗怨.王慮其侵寇,修阿且城.蛇城,備之. : 책계왕은 고이왕의 아들이다. 체격이 장대하고 의지와 기품이 걸출하였다. 고이왕이 사망하자 그가 왕위에 올랐다. 왕이 장정을 징발하여 위례성을 보수하였다. 고구려가 대방을 치자 대방은 우리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앞서 왕이 대방왕의 딸 보과를 부인으로 맞이하였기 때문에 왕이 “대방은 우리와 장인과 사위 관계의 나라이니, 그들의 요청을 들어 주어야 한다.”고 말하고, 마침내 군사를 출동시켜 구원하였다. 고구려에서 이를 원망하였다. 왕은 고구려의 침략을 염려하여 아차성과 사성을 수축하여 방비하게 하였다.》라고 하였는데,
➊ 도대체 반도(半島) 땅 어디가 대방(帶方)이냐? 전라도(全羅道) 남원(南原) 땅이 대방이냐? 황해도(黃海道) 땅이 대방(帶方)이냐?
➋ 대방군(帶方郡)은 헌제(獻帝) 건안(建安) 연간에, 공손강(公孫康)이, 낙랑(樂浪)의 남쪽 경계 지역을 나누어, 대방군(帶方郡)을 설치하였고, 이때 낙랑(樂浪)은 공손씨(公孫氏)에게 속(屬)하였다고 하였는데, 반도(半島) 땅이 공손강(公孫康)의 영토(領土)였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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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責稽王,十三年,秋九月,漢與貊人來侵,王出禦,爲敵兵所害,薨. : 13년 가을 9월, 한(漢)과 맥(貊)인들이 래침하였는데, 왕이 직접 나가서 방어하다가 적병에게 살해되었다.》고 하였는데,
➊ 백제(百濟) 북방(北方)에는, 말갈(靺鞨)과 고구려(高句麗)와 대방(帶方)군(郡). 낙랑(樂浪)군이 있는데, 어떻게 한인(漢人)과 맥(貊)인들이 백제(百濟) 땅을 칠 수 있느냐? 그들은 C-130 수송기(輸送機)에 공수부대(空輸部隊)를 싣고 와 공중투하(空中投下)했다는 이야기냐?
➋ 한고조(漢高祖) 본기(本紀) : 《五 年, 北 貉, 燕 人 來 致 梟 騎 助 漢. : 5년, 북맥(北貊)과 연(燕)에서 날쌔고 용맹한 기병을 보내 한(漢)을 도왔다.》고 하였는데, 한(漢)나라에서 북(北)쪽이 어디며, 이러한 맥(貊)이 어떻게 수천(數千)리를 건너뛰어, 반도(半島) 남쪽지방의 백제(百濟)를 칠 수 있겠느냐? 뭘 좀 알아보고, 이야기하는 것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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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近肖古王,二十六年,高句麗擧兵來.王聞之,伏兵於浿河上,俟其至,急擊之,高句麗兵敗北.冬,王與太子帥精兵三萬,侵高句麗,攻平壤城.麗王斯由,力戰拒之,中流矢死,王引軍退.移都漢山. : 26년, 고구려가 군사를 동원하여 공격해왔다. 왕이 이를 듣고 패하 강가에 복병을 배치하고 그들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불시에 공격하였다. 고구려 군사가 패배하였다. 겨울, 왕이 태자와 함께 정예군 3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에 침입하여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고구려왕 이 필사적으로 항전하다가 화살에 맞아 사망하자, 왕이 군사를 이끌고 물러났다. 도읍을 한산으로 옮겼다.》다고 하였는데,
➊ 도대체 패하(浿河)가 어떤 강(江)이냐? 패하(浿河)가 당신네들 말대로 대동강(大同江)이라면, 백제(百濟)군사(軍士)가 일천(一千)리를 진격(進擊)하는데, 고구려(高句麗) 군(軍)은 눈을 멀뚱멀뚱 뜨고 보고만 있었다는 이야기냐? 또 패하(浿河) 변에 복병(伏兵)을 두었다는 이야기는 뭔가? 고구려(高句驪) 땅에 복병(伏兵)을 두다니?
➋ 더하여 고구려(高句驪) 왕(王)이 전투(戰鬪)중에 죽었다면, 그 평양(平壤)은 백제의 것이나 마찬가지며, 대동강(大同江)이남(以南)은 모조리 백제(百濟) 땅이 되었다는 이야긴데, 왜 백제(百濟)왕(王)은 한산(漢山)으로 천도(遷都)한 것이냐? 고구려(高句驪)가 무서워서? 그렇다면 처음부터 화친(和親)을 할 것이지, 왜 공격(攻擊)을 퍼부었나? 지형(地形)지리(地理)적으로 부합(符合)되지 않으니, 당신네들은 조선사(朝鮮史)를 해설(解說)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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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近仇首王,三年,冬十月王將兵三萬,侵高句麗平壤城.十一月,高句麗來侵. : 3년 겨울 10월, 왕이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평양성을 침공하였다. 11월, 고구려가 침입하였다. 六年,夏五月,地裂,深五丈,橫廣三丈,三日乃合. : 6년, 전염병이 크게 돌았다. 여름 5월, 땅바닥이 깊이가 다섯 길, 넓이가 세 길이나 되게 갈라졌다가 3일 만에 다시 붙었다.》
(13) 《毗 有 王, 三 年, 十 一 月, 地 震, 大 風 飛 瓦. : 3년, 11월, 지진이 발생하고, 큰 바람이 불어 기와가 날았다.》고 하였다.
➠ 위의 글 (11)과 연계(連繫)되는 이야기다. 백제(百濟) 북방(北方)에는, 말갈(靺鞨)과 낙랑(樂浪)과 대방(帶方)등이 버티고 있는데, 이들을 격파(擊破)하고 고구려(高句驪) 평양(平壤)성(城)을 침공(侵攻)했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고구려(高句驪)군사는 모두 허수아비였다는 이야기가 아니냐? 말갈(靺鞨)과 낙랑(樂浪)과 대방(帶方)에 있는 군사(軍士)들을 쳐부수는 동안 고구려(高句驪)군사(軍士)들은 무얼 했지? 1,950년 6월 25일처럼, 휴일(休日)이라서 외출(外出)외박(外泊)을 다 보낸 것은 아니겠지?
➠ 전라(全羅). 충청(忠淸). 한수(漢水)이남(以南) 땅이, 지진대(地震帶)에 속(屬)해 있느냐? 그런데 하느님이 보우(保佑)하사, 지금(只今)은 지진대(地震帶)에서 멀어진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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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蓋鹵王,於是,盡發國人,中略,又取大石於郁里河,作槨以葬父骨,緣河樹堰,自蛇城之東,至崇山之北. : 개로왕, 이에 백성들을 모조리 징발하여, 중략. 또한 욱리하에서 큰 돌을 캐다가, 관을 만들어 아버지의 해골을 장사하고, 사성(蛇城) 동(東)쪽으로부터 숭산(崇山)북(北)쪽까지 강을 따라 둑을 쌓았다.》고 하였는데,
➊ 도대체 욱리하(郁里河)는 어디에 있는 하천(河川)이며, 사성(蛇城)은 어디에 있으며, 또 숭산(崇山)은 어디에 있는 산(山)이냐? 위 설명(說明)대로라면 하천(河川)을 따라, 사성(蛇城)의 동(東)쪽으로부터 숭산(崇山)의 북(北)쪽까지 성(城)을 쌓았다고 하였는데, 그 흔적(痕迹)은 있는 것이냐?
➋ 이것은 고구려(高句驪)의 침략(侵略)을 방어(防禦)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서(西)쪽에서 동(東)쪽으로 쌓았다는 것이고, 하천(河川)은 동서(東西)방향(方向)으로 있었다는 것인데, 한강(漢江)이냐? 임진강(臨津江)이냐, 대동강(大同江)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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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東城王,十年,魏遣兵來伐,爲我所敗.十六年,秋七月,高句麗與新羅戰薩水之原,新羅不克,退保犬牙城.高句麗圍之,王遣兵三千救,解圍. : 동성왕, 10년, 위(魏)나라가 군사를 보내 쳤으나, 우리 군사가 그들을 물리쳤다. 16년 가을 7월, 고구려와 신라가 살수 벌판에서 싸웠는데 신라가 이기지 못하고 견아성으로 퇴각하여 방어하고 있다가 고구려 군사에게 포위되었다. 왕이 군사 3천 명을 보내 구원하자 포위가 풀렸다.》고 하였다.
➊ 북위(北魏)의 백제(百濟) 침공(侵攻)이야기를 해보자.
南齊書 卷 58 / 列傳 第 39 / 百濟國 : 《是歲,魏虜又發騎數十萬攻百濟,入其界,牟大遣將沙法名.贊首流.解禮昆.木干那率衆襲擊虜軍,大破之. : 이해에, 위노(魏虜)가 기병(騎兵) 수십만(數十萬)을 발(發)하여 백제(百濟)를 공격(攻擊), 그 경계(境界)에 들어갔으나, 모대(牟大)가 보낸 장수(將帥) 사법명(沙法名). 찬수류(贊首流). 해례곤(解禮昆). 목간나(木干那)등이 무리들을 이끌고, 노군(虜軍)을 습격(襲擊)하여, 크게 이를 깨뜨렸다.》고 하였고,
資治通鑑世祖武皇帝永明六年.戊辰,公元四八八年 : 자치통감 제기(齊紀). 세조무황제. 영명 6년 무진(戊辰) 공원 488년 : 《魏遣兵擊百濟,為百濟所敗. : 위(魏)가 군사(軍士)를 파견하여 백제(百濟)를 쳤으나, 백제(百濟)에게 패(敗)하였다.》고 하였으며,
通典 : 《後 魏 孝 文 遣 眾 征 破 之. : 후위(後魏) 효문제가 군대(무리)를 보내어 쳤으나 패하였다.》라고 하였다. 모두와 연계(連繫)되는 사건(事件)을 기록(記錄)한 것이다.
➋ 위(魏)가 “수십만(數十萬) 기병(騎兵)”을 동원했다는 것은, 수양제(隋煬帝)가 고구려(高句驪)를 칠 때, 공격(攻擊)군 일백(一百)만(萬)을 동원한 것보다 더 큰 군사력(軍事力)이다. 통상(通常) 공격대(攻擊隊) “1 군(軍) 12,000 명” 중에서 “기병(騎兵)은 5,000 기(騎)” 남짓이므로, 수십만(數十萬) 기병대(騎兵隊)란 말은 전무후무(前無後無)한 군사력(軍事力)이란 이야기다. 대륙사(大陸史)에서 서융(西戎). 흉노(匈奴)를 칠 때의 정벌(征伐)군 규모(規模)는, 보기(步騎) 5만∼10만 내외(內外)이며, 특별(特別)한 경우(境遇)엔 수십만(數十萬), 일백(一百)만을 동원(動員)할 때도 있었는데, 특별(特別)한 경우(境遇)란, 옛 조선왕조(朝鮮王朝)를 공격할 때 동원(動員)된 병력수이다. 숫자는 보병(步兵)+기병(騎兵)+수군(水軍)을 합친 숫자이다.
공격(攻擊) 또는 정복(征服)시에 동원(動員)된 군대(軍隊)의 숫자만을 봐도, 옛 조선왕조(朝鮮王朝)는, 소위(所謂) 식민사관(植民史觀)에서 말하는 대륙(大陸)의 황제국(皇帝國)을 능가(凌駕)하는 수준(水準)이었다는 것을 알자.
➌ “기병(騎兵) 수십만(數十萬)”이란 숫자는 세계사(世界史)를 보아도 유례없는 대규모(大規模) 병력(兵力)이란 사실이다. 이 정도(程度)의 기마대(騎馬隊)를 보내, 침략(侵略)했다면, 당시(當時) 백제(百濟)도, 이에 걸 맞는 국력(國力)을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수십만(數十萬)이란, “십만(十萬)의 두 서너 곱절”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당시(當時) 위(魏)나라에서 보낸 병력(兵力)은 최소(最小) 『이십(二十)만∼삼십(三十)만』 기병(騎兵)을 보냈다는 뜻이다.
➍ 백제(百濟)가 반도(半島) 서남(西南) 모퉁이 땅에 있었다는 식민사학(植民史學)의 설명(說明)대로라면, 세계최초(世界最初)의 전무후무(前無後無)한 대(大)상륙작전(上陸作戰)이 서력(西曆) 488년, ‘북위(北魏)와 백제(百濟)’간에 벌어졌다고 봐야 하는데, 과연(果然) 가능(可能)한 이야기더냐?
➎ 서력(西曆) 488년, 당시(當時) 기병(騎兵) 수십만(數十萬)이 출병(出兵)하려면, 군수(軍需)지원병(支援兵)과 군수물자(軍需物資)등은 그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程度)로 많았을 것이며, 백제(百濟)와 대륙(大陸)사이의 바다(海)는, 온통 전함(戰艦)으로 뒤덮여 있었을 것인데, 이러한 상륙작전(上陸作戰)을 감행(敢行)할 수 있는 선박건조(船舶建造)기술(技術)이 있었다고 보느냐?
또 당시(當時)의 정세(政勢)로 보면 : 백제(百濟)는 일개 제후(諸侯)로써, 북위(北魏)는 대륙(大陸) 북방(北方)주인(主人)으로써, 황제(皇帝) 위상(位相)이 천하(天下)를 진동(振動)할 때다. 이러한 황제국(皇帝國)에서, 자신(自身)들의 행정구역(行政區域) “주(州) 또는 일개 군(郡)” 정도(程度)밖에 되지 않는, 바다 건너 백제(百濟)를 공격(攻擊)해야 할 이유(理由) 또는 명분(名分)은 무엇이냐? 무엇을 얻고자 함이냐?
➏ 북위(北魏)와 백제(百濟)는 바다(海)를 사이에 두고, 존재(存在)하지 않았다는 증거(證據)다. 『본시(本是) 북위(北魏)와 백제(百濟)는, 그 경계(境界)가 서로 맞물려 있었기 때문에, 북위(北魏)의 기병(騎兵) 수십만(數十萬)이 백제(百濟) 땅으로, 전격적(電擊的)으로 진입(進入)했으나, 사전(事前)에 이를 눈치 챈, 백제(百濟) 왕(王) “모대(牟大)”가, 장군(將軍)과 병사(兵士)들을 길목에 잠복(潛伏)시켰다가, 불시(不時)에 습격(襲擊), 크게 깨뜨리니, 북위(北魏) 기병대(騎兵隊)는, 수많은 사상자(死傷者)를 내고 철군(撤軍)했다.』는 것이 그 줄거리다. 당신네들은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런 백제(百濟)를, 반도(半島) 서남(西南) 모퉁이에 잡아 처넣는, 궁극적(窮極的)인 목적(目的)이 무엇이냐? 당신들은 이 모두를 기록(記錄)의 잘못, 오류(誤謬)라고 할 것이냐?
❼ 살수(薩水)가 청천강이라면, 당시 신라(新羅)군이 평양(平壤) 북(北)쪽으로 진격(進擊)했다는 이야긴데, 자신(自身)들의 중앙(中央)부를 꿰뚫고 들어오는 신라(新羅)군을 막지 못하고 살수(薩水)까지 오게 했다는 이야기냐? 이때만 해도 신라(新羅)는, 겨우 명맥(命脈)만을 유지(維持)하고 있던 소(小)왕국(王國)이었던 것을 모르느냐?
위 기록(記錄)을 봐라! 백제(百濟)는 당시(當時), 쳐들어온 북위(北魏)의 수십만(數十萬) 기병(騎兵)을 기습(奇襲)하여, 크게 물리쳤다고 했잖은가! 이러고도 조선(朝鮮)의 세 나라가 반도(半島) 땅에 있었다고 할 수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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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武寧王,三年,秋九月,靺鞨燒馬首柵,進攻高木城.王遣兵五千,擊退之. : 3년 가을 9월, 말갈이 마수책을 소각하고 고목성으로 진공하여 오자 왕이 군사 5천 명을 보내 이들을 물리쳤다. 二十一年, 先是,爲高句麗所破,衰弱累年.至是上表,稱:累破高句麗,始與通好,而更爲强國. : 이에 앞서 고구려에게 격파당하여 나라가 쇠약하여진 지가 여러 해 되었는데 이 때 표문을 올려서 “백제가 여러 번 고구려를 격파하여 그들과 처음으로 우호 관계를 맺었고, 이제 다시 강국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二 十 二 年, 冬 十 月, 地 震. : 겨울 10월, 지진이 났다.》고 하였다.
➊ 이때까지도 백제(百濟)의 북변(北邊)에는 말갈이 있었으며, 고구려(高句驪)를 여러 번 격파(擊破)하고, 이제는 강국(强國)이 되었다고 스스로 말하고 있다.
➋ 또 지진(地震)이 발생했다는 이야기다. 반도(半島) 한수(漢水)이남(以南)과 충청(忠淸). 전라(全羅) 땅, 어느 곳이 지진대(地震帶)에 속해 있어, 시시때때로 지진(地震)이 일어나느냐? 당시에 지진대(地震帶)에 속했던 곳은, 21세기인 지금도 그 지진대(地震帶)는 크게 변한 것이 없다는 과학(科學)지식(知識) 정도(程度)는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 <1편/끝>
2015년 08월 25일 <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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