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604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삼위일체주일)
사랑의 원무 안에서
창1:1-2, 26-31; 고후13:11-13; 마28:16-20
오늘은 삼위일체주일입니다. 삼위일체란 용어가 성경에서 직접 사용되고 있진 않습니다. 이 용어는 터툴리안이 처음 사용했고, 4세기에 이르러서야 만들어진 교리입니다. 삼위일체는 성부, 성자, 성령이신 하나님은 하나의 본질이면서, 위격(Person)으로는 서로 구분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셋이 다르지 않은 하나라는 이 알쏭달쏭한 말은 성삼위 하나님께서 존재하시는 방식을 인간의 언어로 표현한 것에 불과합니다.
고대 교부들은 삼위일체가 지니고 있는 내적 생명력을 묘사하기 위해서 그리스어 페리코레시스를 사용했습니다.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는 주변이나 주위를 의미하는 peri 그리고 공간을 만든다는 의미의 동사 chorein을 합쳐서 만든 단어입니다. 페리코레시스를 글자 그대로 번역하면 주위에 공간을 만든다는 의미입니다. 더 구체적으로는 누군가 혹은 무언가가 그 주위에 다른 이들 혹은 다른 무언가를 위해 공간을 만드는 방식을 가리킵니다.
페리코레시스를 신학적으로는 성부, 성자, 성령의 상호순환, 상호내재, 상호침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 안에 계시면서 또한 우리 안에 계실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이나 사물 안에서 그리고 그것들을 통과하여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빙글빙글 도는 춤, 즉 원무(圓舞)와 같습니다. 이 단어는 춤을 뜻하는 그리스어 choreuo와도 비슷해서 성삼위 안에서 추는 사랑의 춤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아들과 아버지, 성령은 서로를 위한 공간을 만듭니다. 성부, 성자, 성령은 서로 함께 이리저리 움직이며 춤을 추는데, 각자를 위한 고유의 공간을 계속 유지하면서 서로 안에 그리고 서로를 통해 상호 내주하는 방식으로 움직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이 한데 어우러져서 이리저리 조화롭게 움직이지만, 각 위격의 고유한 특성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페리코레시스는 이 역동적인 성삼위의 움직임을 원무에 비유한 것입니다. 원무를 추며 상호순환하고, 상호 내재하는 성삼위 하나님의 이미지는 매우 다이나믹하며 자유롭습니다. 페리코레시스는 위계질서가 있어서 하늘나라의 가장 높은 보좌에 하나님이 앉아있고, 그 다음 서열은 예수, 마지막은 성령인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래서 페리코레시스는 직선이 아닌 곡선입니다. 원무를 추는 성삼위 하나님은 부드럽고, 경쾌하며, 자유롭고, 아름답습니다.
창세기 1장 말씀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근거가 되는 본문 중 하나입니다. 1:26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서,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우리’라고 하셨다고 해서 세 위격을 지니신 하나님을 가리킨다고 초대교부들은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엿새 동안 세상을 창조하시고, 마지막에 사람을 당신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만드셨습니다. 사람을 창조하신 후에 하나님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1:28)” 명하셨습니다.
한데 어우러져서 아름답게 원무를 추는 성삼위 하나님의 이미지를 그리스도인들이 잘 간직해왔더라면,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힘의 위계질서 제일 꼭대기에서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와 자원을 착취하고 이용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이진 않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각자를 위한 공간을 존중하면서, 함께 공존하는 자리를 만들어가는 원무의 이미지는 여전히 인간과 자연이 상생할 수 있는 조화로운 움직임으로 우리를 이끌어줄 것이라는 희망이 됩니다.
페리코레시스, 즉 원무의 이미지를 상실한 인간은 이 세상과 모든 살아있는 생명체를 향해서만 힘을 휘두르고 억압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안에 실재하는 다양한 인격들과 본성들이 있는 그대로 존재하고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기 때부터 부모로부터 충분한 공감을 받지 못하면서 생긴 원상처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고 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아이는 다양한 생존인격을 장착하게 됩니다. 생존인격은 원상처를 만나지 못하도록 무기력, 우울감, 수치심, 분노 등으로 그 상처를 가리고 회피하는 방식을 택합니다.
자기의 온전함은 우리의 밝은 면뿐만 아니라, 어두운 면까지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인정하는데서 시작됩니다. 우리 안에 있는 부정적인 부분들을 꺼내놓는 일은 긍정 vs. 부정의 양극화를 해소시킵니다. 이것은 고통과 기쁨, 감사와 슬픔, 공허와 충만을 함께 더 잘 느끼게 만들며, 대극의 것들이 공존할 수 있도록 내면에 공간을 허락합니다. 이것은 삶과 죽음, 재능과 상처, 위로와 적막감이 신비롭게 한데 어우러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와 다른 사람들의 삶은 그 자체로 훨씬 더 경이롭고 고통스럽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우리의 빛만이 아니라 어둠 또한 우리의 일부라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가 온전해지기 위한 시작입니다. 우리가 온전함을 향하여 용기 있는 첫 발걸음을 내딛도록 각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우리가 있어야 할 그 자리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우리 각 사람이 자신의 참된 정체성을 회복하도록, 즉 하나님 안에서 있는 그대로 이미 온전하다는 것을 깨달아가도록, 우리를 한 걸음, 한 걸음 인도할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바로 성삼위 하나님이십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 안에서 사랑 가득한 움직임으로 원무를 추고 계십니다. 성삼위 하나님의 이 사랑 가득한 원무는 우리의 모나고 어두운 상처들이 열등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온전함을 발견하게 만드는 보물 상자임을 깨닫게 합니다. 우리의 아픔과 상처를 외면하지 않고, 현재의 고통과 절망의 느낌에 참여함으로써 우리는 지금 여기에 오롯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성삼위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높이와 깊이 모두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온전함과 하나 됨을 회복하는 일은 기적처럼 순식간에 갑자기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 안의 어둠을 마주하고 통합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따사로운 빛을 많이 비춰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빛을 비추어 주는 것은 엄청 거창하고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생기 가득한 자연 속을 걸으면서, 온 존재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풀, 나무, 꽃, 구름, 바람, 새, 하늘을 즐기는 것입니다. 나를 든든하게 받쳐주는 땅을 의식하면서,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작은 몸짓입니다. 또한 마음을 열어주는 음악을 들으며 좋아하는 차를 마시거나, 신뢰하는 친구와 진솔한 대화를 나누는 일도 있습니다. 우리의 닫힌 마음을 열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빛을 비추는 일입니다.
우리의 자기됨(selfhood), 선택, 책임은 우리의 욕동보다 더 본질적 수준에 있습니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욕망을 따라갈 수도 있지만, 의지를 내어 자기를 돌보고 성장을 위한 선택을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위해서 소박하고 단순한 일들을 선택하여 행동하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깨우는 동력이 됩니다. 우리의 미미한 손짓과 몸짓은 성삼위 하나님이 우리와 한데 어우러져 원무를 출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내는 마중물이 됩니다. 우리가 마음을 열어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깨어나 사랑 가득한 움직임으로 우리의 내면을 풍성하게 채워줄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3:11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기뻐하십시오. 온전하게 되기를 힘쓰십시오. 서로 격려하십시오. 같은 마음을 품으십시오. 화평하게 지내십시오. 그리하면 사랑과 평화의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기쁨은 외부에서 오는 즐거움이 아닙니다. 자신의 참된 신원을 깨달아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기쁨입니다. 온전함도 마찬가지입니다. 스스로의 노력으로는 온전해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 온 몸에 들어가 있던 힘을 뺄 때, 그 빈 공간에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그 빈자리를 채워주심으로 이루게 되는 온전함입니다.
사실, 바울의 권면은 하나님께서 하시지 않고서는 결코 이룰 수 없는 일들입니다. 기뻐하고, 온전해지고, 서로 격려하며, 같은 마음을 품고, 화평하게 지내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께서 계실 자리를 우리 안에 내어드리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바쁜 일상 중에도 중심을 잃지 않도록 생각날 때마다 깊이 호흡하면서 하나님의 현존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우리가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을지라도, 우리의 불완전함을 하루에도 수십 번 확인하게 될지라도, 좌절하지 않고 다시 한 번 호흡하면서 우리 안에 있는 중심으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이 이런저런 생각들로 가득차서 거기에 함몰되지 않도록 우리 안에 주님께서 계실 작은 틈을 만들어내는 작은 손짓, 몸짓, 호흡을 우리는 계속해서 이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의지를 내어 우리의 내면에 만들어 낸 작은 틈 사이에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사랑 가득한 원무를 추시며 당신과 우리가 함께 머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그곳을 사랑과 평화로 충만하게 채워주십니다. 우리의 의지를 담은 작은 움직임은 우리를 하나님과 하나 되게 하는 커다란 춤사위가 되고, 나아가서는 하나님 안에서 세상과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는 우주적 춤에 참여하게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무는 우리는 온전하고 있는 그대로 아름답습니다.
고린도후서의 마지막 말씀으로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오늘날 예배 마지막 순서에 하는 축도가 여기서 유래되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사귐이 여러분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고후13:13).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작은 움직임들을 우리가 일상 속에서 잊지 않고 이어나갈 수 있도록 우리를 늘 깨우쳐 주십시오. 살아계셔서 우리 안에 현존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