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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세도정치란 ‘정치는 널리 사회를 교화시켜 세상을 올바르게 다스리는 도리’라는 사림(士林)의 통치이념에서 나온 이상적인 정치 도의를 의미하였으나, 척신(戚臣) 또는 총신(寵臣)이 강력한 권세를 잡고 전권(專權)을 휘두르는 부정적 정치형태인 홍국영(洪國榮) 이후의 조선 후기 세도정치를 지칭하는 말로 더 많이 쓰이고 있다. 세상을 올바르게 다스려나갈 수 있는 교화원리로서의 세도는 조광조(趙光祖) 이래 정권을 담당한 사림이 실천해야 할 책무로서 자임한 정치형태였고, 이와 같은 정치자세의 정당성은 사림정치의 권위를 원칙적으로 뒷받침하였다.
그러나 정조 초의 총신 홍국영이 정권을 담당한 이후 ‘世道政治’는 ‘勢道政治’로 타락, 변질되어 권세정치의 형태로 나타났다. 홍국영은 척신으로서 사도세자(이후 장헌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세손(世孫)으로 있을 때 정후겸(鄭厚謙) 등의 위협에서 그를 보호하여 무사히 왕위에 오르게 한 공으로 도승지 겸 금위대장에 임명되어 정사가 그에 의해 상주(上奏)되고 그를 통하여 하달되는 막강한 권한이 위임되었다. 그는 정치기반을 굳히기 위해 누이를 정조의 원빈(元嬪)으로 봉하게 하였으며, 궁중의 숙위소(宿衛所)에 머물면서 인사(人事)를 비롯한 모든 정사를 독단하여 세도정치를 폈으나 4년 만에 추방되었다. 그는 국왕의 일개 비서실장 ·호위대장 격이었으나 그 실권이 재상이나 다름없다 하여 세도재상(世道宰相)이라 불렸다.
정조가 죽고 순조가 12세의 나이로 즉위하자 정조의 유탁으로 김조순(金祖淳)이 그의 딸을 왕비로 들여, 순조를 보필하게 되면서 안동김씨에 의한 세도정치가 시작되어 중앙의 요직은 모두 이들 일족이 독점하였다. 그 뒤 조만영(趙萬永)의 딸이 익종의 비가 되어 헌종을 낳자 헌종 때는 풍양조씨(豊壤趙氏)에 의한 세도정치가 15년 가까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그 뒤를 이은 철종의 비가 김조순의 일문인 김문근(金汶根)의 딸로 다시 안동김씨의 외척에 의한 세도정치로 이어졌다.
이로부터 약 15년간의 세도정치는 타락의 절정을 이룬 권세정치로, 종실(宗室)이라도 이들에게 눌려 살았다. 이어 고종의 생부로서 정권을 장악한 흥선대원군은 안동김씨의 세력을 몰아내고 독재적 세도정치를 펴나가면서 외척의 대두를 경계하여 왕비의 간택에도 신중을 기하였으나 10년 만에 명성황후에 의해 실각한 뒤로는 한말까지 민씨 일족의 외척에 의한 세도정치가 계속되어 국가 요직을 차지한 민씨 일족이 1,000명을 넘었다.
갈밭 마을 젊은 아낙 울음소리 서러워라.
관청 문을 향해 울더니 하늘 보고 울부짖네.
쌈터에 간 지아비가 못 돌아오는 수는 있어도
남자가 그 걸 자른 건 들어본 일이 없다네.
시아비 죽어서 이미 상복을 입었고 아기는 배냇물도 안 말랐는데
삼대가 함께 군적에 이름이 실리다니
달려가서 억울함을 호소하려 해도
문지기는 호랑이요
이장은 호통치며 소까지 끌고 갔네.
조정에선 모두 태평성대를 축하하는데
누구를 보내어 바른 말을 하여 조정 밖으로 내치겠는가
칼을 갈아 방에 들자 자리에는 피가 가득
자식 낳아 안 낼 세금 많이 낸 것이 한스러워 그랬다네
무슨 죄가 있어서 남성의 상징을 잘랐던가
민나라 땅 자식들 거세한 것 그도 역시 슬픈 일인데
자식 낳고 사는 이치 하늘이 준 바이고
하늘 닮아 아들 되고 땅 닮아 딸이 되지
불알 깐 말, 불알 깐 돼지 그도 서럽다 할 것인데
대 이어갈 사람들이야 말을 더해 무엇하리요
부호들은 일 년 내내 풍류나 즐기면서
낱알 한 톨, 비단 한 치 바치는 일 없는데
똑같은 백성 두고 왜 그리도 차별일까
객창에서 거듭거듭 시구편을 외워보네
- 정약용 시, 애절양(哀絶陽)
이 시는 세도 정치기 때 경상도 장기와 전라도 강진에서 18년 동안 귀양을 살았던 실학자 정약용이 관청의 세금 수탈에 항의하여 자신의 성기를 잘랐다는 어느 농민의 이야기를 듣고 지은 거야. 시의 내용을 보면 세도 정치기 때 관리들의 부패와 농민들의 힘든 삶이 어느 정도였는지 잘 알 수 있지.
세도 정치기의 농촌: 칼만 안 들었지 날강도와 같은 행위를 하는 관리들 때문에 도저히 살 수 없는 아비지옥과도 같았다. |
세도 정치기 때 임금은 거의 허수아비에 불과했어. 정치 권력은 세도 가문이 독점했고, 이들의 독주를 견제할 세력이 없어 정치 기강은 문란할 수밖에 없었어. 이러한 현실에서 농민들의 삶은 피폐할 대로 피폐해져 살아도 살았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의 극한 상황에 내몰렸지.
당시 농민들이 국가에 내는 세금은 크게 세 종류야. 농토에 부과한 전세, 군대 생활을 해야 할 사람들에게 거두어들이는 군포, 그리고 먹고 살 것이 없는 봄에 관청이 비축해 놓은 곡식을 빌려 주고 가을에 약간의 이자를 붙여 거두어들이는 환곡. 이를 합하여 삼정이라고 하는데, 관리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수탈을 하여 삼정의 문란이 아주 심했지.
삼정의 문란
전세의 문란 | 영정법 실시 후 토지 1결당 쌀 4~6두로 고정 -> 각종 부담이 추가되어 토지 1결당 쌀 20두 정도를 거둠 관리들이 세금을 덧붙여 정해진 양보다 많이 거둠 |
군포의 문란 | 균역법 실시 이후 1년에 1필씩 거둠 -> 고을별로 총액을 전하여 거두어 관리들이 이를 이용하여 백성을 수탈, 어린아이나 죽은 사람, 이웃이나 친척에게도 군포를 부과 |
환곡의 문란 | 삼정 중 가장 문란 -> 강제 대여, 겨 섞기, 거짓 장부 작성 등 |
삼정 중에서도 특히 환곡의 폐단은 농민들에게 극심한 고통을 주었어. 1년 동안 먹고 살 곡식을 쌓아 놓고 살 수 없었던 농민들은 춘궁기1)에 굶어 죽지 않기 위하여 관청에서 곡식을 빌려 갈 수밖에 없었어. 그런데 탐관오리들은 곡식을 빌려 줄 때 곡식과 이물질을 함께 섞어 빌려주고 가을에 받아들일 때는 질 좋은 곡물로만 받아들여 그 차액을 착복했지. 심지어는 빌려 주지도 않은 곡식을 장부에는 빌려 줬다고 기록해 놓고 가을이 되면 거짓 기록된 장부를 내놓으며, 봄에 빌려 간 곡물을 갚으라고 윽박지르기도 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