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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敎父) 안토니 St. Antonius,(251-356 A.D) 의 생애와 업적
1. 수도생활 입문(入門)
안토니는 이집트인으로서 기독교 가정에서 성장했다. 열여덟 혹은 스무 살 무렵에 부모가 죽고, 여섯 달이 채 안되어 그는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줌으로 하늘에서 보물을 얻게 될 것”(마 19:21)이며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을 받는다. 그는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여동생을 수녀원에 맡기게 되었다. 그때부터 안토니는 수도하는 사람을 찾아다니며 수도생활에 전념했다. 그는 노동을 통해(살후 3:10) 얻은 수입으로 빵을 샀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썼다. 그는 끊임없이 기도했으며 모든 말씀을 붙잡았으며, 그의 기억 속에는 성서의 내용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는 열성적인 수도자들에게 진심으로 순종했으며, 그들의 특성을 자신 안에 모아서 최선의 덕이 나타나도록 노력했다. 사람들은 이렇게 살아가는 그를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이”라고 불렀으며, “아들” 혹은 “형제”라고 했다.
2. 마귀와의 첫 번째 투쟁
마귀는 안토니를 수도생활에서 떠나가게 하려고 “그의 배의 힘줄에 있는”(욥 40:16)무기로서 진격했다. 음란한 생각, 기분 좋은 자극, 여자의 교태 등으로 안토니를 현혹시키려고 했지만, 그는 기도와 금식, 불의 심판과 유충(幼蟲)의 공격에 대한 경고를 떠올리며 시험을 이겨냈다. 마침내 사탄은 자기의 마음과 닮은꼴로 변신한 흑인소년의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냈다. 그리고 항복한 듯이 더 이상 생각을 이용하여 공격하지 않았고 인간의 목소리를 빌어 말했다. 그러자 안토니는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셔서 나를 도우시니 내 원수들이 패배하는 것을 내가 보리라”(시 118:7)는 말씀으로 악마를 쫓아냈다.
이후 안토니는 적이 또 다른 방법으로 그를 함정에 빠뜨리려는 시도를 할 것을 깨닫고 강도(强度)있는 훈련을 실시했다. 고행으로 육체를 복종시키며 가혹한 훈련에 자신을 적응시키려는 계획의 수고를 견뎌냈다. 그의 영혼 안에는 좋은 성품이 생겨났고, 작은 암시에도 열중하며 온 밤을 지새우는 일이 잦았다. 그의 음식은 빵과 소금과 물이었다. 습관적으로 그는 맨땅에 누웠으며, 고후 12:10의 말씀을 생각하며 육체의 힘이 약해질 때 영혼의 힘은 강해진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지나간 시간을 기억하지 않았고 매일매일 수도생활을 처음 시작하듯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빌 3:13)했다. 선지자 엘리야가 말한 “오늘”(왕상 17:1, 18:15)을 통해, 수도자는 거울에 비춰보듯 위대한 엘리야의 생애로부터 자신의 삶에 대한 지식을 터득해야 한다고, 그는 늘 스스로에게 말했다.
3. 묘지에서의 투쟁과 수도생활
안토니는 무덤 속으로 들어가 혼자 머물렀다. 그러자 적(敵)은 안토니가 머지않아 사막을 온통 수도생활로 채우게 될까봐 불안해져서 마귀떼를 몰고 와 강력한 타격으로 그에게 엄청난 고통을 가했다. 구타로 입은 고통 때문에 그는 누워서 기도하면서, 마귀를 향해 로마서 8:35의 말씀을 선포하며 시편 27:3로 찬송했다. 마귀들은 격노하여 야수와 파충류의 형상으로 안토니를 맹렬히 공격했다. 하지만 그는 동요되지 않고 훨씬 더 맑아진 영혼으로 “너희가 분별없는 짐승들의 모습으로 가장한 것이 바로 너희가 약하다는 증거이다”라며 마귀들을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이렇게 안토니의 애쓰는 모습을 지켜보신 주님은 “영원히 도우실 것”을 약속하셨고, 그는 이전보다 체력이 더 강해진 것을 느꼈다. 이때 그의 나이 대략 서른다섯이었다.
이후에도 마귀는 커다란 은접시의 환영과 진짜 금으로 안토니를 유혹했지만, “황야에 접시라니”로 시작되는 그의 명령과 무관심에 쫓겨났다. 그는 버려진 요새(要塞)에서 수도생활을 시작했으며, 그를 찾아온 사람들이 마귀들로 인해 놀라자 환영(幻影)들을 만들어내는 마귀들을 십자가 표시로 이기라고 권면하여 힘을 주었다. 이십여 년 후 안토니는 하늘나라의 신비에 이끌려 갔다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성지에서 나오듯 나타났다. 그를 통해서 주님은 사람들을 치유하셨고, 마귀들을 몰아내셨다. 그때부터 산속에는 수도원들이 생겨났고 하늘나라의 시민이 되기로 작정한 수도사들로 사막은 도시를 이루었다.
4. 안토니의 설교
1)수도생활에의 전념(專念)에 대해서
가르침은 성서로도 충분하지만 우리가 서로의 믿음을 격려해주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우리는 한결같은 열심을 간직하여 우리가 시작한 생활을 포기하지 맙시다. 인간의 수명과 시간은 영원한 생명과 비교해 볼 때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는 재산을 상속받지 않을 것이며, 하늘나라에서 이루어질 약속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간이 너무 걸린다거나 우리가 어떤 위대한 것을 포기했다고 생각하지 맙시다.
온 세상의 지배권을 버린 자는 잃은 것이 별로 없으며 백배 이상으로 받게 될 것입니다. 덕을 통해 소유물들을 내어놓지 않는다면, 나중에 죽을 때에 남기게 되어, 솔로몬처럼 원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물려주게 됩니다.(전 4:8, 6;2) 천국을 물려받는 우리들은 소유하려는 갈망을 품지 맙시다. 우리가 하루라도 나태해진다면 주님은 우리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며, 우리의 게으름에 분노를 내리실 것입니다.(겔 3:20, 18:26, 33:12)
그러므로 믿음의 자녀들이여, 수도생활에 전념하고 태만해지지 맙시다. 나태해지지 않기 위해서는 “나는 매일 죽노라(고전 15:31)”고 한 바울의 말씀을 깊이 생각합시다. 우리가 이렇게 생각하며 산다면 죄를 짓지 않을 것이고, 모든 것을 용서할 것입니다. 우리가 시작했고 덕의 길에 이미 들어섰으니 롯의 아내처럼 뒤돌아보지 맙시다. 그리스 사람들은 교육을 받기 위해 바다를 건너가지만, 우리는 하늘나라를 위해 바다를 건널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의 안에 있느니라”(눅 17:21)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2)영적전쟁에 대해서(엡 6:12)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마귀떼의 세력은 대단하며 그들은 우리로부터 멀리 있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시급한 것은 우리를 상대로 펼치는 마귀들의 비열한 음모를 아는 것입니다. 마귀들도 처음에는 “마귀”라고 규정짓는 존재로 창조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선하게 만들어졌으나 하늘의 지혜를 떠나갔고, 환영(幻影)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을 속여 왔습니다. 우리가 그들이 쫓겨난 곳으로 올라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을 통해 영을 분별하는 은사를 받은 사람이(고전 12:7, 10)많은 기도와 고행을 해야 합니다. 기도와 금식, 주님을 향한 믿음은 마귀들의 다른 종류의 공격을 사라지게 합니다. 특별히 믿음과 십자가 표시로 마음을 무장한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전갈이나 뱀처럼 마귀들은 기독교인들의 발아래 짓밟히도록 놓여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배반을 일삼으며 어떤 형상으로든지 변신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찬송가를 부르는체하며 성경말씀을 인용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수도사의 모습으로 가장하고 신자인양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에게 전혀 상관하지 말고 낯선 자들처럼 대합시다. 그들이 우리를 공격하거나 죽음으로 우리를 위협하는 것처럼 보여도 두려워하지 맙시다. 그들은 약하고 공갈을 휘두르는 것 외에는 아무 능력이 없으니까요.
욥의 시험에서도 사탄은 하나님께 물어야 했고 허락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는 의인 한 사람을 상대하여 이길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한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구함으로써 그는 자신이 약하며 아무 능력도 없음을 보여줍니다. 사탄은 돼지를 다스릴 권한도 없습니다.(막 5:12)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 한 분만을 두려워해야 하며, 마귀들을 멸시하고 그들을 조금도 무서워해서는 안 됩니다. 수도생활에 더욱 분발합시다. 그들을 무찌를 강력한 무기는 올바른 삶과 하나님을 향한 믿음입니다.
마귀들이 예언하는 척해도 우리 모두 속아 넘어가지 맙시다. 마귀들은 듣는 자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자신을 믿도록 설득한 후 그들을 지배하고 파멸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합니다. 인간의 육체보다 더 얇은 물질로 만들어진 몸을 사용하여 여행을 시작하는 사람들을 엿보고 있다가 먼저 달려와 그들의 도착을 알리는 일이 뭐 그렇게 놀랍습니까? 그들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선지식(先知識)이 전혀 없습니다.
다윗의 파수꾼은 달려가서 이미 시작되어 진행되고 있는 일을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이야기했습니다.(삼하 18:24) 바로 그런 식으로 마귀들도 미리 서둘러 가서 사람들에게 징조를 알립니다. 정말로 그런 일들을 알 수 있게 된다고 해도, 무슨 목적으로 열중합니까? 그런다고 덕이 생기지도 않으며 훌륭한 인격을 나타내는 증거도 되지 않습니다. 우리들 중 아무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 때문에 심판을 받지는 않습니다. 문제는 믿음을 잘 간직했으며 계명을 충실히 지켰는가? 입니다.
그러므로 마귀들이 밤에 여러분에게 와서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말하고 싶어 하거나 “우리는 천사다”라고 말할 때 그들을 거들떠보지 마시오. 거룩한 영들의 환상은 소란을 피우지 않습니다.(마 12:19, 사 42:2) 그러나 인간이기 때문에 선한 영들의 환상을 두려워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것은 겁이 난 영혼 때문이 아니라 높으신 분들이 함께 계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악령들의 공격과 출현은 요란한 소음으로 강도들이 피우는 소란과 같습니다. 이런 난리 속에서 영혼은 악을 갈망하게 되고 성격이 불안정해집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사탄에게 현혹되도록 내벼려 두지 않으셨고, 사탄을 책망하여 쫓아냈습니다.(마 4:10)
그러나 우리는 마귀를 쫓아내고 병을 낫게 했다고 거만해지지 말아야 합니다. 기적을 행하는 것은 우리에게 속해 있지 않고 구주의 일입니다.(눅 10:20) 나는 여러분이 내 체험을 듣고 수도생활 중에 흔들리지 않으며, 사탄이나 그의 마귀들의 환영을 두려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런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환영이 나타날 때마다 그것의 정체를 용감하게 물어보시오. 그것이 거룩한 영들의 환상이라면 완전한 확신을 줄 것이고, 악마라면 여러분의 영이 만만치 않음을 알고 즉시 약해질 것입니다.
5. 교회에 대한 박해
맥시민(Maximin, 305-308 로마황제)의 주도 아래 교회가 박해를 받으며 순교자들이 알렉산드리아로 끌려갔을 때, 안토니도 그들을 따르며 “우리도 가서 싸움에 참여하든지 아니면 싸우는 사람들을 지켜봅시다”고 말했다. 그는 광산과 감옥에서 신앙고백자들을 보살폈으며, 법정에서 대단한 열심을 보였다. 재판관은 안토니와 그의 일행이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보고서, 수도사들을 법정(法廷)과 도시에서 추방하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그는 장관에게 분명히 보여 질수 있도록 눈에 띄는 앞자리에 서 있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와 다른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기 위해 그를 보호하셨다. 그가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성경에서 배운 수도생활을 가르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한 보살핌 속에서 안토니는 마치 신앙고백자들과 함께 구속(拘束)된 사람처럼 고통을 받았다. 마침내 박해가 끝나고 안토니는 다시 암자로 돌아갔다. 그는 날마다 양심의 순교를 겪으며 믿음의 싸움을 치열하게 치루어 나갔다.
6. 박해 후의 수도생활
세상에서 물러나 암자 밖으로 나가지 않으며 방문객도 받지 않기로 결심했지만, 그는 의도대로 은둔하는 것이 용납되지 않음을 알았다. 그래서 그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테베로 떠나기 위해 배를 기다리고 있을 때, 그는 더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라는 하늘의 음성을 듣는다. 그곳에서 안토니는 땅을 경작하여 빵을 충당했다. 짐승들이 농작물을 망쳐 놓곤 하자, 짐승 한 마리를 사로잡아 주님의 이름으로 해를 끼치지 말기를 명령했다. 또한 그는 무서운 마귀를 상대로 많은 격투를 견뎌냈다. 마귀들이 달아났고 들짐승들은 그와 화해하게 되었다.(욥 5:23)
사탄은 안토니를 엄중히 감시했다. 하이에나들을 보내서 그를 위협했지만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선포에 그들은 달아났다. 허벅지까지는 사람을 닮았고 다리와 발은 당나귀 같은 야수도 부하 마귀들과 급히 달아나다가 죽었다. 그 야수의 죽음으로 마귀들은 몰락했다. 한번은 수도사들의 간청으로 그들의 암자까지 여행하다가 물이 없어 위험에 처하자 안토니의 기도를 들으시고 주님은 물을 펑펑 쏟아지게 하셨다. 그는 수도사들의 열심을 보고 즐거워했으며, 그의 여동생이 늙도록 수녀의 삶을 충실히 지키며 다른 수녀들을 인도하는 것을 보고 기뻐했다.
그 후 안토니는 자신을 찾아 온 철학자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논쟁을 통한 입증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행위를 통한 믿음에서 온다는 것을 설파한다. “믿음은 영혼의 성품에서 오는 것이지만, 논증은 그것을 전개하는 사람의 기술에서 오기 때문이오” 그리고 그들 앞에서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을 일으켜 세웠다. 철학자들이 놀라자 안토니는 말한다. “왜 이것을 보고 놀라시오? 이 일은 우리가 한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이오. 우리가 가진 것은 말재주가 아니라 믿음이오. 여러분도 이런 능력을 갖는다면 그리스도를 믿는 것 자체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오”
이런 안토니의 명성은 통치자들에게까지도 알려졌다. “콘스탄틴 아우구스투스”와 그의 아들들이 편지를 보냈다. 안토니는 말했다. “통치자가 우리에게 편지를 쓴다고 경탄하지 마시오. 우리가 정말 경탄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외아들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셨다는 사실이오(히 1:2)”
또한 그는 많은 군인들과 부자들이 인생의 짐을 벗어 던지고 그 순간부터 수도사가 되게 하였다. 그는 마치 하나님이 이집트에 보내신 의사 같았다. 그는 영을 분별하는 은사를 가지고 마귀들의 움직임을 알아차렸고, 마귀들로 인해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마귀들의 약점과 속임수를 설명해 주었다. 그리하여 각 방문자는 그에게 기름부음을 받고 싸움터로 나가듯, 사탄과 부하 마귀들의 계략에 담대히 맞서며 산을 내려왔다.
7. 안토니에 대한 마지막 회상
안토니는 하나님의 뜻을 통해 자신의 죽음을 알고 있었다. 그는 형제들에게 권면하며, 특히 멜레티우스를 따르는 분파론자(分派論者)들과 이단적인 아리우스파와 교제하지 말기를 당부했다. 형제들은 그가 자신들과 함께 머물다가 죽음을 맞기를 권했으나, 그는 순교자들을 아마포에 싸서 땅에 묻지 않고 집안에 안치해두는 이집트인들의 장례풍습을 생각하여 거절했다. 안토니는 여러 차례 “주님의 몸보다 거룩한 몸이 있겠는가?”며 그들의 생각을 바로 잡아 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관습으로 자신의 몸도 그렇게 할 것을 염려한 안토니는 산 속으로 들어가 혼자 머물렀다. 그리고 최후로 전에 말했던 권면들을 유언으로 다시 당부하며 세상을 떠나 선조들에게로 인도되었다.
그가 덕인(德人)이었으며 그의 영혼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음은 많은 사람들의 경탄과 그리움으로 증거 된다. 산 속에 숨어 있던 그가 스페인과 골(Gaul), 로마와 아프리카까지 알려질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결과였다. 그들 자신은 은밀하게 행동하며 잊혀지기를 바란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들을 모든 사람에게 등불처럼 밝히신다.
8. 아타나시우스의 권유
그러므로 이 편지를 다른 형제들에게도 읽어 주시오. 그래서 형제들이 수도사의 삶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배울 수 있도록 합시다. 수도사들이 자신을 감추며 물러나려고 애쓰지만, 하나님이 그들을 사방에 알리시고 칭송받게 한다는 것을 형제들이 믿을 수 있도록 합시다. 그리고 이교도들에게도 읽어 주어서 그들이 신으로 여기는 마귀들이 신이 아님을 증명할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그것들을 짓밟고 내쫓는다는 것을 알게 합시다. 영광이 우리 주님께 영원히 있기를, 아멘.
讀 書 後 記
안토니의 생애는 “영성” 그 자체였다. 그는 하나님을 아는 삶에 철저했고, 또 그의 삶 전체로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했다. 그러나 그의 삶이 가장 영성적인 것은 “하나님에 의해 알려지는” 생애를 살았다는 것이다. “나는 영원히 너를 도울 것이고 너를 온 세상에 알리겠다”(P 71)는 안토니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그대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우리는 알려지기를 원한다. 이 알려짐을 위해 스스로 노력한다. 성경은 “이생의 자랑”에 대해서 경고하지만 우리는 끈질기게 세상으로 좇아온 것을 사랑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안토니를 비롯해서 그 후의 수도자들은 기도, 명상, 고백, 은거, 금식 등의 금욕적인 수행으로 세상과 동떨어진 삶을 살았지만, 그들이 지켜낸 영혼에 관한 규율들은 오늘날의 영적 지도자들의 훈련에 있어서 귀감이 된다. 안토니의 생동적이고 역동적인 영성인의 모습은 하나님과의 신비한 관계에서 나온다. 우리는 이것을 신비주의라고 부르며 경원시(敬遠視)하는 전통을 만들어냈지만, 도대체 신비하지 않은 하나님이 성경 어디에 계시는지 우리는 성경을 다시 읽어볼 일이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이라는 모습 자체가 신비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특히 안토니는 “성령님을 통해 영을 분별하는 은사를 받은 사람이 마귀들의 특성을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많은 기도와 고행을 해야 한다”고 역설한다.(P 83) 전적(全的)으로 동감(同感)이다. 이것은 금욕주의나 고행주의에서 나온 말이 아니다. 성경주의에서 나온 말이다. 오늘날 심지어는 영성훈련을 받은 사람들에게서조차 기도와 영적고행(금식 혹은 장기간의 기도)에 대해서 무지(無知)한 말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굳이 수도원주의나 금욕주의란 말을 붙이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임재(臨在)에 대한 느낌과 그 빛 속에서 산다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기도와 금식에 대해서 다시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한다. 그리고 그 결과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소망으로 이끄는지도 생활 속에서 체험해야 한다. 그것을 분명하게 체험하며 산 안토니는 과연 하나님 아래 있기를 소망한 영성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