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이 윤사월 마지막 날, 고향에 자신의 무덤 자리를 만들고 왔답니다. 환갑 기념으로... 저는 사후 화장해서 재를 흩뿌려 세상에 흔적을 남기지 않겠다는 게 평소의 생각이었기에 이 친구의 자신에게 주는 환갑선물이 순간적으로 당혹스러웠습니다. 온갖 생각이 머리를 스쳤습니다.
가형은 하계파 교동 11세 주손입니다. 따라서 분파위부터 선친까지, 20여 위의 산소를 모셔야 합니다. 이런 주손가 차남의 피곤함은 문제될 것 없습니다만, 매년 다니는 산소 길이 울창한 잡풀에 가려져 갈수록 벌초, 성묫길이 힘들어지고, 안동, 영주 산소 오가는 길에 자주 만나게 되는 적지 않은 잊힌 산소를 보면서, 과연 우리 다음 대에 성묘가, 시사(묘사)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주손인 형님, 장조카와 제 큰 녀석에게는 드러내지 못하고 마음속으로 항상 고민하고 있습니다. 기제사는 2대 혹은 4대 봉사이니 많아도 여덟 분만 집에서 모시면 되지만 시사, 성묘는 조상 대대로 모셔야 하므로 저 같은 경우는 20여위, 제 후배인 모 종손의 경우는 33세 손이니 60여위의 산소를 지켜야 합니다.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시사를 다녔으니 햇수로 40년이 넘지만 항상 숙제입니다. 저는 부모님께 배웠고, 어른께서 원하시니 다연하다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애들도 지금은 당연히 따라나섭니다만, 장조카를 포함한 제 애들이 주체가 되었을 때는 기대난망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잡풀만 무성한 잊힌 산소들이 자꾸만 눈에 밟힙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무덤에는 피라미드, 진시황릉, 타지마할, 웨스트민스터사원, 전 세계의 50% 이상이 위치하고 있는 한국의 고인돌,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릉이 있습니다. 이 위대한, 아름다운 문화유산에는 수많은 이들의 노고와 생명-착취에 가까운-이 녹아있습니다. 세계의 장례, 장제 풍습을 보면 참으로 다양합니다. 불가에서는 석가모니의 장례를 따라 화장을 하지만 부활에 대한 믿음이 큰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에서는 무덤을 쓰지요. 인도사람들은 죽으면 바로 화장을 합니다. 우리나라처럼 지하에 묻는, 즉 산소를 쓰는 문화도 적지 않지만, 화장, 조장, 풍장, 수장, 현관장 등 문화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다양한 장제 풍습 및 관행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고인돌, 석관묘, 석실묘, 옹관묘, 적석총, 석곽묘, 전축분 등 다양한 매장문화가 일반적이었다가 불교가 융성했던 시기에는 화장이 적지 않았으나 유교문화가 정착되면서 다시 매장문화로 돌아섰습니다. 한국장례문화진흥원에 따르면 전국의 묘지면적은 약 1,025km²로 추정되고, 이는 국토의 1%를 넘으며, 국민 주거면적 2,646km²의 38.7%에 이르니, ‘죽은 자’가 ‘산 자’의 공간을 1/3 넘게 차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화장 비율이 1994년 20.5%에서 2017년 기준 84.6%까지 증가했음에도 묘지면적은 해마다 여의도 면적(2.9km)만큼씩 느는 추세랍니다. 굳이 후세를 위한다거나, 공리적인 목적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이쯤 되면 사후에 산소를 쓰는 건, 제 관점에선 확실히 아니다 싶습니다. 문득 ‘아니온 듯 다녀가시옵소서’라는 글귀가 떠올랐습니다. 삶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고 살아온 길을 돌아보게 하는 말입니다. 죽은 후 어찌할지, 방향을 제시하는 말이라 여겨집니다. 이승에 흔적을 남기지 않고 떠날 수 있다면, 삶을 아니온 듯 다녀갈 수 있다는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부도, 명예도, 집착도 버리고 나누고 베풀며 여유롭게 살아갈 수 있지 않겠나 싶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론, 무덤도, 납골당도, 이도 저도 아닌 위패만 모셔놓은 경우라도, 이승에 대한 미련이라 생각하기에 제가 세상과 이별할 때에는 화장 후 위패도 남기지 않는 완전 소멸을 택하려 합니다. 혹, 저를 기억하고 싶다면 그동안의 흔적이 남은 사진, 블로그로 접하면 되겠지요.
박목월 시인은 이순을 넘긴 연세에 무덤자리를 보러 가셨고, 그에 대한 소회를 담은 용인행이란 시를 76년에 발표하신 후 2년 뒤 타계하셨습니다. 보셨던 그 묏자리는 아니나, 가까웠을 것으로 보이는 용인모란공원에 묻히셨답니다. 사십 수년 전의 시인은, 당시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산소자리를 보고, 손 없는 날 삼베 수의를 만들어 사후를 미리 준비하셨지만 그런 시절은 이미 오래 전에 지났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환갑기념으로 묏자리를 꾸민 친구에게는 그만의 철학이 있으니 이런 저의 생각과는 별개로 축하할 따름입니다. 치열한 삶을 살아온 자신에게 주는 선물, 소중하고 존중합니다. 그는 무덤이라는 형태로 치열한 작가로서의, 기업가로서의 삶의 족적을 남기고자 함이고, 저는 바람처럼 구애됨 없이 스러지고자 하는 것이니, 각자의 지향점에 충실하면 될 것입니다.
공교롭게도, 주말편지를 보내려는 이 시점에 두 유명인의 서거에 따른 장제 관련 논란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인권변호사로 30년 활동하면서 성희롱이 불법임을 최초로 세상에 알린 박원순 전 시장은 비서 성추행 사건으로 고발된 다음날 자살하였고, 현재 국민장 성격의 서울특별시장을 치르고 있는데, 빈소는 정치인들로 붐비고 연일 뉴스 화면에 뜨고 있습니다. 그에 반해 625전쟁영웅으로 숭앙받았으나 해방 전 간도특설대 장교 복무로 친일논란의 중심에 있던 백선엽장군의 별세 이후 빈소는 뉴스화면에 비쳐지지도 않은채 국민장이 아닌 육군장으로 결정되었고, 서울현충원, 대전현충원 안장여부가 뜨거운 논쟁거리로 비화되어 있습니다. 참으로 상화하택, 염량세태올시다. 생각이 더욱 많아집니다. 복잡해집니다. 장례는, 무덤은 죽은 자를 위한 의식과 그 결과가 아니라 산 자를 위한 통과의례란 생각이 새삼 듭니다...
용인행(모셔온 글)=================
목사님의 소개로
용인엘 갔었다. 내외가
고속버스를 타고.
평당 3,000원이면 싼값이지요.
산기슭에서 소개업자가 말했다.
나는 양지바른 터전을
눈으로 더듬고,
서녘 하늘같은 눈으로
아내는 나를 쳐다보았다.
뫼뿌리가 어두워 들자,
먼 마을에 등불 하나 둘 켜지고
그럴수록 황량해 보이는 산하.
여보, 그만 가요.
울먹이는 아내의 목소리가
가슴에 젖어들었다.
돌아오는 길에도
고속버스를 탔다.
무덤 속으로 달리는 차창에
비치는 내외의 모습.
바람과 모래의 손이
마음을 쓰담아 주었다.
우리에게 이미 토지는
이승의 것이 아니었다.
가즈런한 한 쌍의 묘와
한 덩이의 돌이 떠오르는
흘러가는 차창의 스크린에
울부짖는 것은
바람 소리도 짐승 소리도 아니었다.
----- 박목월
이승이니 저승이니 생각 않고 현재를 즐기며 충실하게 살면 그로 족합니다. 친구 딸의 작은 연주회에서 삶을 윤택하게 하는 강력한 방법 중 하나인 음악에 빠져들었습니다.
https://blog.naver.com/bornfreelee/2220218350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