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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순의 가요이야기 .4] 식민지의 한과 슬픔 걸러준 哭婢(곡비), 전옥 | ||||||||||||||||||||||
신파 넘어선 눈물 연기를 선뵈다
토월회 심부름하며 배우 꿈 차곡차곡
희로애락 담은 독백에 객석 눈물바다
영화 주제가 등 가수로도 눈부신 활동
비극 여왕으로 연예사 한 페이지 장식
1950년대 대구에는 제법 이름 있는 극장들이 있었다. 당시 10대 후반의 소년이었던 나는 아버지를 따라서 극장 구경을 더러 다녔다. 만경관도 갔고, 대구극장에도 갔다. 아버지가 즐겨 찾던 극장의 프로그램은 주로 비극을 테마로 하는 영화였다. 그때만 하더라도 영화 제작 기법이나 기술이 발전된 시기가 아니어서 대개 권선징악이나 벽사진경과 관련된 판박이 줄거리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살아가는 것이 워낙 힘겹고 고단하던 시절이라 비극을 보는 경험은 자신의 가슴 속에 쌓인 한과 슬픔을 털어내는 여과와 조절의 시간이었다. 이 때문에 비극영화를 상연하는 극장 앞은 인산인해로 넘쳐났다. '목포의 눈물' '눈 나리는 밤' 등이 그 대표적인 작품으로 기억된다. 흑백으로 만들어진 이 비극 테마 영화의 대부분에서 단골 배역을 도맡았던 한 배우가 있었다. 그가 바로 전옥(全玉)이다.
함흥 영생중학교 2학년 때 가세가 기울자 집에서 그녀를 시집보내려 했다. 하지만 배우가 되고 싶어 극단을 기웃거렸던 그는 부모를 설득해 오빠 전두옥(全斗玉)과 함께 서울로 내려갔다. 전옥은 복혜숙과 석금성이 스타로 있던 토월회 문을 두드려 그곳에서 잔심부름을 하며 배우의 꿈을 키웠다. 전옥은 토월회 무대에서 착실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이후 극단이 해산하게 되면서 영화 일을 하고 있는 오빠를 따라 무대를 떠나 영화로 자리를 옮겼다. 이때부터 전옥이란 예명을 쓰게 되었는데, 그것은 본명 대신에 오빠의 이름 끝자를 끌어와서 만든 것이다. 맨 처음에는 나운규와의 인연으로 시작되었다. 1928년 17세의 전옥은 오빠의 전문학교 시절 친구이자 가수, 배우로 활동하고 있던 강홍식과 결혼한다. 그녀는 남편 강홍식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방송국인 경성방송국에서 노래를 생방송했고 방송극에도 출연했다. 29년에는 다시 문을 연 토월회의 무대에 섰으나 이내 토월회가 문을 닫자 지두환이 세운 조선연극사의 무대에 섰다. 그녀는 눈물을 뚝뚝 흘리게 만드는 독백으로 유명했으며 비극의 여인 역을 잘 해 '비극의 여왕' '눈물의 여왕'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광복 후 전옥은 전국순회공연을 하던 남해위문대를 백조가극단으로 개칭하여 악극을 공연했다. 당시 백조가극단의 공연은 1부에 전옥이 나오는 인정비극 '항구의 일야'가 공연됐고, 2부에는 버라이어티쇼로 고복수·황금심 같은 유명 가수들의 무대로 구성되었다. 수많은 악극단이 명멸했던 그 당시, 전옥의 백조가극단은 모든 면에서 최고의 위치에 있었다. 백조가극단의 공연은 전쟁 중에도 계속되었다. 이즈음 전옥은 극단의 살림을 맡아보던 일본 유학 출신 최일과 재혼했다. 50년대 중반, 영화가 인기를 끌면서 전옥은 다시 영화로 눈을 돌린다. 자신이 출연한 인정비극 '항구의 일야'(1957), '눈나리는 밤'(1958), '목포의 눈물'(1958)을 영화로 만든다. 60년대 이후 전옥은 무대와 다른 모습으로 영화에 출연했다. 그러다가
가수로서의 전옥은 영화의 선전 효과를 높이기 위해 주제가나 관련되는 곡을 직접 부른 경우가 많다. '실연의 노래'(범오 작사, 김준영 작곡, 천지방웅 편곡, 1934)는 1930년대 초반 당시 유행하던 풍조 중의 하나인 자유연애 사상을 한껏 고취시켜 주었다. '말 못할 이 사정을 뉘게 말하며/ 안타까운 이 가슴 뉘게 보이나/ 넘어가는 저 달도 원망스러워/ 몸부림 이 한밤을 눈물로 새네.' -'실연의 노래' 1절
역시 전옥이 부른 노래 '피지 못한 꿈'도 청년기 특유의 애잔한 심정을 잘 담아낸 노래다. 특히 2절 가사는 '네온사인 불 밑이라 피지 못한 꿈 피지 못한 꿈'이란 대목을 통해 식민지적 근대와 갈등과 충돌을 일으키고 있는 청년기의 내적 고뇌를 수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전옥이 남기고 있는 상당수의 가요 작품들은 시인 유도순이 노랫말을 만든 곡들이다. 작곡가로는 김준영과 호흡을 잘 맞추었다. 작사가, 작곡가 두 사람은 전옥의 감성과 표현능력을 잘 이해하여 그 효과에 잘 부합되는 작품을 만들어 주었다. 아리따운 처녀의 고운 자태를 묘사한 '첫사랑'(범오 작사, 김준영 작곡)과 '수양버들'(유도순 작사, 전기현 작곡, 1936)의 가사에서 마치 혜원 신윤복이 그린 한 폭의 한국화를 보는 듯한 전통적 감각과 고풍스러운 색조가 느껴지는 어휘구사도 돋보인다. 이를 전옥 특유의 창법이 잘 소화시켜 내고 있는 것이다. 전옥의 가수로서의 특징을 가장 잘 살려낸 최고의 걸작은 역시 악극 대본으로 구성한 '항구의 일야'를 손꼽을 수 있다. 이 작품의 여주인공은 사랑에 모진 상처를 겪고 삶의 좌절로 이어지는 탄심이란 인물이다. 이 배역을 전옥이 맡아 크나큰 성공을 거두었다. 탄심의 연인이었던 상대역으로는 이철이란 인물이 설정되었고, 탄심의 친구로 영숙과 의형제를 맺었던 박민이란 인물이 좌절 속에 빠진 탄심을 위기에서 구출해준다. 이 악극의 삽입곡을 원래 남일연이 취입했는데, 광복 후 이미자에 의해 재취입되어 LP음반으로 발매된 적이 있다. 이 음반을 통해 들어보는 전옥의 대사는 산전수전과 세상의 풍파를 다 겪은 노배우의 관록과 역량을 물씬 느끼게 한다. 이렇게 해서 가수와 배우로서의 전옥의 생애는 오로지 가파른 세월의 부담이 주는 중압감과 그 무게에서 괴로워하던 민중들의 한과 슬픔을 여과하고 조절해주는 대중예술가로 오래오래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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