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징명(文徵明, 1470년~1559년)
문징명(文徵明, 1470년~1559년)은 중국 명나라의 문인·화가이다.
장쑤 성 사람으로, 글씨와 그림에 능하였는데, 산수·화조를 잘 그렸다.
명나라 4대가의 한 사람으로 불린다.
작품으로 <혜산다회도>, 시문집으로 <보전집(甫田集)>이 있다.
고궁(故宮)에서 소장한 명나라 4대가 심주(沈周)(1427-1509),
문징명(文徵明)(1470-1559),
당인(唐寅)(1470-1524),
구영(仇英)(약1494-1552)작품의 질이 아름다워 특별이
이번해 4대가 시리즈 특전을 추진하였습니다.
첫 분기는 심주(沈周)전, 두번째 분기는 문징명(文徵明)의 서화를 전시할 예정 입니다,
문징명(文徵明)는 장주(長洲)(현재 강소성 소주(江蘇蘇州))사람으로,
원래 이름은 벽(壁)으로 후에 자호를 이름으로 사용 하였습니다.
이름을 징중(徵仲)으로 변경하고 호는 형산거사(衡山居士),
정운생(停雲生)으로 사용하였습니다. 행실이 엄하고 관직을 얻기 위해 9번이나
시험을 보러 진경 하였지만 시험에 합격을 하지 못해 가정2년(1523)추천을 통해
함린원(翰林院)의 대조(待詔)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후에 관직 생활과 이념이 맞지 않아
가정5년(1526)관을 사직하고 시골에 내려가 시문서화에 노력하였으며
후에 많은 성취를 달성하였습니다. 문징명(文徵明)는 4대가중 제일 장수한 분에 한명으로
후손이 대를 잇고 제자가 많아 명나라 중후기의 서화에 많은 영향을 주웠으며
심주(沈周)과 오파(吳派)에 리더 였습니다.
문징명(文徵明)의 서법은 광림 전대에 유명하여고ㅡ 열심히 배움을 자세를 가진 분이였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꼭 글짜 연습을 하여고 죽을때 까지 이일을 게으르지 않았습니다.
각종 서체에 능하였으며, 작은 해석체(小楷)와 행서(行書)에는 개인 특색이 있었습니다.
작은 해서체(小楷)는 힘이 넘치는것을 볼수 있으며 90세가 될때까지 작품을 하였고
행서(行書)자테가 매우 힘이 넘쳐 흘렸습니다. 그리고 그의 작품은 행초서(行草書)가 제일 많습니다.
회화초 심주(沈周)을 스승으로 모셨으며 후에는 풍부한 가장과 광법의 교유에 영향하에
각 명가의 작품을 연마하여 자신만에 스타일을 구성 해냈습니다. 수먹, 설색에 능하여고,
수먹의 먹색 층차 변화가 생동감이 있습니다. 설색은 청녹으로 물론 선명한 색채이지만
선명하고 우아한 운미를 재현하고 있습니다. 필법이 가늘고, 두거운 2가지 모습을 볼수 있는데요,
가늘것은 생동감이 있고 두거운 것은 노련함이 느껴지며 서와 화에 능하였으며
회화중에 서법의 재미를 느낄수 있습니다. 회화 주제는 대부분이 산수 위주로 진행이 되었고
가끔 인물, 화조, 간단, 심온, 문인의 아름다운 신태를 재현 하였습니다.
이번 전시는 서법과 회화 두부분으로 나누는데요.. 서법은 「서법 발전」과
「서법 인화」두 단위로 진행이 되고 서풍에 변화와 서법과 회화에 대한 영향에 대해
설명을 할 예정입니다. 회화는 「회화 발전」,「방고 스타일」「일고다본」과「화조인물 」4
단위로 진행이 되며, 산수화에 다른 단계에 다양한 스타일 특색을 재현하고 있으며,
양이 적고 질이 높은 화조,인물 화작품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문징명(文徵明, 1470~1559)은 명대의 서화가로서 초명이 벽(壁) 또는 벽(璧)이었으며, 자는 징명(徵明)이었으나 후에 징중(徵仲)으로 고쳤다. 호는 형산(衡山)이며, 장주(長洲 : 蘇州) 사람이다. 온주지부(溫州知府) 아버지 문림(文林)의 주선에 의하여 시문을 오관(吳寬), 그림을 심주(沈周), 글씨를 이응정(李應禎)에게 배웠다. 이 세 사람은 모두 아버지의 친구로서 당시 뛰어난 명사였다. 이후 징명은 절차탁마하여 축윤명(祝允明), 당인(唐寅), 서정경(徐楨卿)과 더불어 오중사재자(吳中四才子)로 일컬어졌다. 처음에는 관로에 뜻을 두고 26세 때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였고, 이후 아홉 번이나 낙제함으로써 뜻을 펼치지 못하였다. 한때 시서화에 뛰어나 한림대조(翰林待詔)라는 직책을 받았으나 적응하지 못하고 3년 만에 사직, 귀향하여 90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재야의 인물로 활동하며 소주예원을 주도하였다.징명의 중자(中子)인 문가(文嘉)의 「선군행략(先君行略)」에 의하면, "아버지는 젊었을 때 글씨를 잘 못썼다. 그러나 힘써 배우며 송 원시대의 글씨를 모범으로 삼아 절차탁마하여 필의를 깨달았고, 이후에는 진·당의 글씨를 모범으로 삼았다. 소해는 왕희지의 황정경(黃庭經)과 악의론(樂毅論)을 따랐으며, 예서는 종요(鍾繇)를 모법으로 삼아 일세에 독보적이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만년에 이르러 승두체에 뛰어났으며, 심주(沈周)를 모방하여 황정견 풍의 대서를 잘 썼다. 시문집으로 「보전집(甫田集)」이 있으며, 「정운관첩(停雲館帖)」에 그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그의 장자 문팽(文彭)은 가학을 이어받아 각 서체에 두루 능하여 아버지와 비교될 정도였으며, 특히 전각의 비조로 이름이 높다. 북송대 소순, 소식, 소철의 소씨(蘇氏) 삼부자가 출현하여 문단을 풍미한 것처럼 명대의 문징명, 문팽, 문가의 문씨(文氏) 삼부자가 출현하여 서화각으로 일세를 풍미한 것이 참으로 흥미롭다.문징명의 작품 중에서 76세 때 행초서로 쓴 「천자문」이 일품이다. 「명산장(名山藏)」 권95에 의하면, 그가 소주부학(蘇州府學)의 학생신분이었을 때 매일 천자문을 열 번씩 임사하며 글씨를 연마하였고, 이후에도 각 서체로 천자문을 계속 쓰며 서법을 수련하였다고 한다. 집자성교서와 지영의 천자문의 필법이 강하게 드러나 있는 유려한 행초서로 좋은 서학자료이다.여기에 소개하는 행서시권은 권미의 관기에 '丁巳春三月卄日徵明書'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가정(嘉靖) 36년(1557) 징명의 나이 88세 때의 작품임을 알 수 있다. 미수(米壽)의 글씨라지만 그 기개와 골기가 결코 쇠하지 않고 여전히 굳건한 필력을 구사하고 있는 징명의 만년 수작이다. 필의는 황정견과 심주의 서풍을 따르고 있지만 황풍이 강하며, 뛰어난 필력과 결구을 구사하고 있어 송대 이래 황산곡의 영향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작품이다. 그 내용은 이전에 호구(虎丘)에서 아름다운 경치를 완상하며 읊었던 칠언율시 4수이다. 그 필치와 내용이 흡사 황정견의 송풍각 시권을 보는 듯하며, 같은 글자도 빈출하여 좋은 대비를 이룬다. 송풍각 시권과 이 행서 시권을 번갈아 임서해보면 그 취의처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