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지만 긍정적인 평가들을 내린다면;
이렇게 놓고 보며 부정적인 측면이 긍정적인 측면 못지 않게 많아 보이지만, 그 대신 긍정적인 측면들 하나하나가 모두 핵폭탄급 중요성을 갖고 있어서 여러가지로 기념비적이라고 느껴지는 부분이 많습니다. 물론, 저는 영화 전문가가 아니니까 자세한 의의까지는 모르겠지만요.
아,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요. 아직도 설명할 말을 못찾는 것을 보면 확실히 범상한 영화는 아닙니다. 그만큼 뭔가 하고 싶은 얘기가 잔뜩 많은 영화라고 하겠죠. 글 제목에는 '스포일러 대량'이라고 적어놓았지만 사실, 스포일러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영화의 소재는 기원전 480년의 테르모퓔라이 전투입니다. 300명의 스파르타 전사들과 700명의 테스피아인들이 2만명의 페르시아군에 맞서 최후의 방어를 펼친 전멸전이죠(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 군의 규모를 2만명 정도, 크테시아스는 8만명으로 잡고 있지만 대체로 오늘날 역사학자들은 헤로도토스의 견해가 더 적확하다고 여깁니다)
뭐, 영화에서는 100만명으로 뻥튀기 해놓고 있지만 그냥 그러려니 합시다. 그런거 트집 잡으면 이야기꾼들은 뭘 먹고 삽니까. 또, 온갖 그리스인들이 겁을 집어먹고 철수했을 때 보이오티아의 코딱지만한 도시인 주제에 유일하게 끝까지 스파르타인들과 남아 함께 싸우고 죽어간 700 명 테스피아인들의 이야기가 없는 것도 (불쌍하지만..) 넘어갑시다. 영화에서는 나오지도 않지만 그래도 역사가 그들을 기억해줄겁니다 (묵념 =_=...).
주욱 이야기를 훑어보면서 전반적으로 받은 인상은, 지대하게 액션성이 강한 열혈물이면서도 나름대로 전반적인 줄거리의 흐름이 역사를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 절도를 지키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특히 픽션이라면 온갖 말도 안되는 상황을 구겨넣는 최근 한국 드라마들이라면 좀 (많이) 본받아야 할 점입니다. "300"은 액션성 역사 판타지인 주제에 그 절도로 인해 나름대로 훌륭한 품격과 무게를 지니고 있어서 굉장히 중후한 느낌이 듭니다. 왠지 '주몽'을 보면서 중국 무협물이나 일본 소년만화의 전개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과 비교하면, 똑같은 역사 판타지 쟝르이면서도 그 장중한 분위기와 역사적 전개에 부합하는 스토리라인은 참으로 훌륭하다고 할 수 있겠죠. 일각에서는 트레일러를 보고 "슈퍼 스파르탄들이 붕붕 날아다니는 고대 그리스판 드래곤볼 아니냐"라는 우려도 있었으나, 절대로 그렇게 가볍지는 않습니다.
스토리 전개의 필요상 가공되거나 각색된 부분이 있고, 일부 등장인물의 설정이나 관계 등이 역사와는 다르기는 합니다. 또, 인간이라기 보다는 무슨 데몬집단 처럼 그려지는 페르시아군의 모습을 보고 충분히 불쾌감을 느끼거나 고증성에 있어서 거부감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이란에서는 게거품을 물더군요.. 뭐.. 무리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 역사적 전개를 충실하게 따라가면서 심대한 "역사관 왜곡"의 문제 없이 역사의 한계 내에서 자유로운 상상을 펼쳤다는 점에 있어서는 분명 대단한 작품입니다. 인종적 편견이나 왜곡에 대한 것은 분명 일리가 있는 문제제기입니다만, 원래가 느와르적 분위기 물씬 풍기는 청년 이상 독자층을 상대로 한 만화라는 점에 있어서 이해 못할 바는 아닙니다. 톨킨의 "반지의 제왕"에서 '동부인(하라드림)'들이 묘사된 모습에 대해서도 동일한 비판이 존재하고 있으니까 말이죠.
그런 점에 있어서는 분명 볼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그 외에 무슨 말을 더 해야 할까요.. 위에 열거한 장점들에 대해서 얘기를 해볼까요..?
혁명적인 영상미
영화 잡지나 사이트 등을 통해 "300"의 정보를 접한 분이라면 "300"은 촬영 중 야외로케가 거의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되신 분이 많을겁니다. 즉, 그리스의 경관을 묘사한 대부분의 장면들은 블루스크린을 바탕으로 제작한 것인데, 이것은 정말로 놀라운 일입니다. 여러 배경을 블루스크린 처리한 영화들은 이전에도 많았지만 이 영화 처럼 거의 모든 장면이 블루스크린을 사용한 경우는 유례가 없습니다. 여기서 감탄할만한 것은 블루스크린을 영상화하는 디지털 기술력이 이토록 높은 수준의 발전을 이루었다는 점, 그리고 디지털화한 배경의 촬영이 영화 분위기를 압도적으로 좌우할 수 있다는 새로운 개념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일부 장면들을 특수촬영하거나 디지털 편집한 영화는 이전에도 있었지만, "300"은 배경은 물론이고 영화 전체의 톤이 아주 매력적입니다. 우울하고 어두운 빛깔의 파스텔 톤인데, 이게 뭔가 아련하고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더해주는 것은 물론이고 몰입감을 높여주는 효과도 있습니다. 다큐적 고증성을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ROME" 시리즈 처럼 자연광 아래에서 촬영한 그런 화면을 기대했을지도 모르지만, 굳이 그러한 잣대를 들이대지 않고 영화 자체의 분위기에 몰입하다보면 그 시각적 영상미가 정말로 감탄할 만큼 효과적이라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또 다른 주목할만한 영상기법은 액션 장면에 있어서의 "스탑&고" 프레임의 활용인데, 주요 액션장면을 슬로우 모션으로 처리하거나 빠르게 재생하여 긴박감을 더하는 방식은 여러 영화에서 단골로 사용된 기법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의 엄청난 긴박감을 그대로 생생하게 전해주는 기법 하나를 볼 수 있었던 부분이 바로 페르시아인들의 첫번째 공격을(잡병들의 웨이브 --;) 막아내고 반격으로 돌아서서 먼치킨 모드(-_-;;)에 돌입한 레오다니스의 검투장면입니다. 주목해서 보시기 바랍니다.
다른 영화에서도 이런 액션 시퀀스를 사용했는지 여부는 잘 모르지만,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적어도 "300"에서 처럼 돋보이지는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대열이 무너진 혼전 상태에서 차례차례 덤벼오는 페르시아 잡병들을 연속으로 하나하나 검으로 처리하는 장면인데, 한번의 공격에서 다음 공격으로 넘어가며 하나하나 적을 쓰러뜨리는 장면에서 연속으로 슬로모션과 퀵모션이 자연스러운 리듬으로 번갈아 나옵니다. 관객이 그 아름다운 검투를 "후웃~"하는 긴박감으로 바라보는 순간 갑자기 빠른 페이스로 다음 적을 상대하고, 그 빠른 페이스에 또다시 호흡을 뺏기는 순간 다시 결정타를 날리는 모습이 슬로우 모션으로 전개.. 그런 퀵과 슬로우 페이스를 번갈아 사용하는 이 장면은 정말 "300"의 액션장면 중 가장 백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억할만한 스토리가 별로 없다고 해도 그 영상을 전개하는 방법 만으로도 관객의 마음을 빼앗아버릴 수 있는 수준이라면 정말 대단한겁니다.
가슴 뜨거운 "열혈물"을 좋아하는 사람에겐 감동 그 자체
이 영화의 코드는 말 그대로 "열혈", "마쵸", 그리고 "불굴" 세 가지 정도일테죠. 폭력의 미학에 탐닉할 수 있는 여성이라면 모르지만, 어지간해서는 이런 종류의 영화를 여성들이 즐기기는 힘들겠죠. (뭐, 제가 여성들에 대해 잘 모르는 소리를 하는 것일 수도..). 이 영화는 유감없이 '마쵸'의 코드를 발산합니다. 일단 당시 상황에 걸맞게 거의 전신나체로 활보하는 스파르타인들의 몸 자체가 남성미를 물씬 풍기죠. 그 몸매의 모습이 프로레슬러와 같은 현대 보디빌딩으로 만들어진 우락부락 근육이라기 보다는, 고대인들의 조각에서 볼 수 있는 소위 '운동근육'이 붙은 늘씬하면서도 달 다져진 몸매라는 점에서 감탄을 했습니다. 분명 이 영화 찍기 위해서 스파르타인들의 역할을 맡은 배우들은 엄청나게 몸매관리를 해야 했을겁니다. 현대적인 '덩어리형 근육'이 붙은 보디빌더 엑스트라들을 쓴 것은 분명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히려 육상 등 운동경력이 있는 사람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게다가, 원작자가 프랭크 밀러인 만큼 느와르적 비장미 만큼은 타의추종을 불허합니다. 이 또한 남성적 영화의 매력이기도 하겠죠.
세련된 스타일리쉬 폭력미학의 결정판
스타일리화 된 폭력의 미화.. 라는 개념은 이미 최근 영화들이 자주 사용해온 코드이긴 합니다. 예컨데, 그러한 이유로 여러가지 찬사 못지 않게 비판을 받은 영화가 바로 "매트릭스" 시리즈이죠. 중국의 무협액션 거장 원화평 무술감독의 지휘 아래 중국무협식 액션을 헐리웃 영상미와 결합한 그 독특한 격투/총격전 씬은 "매트릭스"의 가장 뛰어난 점이기도 합니다. 슬로우 모션으로 진행되며 우아하게 벽을 타고 달리면서 싸우는 그 모습으로 인해, 살벌한 실내 총격전이 그렇게 아름답게 묘사될 수 있을 줄은 아무도 몰랐겠죠.
그런데, "300"은 피와 살점과 잘린 사지가 난무하는 단병접전을 그러한 식으로 그려냅니다. 게다가, 지극히 중후한 방식으로 그려내기 때문에 폭력적인 영화에 거부감을 갖고 있는 사람 조차 넋을 놓고 그 장면을 바라보며 "멋지다"라고 느낄만한 정도입니다. 특히 앞서 설명한 "첫번째 웨이브를 상대하는 레오니다스"의 장면은.. 뭐랄까... "우와..."입니다, "우와~".
진홍색 망또의 스파르타인들의 후덜덜 포오쓰
이건 고대사와 역사 시뮬레이션을 좋아하는 우리 까페 회원분들이라면 완전 열광할 부분입니다. 물론 고증성에는 문제가 있긴 합니다. 스파르타인들의 주홍색 망또는 말하자면 일종의 "예복" - 전투할 때에는 입지 않습니다. 어엿한 성인이자 당당한 전사로써의 인정받은 젊은이가 전사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면서 비로서 '스파르타인'으로써 붉은 망또를 입을 자격을 얻게 되죠. 싸울 때 입는 전투복은 아닙니다.
하지만.. 역시 술이 달린 그 특유의 그리스 투구.. 그리고 진홍색 망또, 람다 문양의 호플론... 그런 녀석들이 한 두놈이 아니라 여럿이 대열을 짜고 있을 때의 위압감.. 대단합니다. 경무장이 전부인 투르크인들이 로도스의 성벽 위에 완전무장으로 도열하고 서있는 서구의 엘리트 기사들의 번쩍번쩍 빛나는 모습을 볼 때의 이질적인 위압감.. 아마 고대의 페르시아인들도 전투에 나서기 전에 스파르타인들이 투구를 쓰고 진홍 망또를 입고 도열해 있는 모습을 봤다면 그런 느낌을 받았겠죠. 정말 포스 한번 죽여주게 후덜덜합니다. 게다가, 그 핏빛의 진홍 망또를 입은 전사들이 싸우는 모습은 정말이지...
주역을 맡은 제라드 버틀러의 혼이 담긴 연기
레오니다스 역을 맡은 사람은 제라드 버틀러입니다. 이 사람이 누구냐구요?
사실 기존 평가에 따르면 1급의 배우는 아닙니다. "타임라인"이라든지 "툼레이더2" 등으로 블록버스터 데뷔를 하기는 했지만 하나같이 평가가 좋은 영화는 아니었죠. 주로 B급 역사물이나 TV용 영화 등에 많이 등장한 배우로써 아주 헤비한 스코틀랜드 악센트를 사용합니다. 아마 우리 까페 회원들은 언젠가 케이블 TV에서 방송해준 TV용 시리즈 "아틸라 더 훈"에서 봤을 바로 그 사람입니다!
뭐,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제라드 버틀러로써는 그간의 설움이나 고민을 모조리 날려버릴 성공한 초특급 대형 블럭버스터에 출연한 것이 되겠죠. 주가 한번 왕창 오를 것입니다. 원래도 근육질 몸매였기는 하지만 "300"에서는 정말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을 연상할만큼 깔끔하게 다듬어진 '그리스적' 몸매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게다가, 분장 또한 기가막히게 그리스적인 모습에 그 열혈한 연기 덕분에, 계속 귀에 익은 그 스코틀랜드식 억양을 들으면서도 과연 그 사람이 맞는지.. 긴가민가 했을 정도입니다. 나중에 따로 인터넷에서 캐스트를 확인해보니 역시 제라드 버틀러...
게다가, "반지의 제왕" 시리즈 및 "반 헬싱"에도 등장한 데이비드 웬햄도 꽤 좋은 연기를 보여줍니다. 근데 개인적으로는 그 사람의 목소리가 나레이터 역에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기는 합니다만...
만화를 영화화한 작품 중 몇 안되는 성공적인 작품
만화를 영화로 만들기는 정말로 힘듭니다. 무엇보다도 만화 특유의 영상미를 영화로 옮기기가 힘들뿐더러, 아메리칸 코믹스 처럼 수십년을 이어온 만화들이라면 2시간 이내 분량으로 과연 그 장대한 만화의 연속적 세계관 내에서 어느 부분을 묘사해야 할지가 시나리오 작가로써는 엄청난 쌩고생이니까요.
그런 점에서 "퍼니셔"라든지 "고스트라이더" 등의 최근 몇개 만화작품은 명백한 대실패입니다. "헐크"의 경우에는 사람에 따라 평가가 갈리는 편이고, "스파이더맨" 시리즈는 샘 레이미라는 감독의 역량 자체가 워낙 탁월한 덕에 아주 성공적으로 스파이더맨의 매력을 영화로 옮긴 케이스입니다. "300"의 경우는 딱히 시나리오작가나 감독의 역량이라기 보다는 프랭크 밀러라는 만화가 자신이 범상치 않은 영화적 기법을 사용하는 독특한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게다가 "300" 자체가 연속성이 있는 세계관 내에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아메리칸 코믹스판 "단편집"이라고 할 수 있는 그래픽 노벨이었기에 더욱 유리했겠죠.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유야 어쨌든 간에 이로써 만화를 영화한 또 하나의 대성공 작품이 나왔다는 것 - 앞으로 혹시 일본 만화도 잘만 한다면 실사로 영화화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물론, 일본에서 만든 실사 영화로는 안됩니다. --;;; 한국 드라마도 웃긴다고 생각하지만, 최근 한국 영화는 괄목할만한 발전을 했죠. 그런데, 솔직히 일본 드라마/영화의 대본 수준은 절대로 세계무대에서는 통하기 힘들 만큼 .. 뭐랄까.. '유치'한 면이 있습니다. 이것은 취향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정말로 미치겠어요.. 만화를 실사화한 드라마를 보다보면 정말 짜증이 확...)
마지막으로.. 고증성과 전투씬에 대한 얘기
역시 이 부분을 원하시겠죠. 뭐, 고증성 자체는 뛰어난 영화는 아닙니다. 역사 판타지이니까요. 특히, 적군으로 나오는 페르시아군의 모습은 정말이지.. --;;;; 그래도 페르시아군은 고대 중동에서는 명실공히 최강의 국가의 최강의 군대였고, 그리스전쟁에서 패배했기 때문에 무슨 얼간이 집단으로 그려지는 경향이 있지만 그래도 그리스전쟁 이전까지는 불패의 군단이었잖습니까. 게다가 명망높은 엘리트들인 '이모털' 전사들을 보고...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베르세르크의 전마병이냐? --;;;"
하지만 역시 관심이 가는 부분은 스파르타와 고대 그리스인들이겠죠.
스파르타인들이 투구와 방패 외에 별 무장을 안하고 있는 것을 보고 의아해하시는 분들도 있는데, 의외로 BCE 5세기의 스파르타인들이라면 그쪽 무장이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습니다. 딱히 청동갑주를 만든느 방식이 알려지지 않았거나, 소수의 정예병들이 완전무장 킬 수 없을 만큼 가난하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만, 그래도 그 무렵의 전사들의 모습을 묘사한 유물들에는 거의 하나같이 완전 나신입니다. 기초적인 손목, 발목 갑옷 정도를 착용하고 투구와 방패, 창을 갖췄지만 의외로 흉갑이 묘사되어 있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대체로 청동갑주를 일반적으로 착용하게 된 것은 페르시아 전쟁 이후, 헬레니즘의 전파 이후로 잡는 듯 합니다. 뭐 이 부분에 대해서는 자쿠워리어님 같은 분들이 더 잘 아시겠지만요.
그 외에 전투씬 또한 미화되었겠죠. 싸우는 모습이 정말 멋있기는 합니다만.. 아무래도 스파르타 전사들이 좀 너무 먼치킨화된 감이 있긴 하죠 (하하).. 하지만, 앞서 몇차례 얘기한 부분, 페르시아군의 잡병들의 최초돌격장면.. 그것을 막아내고 반격에 나서는 스파르타인들의 격투 모습은 정말 대단합니다. 판타지 같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그 것 말고, 유일하게 "고증성"에 대해 진지하게 깊이 생각해본 부분이 단 한 군데 있습니다.
역시 페르시아 잡병들의 최초돌격 장면입니다. 그리고 버텨서는 스파르타군의 방패의 벽에 페르시아 일반병들이 충돌하는 그 모습에서 바로 왜 사리사를 사용하는 "마케도니아식"이 아닌 "전통적"인 팔랑크스 전법이 그런 특이한 형태를 취했는가에 대한 결정적인 힌트가 나옵니다. 그 장면 하나 만큼은 정말 리얼리티 그 자체이니까요.
'전통적' 팔랑크스가 묘사된 모습을 보면, 작은 소형 방패에 양손으로 사리사를 들고 창의 숲으로 적의 전진을 막아서는 후일의 '마케도니아식'과는 달리, 비교적 짧은 단창을 머리 위로 든 형태가 나옵니다. 왜 그럴까요? 그 해답이 바로 그 장면에서 제시됩니다.
보병 집단이 밀집대열을 짜고 방패의 벽을 만들거나 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고대의 어느 군대에서도 다 사용하던 방법입니다만, 팔랑크스는 그러한 밀집진형 중에서 당시 상황으로서는 가히 혁명적이었습니다. 병과가 제한된 싸움에서는 전술적 기동성이 크게 제한되었기 때문에 어지간한 대국이 아니면 기병 보병 궁병 비율 맞춰서 총동원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기는 쉽지 않았죠. 이전에 "이런 역사 저런 전쟁" 만화에서 묘사된 것 처럼 당시 그리스인들로써는 유일하게 안정적으로 가용할 수 있던 병과가 보병들이었고, 그 보병전술에 올인을 한 것이 팔랑크스입니다.
첫 번째 페르시아인들의 웨이브를 받아내는 장면을 보면 아시겠지만, 접근한 양쪽 군대의 첫 열이 바로 칼을 뽑아들고 단병접전에 들어가지는 않습니다. 양쪽 병사들이 "우워어어어어어~" 소리지르면서 칼을 뽑아들고 수많은 개인들이 각자 1:1의 싸움을 벌이는 그런 모습은 영화에서 극적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 사용할 뿐입니다. 실제로 자기가 전쟁에 나섰다고 상상을 해보세요. 적이 방패를 앞세우고 창대를 앞으로 겨누고 서있는데 거기서 칼 휘두르면서 "우워어~"하고 싶은 사람 누구 있나요?
당연히, 최초 돌격의 충돌은 방패끼리 이루어집니다. 돌격하자마자 찔려 죽기 싫으니까요. 그리고, 서로가 밀어 붙입니다. 말 그대로 스크럼짜기입니다. 몸을 커다란 호플론으로 최대한 가리고 방패 뒤에 숨어서 처음 부딛히는 방패끼리의 충격을 버텨낸 후에, 몸을 가린 상태에서 방패 위 공간으로 상대를 쿡쿡 찌르면서 서로 으쌰으쌰 밀기 싸움을 하는거죠. 그리고 그런 전투에서 압도적인 강함을 보인 것이 바로 전통적인 그리스식 팔랑크스입니다.
대형 호플론으로 자기 왼쪽 옆 사람의 몸 일부에 걸쳐서 방패의 벽을 쌓으면서 "방패를 서로 맞물려서" 용의 비늘처럼 맨 앞열 우측에서 좌측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커다란 이어지는 방패를 만들어낸 후에, 그 위로 창을 내지르는 거죠. 최초의 스크럼 밀어붙이기 싸움에서는 적을 눈으로 보고 창을 찔러댈 틈도 없습니다. 방패로 버텨서고 밀고 밀고 하고, 뒷 열의 사람들은 역시 앞 사람의 등을 떠받치고 대열이 밀리지 않도록 하는거죠. 그리고, 그 힘싸움에서 지면 밀린 쪽의 전열이 넘어져버리면서 틈이 나고, 그 때 부터 그 틈새부터 살육이 시작되는겁니다.
그리고, 스파르타인들이 강했던 것은 바로 그 싸움을 압도적으로 잘했다는거죠. 정말 그것이 얼마나 훈련의 결과인지를 느끼고 싶다면 데모에 나가보시면 됩니다. 저도 대학 시절에 데모 꽤나 많이 했지만, 항상 전경들의 3~4배는 되는 압도적인 인원 수가 모였는데도 불구하고 전경들 방패벽을 밀어붙여 뚫은 경우는 기억에 한번도 없습니다. 전경들이 받는 방패벽쌓이 훈련, 전열은 방패를 빽빽히 세우고, 뒷열은 앞열 사람의 등을 떠받치면서 밀리지 않도록 하는 그 훈련은 정말로 톳씨하나 틀리지 않고 고대 팔랑크스의 재형 그 자체인 것이죠. 아마 고대전쟁 리인액터를 모집한다면 전통적 그리스 팔랑크스 하나 만큼 죽여주게 제대로 해낼 사람들이 한국 전경들일 것입니다.
로마인들의 레기온들은 그것과 얼마나 달랐을까요? 로마인들의 레기온은 전술적 기동성이 훨씬 높다 뿐이지 기본적으로 익혀두는 '팔랑크스 스타일' 전투 방식은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로마인들이라고 해서 늘, 어느 때나 전후좌우 간격을 두는 검병들은 아니었다는거죠. 상황에 따라, 상대에 따라 다른 전술을 사용할 수 있었고, 필요하다면 전통적 팔랑크스와 똑같은 형태의 스크럼을 짤 수도 있었습니다. 특히, 공격에 나서는게 아니라 "모루"의 역할을 해야 하는 병사들이라면 당연히 유사한 방식으로 싸웠을테니까요.
..
뭐, 잡설이 길어졌지만, 아무튼 "300", 기대하고 본 역사물/유사역사물 중에서는 그래도 오래만에 볼만한 영화였던 것 같습니다. 뭐, 정신적으로 남는 것은 사실 많지는 않습니다. 그리스인의 자유이니 이성이니 단결이니 하는 것은 솔직히 좀 너무 상투적이죠. 언젠가 한 얘기가 있지만 다리우스와 크세르크세스를 상대로 한 페르시아 전쟁에서는 그토록 열혈하게 싸워 지켜낸 사람들이, 페르시아 전쟁이 끝난 후 시작된 페르시아 외교전 앞에서는 여지없이 무너져 내려 분열하고 그리스인들끼리 싸워대는 골때리는 모습을 본다면 필요이상으로 그런 '서구적 이념'의 환상에 젖을 필요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시종일관 영화를 흐르는 비장미 만큼은 압권입니다. 그리고, 전쟁에 나서야 했을 때 그렇게 우유부단하던 스파르타인들 조차도 결국에는 목숨을 내놓고 끝까지 싸웠다는 것에서 모든 그리스인들이 고무되어 결국에는 치후의 결전인 플라타이아에서 승리를 이루어낸 것만은 사실이니까요. 그런 점에서 "뜨거운 문", 혹은 "불의 문"(프레스필드의 번역을 따르자면..)에서의 스파르타인들의 최후 항전은 그만큼 비장한 감동미가 흐르는 것임은 분명할 것입니다.
그럼 이상, 쓸데없이 길고 잡담 많은 감상평을 마치겠습니다.
첫댓글 오늘, 극장에 가서 보고 왔습니다. 고증이나 기타 사소한 문제를 제껴두자면, 저도 KWEASSA 님과 비슷한 감상을 느꼈습니다.
저도 영화봣어요...정말 잼잇음..-0- 진짜...스파르타..다르게보임이젠;;ㅎ
한번 봐야겠군요.. 글 잘읽었습니다 ^^
머리속에 남는 건 없지만(그래서도 안되겠지만..) 재밌었습니다. 레오니다스의 중후한 근육이 정말 헤라클레스 조각상 같더군요(..남은 게 이거..)
그래도 한동안은 동양에 대한 악의적인 시각이란 꼬릿말은 끊이질 않겠군요.
상당히 좋은 글이었습니다.^^. 저도 오늘 봤는데 재밌게 보고왔습니다.
호오, 의외로 오티스모스도 나오나보군요ㅇㅅㅇ;;
음, 좀 퍼갈께요 ㅇㅅㅇ
예전에 여친이 엄정화씨가 주연한 '오로라공주' 영화 표를 사서 가자길래 같이 가서 봤는데, 저를 포함하여 '300'과는 정반대의 현상이 벌어지더군요. 그때 영화 끝나고 나서, 저의 표정이 압권이었죠... 그날 영화 얘기 한마디도 안했습니다. ㅎㅎ
마쵸/열혈/불굴이라 -_-;; 한번 감상해 볼까(..)
잇힝~
아아.. 적어도 아직 만화를 실사화한 일본식 영화/게임은 망막에 극심한 자극을 준다는...-.-;; 특히 게임은..
그건 헐리우드를 비롯한 미국도 마찬가지겠죠... 데드 오어 얼라이브, 보지는 못했습니다만 들려오는 얘기로는 평점 4점 만점중 1점도 칭찬해 준 거란 걸 보면...-_-ㅋ
스토리가 유치하다거나 하는게 아니고요. 배우들이 심히 압박입니다.
전체적으로 기대되는데... 그 페르시아 악마군만은!!!!!!!!! 사실 그 부분이 굉장히 안타깝습니다....
단순한 열혈, 확실한 권선징악...고민하지 않고 화끈하게 즐기기에 최고의 영화입니다. 갠적으론 감격했음 ㅜㅜ
다른건 상관없는데 페르시아 군대를 무슨 악마로 묘사하는게 상당히 짜증나더군요... <한숨>
이란에서는 영화안만드나
만약 서양군대를 사악한 사람들로 묘사하고 대항하는 중동군대를 고결한 전사로 묘사한 영화가 나온다면.. 서양인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부시 : 전쟁이다!!!!!! 저들은 새로운 악의 축이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돌격!!!!!
중공 하늘을 수놓는 토마호크들...
저도봤는데 이모탈전투중에 가면이벋겨지고 베르세크가 갑자기생각나더군요 ..그래도전투장면은 브레이브하트,블랙호크다운, 반지의제왕, 들과함께 전투및 사실감 긴장감을 나타내주는 나의 명예의전당에 추천함니다.
[베르세르크의 전마병]에서 뒤집어 졌습니다....*^^*
이란군의 무장은 나무를 엮어만든 방패였는데 호플론은 무슨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