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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이 예언에 대한 말씀의 경고. (최한나)
10. 또 내게 말하되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11.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 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요한계시록 22:10-12)
18.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19.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요한계시록 22:18-19) 말씀 아멘!!
구약을 보면 다니엘은 그가 받은 묵시를 인봉하라는 지시를 들었다. 단8:26절에는 “이미 말한바 주야에 대한 환상은 확실하니 너는 그 환상을 간직하라 이는 여러 날 후의 일임이라 하더라 ” 그리고 12:4절에도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을 더하라” 또한 12:9절은 “그가 이르되 다니엘아 갈지어다 이 말은 마지막 때까지 간수하고 봉함할 것임이니라” 라고 기록되었다. 그것은 마지막 때까지 봉함하여야 하였다. 마지막 시대가 된 후에 다니엘의 예언이 열려졌고, 요한계시록의 예언이 조명되었다. 즉 다니엘서에서 봉함된 예언이, 마지막 때가 되었을 때 요한계시록의 예언과 함께 열리게 된 것이다.
오늘 말씀 10절을 보면 사도요한에게 계시를 전하던 천사는 사도 요한에게 때가 가까움을 다 시 한번 강조하며,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고 하였다. 즉 마지막 심판과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했으므로 지금까지 보인 계시의 말씀을 세상에 널리 알리라는 것이다. 따라서 어찌 보면 이 말씀은 다소 불필요한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왜냐하면 계시란 어차피 보이고 알리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 성경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본 절의 말씀은 결코 무의미한 말씀이 아니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계시를 주신 이후에 오히려 이를 봉함하여 알리지 말라고 말씀하신 적도 여러 번 있기 때문이다. “이사야 8:16절 너는 증거의 말씀을 싸매며 율법을 내 제자들 가운데에서 봉함하라”라고 기록되었고, 예레미야서 51:63절에도 “너는 이 책을 읽기를 다한 후에 책에 돌을 매어 유브라데 강 속에 던지며” 라고 구약 여러 곳에 기록되었다.
더구나 계시록 10장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사도 요한에게 계시와 환상은 보여주신 후 오늘의 본 절의 말씀과는 달리 오히려 이를 인봉하고 기록하지 말라고 명령하셨다. 물론 이처럼 봉함 명령을 주신 것은 아마 그 내용만큼은 인간이 나는 것이 오히려 해가 되기 때문일 것이다. 다라서 우리는 이러한 모든 사실들을 통해 성경의 계시에 대해 다름과 같이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곧 성경에 기록된 계시의 말씀은 영적 진리에 대한 모든 것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우리 인류가 구원을 위해 알아야 하는 필수적인 것만 기록한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그 반대로 구원과 천국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 속에는 우리 인간들이 알도록 허락되지 않은 것들이 얼마든지 있음을 보여줌과 동시에, 이것들에 대해서는 오히려 겸손하게 침묵하는 거시 바른 자세임을 교훈해 주는 것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는 이와 정반대로 움직이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즉 세상에 널리 알리라고 허락한신 말씀은 등한히 하면서 반대로 침묵하라고 명하신 부분은 어찌하든지 알아보겠다고 머리를 싸매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다. 그리하여 이들은 인간이 알 필요도 없고 알 수도 없는 부분에 대해 자신들의 생각으로 온갖 억측을 다 갖다 붙임으로써 자신도 멸망하고 다른 수많은 영혼들도 멸망에 빠지도록 한다. 이에 대해서는 베드로 후서 3:16~17절 말씀에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 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가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이러한 모습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려는 인간의 죄성에 대한 전형적인 보기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본장의 18~19절은 하나님의 말씀을 함부로 다루거나 가감하지 말아야할 것을 엄숙히 경고 한다. 구약 신명기 4:2절에도 지켜야 할 하나님의 규례들에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내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고 기록되었다. 이 명령은 다른 사람을 책망하거나 공격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부적절하게 사용한다든지, 자신의 사상이나 견해를 주장하기 위하여 말씀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것도 포함한다. 말씀은 오직 말씀으로 해석해야 하며, 말씀은 오직 성령의 도움으로 조명해야 한다.
계시록 22:18-19 인용한 그것은 하나님께서 계시하셨거나 명령하신 것은 어떠한 식으로든지 변경하지 못하도록 경계하시고자 사람들에게 주신 경고이다. 그 엄숙한 선언은 하나님의 율법을 경시하도록 영향을 끼치는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것이 별로 대수롭지 않은 문제라고 경박하게 말하는 자들은 그 선고 앞에 떨고 두려워하여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보다도 자기 자신의 의견을 높이는 모든 자들, 자기의 편의를 도모하거나 세속과 타협하기 위하여 성경의 분명한 의미를 변개코자 하는 자들은 모두 자기 자신에게 두려운 결과를 가져오는 자들이다. 기록된 말씀, 곧 하나님의 율법은 모든 인류의 품성을 저울질하고 그 그릇됨이 없는 시험에 의하여 부족함이 드러나는 모든 자들에게 정죄의 선고를 내리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성경의 계시와 천국의 신비 가운데에는 분명 허락된 것과 금지된 것이 있음을 알아 (행 1:7절 말씀) 각자가 합당한 바른 자세를 견지하도록 늘 힘써야 한다. 그리하여 허락된 계시와 말씀에 대해서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심을 다해 알리고(딤후 4:2), 허락되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는 겸손히 침묵함으로써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세상에 분명히 알도록 해야 한다.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하여 주셨으니” 요 12:49절 말씀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고후 12:4절 말씀 아멘!
42.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16.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 하시더라 17.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18.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19.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20.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21.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요한계시록 22:16-21)말씀 아멘!
계시록은 세상에는 두려운 경고이나 그리그도인들에게는 희망의 메시지이다.
본장 16절을 보면 먼저“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 거하게 하였노라”고 하였다. 곧 지금까지 기록된 모든 내용은 어느 누구의 사변이나 공상이 아니라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계시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계시록에 기록된 모든 사건들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임을 다시 한 번 확실히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계속해서 보면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별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란 곧 인간적으로는 그리스도가 다윗의 후손이지만, 실제적으로 보면 다윗의 원형이라는 뜻이다.
때문에 주님께서 일찍이 바리새인들과의 논쟁을 통해 지적하셨던 것처럼 다윗은 오히려 그리스도를 가리켜 내 주라고 했던 것이다. 마 22:41~45.“또한 ”광명한 새벽별“이란 그리스도가 우주의 통치자이자 새날과 새 시대를 여는 선구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본 절을 종합해면 계시록이란 곧 다윗의 원형이자 새 시대의 선구자이신 그리스도의 증거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는 오늘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을 거부하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두려운 경고이지만 반대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성도들에게는 더 없는 희망의 소리라는 것이다.
마라나타 “오소서, 주 예수여!” 요한계시록은 그분이 오셔서 심판과 구속이 마무리되기를 기도하는 것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우리도 동일한 기도에 동참해야 한다. 궁극적으로만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그분이 삶의 현장 가운데 오셔서 시시비비를 가려 주시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악인을 향하여 저들이 망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해서는 안 되지만, 악이 무너지도록 기도할 수는 있다. 하나님의 공의가 세워지고 하나님의 진실이 승리하는 역사가 우리의 삶에서 이뤄지기를 위하여 기도해야만 한다. “아멘 주 예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20절)아멘!
하나님께로 항복은 성숙의 지름길이다. 하나님께 속히 항복하여 이 땅에서 거룩한 성으로 완성되어야 한다. 21~22에서 제시되는 마지막 날에 이뤄질 약속은 죽어서 얻는 것만이 아니라 살아서 맛보고 누려야만 하는 것이다. 도무지 영광스러운 존재로 완성 될 수 없어 보였던 교회를 이끌어 마침내 찬란한 영광의 광채를 드러내는 성 으로 완성시키시는 주님의 열심과 집념이 끝내 승리하는 것을 목도한다.
누구도 교회를 향한 그분의 고집에 대하여 항거할 수 없다. 그러나 그분은 이러한 위대한 역사를 이루는 과정에서 절대로 억압이나 강요의 방식으로 당 신의 백성들을 이끌어가지 않으신다. 오히려 인격적 설복의 방식으로 인생에 게 다가오신다. 이것으로 사람들의 성화의 정도에 치아가 생기는 것이다. 주 님의 사랑이나 열정이 부족하거나 모든 사람에게 미치지 못해서가 아니라, 모든 인생이 통일한 모습으로 하나님께 고개를 숙이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고개 숙이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격적인 대접을 악용하지 말고 속히 투항하고 항복하는 것이다. 그때 우리는 이 땅에서 저 세상을 누리고 다기 올 완성된 성으로 여기서 건설될 수 있을 것 이다. 성숙과 방탕의 길이 우리 앞에 있다. 항복은 성숙의 길목이다.
43. 미국 독립의 의미
시편 33편은 ‘찬양의 노래’로서, 주제는 여호와를 자연계의 창조주시고, 인간시를 지배하시는 분에 대한 찬양이다. 본 시편은 독특한 양식적 특정을 보여 주는데, ‘알파엣 순으로 이루어진’시로 볼 수 있다. 엄밀하게 말해서 답관체 시는 아니라고 하여도 절의 수와 기타 몇 가지 형식적인 특정을 고려할 때 답관체 시와 상당히 유사하다. 답관체 시의 특정이 있다면 내부적인 구조와 균형이 상당한 규칙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또 한본 시편은 관용적인 표현을 구사하는 비율이 비교적 높은데, 동일한 단어나 통일한 어근에서 파생한 단어들이 반복적으로 사용한 점은 본 시편에 통일성을 더해준다.
찬양하라는 요구는‘의로운 자들’ 또는 ‘정직한 자들’에게 주어지고 있는데, “새 노래”라는 표현의 의미는 불확실하다. 이 말이 종말론적인 의미를 내포할 수도 있으나 시편에서는 재 노래라는 표현이 종종 관용적인 표현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말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왕권에 대한 찬양이 항상 신선함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그리고 시인은 특별히 '죽음'과 '기근'으로부터의 구원을 언급한다. 이 구원은 재앙으로부터의 구원일 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하여 생명 속으로 들어가는 구원이다. 그리고 시인은 본 시편을 기도의 어조로 끝맺고 있다(22절). 시인은 특히 하나님의 인자하심의 축복을 경험하게 되기를 간구한다. 인자하심의 축복은 언약관계의 모든 특권을 가져다줄 것이다. 그러므로 미국은 성경위에 세워진 나라인지를 생각해 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세웠졌던 이스라엘 나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참된 삶을 살지 못하였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우상들을 섬기는 나라였다.
그러나 공의와 인자하심은 하나님의 속성이다. 하나님께서는 정의와 공의를 사랑 하신다고 하였다. 그런데 시인은 이것을 말로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세상에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충만하다고 하였다. 정의와 공명은 하나님의 속성이요, 세상의 통치 원리다. 하나님은 그 성품이 공의로우시기 때문에 그 공의를 사랑하며, 공의로 세상을 다스리시고 공의를 행하는 자를 사랑하신다. 이와 는 반대로 공의를 행하지 않는 자는 미워하시고 합당한 보응을 하시거나, 하나님의 통치가 반드시 공의로만 다스려지는 것은 아니다. 공의는 이 세상을 유지하게 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지만, 공의로만 다스려 질 때 그 앞에 설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또 다른 속성은 ‘인자하심’이다. 여기에서 인자란 계약관계를 통한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으로 인하여 결코 인간을 포기하실 수 없는 계약적인 사랑을 일컫는다. 우리 인간은 죄인이다. 그리고 그 본성으로 인하여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 만약 하나님의 공의의 원리로만 세상이 다스려진다면 모두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태초에 인류의 조상이라고 할 수 있는 아담과 하와와의 약속에 근거하여 그분의 사랑을 인간에게 베푸시는 속성을 가지고 계신 것이다. 하나님이 때로는 오래 참으시며 인내하시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이 세상에서는 인과웅보의 원리가 지배하나, 하나님 나라에서 그 원리보다는 하나님의 계약적 사랑인 헤세드의 원리가 앞선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들에게, 또 미국에게 구원의 빛이 찾아온 것이다.
44.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7. 그들이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8.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9.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
10. 기록된 바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네 앞에 준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마:11:7-11)말씀 아멘!
본문은 세례 요한의 질문을 가지고 온 두 제자가 돌아가고 나서 예수님께서 자기를 좇아 에워싸고 있는 무리에게 세례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신 내용이다. 예수님은 무리에게 물어보시고 그 자신 스스로가 답해 주시는 형태로 말씀하셨다. 무리 중 많은 사람들이 요한의 세례를 받았던 사람들이었다. 세례 요한이 황량한 유대 광야에 있는 요단강에서 회개의 복음을 외치며 물세례를 베풀 때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세례를 받기 위하여 갈릴리를 떠나서 그곳까지 나갔었다.
그것을 아시고 계신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물어보시는 것을 통해서 세례 요한이 어떤 사람인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너희가 광야에 나갔었는데 무엇을 보기 위해서 였느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아니면 다른 무엇을 보려고 나갔었느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광야에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닌 왕궁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었느냐? 선지자를 보려고 나갔었느냐?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요한은 선지자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다. 요한은 성경에 예언된 사람인데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네 앞에 예비하리라’고 예언된 사람이 바로 요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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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말씀하신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로 요한을 묘사한 것은 세례 요한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같이 소신이 없는 허약한 마음이 아닌 심지가 굳은 사람이라는 말이다. 지금 세례 요한이 옥에 갇혀 있는 현실을 생각해서 그리 말씀하신 것이다. 세례 요한이 지금까지 한 일은 메시야가 올 것을 백성들에게 알리고 백성들이 그 메시야를 영접하도록 준비시키는 일이었다. 이 일밖에는 모르고 살았다. 그런 그가 헤롯을 책망한 일로 인하여 옥에 갇혀 생명의 위협을 받는 아주 어려운 현실에 놓여져 있다. 그런 그가 가지고 있는 믿음의 실체는 그리스도이신 예수께서 죄인의 죄를 심판하여 멸하시고 죄를 회개한 자를 구원하여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생케 하실 것에 대한 성취이다. 그에 대한 소망이 그의 유일한 기쁨이였다.
예수님은 그런 세례 요한을 잘 아신다. 그러기에 무리들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너희가 세례 요한을 보기 위하여 광야로 나간 것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같은 그를 보기 위해서가 아니지 않느냐? 그렇다! 너희가 보는 것은 굳은 마음에 있는 세례 요한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을 통해서 예수가 그리스도로 오신 분이시며, 그 그리스도께서 하실 일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고서 예수님을 위하여 사역한 사람으로서, 예수께서 하실 일이 가져올 소망에 있는 세례 요한임을 무리에게 인식시키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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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또한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 입은 자들은 왕궁에 있다.”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언급하신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란 “화려한 옷을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눅 7:25)를 이르는 말이다. 옛날 표현으로 말하면 귀족, 왕족들이다. 현대인에게 있어서 부드러운 옷 입은 자들은 호화로운 생활을 탐하는 자들이다. 의식주에 걱정 없는 그런 사람들이다. 예전에 ‘화이트 칼라’(White collar)란 말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흰 와이샤쓰에 넥타이를 메고 양복을 입고 한 신사를 말한다. 이런 옷을 입을 수 있는 사람이 많질 않았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너희들이 광야에 나간 것은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지 않느냐? 만일 그런 사람을 보려고 했다면 왕궁엘 가든지 했어야 했다고 하였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세례 요한이 자기 안일을 위해서 사는 그런 사람으로 보지 말라는 것을 말해 주기 위해서이다. 화려한 옷을 입고 사치스럽게 지내며 자기를 과시하는, 그러니까 재물을 탐하고 권력을 탐하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으려고 하고 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것 때문에 광야에서 회개의 복음을 외치며 세례를 베푸는 일을 한 것이 아니다. 세례 요한의 모습과 생활에 대해 말하기를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야생 꿀)이었더라”(마 3:4)라고 하였다. 세례 요한의 이러한 모습은 유대인들에게 금방 선지자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었다. 바울이 복음을 알므로 말미암아 자기의 소유한 모든 것을 해로 여기고 배설물처럼 버렸던 것처럼 세례 요한 또한 그랬다. 그리고 그는 단지 그리스도만을 위해서 일하며 살았다. 세례 요한은 그런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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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려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라고 말씀하셨다. “너희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보려고 광야에 나간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들을 보려고 나간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간 것이냐? 너희들이 광야에 나간 것은 세례 요한에게서 그런 모습을 볼려고 해서가 아니라 뭔가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냐? 그게 무엇이냐? 세례 요한을 어떤 사람으로 알았느냐? 선지자로 알고서 나간 것이 아니냐? 그래서 선지자가 하는 말을 들으려고 하고, 선지자가 베푸는 물세례를 받으려고 해서가 아니냐? 그렇다. 요한은 선지자보다 더 나은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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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사람들이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부분을 끄집어내서 올바르게 가르쳐 주었다.세례 요한은 성경에 예언된 사람인데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네 앞에 예비하리라’한 사람이 바로 세례 요한을 두고 한 말이다 라고 하였다. 이 말씀은 말라기 3장 1절에서 인용한 것인데 심판과 구원을 행하기 위하여 주께서 오실 때,그 앞서 주께서 사자를 보내어서 주의 길을 예비할 것이라고 하였다.
예수님은 요한이 바로 그 사자라고 말씀해 주신 것이다. 그럼으로써 세례 요한이 단지 선지자에 불과한 인물이 아니라 예언의 대상이 되었던 인물임과 그가 왔음으로 해서 주의 날이 도래하였음을 말해 주고자 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세례 요한은 모든 선지자보다 큰 자이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이가 일어남이 없도다”고 한 것은 그런 뜻이다. 예수님은 이처럼 선지자 세례 요한의 사역과 주의 날의 도래와의 관계를 말씀해 주는 것을 통해서 예수님 자신이 주의 날의 주인공임과 자신이 이 세상에 왔음으로 해서 옛 시대는 마감이 되었고 새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말해주고자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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