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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일환 목사 / 믿음의 말을 하는 자 (민 11:1-3)
옛날 어느 나라에 두 마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두 마을에는 마을이름보다 더 잘 불리는 별명이 있었습니다. 한 마을은 感謝村(thanks village)이고 다른 한 마을은 不評村(complain village)이었습니다.
불평촌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불만이고, 무엇이든지 근심하고, 무슨 일이 생기면 매사에 분노하고, 또 좋은 일이 일어나도 혹시 잘못되어 다시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예상을 하면서 걱정을 했답니다. 그들은 매사에 불평과 불만, 근심의 연기가 항상 입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니 불평촌 사람들은 주소가 그 동네이고 또 모두가 불평 속에서 살기 때문에 이 비극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촌에 사는 사람들은 어떠한 가운데서도 감사를 했습니다. 고생을 해도 감사하고 또 시련을 받을수록 감사의 농도는 더욱 깊어졌습니다. 봄에는 꽃이 피는 것에 감사했고 여름에는 잎이 무성한 것에 감사했으며, 가을에는 추수하는 것에 감사하고 겨울에는 나뭇가지는 앙상하지만 그 뿌리가 있는 것에 감사를 했습니다.
하루는 불평촌에 사는 사람이 감사촌에 놀러왔다가 감사하는 소리에 놀랐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감사를 배웠습니다. 그러나 하루 종일 범사에 감사하다가 저녁이 되어 불평촌에 돌아온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에이. 감사촌에 갔다가 얻어먹은 것도 없이 감사만 하고 왔네." 하더랍니다.
여러분은 어떤 촌에 살고 있습니까? 감사촌입니까 불평촌입니까? 그런데 누구나 다 감사촌에 살고 싶으면서도 쉽지 않습니다. 감사는 감사촌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촌으로 이사를 와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불평촌에 살던 한 사람이 이왕이면 감사촌에서 살자고 이사를 했더니 감사하는 삶을 살게 되더랍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루를 살면서 하는 말을 곰곰이 살펴보면 어떤 종류가 더 많을까요? 부정적인 말이 더 많을까요? 아니면 긍정적인 말이 더 많을까요? 우리 입술에서 어떤 말이 더 많이 나오느냐가 우리의 幸福度를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성경 말씀을 살펴보세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400년간의 애급생활을 마치고 하나님의 강권적인 은혜로 애굽에서 나와 홍해를 건넜습니다. 그런데 홍해를 건넌 그들의 모습을 통해 참으로 이상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그들은 애굽을 탈출하는 過程속에서 엄청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였습니다. 어떤 은혜입니까?
하나님이 대 애굽의 왕 바로를 10가지 재앙으로 손을 반짝 들게 합니다. 당시 애굽 왕은 애굽사람들에게는 신이었습니다. 그런 신과 같은 존재가 하나님의 심판 앞에 두 손을 들게 된 것입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애굽을 나와 도망치자 추격하는 애굽 군대를 막으시는데 불기둥을 직접 움직이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손도 못 대게 하십니다. 또 가로막은 홍해를 하나님이 갈라놓으셔서 그 사이를 한사람도 다치지 않고 모두 건넌 체험을 했습니다. 더 나아가 뒤따라오는 애굽 군사를 그 홍해 속에 다 수장시키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보았습니다. 한 가지 더, 먹을 것이 없게 되자 새벽마다 만나를 내리셔서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이 굶주리지 않게 하도록 친히 役事하셨습니다.
이 정도 되면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의 자세는 분명 놀랍게 달라져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깊이 살펴보세요. 그들의 입술에는 원망 불평이 가득합니다. 어찌 이것이 합당한 자세라 할까요? 결국 하나님이 그들의 불평과 원망을 들으시고 진노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장막 한쪽에서 화재를 일으키십니다. 그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불어 닥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무리 진압을 해보려 해도 물이 넉넉지도 않으니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때서야 백성들이 모세를 향해 부르짖게 되고 결국 하나님은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불이 꺼지게 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의 사건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교훈을 주십니다. 오늘 우리가 받을 교훈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오늘 본문을 향해 3가지 질문을 하고 그 답을 찾아야 합니다.
1. 왜 이스라엘은 원망 불평을 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1)받은바 은혜는 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영원히 종으로 살아야만 하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과 은혜로 무혈탈출에 성공했습니다. 그들의 힘으로 독립운동을 벌인 적이 없습니다. 또 군사력을 모아 힘으로 탈출한 것도 아닙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승리케 하심으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특별히 홍해 건넌 사건이 이것을 반증합니다. 어린들 찬송가 홍해 어떻게 건넜나? 헤엄쳐 아니, 배타고 아니, 오직 하나님이 모세의 지팡이를 통해 갈라놓으셨고 그 사이를 통과하게 하셨습니다. 그들이 그 홍해를 건넌 후 너무 좋아 하나님을 찬송하며 노래를 지어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도 잠시 잠간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은혜를 곧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그것이 인간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경우가 없나요? 사례는 다를 것이나 똑같습니다. 부흥회를 할 때면 '아멘 아멘'하며 주님께 헌신을 다짐하지만 그 한 주간만 반짝할 뿐입니다. 병을 고침 받은 경우도 아플 때는 치료해달라고 울며불며 기도하지요. 그러나 막상 치료되면 병원에서 치료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맙니다. 또는 날 시간이 되어서 났다고 생각하고는 언제 아팠느냐 싶게 지나갑니다. 자녀가 아픈 경우도 그렇습니다. 나는 자식이 아팠다가 나은 경우 치료받아 감사하다고 감사헌금 드린 사람을 별로 본적이 없습니다. 왜 이 모양일까요? 한마디로 받은바 은혜를 망각하기 때문입니다.
2)인간의 체험과 경험의 한계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체험하면 확실할 것 같이 보입니다. 자기가 경험한 것은 의심치 않고 믿을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세요. 변화 산에서 예수님 변화하신 모습 보았습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 적어도 이들은 예수님의 놀라운 모습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 잡혀갈 때 다 도망치고 죽으신지 3일 만에 부활하셨다는 소리를 듣고도 믿지 않습니다. 체험하면 확신할 것이라고요? 손으로 만져보면 의심치 않고 믿을 것이라고요. 아닙니다. 성경을 보세요. 죽은 자 3번씩 살려도 안 믿습니다. 나사로, 회당장 야이로의 딸, 나인성 과부의 아들, 이렇게 세 명씩 살려주는 것을 그들의 눈으로 봤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죽은 지 3일 만에 부활한다는데 믿지 않습니다.
여러분! 병 고침 받아보면 확실할 것이라고요? 아닙니다. 어림도 없습니다. 체험하고 경험해도 인간은 그때뿐입니다. 여러분 주변을 보세요. 오히려 소위 은혜 받았다는 자들이 더 실망을 끼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기에 체험을 경험을 의지하지 말라고 오직 약속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원치 않다고요? 우리도 똑같은 종자들입니다. 그러기에 믿음을 붙들어야 합니다. 봤다고요? 체험했다고요? 그럴수록 깨어 있어 기도하고 조심하시기를 바랍니다.
3)우리 속에 거하는 무서운 탐심 때문입니다.
왜 이스라엘이 원망하고 불평하였을까요? 가는 길이 힘들다고, 먹을 것도 맛이 없고 한마디로 재미가 없다고 불평하며 원망합니다. 차라리 애굽이 더 날 뻔했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그들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을까요? 한마디로 밑 빠진 독같이 한없는 탐심 때문입니다. 그 탐심이 이스라엘을 이토록 비참한 신세로 만들었습니다. 우리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인생이 재미없는 가장 무서운 이유, 그리고 우리를 힘들게 만드는 가장 무서운 세력은 다름 아닌 탐심입니다. 통제할 수 없는 탐심이 우리 속에 도사리고 있는 한 우리에게는 일시적 행복은 있을 것이나 영원한 행복은 찾아오지 않음을 믿어야 합니다.
2. 하나님께 犯罪하면 어떻게 되는가를 敎訓하십니다.
각종의 재난으로 경고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이 싫어하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상숭배요, 교만이요, 탐심입니다. 그런데 그에 못지않게 싫어하는 것은 원망 불평입니다. 그런데 이런 범죄 속에 사는 자를 하나님은 어떻게 처리 하실까요?
일차로 깨닫게 하기 위해 여러 가지로 경고하십니다. 그래도 돌이키지 않으면 재난을 당하게 합니다. 오늘 본문에도 이스라엘이 원망 불평하니 그들 진영에 화재가 나게 합니다. 성경에 불로 심판하시고 물로 심판하시고 더 나아가 악질로 심판하시는 모습을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누구에게요? 제일먼저는 감사할 줄 모르고 원망 불평하는 자들에게 하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재난을 보는 시각이 달라야 합니다. 재남이 닥쳤을 때 세상 사람이 어떻게 보든 상관없이 우리는 하나님의 시각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단순히 천재지변이네, 환경 파괴 때문이네 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모두가 다 사람의 죄악 때문에 생긴 것이므로 인재라고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재난은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일로 다가오게 됩니다. 지난 루사 태풍으로 자기가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죽은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재난입니다. 이런 형태의 재난이 우리에게도 닥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도 회개치 않으면 이와 같이 망하리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임이 닥친 심판은 사람의 힘으로 막을 수 없게 됩니다. 노아 홍수 심판도 그렇습니다. 불 심판은 그래도 소생의 길이 있습니다. 물 심판은 아주 무섭습니다. 현대인이 당하는 재난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요즘 흔히 일어나는 재난은 홍수, 화재, 질병, 교통사고 등입니다.
물론 이런 모든 재난이 하나님의 심판은 아닙니다. 욥이 당한 것처럼 우리의 믿음을 연단하고 시험하기 위함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는 그런 재난 앞에서 스스로를 냉철하게 돌아보고 무엇이 문제인가를 찾아내는 능력을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3. 그렇다면 우리의 원망 불평의 삶을 어떻게 고쳐야 할까요?
1)회개입니다.
겸손히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 스스로를 통찰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성령님의 깨닫게 하시는 능력이며 또한 성경이 우리 스스로를 보게 하는 거울의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성도는 스스로를 보며 책망하고 돌아설 수 있어야 합니다. 시편 기자가 했던 것처럼 시편42: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스스로에게 명령하고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원망 불평이 가득 찬 내 모습을 바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내 문제를 남에게 책임을 전가시키는 무서운 모습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재난을 멈추게 하는 최고의 지름길입니다. 40일이 지나면 이성이 무너진다! 외쳤던 요나의 외침을 듣고 회개하여 심판이 돌이켜졌던 니느웨 성처럼 우리에게 닥칠 재난과 심판은 오직 회개만이 멈출 수 있는 능력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하나 회개보다 더 적극적인 것은
2)오직 감사와 찬송으로 악한 말을 내지 못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감사와 찬송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감사와 찬송은 나를 주님께로 가까이 가게 합니다. 그러므로 결국 원망 불평하다가도 찬양과 감사가 터져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을 자세히 보세요. 처음에는 어찌하여~ 하시나이까? 하며 불평하고 원망하듯 하나 뒤쪽을 보면 반드시 감사와 찬송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끝이 납니다.
그러기에 감사 찬송은 평상시 훈련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 가정은 복잡합니다. 남편은 아내와 말다툼하고, 형제는 서로 싸우고, 자식은 서로 욕하는 상태이고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고 집안엔 불평만이 가득 찼습니다. 여러분 집안은 어떤가요? 만약 누가 화분을 깨트렸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나요? 잘난 가정은 "어떤 놈이 이것을 깨트렸어, 왜 당신은 이것을 이런 곳에 두는 거야", 그러면서 대판 난리가 납니다. 그런데 평화로운 가족은 "아, 내가 그런 곳에 놓아둔 것이 잘못이었어요.', '아뇨, 제가 부주의한 탓이지요." 하며 모두 자기 자신이 나쁜 사람이 됩니다. 그러다 보니 집안이 평화롭고 안정이 됩니다. 여러분가정이 이런 천국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마지막으로 주님에 대한 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가만 보면 원망 불평 뒤에는 사랑이 식었다는 표현입니다. 왜 부부가 싸울까요? 여러 가지 이유 있으나 제일 큰 이유는 사랑이 식었기 때문입니다. 왜 고부간이 불편하나요?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 신앙생활이 힘드나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식었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마지막으로 물어보신 것은 사랑입니다. 왜 하실 말이 많았을 텐데 왜 사랑을 물었을까요? 사랑이 모든 것을 덮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기만 하면 문제 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 남의 자식이 못된 짓을 하면 꼴을 못 볼까요? 사랑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왜 계모가 자식을 구박하는 것입니까? 그것도 사랑문제입니다. 왜 시어머니와 친정어머니가 다른가요? 그것도 사랑문제입니다.
여러분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십니까? 그러면 여러분의 입술에서 오직 감사 찬양이 날마다 터져 나올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도 사랑스럽고 성도도 사랑스럽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면 모든 것이 짜증이고 하나님이 맡겨주신 직분이 힘들고 지겹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믿음의 말을 하시기 바랍니다.
원망불평이 터져 나올 때 좋아할 자는 오직 마귀뿐입니다. 믿음의 말을 하고 그것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면 하나님은 기뻐하실 것이고 결국 내게는 놀라운 복이 넘쳐날 것입니다. 믿음의 고백인가 아니면 원망 불평인가? 예수님이 남을 원망하신 적이 있나요? 예수님이 불평하신 적이 있나요? 없습니다. 오직 감사하며 찬송하며 믿음의 말을 하셨습니다.
그 차이가 우리 인생의 행복을 바꾸어 놓습니다.
기도합시다.
김홍도 목사 / 예상 못할 은혜와 믿음 (11: 1-14, 22-23)
올림픽 게임에서 한국 야구 대표 팀이 야구의 나라 미국을 비롯해서 세계 최강의 야구팀인 쿠바를 두 번이나 이기고 금메달을 획득하는 것을 보고, 해설하는 분이 마지막에 “한국의 야구팀이 미국을 비롯해서 쿠바까지 6개국 팀을 한 번도 지지 않고 다 이기리라는 것은 상상도 못 하고 예측도 못 한 일이다” 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세상일도 상상 못 할 일이 일어나거늘 믿음으로 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상상도 못 하고 예측도 못 한 일이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우리 기독교인들은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절망하거나 낙심치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하며 나아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 민수기 11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을 떠나 가데스 바네아로 향해 갈 때에 큰 문제가 발생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중에 섞여 사는 무리(mixed multitude)가 불평하기 시작하니 그 불평이(complaint) 삽시간에 염병처럼 퍼져 갔습니다. 불평의 내용은 민수기 11장 5절에 있습니다.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 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하며 불평하고 또 하나님이 매일새벽 내려 주시는 ‘만나’ 는 각종 비타민도 들어 있고 맛도 있었습니다. 그것을 찧어서 빵처럼 만들어 먹기도 하고 과자를 만들어 먹기도 했던 영양 많고 맛있는 하나님의 음식인데 맛이 없다고 불평했으니 하나님이 얼마나 진노 했겠습니까? 여호와의 진노가 임했다고 했습니다.
이때에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 하시기를 “하루나 이틀이나 닷새나 열흘이나 이십일만 먹을 뿐 아니라 코에서 넘쳐서 싫어하기까지 일개월간을 먹게 하시리니...” 하셨을 때, 모세가 민수기 11장 22절에 “그들을 위하여 양떼와 소떼를 잡은들 족하오며 바다의 모든 고기를 모은들 족하오리이까” 하고 반문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장정만도 60만 명인데 어떻게 이 큰 무리를 먹일 수 있겠습니까? 하고 반문 한 것입니다. 믿음이 좋은 모세도 의심하고 믿지 못 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이 말씀하시를 민수기 11장 23장에 “...여호와의 손이 짧아졌느냐 네가 이제 내 말이 네게 응하는 여부(與否)를 보리라” 하셨습니다. 즉, 전능하신 하나님께 능치 못 한 일이 있겠느냐 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바다에 강한 바람이 불어오게 해서 메추라기 떼가 날아와 이스라엘 진중 사방에 내려와 덮이는데 두 규 빗 즉, 90㎝ 두께로 내려와 쌓였습니다. 메추라기 떼는 몇 날 며칠 떼를 지어 날아 가다가 피곤하면 아무데나 내려 앉아 머리를 쳐 박고 정신없이 잠을 잔다고 합니다.
온 이스라엘이 이 메추라기 고기를 구워먹고, 볶아먹고, 삶아먹으며 고기를 실컷 먹게 되었습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졌느냐” 하신 말씀이 이루어 졌습니다.
1.백성의 불평과 원망
① 섞인 무리(mixed multitude)의 불평
이스라엘 백성 중에 섞인 무리가 있었는데 이들이 종살이 하던 애굽 땅을 그리워하면서 불평을 했더니 온 무리에 염병같이 퍼져서 온 백성이 울며불며 불평하고 원망했습니다. 이때에 하나님이 진중에 불을 내려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불살랐습니다.
성경에 “섞인 무리” 혹은 “쓴 뿌리”란 말씀이 종종 나오는데 이 “섞인 무리” 란 어떤 사람을 말하는가 하면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람이 결혼해서 자식 낳고 사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남편이 애굽 사람이고 부인이 이스라엘 사람이거나 남편이 이스라엘 사람이고 부인이 애굽 사람이거나 해서 피가 섞여 사는 사람을 의미 합니다. 혹은 애굽 사람이었는데 이스라엘 백성가운데 섞여서 출애굽 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애굽 땅을 그리워하며 불평하기 좋아한 것입니다. 민수기 11장 5~6절에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라고 했습니다. 종살이 하던 때를 그리워 하니 하나님께 대한 배은망덕이 아닙니까?
오늘날 교회의 “섞인 무리” 란? 성경 강해집을 쓴 Mc Gee 목사에 의하면 별 일 없는 한 주일 낮 예배에는 참석을 하는데 밤 예배나 성경공부 하는 데는 안 나오고 기도회 같은데도 나오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자기들끼리 등산을 가거나 조기축구회는 잘 나가고 끼리끼리 놀러 다니기는 잘 하지만 교회봉사는 별로 하지 않는 사람들이 오늘날의 “섞인 무리” 들입니다. 이 섞인 무리는 하나님이 주신 음식인 ‘만나’ 를 가지고도 불평했습니다. 민수기11장 6절에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라고 불평했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주신 음식이라 각종 비타민이 다 들어 있고 영양가가 높은 음식입니다. 민수기 11장 8절에 “백성이 두루 다니며 그것을 거두어 맷돌에 갈기도 하며 절구에 찧기도 하고 가마에 삶기도 하여 과자를 만들었으니 그 맛이 기름 섞은 과자맛 같았더라” 했으니 얼마나 맛있고 좋은 음식입니까? 그러나 그들은 불평만 했습니다. “만나” 는 오늘날 “설교말씀”, “생명의 양식” 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내의 “섞인 무리” 는 하나님의 말씀을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 생명의 양식으로 삼지 않고 설교가 이러쿵저러쿵 비판하거나 불평하기만 좋아 합니다.
9년 전 MBC 사건이 터졌을 때 교회 주변에 남자 권사 대여섯 사람이 몰려다니며 불평하고 별별 입에 담지 못할 말을 다하며 다니다가 주동인물 권사가 갑자기 병명도 모른 채 죽고 말았습니다. 그 후에 그 모임이 해산되고 없어졌습니다. 교회는 다니면서도 이런 “섞인 무리” 에 속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② 모세의 불평
모세와 같은 위대한 영도자가 백성들이 고기가 먹고 싶다고 불평하며 울었더니 하나님께 불평을 했습니다. 민수기 11장 11절에 “여호와께 여짜오되 주께서 어찌하여 종을 괴롭게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나로 주의 목전에 은혜를 입게 아니하시고 이 모든 백성을 내게 맡기사 나로 그 짐을 지게 하시나이까” 했고, 12절을 보면 “이 모든 백성을 내가 잉태 하였나이까 내가 어찌 그들을 생산하였기에 주께서 나더러 양육하는 아비가 젖 먹는 아이를 품듯 그들을 품에 품고 주께서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가라 하시나이까” 하고 불평했습니다. 내가 이 백성을 잉태를 했습니까? 하고 불평을 했습니다. 그다음 13절에 보면 “이 모든 백성에게 줄 고기를 내가 어디서 얻으리이까 그들이 나를 향하여 울며 가로되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라 하온즉 책임이 심히 중하여 나혼자는 이 모든 백성을 질 수 없나이다” 하고 15절에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나로 나의 곤고함을 보지 않게 하옵소서” 하고 즉시 죽여 달라고 했습니다. 모세가 왜 그렇게 약해졌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하루나 이틀이나 닷새나 열흘이나 이십일만 먹을 뿐 아니라 코에서 넘쳐서 싫어하기까지 일개월간을 먹게 하시리니...” 라고 하셨는데도 “...보행자가 육십 만 명이온데 주의 말씀이 일개월간 고기를 주어 먹게 하겠다 하시오니 그들을 위하여 양떼와 소떼를 잡은들 족하오며 바다의 모든 고기를 모은들 족하오리이까” 고 불신앙의 말을 할 때에 “여호와의 손이 짧아졌느냐” 고 하시며 바다에 세찬바람이 불어오게 해서 메추라기 떼가 날아와 이스라엘 진중에 덮였는데 약 90㎝, 즉 1미터 가까이 날아와 쌓이게 해서 한 달 동안 실컷 먹고 남게 했습니다.
2. 상상 못할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하시려면 못 하실 것이 없음을 믿고 어떤 환경에서든지 낙심하거나 절망해서는 안 됩니다. “양떼와 소떼를 잡은들 족하오며 바다의 모든 고기를 모은들 족 하오리이까” 하고 모세 자신도 의심했지만 하나님은 고기를 실컷 먹이고도 남게 하셨습니다.
구약성경 열왕기하 7장에도 이와 같은 큰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아람 왕 벤하닷이 많은 군대를 이끌고 와서 북 왕국 수도 사마리아 성을 포위하고 항복을 받으려고 했습니다. 성안의 양식이 다 떨어져서 오늘은 내 아이를 잡아먹고 내일은 네 아이를 잡아먹자고 할 정도였습니다. 나귀머리 하나에 80세겔 요즘 말로하면 돼지머리 하나에 100만원 하고 밀가루 한 포에 100만원 넘게 하는 상황인데 선지자 엘리사가 예언하기를 “내일 이맘때에 밀가루 한 포대에 5천원하고 보리쌀 한 포대에 5천 원 할 것” 이라고 했더니 왕의 신하 중 한사람이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라고 말하며 의심했습니다. 그 때에 엘리사가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 고 했습니다. 인간의 생각으로는 상상도 예측도 못 할 일이 일어날 것 이라고 예언 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은 하셨습니다. 큰 군대가 쳐 들어오는 소리가 아람군대의 귀에 들려왔습니다. 이스라엘이 용병을 끌어 왔구나 생각하고 그 많은 군량미 밀가루와 보리쌀을 버려두고 혼비백산 도망갔습니다. 이 사실을 아무도 모르고 있는데 사마리아성에 네 문둥이가 아람 군 진영을 보니 조용한 것을 보고 죽을 때 죽더라도 한 번 가보자, 기왕 굶어 죽을 바에는 죽을 각오를 하고 ‘가보자’ 하고 아람 진중에 들어갔습니다. 많은 밀가루, 보리쌀, 음식과 군복이 산더미처럼 쌓인 것을 보고 실컷 먹고, 힘껏 짊어지고 와서 이스라엘 군대에 알려주었습니다. 거짓말인줄 알았다가 사실임을 깨닫고 성문을 열어 재끼고 물밀 듯이 백성들이 나가 많은 양식과 의복을 가져왔습니다. 100만원하던 밀가루, 보리쌀이 5천원에도 안 팔릴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라고 하던 이스라엘 나라의 장관은 군중의 발에 밟혀서 죽고 말았습니다. 엘리사의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기 때문에 예상치 못했던 일들을 행하십니다. 우리가 8.15해방 때도 사실 예상치 못 한 방법으로 해방을 맞게 되었고 6.25때 UN군이 파병된 것도 예상치 못했던 일입니다.
3. 절망적 환경에서 우리가 가질 태도
① 절대적인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환경을 보고 낙심할 것이 아니라 더욱 굳센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 40절에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씀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5장 7절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고 하셨습니다. 암담한 환경에 처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굳세게 믿고 나아가야 합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고 하셨습니다.
② 불타는 심령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불가능이 없다면 기도에도 불가능이 없습니다. 시편 50편 15절에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했습니다. 일을 행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그것을 성취하고 완성시키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예레미아 33장 2~3절에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너는 내게 부르 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고 하셨습니다. 부르짖으며 간절히 기도할 때에 하나님이 숨겼던 비밀을 열어 보여 주시고 예상치 못했던 일을 나타내주시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망우리 변두리에 세계 최대의 감리교 성전을 짓고 세계 최대의 감리교회가 세워졌다는 사실은 도저히 상상도 못하고 예측도 못한 일입니다. 2006년도에는 세계감리교대회를 역사상처음으로 교회에서 치루었고 역사상 가장 훌륭하게 치루었습니다. 성전 건축을 시작할 때부터 상상 할 수 없는 사탄의 시험과 방해를 받아 도저히 건축을 완성할 수 없는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온 성도들의 믿음과 뜨거운 기도로 승리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고 예측할 수도 없는 일이기 때문에 인간의 생각으로 계산해서는 안 됩니다. 불가능하다고 낙심하거나 불평하면 안 됩니다.
불초 이종도 얼마나 많은 시련과 사탄의 공격을 받았습니까? 몇 번이나 목회를 중단 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으나 44년 목회를 무사히 마칠 뿐 아니라 동사목사로 종신토록 이모작 목회까지 할 수 있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것은 저 자신도 어느 누구도 예측도 못하고 상상도 못 했던 일입니다.
③ 긍정적인 생각을 계속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은 아무리 불행처럼 보여도 반드시 좋은 결과를 가져오게 되어 있으므로 긍정적인 생각을 해야 합니다. 로마서 8장 31절에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했고 시편 118편 6절에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게 두려움이 없나니 사람이 내게 어찌 할꼬” 했습니다. 이사야 41장 10절에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 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고 지금도 저와 여러분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나 우리가 상상도 못하고 예측도 못한 일을 행하시는 분임을 믿고 절망하거나 좌절하지 않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