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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의응답: (주인의식에 대한 질문) 질문이 상당히 큰 질문이라 각자가 하고 싶은 말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이 경제 부양책을 쓰고 있는데 지금까지 단기 처방책을 계속 2,30년 써왔습니다. 그래서 일본 경제가 실패해버렸습니다. 그렇듯이 주인의식을 함양한다는 차원에서도 단기 처방책을 자주 쓰면 그것이 결국은 끝에 가서는 더 좋지 못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부동산문제도, 교육 문제도도 단기 처방으로 대해 왔습니다. 그러다보니 해결이 안 됩니다.
국가에서는 크게 두 가지 방법을 씁니다. (1)단기적인 효과만 내고 뒤에 가서는 오히려 그 효력이 떨어지는 그래프, (2)처음에는 효과가 미미 하다가 뒤로 갈수록 상승하는 그래프. 보통 국가에서 (1)번 방법을 사용합니다. 왜냐하면 정치인이 자신의 임기가 짧기 때문에 당장 효과를 볼 수 있는 방법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효과는 떨어져 버립니다.
진정한 주인은 자신이 집권할 때 타인들에게 박수 받는 것만 생각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주인은 자신 당대에는 박수를 받지 못하더라도 결국 잘 되도록 하는 방법을 쓰게 됩니다. 제일 핵심이 되는 주인은 원불교 식으로 표현하면 인과를 믿고 받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깨친 사람이고 그 사람이 주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나중에 어떻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염두 해 두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1)번 방법을 선택하는 사람은 당장은 박수를 받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될 대로 대라는 식으로 생각합니다. 때로는 국민들이 자신에게 동의를 하지 않더라도 올바른 정책을 펴야 합니다. 지금 당장 우리나라가 세금 문제가 큽니다. 여당도 대통령과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여당에서는 아직 대통령의 임기가 남아있고 자신들이 손해 볼 일이 없기 때문에 세금을 지금 올리자고 합니다. 자신들은 올려서 국민에게 표를 더 받겠다는 겁니다. 그러나 대통령 입장에서는 정권이 바뀌면 곤란해집니다. 감옥에 투옥될 수도 있습니다. 자기 당대에 인기몰이를 많이 해 놓아야 합니다. 따라서 세금을 올리지 않겠다는 겁니다. 양측 모두 국가의 주인이 아닙니다. 인기와는 상관없이 어떻게 해야 우리나라의 미래가 발전할지를 생각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주(主): 자신이 먼저 스스로의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정신수양을 보면 대종사님께서 “자주력(自主力)”이라고 표현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정신을 수양하면 스스로가 주인이 된다는 뜻입니다. 결국은 정신수양을 못하면 욕심과 외부 환경 즉 물질이 주인이 되버립니다. 그러면 나 자신은 그것들을 쫓아가다가 끝이 납니다. 그러한 물질들을 내가 주인이 되어 사용해야 하는데 나는 어딘가로 가버리고 그것들에 끌려가고 쫓아가며 정신없이 살게 되는 셈입니다. 결국은 욕심의 문제이고 그 욕심이 재색명리를 향합니다. 그러다보면 내 본심은 주인을 잃어버리고 재색명리가 주인이 되어 정신없이 살게 되고 그렇게 되면 나는 형제도, 양심도, 대의도 신의도 몰라라 하고 던져버리게 됩니다. 그건 결국 내가 나 자신의 주인이 되지 못해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되면 원불교 교리를 통째로 가져다 들이 대면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시스템을 잘 갖추면 된다고 합니다. 물론 시스템이 없어도 문제고 법률과 제도가 없어도 문제입니다. 그러나 시스템을, 법률을 누가 운용합니까. 사람이 운용하고 사람은 무엇이 운용하냐 하면 바로 사람의 마음이 운용합니다. 특히 마음 중에서도 옳은 마음, 즉 주인 된 마음이 운용합니다. 아무리 시스템이 완벽하고 좋은 인재를 그 속에 갖다놔도 그 사람의 마음이 바르지 않으면 문제가 생깁니다.
부처님 당대에도 “지팡이 보다 못한 자식” 이라는 내용의 글이 있습니다. 나이를 먹은 사람이 자식을 낳아 죽어라 키워주고 돈도 대주었지만 나중에 자식이 부모를 쫒아 내버렸습니다. 결국 나(자신)를 지탱해주었던 것은 나의 지팡이였고 자식은 지팡이보다 못하다는 겁니다. 이 내용을 읽고 제가 댓글을 달아주었습니다. 사실 어떻게 자식이 지팡이보다 못하겠습니까. 자식의 마음이 그렇다는 것이죠. 자식의 마음이 무명과 욕심과 습관에 갇혀서 효도를 못하는 것이 문제죠. 문제의 원인을 잘 파악해야 합니다. 원불교를 다니신다면 일차적 생각에서 이차적, 삼차적 생각으로 발전할 수 있게 되고 현상 속에서 이면을 바라보는 시각이 생기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덜 속게 되고 미래를 내다볼 수 있으니까 얼굴도 포커페이스를 유지할 수 있죠. 앞을 모르면 그 순간, 순간만 보고 삽니다. 주(主자)가 임금보다도 높은 사람입니다. (임금 왕(王)보다 위에 획이 하나 더 있다는 것에서 나옴) 임금은 나라만 보지만 주(主)는 세상을 보고 임금보다 더 핵심적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집에서 주인이십니까? 혹은 학교, 직장, 단에서 또는 이 교당에서 주인이십니까? 세상에는 주인이 많지 않습니다. 전부 객(客)밖에 없습니다. 손님으로 산다는 것은 좋은 말로 손님이라고 표현한 것이지 실제로는 구걸하러 다니는 거지나 다름없습니다. 누가 반찬 차려놓으면 얻어먹고 사라지기만 반복하고 공도자나 헌신한 앞사람이 무언가를 이뤄 놓으면 얻어먹고만 가는 것이 객의 행동입니다. 그래놓고는 복을 받길 원합니다. 복을 지을 때는 안 짓고 말입니다. 주인은 그렇지 않습니다. 간단히 예를 들어 여러분의 손가락이 꺾어졌다고 합시다. 이 때 그냥 꺾어졌나보다 하고 모른 척 하십니까? 바로 통증 때문에 고통 받습니다. 왜 그러죠? 바로 내가 아프기 때문입니다. 손가락을 얼른 치료하지 않으면 누가 손해입니까? 바로 손가락의 주인인 내 자신이 손해죠. 그 이치와 같습니다. 주인은 세상이 나와 둘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제가 상담을 하다 보면 집안에서 아버지의 직업이 뭐고 연봉이 얼마인지, 우리 집에 빚이 얼마나 있는지 엄마는 무슨 병이 있는지 등 집안 역사도 모르는 채로 용돈만 받으며 다니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건 주인의 자세가 아닙니다. 주인은 집안 문제에 대해 알거나 모른다 하더라도 물어봅니다. 물론 어릴 때는 집안 사정을 모를 수도 있지만 계속 내 코가 석자라는 식으로 집에서도 손님 노릇을 하면 그건 집에서도 거지인 셈입니다. 여러분이 교당 사정을 얼마나 아십니까?
차려놓은 밥상을 얻어먹고만 가지 말고 한 번 차려보세요. 그것도 재미가 있습니다.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끼고 보람도 느끼고 그 속에서 자신이 성장하고 좋은 인연을 만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힘이 쌓이고 역량이 터지고 자신감도 얻습니다. 그런데 계속 손님 행세만 하고 눈치 보는 생활을 반복하면 스스로부터가 자신감이 없어집니다. 누가 자기를 만드느냐 하면 자신 스스로가 자신을 만듭니다. 나는 좋은 사람인데 학교, 회사, 부모, 교무님 같은 자신의 원망의 대상이 나쁜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좋아야 좋은 것입니다. 내가 다 만드는 것이고 여러분이 어디에 가서 분위기를 모조리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는 법입니다.
<기적의 100년 감동의 100년-좌산 상사님 법문>
(첫 단락)
원기 100년이 시작되었습니다. 대종사님이 26세에 대각을 하시면서 원기가 시작이고 원기 원년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 100년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면 원불교는 어떻게 시작되었느냐? 라고 한다면, 대종사님께서 사진에서 보이는 대각 터에서 대각을 하심으로 말미암아 원불교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목에 상사님께서 “기적”이라고 표현하시고 “감동”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세상은 기적을 일상적인 것이 아닌 특별한 것을 기적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원불교에서 이야기하는 기적은 약간 다릅니다. 예를 들어 대종사님께서 대각을 물구나무를 서 계시다 대각을 하셨다면 세상에서 이야기하는 특별한 일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종사님께서는 대각을 하시고 나서도 손, 발톱을 깎으시고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생활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이렇게 원불교의 기적은 평범한 기적이자 모두가 함께할 수 있는 기적을 이야기 합니다. 물구나무서서 대각을 했다던가 죽을 때도 천장에 매달려서 죽는 것과 같은 특이한 일을 원불교에서는 기적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평범함이지만 누구나 할 수 있도록 해 놓은 것을 기적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아무나 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보통 사람들은 평상심을 지키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온갖 핑계와 합리화와 조건들을 따지면서 그 평상심이 중간에 다 끊어집니다. 원불교와 동시대에 나왔던 수많은 종교들이 있습니다. 원불교보다 훨씬 규모가 컸던 종교들도 많았습니다. 천도교가 당시 3‧1운동을 하자고 계획을 했고 그 계획에 대해 회의했던 장소가 지금의 동묘입니다. 현재 방문해보면 비석도 있습니다. 독립군 자금도 거의 천도교에서 지원했습니다.
천도교 숫자가 현재의 원불교 교도 수보다 많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아예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지리멸렬 해졌습니다. 또 다른 종교인 증산교 강증산 선생님도 대단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분께서 돌아가시자마자 50여개 분파로 쪼개졌습니다. 그나마 지금도 짱짱한 곳이 대순진리회입니다. 증산도의 일부분이죠. 지금도 원평에 가면 대순진리의 각파가 다 있습니다. 그런데 제일 촌구석진 영광에서 대종사님의 대각으로 40여명 저축조합을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원불교가 생활의 종교로서 탄탄하게 나가기 시작합니다. 그때 원불교가 이렇게 되리라고 누가 생각했겠습니까. 일제 강점기를 거치고 6.25동란이 나고 또 우리나라의 어려움과 가난함을 겪고 극복하면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2단락)
출발부터 우리는 꿈이 있었습니다. 그 평지에 산을 세우겠다고 하는 평지조산의 꿈이 있었습니다. 그 꿈은 결국 일원세계 건설, 낙원세계 건설, 불법을 생활에서 실행하고 누구나 처처불상으로써 서로를 대하고 동정 간에 어디서나 선을 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자 한 것입니다. 그래서 영육쌍전, 이사병행, 동정일여의 법이 생활 속에서 쓰이고 모든 종교도 또는 어떤 민족이든 종교든 다 하나가 된 낙원세상을 건설 하겠다는 꿈이 원불교의 꿈입니다. 그게 일원세상입니다. 그런 성불제중과 제생의세의 꿈을 가지고 출발을 했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것도 참아냈습니다. 그래서 혹독한 추위도 이겨내야 했고 찌든 가난과 배고픔도 견뎌 내야했습니다. 특히 영광은 지금은 이제 정관평이 있지만 앞에는 바다가 있고 뒤에는 산이 있어 먹을 것 이 없었습니다. 영광에서 쌀 한 되라도 먹고 시집을 간 사람이 없을 정도로 가난했습니다. 그래서 대종사님께서 저 조수간만이 있는 바다를 막아 볼까 하고 생각에 저축조합을 하시고 방언공사를 시작하셨습니다.
방언공사를 하신 분들은 전부 다 학자, 양반들이셨습니다. 일을 안 해본 분들이십니다. 그러나 아까 평지 조산의 꿈, 즉 이 세상의 중생을 제도하고 평화세상, 낙원세상, 일원세상을 만들자 하면서 방언공사를 시작한 것입니다. 여러분 같으면 나오라고 하시면 나오겠습니까? 춥다, 아프다 온갖 핑계를 다 댈 텐데…. 원기 3년 3월부터 1년 동안 방언공사를 합니다. (PPT) 그래서 1차 공사 때 바닷물이 막아졌습니다. 이 때 1년 동안 2만5천7백7평을 마련했습니다. 그리고 2차 공사 때 저 바닷물도 둑을 세워 막았고 2차 때 2만 7천여 평을 마련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1956년도에 막습니다.
이와 관련된 일화도 하나 있습니다. 팔사님이셨던가요? 저녁에 공사를 해 놓은 둑에 가셨더니 구멍이 하나 나 있었습니다. 원래 둑이 무너질 때 구멍하나로 인해 무너지는 법입니다. 이 분이 겨울임에도 웃통을 벗고 그 구멍을 몸으로 막으셨습니다. 과연 어떤 마음이셨을까요? 아까 주인 이야기를 했는데 주인이 아닌 사람은 별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려다 안 된다면 그만 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주인이니까 막으셨습니다. 주인은 알아서 보이고 알아서 찾아서 합니다. 쉽게 살면 주인이 아닙니다. 저렇게 하고 나서 우리의 정성이 눈에 보이는 세상뿐만이 아니라 그렇지 않은 음계의 인증을 받아야 겠다는 생각을 하셔서 각 산에서 중앙봉에 정산종사님이 계시고 기도를 드립니다. 10일에 한 번씩 하고 시간은 밤 12시였습니다. 시간을 맞추기 위해 회종시계를 하나씩 사주셨습니다. 그렇게 3월부터 10월까지 우리는 기도하자고 하셨습니다. 방언공사가 끝날 때쯤 해서 3.1운동이 터집니다. 분명히 자신들도 참여하겠다고 하는 성질 급한 제자도 있을 것이고 만세 소리가 들려오는 여파가 있었음에도 대종사님께서는 우리는 기도 하자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8월 21일에 마지막 기도를 했습니다. 그 때 사무여한으로 자결하자고 하셨고 이 말을 듣고 다 비장하게 떠나는데 다시 오라고 하셔서 지장을 찍었습니다. 혈인 같이 빨간 지장을 찍었다고 해서 백지혈인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원기 4년에 우리 회상이 법계, 음계, 진리계로부터 인증을 받았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3단락)
법인기도 끝날 때 쯤 변산으로 이동하십니다. 그 다음에 책을 내시고 제자를 모으셨습니다. 거기서 여기에만 있지 말고 나가자고 하셔서 익산으로 나오셨습니다. (PPT) 이것이 석두암 터 입니다. 이것이 1943년도에 찍은, 6.25 때 없어지기 전의 사진입니다. 저기에서 수양도 하시고 삼강령 팔조문을 발표 하시면서 초기 인연도 모으시고 성리 법문도 많이 설하셨습니다. 그리고 일제 강점기기 때문에 익산으로 나가셨는데, 조선 총독부 건물이 지금은 옮겨서 박물관으로 만들었지만 당시에는 광화문 뒤에 딱 붙어 청와대도 가로막고 버티고 있었습니다. 역사시간에 배우셨겠지만 여기서 창씨개명과 같은 우리나라를 멸하기 위한 문화말살정책을 펼쳤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법회를 봐도 칼을 차고 일본 경찰이 뒤에 앉아있었습니다. 그리고 대종사님께서 관아에 세 번 불려갔다 되어있는데 처음에는 영광경찰서에 불려가셨습니다. 간척사업 끝나고 3.1운동 직후에 영광 경찰서에 잡혀가셨고, 그 다음에 김제에 있는 금산사에 가셨는데 어떤 사람이 발작을 일으켜 죽을 뻔 했습니다. 대종사님이 그 사람을 가만히 놔두지 않고 살려주시는 바람에 그 모습을 본 일본 경찰들이 대종사님을 이상한 사람이라 해서 잡아갔습니다. 원기 24년도에는 이리경찰서에 붙들려 가셨습니다. 그 때는 천왕 모독 사건이라고 해서 정산종사의 아버님께서 마름교당 교무셨습니다. 그 분께서 천왕에게 똑바로 하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래서 경찰들이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내야겠다고 생각했고 편지 백일장 대회를 열어 필체 대조를 해서 찾아냈습니다. 제자를 교육시킬 거면 똑바로 교육하라 해서 잡혀가셨고 한 번 잡혀가실 때마다 며칠씩 감옥에서 지내고 오셨습니다.
(사진)
맨 왼쪽이 대종사님이시고 가운데가 중앙에서 내려온 경찰 간부이고 오른쪽이 이리 경찰서 서장입니다. 그리고 이 장소는 총부입니다. 그 다음에 보면 여기는 당시의 공회당입니다. 중앙선원 으로 쓰이다가 다시 상주선원으로 쓰였습니다. 여기 밑에 보면 다리와 턱이 있습니다. 저 곳 안에 들어가서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중앙선이라고 써진 문을 열면 아래로 웅덩이가 푹 파여 있습니다. 그 안에 숨어서 일본 경찰을 도청하기도 했습니다.
이 사람은 일본 경찰 중 한 명이었던 황가봉입니다. 영국이 인도를 점령한 뒤에 인도 사람을 앞세워서 인도를 감시하도록 했습니다. 우리 한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일본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에 경찰서장은 일본사람일지라도 막상 실제 경찰은 한국 사람이 하도록 시켰습니다. 이 사람도 한국 사람이지만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한 것입니다. 그 때 당시 일본 경찰들이 대종사님을 보고 저 사람은 인도의 간디 같은 사람이고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아서 빨리 없애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 사람(황가봉)이 감시를 하러 나와서 대종사님에게 별의 별 못된 짓을 많이 했습니다.
하루는 대종사님께 하도 무례하게 행동해서 4산 오창건 선생님께서 어떻게 우리 스승님께 그렇게 할 수 있냐며 혼을 내셨습니다. 그랬더니 대종사님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대종사님은 일본경찰 마저도 구제할 중생이자 부처님이라고 보신 것입니다. 4산님의 경우 단순히 일본 놈일 뿐이고 대종사님을 괴롭히는 사람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대종사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셨고 당시에 불공을 정말 많이 들이셨습니다. 그 당시 일본 경찰들이 어떤 행동까지 했냐하면 기생들을 데리고 와서 대종사님에게도 같이 술을 먹입니다. 그리고 작전을 써서 기생에게 대종사님을 홀리라고 시켰습니다. 그러면 대종사님이 다 그걸 들어주시는 척 하면서 일본경찰의 기분을 거슬리지 않게 조절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대종사님 심정이 어떠셨을 것 같습니까? 얼마나 위태로웠을까요? 저놈들은 이 회상을 없애 버리려고 하는 것들이고 그래서 나를 가지고 시험하고 조롱하고 약점을 찾으려고 난리인데 그 상황 속에서 굉장히 힘드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공을 통해서 오히려 이 사람(황가봉)이 황이천 선진으로 바뀝니다. 이 사람은 감동해서 입교를 합니다. 일본 하늘과 조선 하늘, 두 하늘을 모셨다 해서 대종사님이 이천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셨습니다. 나중에는 오히려 이 사람이 일본의 소식(정보) 같은 것을 대종사님께 거꾸로 알려줍니다. 일본인 경찰 서장도 오히려 나중에는 대종사님께 호의적으로 바뀝니다. 특히 도산 안창호 선생이 대종사님을 만나고 가신 뒤로 위에서 압력이 더욱 심해졌습니다. 혹시 동의권과 관련된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으신 것이죠.
대종사님은 안으로는 제자들을 훈련시키시고, 교당을 내고, 밖으로는 일본사람들을 상하셨어야 했습니다. 대종사님이 일본을 가시려고 했었습니다. 그래서 부산까지 가셨습니다. 그 때 대종사님이 눈에 안질이 와서 가지 못하셨습니다. 일본 사람들이 대종사님을 불러들여 처치하려고 했던 것을 대종사님이 귀신같이 아시고 부산까지 간 후에 안질이 와서 못 가신다고 말씀하셨던 겁니다. 이러한 일들을 겪으시고서 마침내 해방을 맞으셨습니다. 그 하나하나의 과정이 얼마나 노심초사의 과정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면서 그 안에서 밥이 없고, 굶어가며 겪은 배고픔은 이루 말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일은 일단 먹여주고 하자는 식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당시에는 일은 하면서 먹일 것이 있으면 먹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황이천 선진님)이 발심해서 전국으로 강연하러 다녔습니다. 내가 대종사님을 이렇게 괴롭혔지만 대종사님께서는 나에게 어떻게 불공을 들였고 그 결과 자신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전국으로 강연하러 다닙니다. 그래서 감동해서 당신 딸을 출가 시킵니다. 이 분이 황이천 선진의 딸이신 황명신 교무님 이십니다. 이게 바로 대종사님의 위력입니다. 저 같으면 일본경찰이 와서 괴롭혔다면 대종사님처럼 하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상대를 안 하던가 귀찮은 존재들로 치부했을 겁니다. 그러나 대종사님은 그 사람들을 불공해서 오히려 정보입수의 대상으로 삼고 교화해서 그 사람의 딸까지 출가시키도록 만든 불공의 위력을 내신 분입니다.
대종사님의 모습에 제자가 감복을 했습니다. 이게 바로 기적 아니냐는 겁니다. 대종사님이 대각을 하신 곳도 영광입니다. 거기서 태어나셔서 구도하시고 깨달아 그 지역에서 모두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 유교문화 속에서 대종사님보다 나이도 많은 사람들을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역대 성자 중 그런 성자는 없었습니다. 대부분 성자들은 자기가 태어난 곳에서 비난도 많이 받고 버림받았습니다. 전부 태어난 지역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다른 곳에 가서 신도들을 모읍니다. 서가모니부처님은 왕자라는 신분의 덕을 보았지만 그나마 다른데서 교화하셨습니다. 그러나 대종사님은 거기서 인정을 받고 저축조합과 방언공사까지 하셨습니다. 지금도 영광에 가면 집집마다 교무가 몇 명이 나왔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 갑니다.
(4단락)
이제 해방이 되었습니다. 해방 이후로 각 지역으로 퍼져 있던 사람들, 미국, 중국, 만주에서 체류했던 사람들이 전부 돌아왔습니다. 전쟁이나 식민지를 피해서 갔던 사람들이 맨손으로 돌아와 버린 겁니다. 당시에는 원불교 (교당)도 몇 군데 없었고 가난할 때였지만 이에 대해 총부에서 회의를 합니다. 각 교당과 총부가 힘을 모아서 전재동포 구호 사업을 하자는 계획을 펼칩니다. 그래서 전국 4군데에서 시작을 합니다. 서울에서도 서울역 앞에 경성지구를 설치했습니다. 경성지구는 지금의 서울 교당을 이야기합니다. 후원을 받고 각 교당과 총부에서 돈을 조금씩 받아서 2만7천명 분의 일용품과 240가마의 잡곡, 42만 명에게 급식 배급, 11만 명을 위한 숙박 시설마련, 3000명에게 입힐 의복 마련, 응급 처치는 400명, 입원치료 100명, 출산 조력은 12명 했습니다. 그 다음에 부산에서도 이와 같은 활동을 했습니다. (사진) 지금 현재의 부산교당 자리입니다. 맨 가운데 키 크고 밝은 옷을 입으신 분이 초량 교당 지부장(회장) 이셨던 임칠보화 어른이십니다. 그리고 우측이 초량교당 교무신 공타원 조정근님이십니다. 그리고 임칠보화 어른이 왼쪽에 계신 분이 나중에 대 호법이 되시는 송원철 어른이십니다. 그 다음에 교도도 계시고 우측에 보면 공타원님 옆에 박영건 선진님이 계십니다.
저 위에 보면 “동포를 살리기 위하여 우리는 거리로 간다”라고 쓰여 있는데 원불교 최초로, 국가에서도 최초로 전재동포를 위해 우리가 나간 것입니다. 부산에서 경남, 초량, 당리교당 이렇게 교도 분들이 모이셔서 여러 가지 전재동포들에 대한 지원을 하셨습니다.
이런 활동은 전주에서도 했습니다. 익산은 1년 뒤 10월 20일까지 했습니다. 해방 후 1년도 더 한 것입니다. 사망자 치상만 100명, 출산 조력이 20명, 급식 제공이 48만 5000명, 식량은 890가마를 썼습니다. 익산은 국가지원도 같이 조금 받았습니다. 전재동포 구호 사업을 한 덕에 국가로부터 여러 가지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 때 당시 송원철 선생님의 경우 경남도 공무원으로 지원받고 나중에 부산시 계장까지 되셨습니다. 그러면서 활동도 하셨습니다. 이분들이 이 활동을 하면서 동시에 문맹퇴치 운동도 하셨습니다. 한글 학회의 사람들을 총부로 불러서 강의를 시킨 다음에 그 강의 방법을 교무님들이 익히셔서 전국각지에서 문맹 퇴치 운동을 실행합니다. 지금도 전라북도 금평에 가면 금평 전체의 98퍼센트가 원불교 교도입니다. 전부 거기서 문맹퇴치 교육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원불교의 교세는 작았지만 원불교가 우리나라에 끼친 여러 가지 영향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문맹퇴치운동이고 전재동포 구호사업이고 또는 새마을 운동의 예법혁신도 원불교의 교리를 따서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새마을 운동 본부에 훈련 요원으로서 교무가 파견이 되었습니다. 지금 청소년 수련활동도 원불교가 완도에서 시작하면서 생겨난 것입니다. 그리고 대안학교도 원불교가 처음으로 시작해서 전국으로 퍼진 겁니다. 이 외에도 인성 관련 법안, 한일 협정 체결 할 때도 다 대산종사님과 국회의장님의 의논이 있었습니다. 원불교가 신앙만 하는 단체가 아닙니다. 국력과 교단의 힘은 비례해서 나가는 법입니다.
안타까운 일도 있었습니다. 저 활동들을 하면서 정산종사님의 동생이신 주산종사께서 발진 티푸스로 돌아가셨습니다. 이 분은 법위가 여래위십니다. 그리고 조금 있으니 한국전쟁이 터졌습니다. 이 세상의 지옥중의 지옥이 병원에 누워있는 것과 전쟁입니다. 전쟁이라는 것은 양심도 도덕도 다 필요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극악무도 면모들을 다 보여주는 것이 전쟁입니다. 그 때 우리 총부가 바로 호남 사령부가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당시 정산종사님은 제자들을 다 여기저기로 보내셨습니다. 일제 강점기에는 여자들을 정신대를 피해서 동대문 병원으로 보내고 남자들은 또 피해서 여기저기 보내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제자들을 다치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저 때 팔타원님의 아들, 구타원님의 아들이 죽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창필재단이 생깁니다. 김필묵이 팔타원님의 아들입니다.
여러분, 대종사님 제자분들 중에 일타원, 이타원, 삼타원님은 전국을 돌아다니시면서 여러분들이 일생동안 해도 하지 못할만큼의 많은 교화를 하고 가신 분들입니다. 그리고 사람과 돈을 대준 분들이 바로 육타원, 팔타원, 구타원이셨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내로라하는 부자이자 인재들이셨습니다. 이 사람들이 대종사님을 후원해주신 겁니다. 우리나라에 고종황제가 차를 갖고 계시고 또 차를 갖고 계셨던 한 분이 팔타원님이셨습니다. 그 차를 서울역에 대종사님 이 내리시면 딱 대기시켰습니다. 그리고 대종사님께서 타고 가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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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순간순간 어떻게 넘어갔는지 모릅니다. 종교가가 또 명맥이 끊어질 때가 있는 것이 어떤 사건이 터집니다. 재색 문제가 터지거나 교주가 죽고 나서 분파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대종사님 돌아가시고 나서 일본에서는 굉장히 좋아했습니다. 이제 원불교의 교법 연구는 끝났다고 생각한 것이죠. 그런데 조그맣고 예쁘장하신 정산종사님께서 맥을 이으신 겁니다. 그 와중에 6‧25도 겪으시고 얼마나 배고픈 환경이었는지 모릅니다. 나라도 배고팠지만 총부도 배고팠습니다. 당시에 쌀도 없고 밥도 없습니다. 그러니 총부에서 정산종사님 드리려고 밥을 딱 한 그릇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식당 종치면 밥은 없으니 오지 말라고 합니다. 정산종사님에게 대중도 밥을 먹는다고 속이기 위해 종을 쳤던 겁니다. 그러면 정산종사님께서는 또 눈치를 채시고 속이 안 좋다고 하시며 드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선진님들이 엿장사도 하시고 만석리에 농사도 지으시고 복숭아 장사도 하시는 등 온갖 장사를 다 하시고 그렇게 해서 총부가 유지가 되었습니다. 사회에서는 원불교가 돈이 많다고도 하고 삼성에서 밀어준다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합니다. 여러분들은 다 엿장수의 후손들입니다. 선진님들이 엿장사까지 하시면 어마어마한 고생을 하셨습니다. 그 중 이동광 선진님은 머리가 좋으셔서 스스로가 엿 사라는 구호를 못 외치시겠으니 아이들을 시켜서 엿가락을 주시고 엿사라는 말을 외치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당신은 엿을 모두 팔고 돌아오셨습니다.
조사를 해봤더니 대종사님께서는 서울에 55번 다녀가셨습니다. 26세 대각하시고 53세에 열반하셨습니다. 부산, 금강산, 개성, 경주도 다녀가시고 얼마나 바쁘셨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바쁘게 지내시면서 돌아가시기 전 막판에는 대종사님 방에 불이 안 꺼졌다고 합니다. 아침에 청소하러 가면 지우개 가루가 많이 나왔다고 합니다. 바로 저녁 내내 마지막 정전을 쓰시면서 쓰고 지우고를 반복하신 겁니다. 왠지 대각하신 대종사님은 한번에 볼펜을 들고 모든 것을 쓰시고 가셨을 것 같죠? 그렇지 않습니다. 진리가 하늘에 있다가 성자에게 가고 그 성자가 죽고 나면 경전으로 간다고 합니다. 그 역대 성자 중에 경전 편찬을 끝까지 마치고 가신 분은 대종사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걸 막판에 쓰고 가시는데 한 번은 돌아가시기 두 달 전에 서울에서 오셔서 불교 정전에 인쇄 붙이기 전에 마지막 감수 하시고 얼른 편집을 해서 익산에 보냈다고 하십니다. 대종사님은 그 정전을 받아들고 제자들이 좋아서 춤을 출줄 아셨는데 그저 멀뚱멀뚱하게 쳐다봤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는 너희들이 이 책을 보고 좋아서 춤을 출줄 알았다. 그런데 눈만 멀뚱멀뚱 뜨고 있느냐”고 하셨다고 합니다. 그 어떤 박해와 어려움을 겪어도 정전 안에 일원상 서원문만 있으면 다시 회상을 일으켜 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깨달은 사람이 한 명만 있어도 다시 회상을 일으켜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불교 정전을 내시고 마지막에 돌아가시게 됩니다. 53세에 1943년 해방 2년 전 6.1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6.1대제를 기리고 있습니다. 그렇게 돌아가시고 나니까 일본이 장례에 참여할 인원수도 제한합니다. 그리고 대종사님의 뒤를 이었던 정산 종사님은 교전을 완간 하시고 제자들을 탄탄하게 키워 나가셨습니다. 정산종사님도 대종사님보다 9살 더 많으신 나이로 돌아가십니다. 지금 원광대 자리에서 장례식을 치뤘습니다. 여러분 종법사가 돌아가시면 그 종교는 대개 찢어져 버립니다. 그러나 원불교는 끄떡없이 대산종사님으로 이어져서 제2의 부흥을 이룹니다. 그런데 이 분도 98년도에 85세로 돌아가셨습니다. 이 세어른은 영통, 법통, 도통을 다 하신 분들입니다. 이분들의 말씀은 천 년, 만 년 후에도 옳은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독서를 많이 하시는데, 물론 독서도 좋지만 그 책에 쓰인 말들이 천년 후, 만년 후에도 맞을 까요? 그러나 이 세 어른의 말씀은 만 년 후에도 틀린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게 도통 법통 영통 하신분의 특징입니다. (사진) 이것은 대산종사 열반 장례식입니다. 영모전 광장에서 하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의 세 어른이 끄떡없이 흔들림 없이 법통대의를 지켜나가셨습니다. 이 와중에도 물론 일이 있었습니다. 정산종사하실 때 전음광 선진님이 반발도 하셨고 대산종사님이 하실 때도 여러 가지가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정전이 있고 법이 있고 초창교단의 맑은 대의정신이 있어서 큰 흔들림 없이 이어 왔습니다. 좌산님도 두 번 하셨고 경산종사님도 6년 단위로 두 번 하셔서 이렇게 교단이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중간에 별 일이 있었습니다. 서울회관 사건이라고 하는데 교단자체가 흔들릴 때도 있었습니다. 교무님들의 머리핀까지, 밥 먹던 숟가락까지도 다 팔았습니다. 교단 망한다고 해서 금모으기 운동도 저희가 처음 했습니다. 정말 가슴 졸이는 상황들이 많았습니다. 대종사님 목 뒤에는 혹이 있었습니다. 대산종사님도 혹이 있었고 정산종사님은 암이셨습니다.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웬만한 것은 수행을 잘하면 건강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몸은 인간의 몸입니다. 지도자로 갈수록 신경 쓸 일이 굉장히 많아집니다. 일이 많아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말을 듣지도 않고 꼭 사고치는 구성원들이 있습니다. 이 글을 몇 번 집에 가서 읽어 보세요. 저는 이 글을 읽고 처음에 펑펑 울었습니다. 좌산님께서 표현도 그렇고 글도 정말 구구절절이 표현해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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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자리 수 교단사가 금년에 시작했습니다. 대종사님, 정산종사, 대산종사 모두 돌아가셨고 초기의 당대 제자도 몇 분 안 계십니다. 제가 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대종사님 당대의 제자 분들이 대종사님을 모시고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해 주셨습니다. 또 제가 대종사님 제자들을 직접 찾아뵈어서도 많이 들었습니다. 특히 저는 훈타원 양도신 선진님을 통해서 대종사님 당대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달라진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직접 들으니 더 달리 느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대종사는 비범한 사람으로 많이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제가 훈타원님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정말 인간적이시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대종사님께서 탁 지시하시고 아래 사람들이 그대로 따르고 그렇게 끝내지 않으셨습니다. 아이들에게 장난도 치시고 상의도 하시고 구슬리기도 하셨습니다.
구타원님 밑에 훈타원님이 계셨습니다. 당시에 교당도 몇 군데 없었을 때 남원도, 마령도 등 여기저기에 교당을 내려고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교당을 짓고 여기저기에 교무를 파견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그러면 총부에 있는 사람을 골라서 내보내야 하는데 어린 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구타원님이 보시기에 훈타원 양도신이 쓸만하다는 생각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구타원님이 훈타원님을 일을 잘 하고 써먹을 수 있는 수준까지 교육시켰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셨냐면 구타원님 계시고 거기서 일 하는 서기 같은 걸 시키셨습니다. 그래서 대종사님이 구타원님께 가셔서 우리의 회상이 커져서 여기저기서 교무들을 보내달라는 좋은 소식이 들어온다고 하십니다. 속으로는 양도신 선진님을 달라는 말이셨는데 겉으로는 그냥 표를 내지 않고 가셨다고 합니다. 그래놓고는 구타원님께서 안 주려고 하는데 마지못해 주도록 대종사님이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구타원님 같은 분들께 불공을 굉장히 잘 하셨습니다. 팔타원님 같은 분들이 서울에서 한번 내려오시면 대청소를 하고 총부가 다 뒤집어집니다. 그래서 어느 날 한 교무가 우리가 지금 당장 교도가 없는데 교무들이 이렇게 까지 해야 하냐는 항의를 했습니다. 그러니 그런 소리 하지 말라고 하시며 팔타원님은 내려오실 때 당신이 갖고 계신 집문서나 땅 문서 중에 제일 좋은 걸 가지고 내려오셨습니다. 대종사님은 팔타원, 구타원님으로부터 경제적인 지원을 많이 받으셨는데 특히 팔타원님께서 갖고 계신 재산을 나중에 계산 해보니 현재 은행을 하나 세우고도 남는다고 합니다. 대종사님께서 교무들에게 무언가를 해 주고 싶으신데 익산에서 농사를 지어서는 경제 사정이 넉넉지 않으니 서울에 올라가셔서 팔타원님께 이 말씀 저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면 팔타원님께서 눈치를 채시고 필요한 걸 그냥 말씀하시라고 하며 돈을 세지도 않고 그냥 주셨다고 합니다. 그렇게 후원하신 분입니다. 그렇게 해서 경종을 구하게 되고 낙자가 나오고 하나씩 하나씩 교당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교무님들이 교당하나 세우면 10년은 늙습니다.
그래서 저는 작전을 바꾸어 교당하나 세우고 10년 늙을 바에 출가를 많이 시키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제는 원음방송이 생기게 되고 군에서도 군인들이 법회를 보게 되고 군종장교 에서도 교무가 몇 명 나왔습니다. 그리고 제가 인도 델리에 갔는데 교당이 있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20~30년 공을 들여 정부에 요청을 해도 교회를 안 세워 줍니다. 그러나 원불교는 세웠습니다. 원하면 되는 것이 원불교라고 하잖아요. 미국의 경우도 건축을 하나 해도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그러나 원불교는 미국에도 대학을 세웠습니다. 이것이 (사진) 필라델피아 선학 대학입니다. 여기서 이번에 흑인 한 사람이 출가해서 교무님이 되셨습니다. 또 한국인 2세 교무님도 나오셨습니다. 그래서 저희도 4학년을 마치고 나면 토익 시험같은 시험을 봐서 점수가 되는 사람은 이곳에 보내줍니다.
(사진) 그리고 여기는 원 다르마 센터입니다. 뉴욕 주의 맨하탄에서 두 시간 정도 거리입니다. 이 곳은 돌아가신 신타원님의 가족들께서 100억을 들여서 지어 주셨습니다. 우리 동기중에 서울대를 나와서 출가한 유도성교무님이라고 대구 출신 교무님이 계십니다. 그래서 제안을 하셨습니다. 어른들은 미국총부라고 하면 건물만 생각하시는데 일종의 훈련 센타를 짓자는 아이디어를 내셨습니다. 처음에는 큰 건물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삼성에서 그래서 작은 건물로 해서 여기저기에 지었습니다. 지금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훈련하고 있는데 상당한 인기가 있습니다.
이게 지금 금년 현황입니다. 원불교가 이제 100년이 시작되었지만 교구가 해외에는 5개 교구가 있습니다. 맨 왼쪽부터 보면 유럽교구가 있고 여기에는 독일, 프랑스, 러시아, 카자흐스탄. 그리고 아프리카에 스와질랜드와 케냐에 교당이 있습니다. 그리고 유럽에 아시아 지구가 있습니다. 여기에는 네팔, 캄보디아 그리고 인도가 들어가 있습니다. 그리고 중국교구가 있습니다. 여기에는 현재 베이징, 상하이, 연변, 칭다오, 홍콩, 대련, 청도, 항주 등 이런 지역에 교무님들이 나가 계십니다. 태국에도 있고 베트남에도 있고 몽고, 라오스에도 있고 또 일본교구가 있습니다. 그리고 호주, 뉴질랜드에도 있습니다.
미국교구는 동부 서부로 나누어 많은 교당들이 있습니다. 캐나다에는 벤쿠버와 토론토에 있습니다. 23개 국가에 68개 교당 그리고 27개 기관이 있습니다. 잘 되는 곳이 몇 군데 있는데 미국에는 선학대학이 있는 필라델피아가 잘 되고 있고 동부에는 로스캐롤라이나가 현지인 대상으로 잘 되고 있고 중국으로 가면 청도와 베이징도 잘 되고 상하이도 되고 이번에도 상하이에서도 한 사람이 와서 저를 만나고 출가를 결정하고 간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모스크바가 현재 아주 잘 되고 있습니다. 그 곳은 교도가 몇 백 명이고 교무님도 훌륭하셔서 교화가 엄청 잘 되고 있습니다. 인도는 돈만 있으면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왜 이 말씀을 드리냐 하면, 옛날의 성자들은 한 지역을 맡으신 분들이십니다. 그 분들은 선천시대의 성자들이십니다. 그러나 대종사님은 후천시대의 성자이십니다. 후천시대는 하나가 되는 세상입니다. 원불교 법은 한국에만 맞는 법이 아닙니다. 세계 전체에 누구나 가져다 써도 맞는 법입니다. 주세성자, 주세불로 오신 분이 대종사님이십니다. 과거에는 4~50년 결실, 4~500년 결복이라는 표현이 법문에 있습니다. 한국에서 키운 교무만도 137명 나가 있습니다. 원기 100년부터는 결복시대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세상이 하나 된 세상으로서 민족도 종교도 모든 경제 문제까지도 모든 것이 하나입니다. 역사도 예전처럼 유럽역사, 중국역사, 한국역사가 구분되어 있었으나 이제는 그런 역사는 필요 없습니다. 세계 역사가 다 하나입니다. 그런 시대에 여러분은 원불교를 만나신 것입니다. 그러니 이 좋은 회상을 만났을 때 각자 공부를 잘 해서 멋있게 살 다 죽어야 합니다. 내한 몸 죽고 나면 12시간도 되지 않아서 관속에 집어넣습니다. 그 다음에 12시간 정도 지나면 바로 화구에 집어 넣던가 땅속에 집어넣는다. 그것이 몸입니다. 물론 애지중지 해야겠지만 세계 사업을 하기 위해 애지중지해야 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불에 태워지거나 땅 속에 들어갈 몸입니다. 언젠가 그날이 오고 그 날은 길어봤자 몇 십년 안 남았습니다. 그러나 한 생 태어나 사람 몸 받아서 이 법을 만났을 때 멋있게 살다 멋있게 가세요. 그러면 또 멋진 인연을 만나 다시 한 번 멋있게 살 다 가실 수 있을 겁니다.
첫댓글 업로드가 많이 늦어졌습니다. 죄송합니다 ㅠ.ㅠ
와우 명절에도 수고해주셨네요 감사합니다^^
고생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