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비론과 양시론이 어떤 사태해결의 단초가 되고 사실 파악의 실상이 되기도 하나 어떤 때에는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는데 장애요인이 되기가 쉽다. 황희정승의 양시론은 관용과 열린 시각의 해석으로 대중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양시론과 양비론을 떳떳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모호한 태도는 기회주의자라고 매도하는 분위기 때문이다. 그러나 갈등이 많은 사회, 게다가 중재할 수 없는 사회 현상일수록 “한칼”을 선호하기도 한다.
양비론은 옳지 못하다, 양시론은 옳다, 그런 말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양쪽이 다 잘못되었다고 해도 문제의 핵심은 찾을 수 없고 양쪽이 다 옳다 해도 쉽게 실마리가 풀리는 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양시론과 양비론을 합치면 시비가 된다. 시비는 옳고 그름을 말하는 것이지 가리라는 것은 아닐 것이다. 만물이 다 시비를 가려야만 정의 사회가 실현되고 살 맛 나는 세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일례로 효 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유교문화는 그 특성상 사고방식, 언어양식, 행동방식, 사회현상 등등이 한국인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특히 명문 벌족으로 알려져 있는 양천허씨 들이 더욱 그러하다.
현대 유교문화의 특징은 효문화, 서열문화, 가족주의문화, 공동체문화, 예절문화 등을 바탕으로 깔고 있으며 우리 양천 허문은 숭조사상의 근본으로 “가전충효 세수청백”해야 한다는 선조의 유교로 행동규범이 정돈되고 후손들에게 잘 전수되어 명문 벌족의 반열에 서있다.
거기에 종중사를 의논하고 참여하고 결정하는 일에 시비를 가려서 한다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일까 생각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친린 화척 정신으로 족의를 다지고 혈연의 크기를 굳게 다지는 것은 화합이 최고의 가치인 것만은 틀림없다. 일가간의 화합을 마련하여 종중기틀을 다지는 일에 양비론과 양시론으로만 따지면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일이다. 화합이란 사전적 의미는 쌍방간에 마음이나 뜻을 모아 화목하게 어울린다는 의미이나 천지상합이 일어나서 일방적인 요구나 조치가 아닌 상대적인 포용이 있어야 진정한 화합이 있을 것이다. 다른 어떤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었으면 좋겠다.
“관용과 열린 시각” “역지사지”이런 단어들이 생각난다.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 생기고 일어나서도 안 되는 일이 생겨도 능히 온당하게 잘 처결한 우리 양천 허문이 아니었던가. 인터넷에서 본 글귀가운데 다섯 글자의 인생교훈이라는 글을 보니“①갈까 말까 할 때는 가라. ②살까 말까 할 때는 사지마라. ③말 할까 말까 할 때는 말하지 마라. ④ 줄까 말까 할 때는 주어라. ⑤먹을까 말까 할 때는 먹지 마라.”하는 글귀가 있었다. 한 번 되새겨 볼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