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흥안씨(1파) 9세 판서공 안종약(安從約)은 조부 안원숭(安元崇), 부 안원(安瑗)으로 순흥안씨 대종가이다. 안종약의 후손들을 판서공파라고 부르며 그의 네 아들 후손들을 지파로 나눠서, 1남 안구(安玖) 참찬공파, 2남 안경(安璟) 찬성공파, 3남 안수(安琇) 직장공파, 4남 안리(安理)는 서파공파로 분파되었다.
이 중에서 순흥안씨(1파) / 판서공파 / 서파공파의 족보 즉 파보의 내용이다.
1957년 간행된 《순흥안씨서파공파보(順興安氏西坡公派譜)》를 일단 정리해서 기록으로 남깁니다.
참고 : 순흥안씨 / 판서공파 / 서파공파
http://cafe.daum.net/ahncham/FiFW/64
http://blog.daum.net/auk9427/40
출처 : http://egloos.zum.com/DongkukAhn/v/5923019
1권에 <전의록(傳疑錄)>이 실려 있는데,
1. 1765년 간행된 《순흥안씨족보 을유보(乙酉譜)》3항에 실려있던 <광주안씨 - 순흥안씨의 분관 기록>를 기록하고 있다.
주된 내용은 “광주안씨 안방걸(安邦傑)의 후손 안필몽(弼夢)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형 안홍미(安弘美)는 문하시중을 지냈고, 동생 안자미(安子美)는 순흥안씨 시조가 되었다”는 기록이다.
乙酉譜曰 廣州安氏鼻祖 大將軍邦傑下 舊有缺世 今考其新譜別編 始於大將軍下 繼以 子門下侍中 國信 子門下侍郞 礪仲 子內史侍郞 輔平 子僉議中贊 憲思 子平章事 武成 子參知議事 慶立 子中書令 石昌 子內史令 弼夢 子門下侍中 弘美 以吾始祖 護軍公 書於弘美弟行 而註以順興安氏始祖 以爲得於順興刊板舊譜云 此所謂舊譜迺吾安之所不知者也 若有此舊譜 則何不出於 前後修譜時耶 其言固無稽 其所錄 亦傳疑之例 而旣有刊行文字 恐爲百世之疑 故玆以卞明焉
《을유보(乙酉譜, 1765)》에서 이르기를, “광주안씨(廣州安氏) 비조(鼻祖)인 대장군 방걸(邦傑)의 아래에 빠져 있는 세대가 있었는데, 이제 그 신보(新譜)의 별편을 상고해보니, 대장군의 아래로부터 시작하여 아들인 문하시중 국신(國信)과 아들인 문하시랑 여중(礪中)과 아들인 내사시랑 보평(輔平)과 아들인 첨의중찬 헌사(憲思)와 아들인 평장사 무성(武成)과 아들인 참의지사 경립(慶立)과 아들인 중서령 석창(石昌)과 아들인 내사령 필몽(弼夢)과 아들인 문하시중 홍미(弘美)를 계속 썼으며, 우리 시조인 호군공(護軍公, 安子美)을 홍미의 아우 항렬에 써 놓고는 순흥안씨(順興安氏)의 시조라 주기(註記)하고, 이것을 순흥안씨의 판각한 구보(舊譜)에서 얻었다 하였다. 이들이 말하는 구보는 우리 안씨는 일찍이 알지 못하는 것이다. 만일 이러한 구보가 있었다면 어찌 전후에 수보(修譜)할 때 나오지 않았단 말인가. 그 말은 진실로 황당무계하며 그 기록 또한 의심스러운 것을 전하는 준례에 불과한데, 이미 간행한 문자가 있으면 백세(百世)에 의심할까 염려되므로 이에 분별하여 밝히는 바이다.”라고 하였다.
광주안씨 안방걸(安邦傑) - 국신(國信) - 여중(礪中) - 보평(輔平) - 헌사(憲思) - 무성(武成) - 경립(慶立) - 석창(石昌) - 필몽(弼夢) - 형 홍미(弘美)는 문하시중, 동생 자미(子美)는 순흥안씨 시조
2. 1830년 간행된 《순흥안씨족보 경인보(庚寅譜)》에 실려 있는 내용이라 하였으나, 이글의 원 출처는 1765년 간행된 《순흥안씨족보 을유보(乙酉譜)》의 범례에 실려있는 <전의록(傳疑錄)>의 내용을 인용한 것으로 보여 진다.
庚寅譜曰 廣州安氏 新譜 密陽板 別錄註卽 安順菴鼎福所著 有曰 廣州安氏自大將軍以下 典農寺尹 以上有缺世 原州宗人處大 往忠州順興安氏外孫金姓人家 見順興安氏刊版舊譜 則亦以廣州君爲始祖 其下系以十二代 屬之于典農寺尹 處大遂謄 送于宗中 宗中諸人 但見其所謄 不敢遽以專信 送宗人信亨 往見處大與之偕 往忠州金姓人家 則順興舊譜 已入於回祿中 其家亦移居 無處更問 今姑別錄 以俟後日云 族祖唐津公羽濟氏世乘亦曰 此舊譜似是丙午前本也 而第吾宗人亦有於忠州吾安氏外孫柳姓士人家得見 其板本所謄 護軍公以上九世而謄來者則此也 忠鄕之有此本審矣 豈前時 譜學不博 未能闡發故耶 廣州安氏之所不敢信者 亦未敢遽信 而姑錄之云 今姑竝記之
《경인보(庚寅譜, 1830)》에 이르기를 “광주안씨의 신보(新譜)인 밀양판(密陽版) 별록(別錄)의 주(註)는 바로 순암(順庵) 안정복(安鼎福,1712~1791)이 지은 것인데 여기에 이러한 기록이 있다. ‘광주안씨는 시조인 대장군(안방걸) 이하 전농시윤(典農侍尹) 이상에 빠진 세대가 있었는데 원주(原州)의 종인(宗人)인 안처대(安處大,1675~?)가 충주(忠州)의 위류면(團柳面)에 사는 순흥안씨의 외손(外孫)인 김씨 집안에 가서 순흥안씨가 간행한 구보(舊譜)를 보니 또한 광주군(廣州君)을 시조라 하였고 그 아래에 12대를 이어 전농시윤에 소속시켰다. 안처대는 마침내 이것을 등사하여 종중에 보내왔는데 종중의 여러 사람들은 다만 그 등사한 것만을 보고는 그대로 믿을 수가 없다 하여 종인인 안신형(安信亨,1692~1760)을 보내어 가서 보게 하였다. 안처대는 그와 함께 충주에 사는 김씨 집에 가보니 순홍의 구보(舊譜)는 이미 화재에 불타 없어졌고 그 집도 이사를 가서 다시 물을 곳이 없었다. 그러므로 이제 우선 별도로 기록해서 후일을 기다리는 바이다. 하였으며 족조(族祖)인 당진공(唐津公) 안우제(安羽濟, 1720-1784)씨의 세보(世譜)에도 또한 이르기를 이 구보(舊譜)는 《순흥안씨 병오보(丙午譜, 1546)》 이전의 본(本) 인듯하다. 다만 우리 종인 중에도 "충주에 사는 우리 안씨의 외손인 유씨 집안에서 그 판본에 등사된 호군공(안자미) 이상 9세(世)를 얻어 보고는 등사해 온 것이 있으니 바로 이것이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충주지방에 이러한 본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아마도 예전에는 보학(譜學)이 밝지 못하여 이것을 발견하지 못했는가보다. 광주안씨들도 감히 그대로는 믿지 못하는 것을 우리 또한 그대로 믿을 수 없으므로 우선 기록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지금 아울러 기록하는 바이다.
3. 《죽산안씨동원보(竹山安氏同源譜)》에 실렸다는 <농서이씨설>도 기록하고 있다.
竹山安氏同源譜云 有諱李瓊 一諱琬 中國隴西人 唐憲宗元和二年 新羅哀莊王七年 丁亥 與其弟璜 入我東 居松嶽山下時 有廣州人殺其主以叛 安瓊兄弟 挺身安國 瓊安國 故賜姓安氏 弟璜 以本姓移封固城 安瓊有子三人 長枝春 仲葉春 季花春 新羅景文王三年 甲申外亂 兄弟三人俱有平亂功 王以爲安國之臣 因更名曰 邦俊封竹山君 曰邦傑封廣州君 曰邦俠封竹城君 東方有安氏 自此始焉.
죽산안씨동원보(竹山安氏同源譜)에 이르기를, "휘(諱) 이경(李瓊) 또는 완(琬)은 중국 농서 사람이다. 당 헌종 원화 2년(신라 애장왕 7) 정해년(807)에 그 아우 황(璜)과 함께 우리나라에 들어와 송악산 아래에 거주하였다. 이때 광주인이 그 성주를 죽이는 반란이 일어나자, 안경(安瓊) 형제는 몸을 던져 이를 토평하여 나라를 편안히 하였다. 형 경(瓊)은 나라를 편안히 하였다 하여 안씨 성을 하사[賜姓]하고, 아우 황(璜)은 그대로 본성(이씨)을 갖고 고성(固城)에 옮겨 봉해졌다. 안경(安瓊)은 세 아들을 두었는데, 장자는 지춘(枝春)이요, 차자는 엽춘(葉春)이요, 막내는 화춘(花春)이었다. 신라 경문왕 3 년인 갑신년(864)에 외란(外亂)이 있었는데, 형제 세 사람이 모두 난리를 평정한 공로가 있었다. 왕은 나라를 편안히 한 신하[安國之臣]라 하여 이름을 고쳐[更名] 방준(邦俊)이라 하고 죽산군(竹山君)에 봉했으며, 엽춘은 방걸(邦傑)이라 하고 광주군(廣州君)으로 봉하였으며, 화춘은 방협(邦俠)이라 하고 죽성군(竹城君)에 봉하였는바, 우리나라에 안씨가 있게 된 것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하였다.
《상계소원록(上系溯源錄)》은 전주(全州)에 살던 종인의 가승(家乘)에서 나온 기록[此下事蹟出於全州宗人家乘矣]이라고 밝히고 있다.
참고 : 1923년 (구)죽산안씨 소부소감파 죽산안씨세보(竹山安氏世譜) http://cafe.daum.net/ahncham/DFic/5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