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까지 행해진 60년대 초반 한국영화들 연구는 그 시대의 대표적 감독인 김기영, 신상옥, 유현목 등에 대한 연구 중심이었고, 상대적으로 장르 영화에 대한 연구는 미약한 편이었다. 그 시기의 가장 대표적 장르였던 멜로드라마에 대한 연구는 <미워도 다시 한번>(1968)을 기점으로 시작되었고, <미워도 다시 한번> 이전의 멜로드라마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영화 연구의 한 부분이 영화를 통해 그 시대의 사회상을 통찰하는 것이라면, 이에 해당하는 연구는 장르 영화에 대한 연구일 것이며, 무수한 장르 가운데 영화와 60년대 초반 한국사회의 관계를 살펴보기에 가장 유용한 장르는 아마도 멜로드라마일 것이다. 멜로드라마는 60년대 초반 한국에서 가장 많이 제작된 장르였고, 대중에게 가장 인기를 끌던 장르였다.1) 60년대 초반 한국의 멜로드라마로 분류될 수 있는 영화들은 <로맨스 빠빠>(1960), <박서방>(1960), <삼등과장>(1961), <마부>(1961), <해바라기 가족>(1961), <가족회의>(1962), <로맨스 그레이>(1963) 등의 영화들이다. 이 시기의 멜로드라마는 주로 가족 묘사에 치중했는데, 그러한 경향의 대표적인 가족멜로드라마로는 <로맨스 빠빠>, <박서방>, <마부>, <로맨스 그레이> 등이 있다.
이 글은 이러한 가족멜로드라마에 대한 연구에 들어가기 앞서 이전의 연구자들이 이 영화를 어떠한 관점으로 다루었는지 살피기 위한 것이다. 필자는 장르의 정의 문제, 한국영화사에서 이 장르들이 차지하는 위치 문제, 한국 사회에서 이 장르들이 갖는 함의 등에 대한 논의를 중심으로 장르의 구분 문제, 장르의 역사적 위치 문제, 모더니티의 문제, 젠더의 문제로 나누어, 1960년대 초반 한국의 가족멜로드라마에 대한 비평적 쟁점들을 살펴볼 것이다.
장르 구분의 문제에서는, 60년대 초반 가족멜로드라마가 갖는 희극적 성격을 확장시켜 희극으로 규정한 김윤아의 논의를 소개한 후, 그녀의 논의와 타 연구자들의 장르 명명을 구분하고, 다시 이것을 서구 멜로드라마 정의와 비교할 것이다. 장르의 역사적 위치에 대해서는 60년대 멜로드라마와 50년대, 7/80년대 멜로드라마의 차이에 대해 언급한 이영일과 김소영의 논의를 소개하고, 그 논의가 갖는 의의를 살펴볼 것이다. 모더니티의 문제에서는 60년대 영화를 모더니티라는 관점에서 설명하려는 이효인, 김소영의 논의를 요약하고, 그들의 논의가 가지는 문제점들을 살펴볼 것이다. 젠더의 문제에서는 60년대 영화에서 나타나는 남성성의 불안에 주목한 김소영의 논의와 남성성의 변화에 주목한 김미현의 논의를 요약하고, 산업화 시대의 한국의 남성다움에 대한 조혜정의 논의와 연결시켜 볼 것이다.
1. 장르 구분의 문제
한국영화사를 최초로 정리한 이영일의 책에서 <박서방>, <마부>, <로맨스 빠빠>와 같은 60년대 영화들은 멜로드라마로 분류된다.2) 이후 김소영과 김미현의 논문에서도 이 영화들은 멜로드라마 혹은 가족멜로드라마로 불려졌다.3) 그러나 이들은 이 영화들이 서구의 멜로드라마와 어떤 공유점을 갖고 있는지 뚜렷하게 밝히지 않은 채 기존의 장르 구분에 따르고 있다. 60년대 영화들을 연구한 이효인의 논문에서는 이 영화들을 장르 연구의 선상에서 보지 않고, 근대에 대한 대응과 적응 방식에서 분류하고 있을 뿐이다.4)
60년대 초반 영화들의 장르 구분에 대한 논의는 김윤아의 논문에서 나타난다.5) 김윤아는<로맨스 빠빠>, <박서방>과 같은 영화들은 멜로드라마라기보다는 희극영화에 가깝다고 보았다. 상당히 자의적으로 멜로드라마를 정의한 김윤아는 희극영화의 특성을 유추하고 있다. 그녀는 멜로드라마가 가족 자체보다는 가족 구성원 개인에 더 관심을 보이는데 반해, 당시의 영화들은 가족 자체가 하나의 단위로 중심에 놓이고, 개개인의 심리보다는 가족간의 관계가 관심을 지배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멜로드라마가 가정을 배경으로 전개되기는 하지만 가족의 결합이나 가정의 회복을 목적으로 삼지 않는데 반해, <로맨스 빠빠>, <박서방>과 같은 영화들은 가족의 결합이나 회복을 목적으로 삼기 때문에 멜로드라마와는 다르다고 보았다.
그녀가 멜로드라마라는 장르 구분을 버리고 가족희극영화라는 개념을 따른 또다른 이유는 당시 영화들의 인물이 전형화되어 있다는 데 있다. 즉, 당시 영화들의 인물이 가족 안의 배역에 따라 상투적인 연기를 한다는 것이다. 또 멜로드라마는 어떤 특정 관객층을 상대로 하지만, 가족희극영화는 보편적인 사람들에게도 친밀감을 가질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멜로드라마는 하나의 이야기에 집착하지만, 가족희극영화는 여러 하위 플롯들을 내포하고 있다고 보았다.
서구의 영화사에서 멜로드라마가 하나의 장르로서 공고하게 확립되어 있지 않다는 비판이 여러 연구자에 의해 지적되어 왔다.6) 멜로드라마가 내포한 장르적 특성의 흔적이 다른 많은 장르들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정재형에 따르면 60년대 초반 가족멜로드라마가 희극의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에 본격 희극 장르와 여러 측면에서 공유된 특성이 있다고 한다.7) 그러나 김윤아가 발견한 특성들은 희극보다는 멜로드라마 장르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인데, 그 이유는 아래와 같다.
서구의 멜로드라마는 부르조와 계급이 귀족 계급에 맞서서, 귀족 계급이 향유하던 왕조적이고 신화적인 신성보다 가족과 도덕적 가치에 초점을 맞추면서 발전했다. 이때부터 드라마에 나타난 사회적 위기는 가정 안에서 매개되었다. 멜로드라마는 가족간의 갈등, 가족간의 의무와 사랑 등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등장인물들에게 초보적인 심리적 역할만을 주었다. 또한 멜로드라마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에서 소외된 남성 주인공이 가정 안에서 만족을 찾을 수 있도록 내러티브를 구성했다. 멜로드라마의 사회적인 기능은 가족 관계의 회복과 결합에 있었다.8) 김윤아는 여성 주인공의 좌절을 그린 여성멜로드라마에서 멜로드라마의 특성을 찾은 것이다. 너무나 협소한 정의에서 김윤아가 출발했기 때문에, 60년 초반 영화들이 멜로드라마의 특성에서 이탈했다고 본 것이다.
또 멜로드라마의 주인공이 희생자로서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을 설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단순히 특정 관객층을 상대로 한다는 지적은 잘못된 것이다. 그리고 60년대 가족멜로드라마의 공통된 주제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에서 무력해진 가장에 초점을 맞춘 것이고, 영화의 플롯들이 위기에 처한 가족의 회복을 위해 기능한다면, 단순히 병렬 플롯이라고 해서 희극영화라는 설정은 잘못된 것이다.
김윤아가 60년대 영화들을 희극 장르로 규정하기 위해 영화의 특성들을 기술한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영화들의 멜로드라마적 특성들을 드러낸 결과가 되고 말았다. 이러한 특성들은 역사적 배경이 다른 60년대 한국의 영화들이 서구 멜로드라마의 특성과 만나는 지점이고, 서구 멜로드라마 이론과 비교연구가 가능한 통로가 될 것이다.
2. 멜로드라마의 역사적 위치
1960년 초반 가족멜로드라마는 한국영화사에 있어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까? 이전까지 영화연구자들은 영화사 전반에 걸쳐 가족멜로드라마를 통찰하기보다는 멜로드라마라는 장르 안에 잠재하는 역사적 차이를 통해 가족멜로드라마를 고찰하고 있다. 이영일은 60년대 초반 가족멜로드라마가 50년대 후반과 60년대 후반의 멜로드라마와 다른 경향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9)
50년대 후반 <자유부인>(1955)을 기점으로 한 멜로드라마는 시대풍조와 유행에 민감했다. 전후 한국사회는 자유주의 사상의 유입으로 당시 영화에는 변해가는 사회상과, 옛것과 새것사이의 균열과 갈등이 반영되어 있었다. 반면 60년대 초반 멜로드라마는 서민층의 생활 또는 가정을 중심으로 한 생활현실을 투영했다. 이러한 영화들로는 <해바라기 가족>(1961), <가족회의>(1962), <로맨스 그레이>(1963> 등이 있다. 이 영화에서 김승호, 황정순 등의 중년 서민 이미지와, 최은희, 도금봉 등의 생활력 있는 젊은 아내와 애인 이미지는 당시 관객들에게 호소력이 있었다.
이러한 멜로드라마의 경향이 60년대 중반에 이르면 사랑에 실패한 여성이 가정 밖에서 겪는 어려움을 그린 신파극 형식으로 바꿨다. 복고조의 통속물은 <미워도 다시 한번>(1968>의 흥행 성공으로 정점을 이뤘다. 이영일은 이러한 신파 멜로드라마가 60년대 초반 멜로드라마의 건전한 성격과 견주어 볼 때, 한국 사회의 근대화 과정 중 대중들의 심리 속에 있는 퇴영성과 무위성을 반영하고 있다고 보았다.
한편 김소영은 멜로드라마가 한국 사회에서 근대화와 유교적 가부장제 문화간의 경쟁적인 국면에서 정체성을 구성하는 도구로 기능했다고 보았다.10) 한국에서 멜로드라마는 쿼터 시스템 아래에서 만들어졌고, 국가 이데올로기를 지원하는 역할을 하였다. 60년대 멜로드라마에서 근대화와 더불어 전통적인 가부장적 특권을 잃을 것이라는 남성성의 위기는 장남 주도의 새로운 질서로 극복되었다. 멜로드라마는 가족과 국가에 적합한 주체성을 끊임없이 상기시켰고, 가족과 국가의 복원을 위해 노력했다.
7/80년대의 멜로드라마는 섹스 산업에 종사하는 호스테스들에게 초점이 과도하게 맞춰졌다. 호스테스 멜로드라마는 당시 여성의 문제를 다른 '그 무엇'으로 치환하기 위해 만들어졌는데, 중심 주제는 노동계급 여성의 타락이었다. 이러한 여성 노동자의 현실은 가족과 국가라는 틀에 부적당한 것으로 형상화되었다.
60년대와 7/80년대 멜로드라마를 관통했던 것은 국가와 가족에 적합한 주체성과 그렇지 못한 주체성 간의 구분이었다. 이 기준에서 본다면 60년대 멜로드라마에서 형상화하고 있는 인물들은 시민권을 획득한 사람들이었고, 70, 80년대 멜로드라마에서 형상화하고 있는 인물들은 시민권을 박탈당한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이영일과 김소영의 논의는 멜로드라마의 역사에서 각 시기의 영화들이 차지하는 위치, 영화와 사회가 만나는 지점에 대한 고찰을 담고 있다. 그들의 논의는 영화를 역사 속에 위치시킴으로써 영화를 거시적인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게 한다. 이것은 컨벤션을 갖고 있는 장르 영화일 경우 장르의 역동적인 모습을 볼 수 있게 한다. 장르의 컨벤션 체계는 구태의연한 정적인 체계가 아니라 각 시기의 사회상에 따라 영향을 받는다. 멜로드라마의 내러티브와 캐릭터들은 각 시기마다 다른 양상들을 보이는 것이다.
3. 모더니티의 문제
60년대 한국 영화에 접근하는 방법 중 두드러진 관점은 모더니티의 문제로 영화를 바라보는 것이다. 60년대라는 시기가 '근대화' 담론이 한국 사회에 광범위하게 유포되기 시작한 때라는 점을 상기해보면, 이러한 관점은 상당히 그럴 듯 해 보인다. 60년대 영화의 내러티브에는 전통과 근대의 문제가 상당 부분 뒤엉켜있고, 어떻게든 사회적인 혼란을 가정 안에서 해결하려는 의지가 내러티브를 관통하고 있다.
이효인과 김소영은 60년대 영화를 모더니티의 문제로 보고자 한다. 이효인은 60년대의 다양한 영화들이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 모더니티와 모더니즘의 문제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살피고 있고, 김소영은 모더니티의 영화적 경험이라는 문제설정을 통해 모더니티의 상호 모순적인 측면이 내러티브와 영상에서 어떻게 형상화되는가 논의하고 있다. 이러한 논의 중에서 60년대 초반 가족멜로드라마에 초점을 맞춰 이들의 논의를 살펴보자.
이효인은 <마부>와 <박서방>에서 근대에 대한 등장인물들의 태도를 영화의 내러티브에서 중요하게 살피고 있다.11) <마부>의 주인공, 춘삼의 직업은 마부이다. 운송수단의 변화로 마부는 전근대적인 직업이 되었다. 춘삼의 가족은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변화로 어려움에 직면해 있었다. 그러한 어려움은 장남의 고시합격을 통해 최종적으로 해결된다. 이효인은 <마부>의 내러티브적 해결을 근대에의 '회의없는 적응'이라고 평가한다. 이효인은 60년대 영화에서 근대에 대한 비판이 얼마나 유효적절하게 묘사되었는지를 비평의 관점으로 삼고 있다. 근대에 대한 예술의 반응이 보들레르처럼, 미학적 영역이 사회의 세속화를 극복하거나 초월해야한다고 이효인은 보았다. <마부>에서 장남의 고시합격으로 인한 가족의 신분상승이 갖는 의미는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변화를 통해 겪었던 가족의 어려움을 전도시키고 있는 것이었다.
이효인은 <박서방>에서 근대에 대한 대응방식에 있어 세대 차이의 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박서방>에서 주인공 박서방과 그의 자식들은 자유연애라는 문제로 대립한다. 박서방은 딸들의 자유연애를 인정하지 않는다. <박서방>에서 내러티브의 중요한 갈등은 딸들의 아버지에 대한 반발과 그에 따른 가족의 위기다. 이효인은 이것을 근대에 대한 시각의 차이로 보고 있다. 박서방에게 근대란 부박하고 위험한 것인 반면, 자식들에게 근대란 이전의 불합리하고 비생산적인 것을 청산할 수 있는 것이다. 내러티브에서 갈등의 해결은, 작은 딸 명순의 혼인문제로 겪게 되는 가족 지위상의 문제에서 박서방이 자식들을 인정하는 것으로 풀린다. 이효인은 박서방의 성격에서 모더니즘 예술의 주제인 근대에 대한 성찰과 비판을 찾고 있다. <박서방>에서 근대에 대한 불안과 역겨움은 박서방의 심리를 통해 드러나고, 영화에서 그러한 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는 점에서 <박서방>은 모더니즘을 파악할 수 있는 유효한 텍스트로 평가된다.
이효인은 60년대 한국영화에서 나타난 모더니티에 대한 논의를 모더니티에 대한 반발과 성찰을 담고 있는 모더니즘의 관점에서 하고 있다. 영화에 나타난 근대성은 모더니티에 대한 적절한 비판을 하고 있을 때 성취될 수 있다고 이효인은 본 것이다. 이효인은 <마부>나 <박서방>과 같은 영화들이 모더니티와 관련된 내러티브를 갖고 있지만 모더니즘적인 측면이 결여되어 있다고 보았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마부>는 모더니티에 대한 회의없는 적응과정을, <박서방>은 모더니티에 대한 세대 차이를 부각시키면서 구세대의 부적응에서 기인한 모더니티에 대한 반발을 그렸다.
김소영은 한국에서 영화가 근대적 계몽의 프로젝트로 기능했다고 본다.12) 영화라는 장치는 근대 산업화의 산물이지만, 한국의 영화 수용은 외부 세력의 강제적인 경제적 정치적 개항 압력을 받아 세계 시장으로 편입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서구의 현대를 한국민에게 전해주는, 서구에서 동방을 비추는 예술로 감지되었다. 김소영은 서구에서 모더니티의 전도사로 들어온 영화가 한국에서 근대화 시기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 관심을 갖고 60년대 영화를 대한다. 서구 역사에서 모더니티가 수행한 역할을 논한 먀살 버만(Marshall Berman)의 틀로 김소영은 한국 영화를 분석한다. 버만은 공산당 선언의 구절인 "견고한 모든 것은 공기 속으로 녹아 사라진다"는 것을 모더니티의 속성으로 보았다.
김소영은 전통적인 관습과 관계들을 해체하는 모더니티의 속성으로 60년대 한국 영화를 바라본다. 60년대 한국영화에서 나타나는 전통과 근대의 대립은 모더니티의 역동적인 모습에서 찾을 수 있다. 모더니티의 상호 모순적인 측면, 즉 진보와 발전에 대한 희망과 전통의 해체에 따른 불안 가운데, 60년대 영화는 모더니티의 어떤 측면을 의미화하고 있는가가 김소영이 관심을 갖는 화두이다. 김소영은 <마부>의 마차, 화물차, 버스, 시발 택시 등의 전근대적인 교통수단과 근대적인 교통 수단이 교차하는 광경에서 당시 사람들의 일상과 경제적인 모습을 유추해낸다. 그리고 <마부>에 등장하는 인물들에게서 전근대적인 모습과 근대적인 모습을 찾고 있다. <마부>가 장남의 고시합격을 통해 해피엔딩으로 끝을 맺고 있지만, 김소영이 주목하는 이 영화의 중요한 장면은 마부가 자본가의 차에 치여 다리를 다치고 말을 빼앗기는, 전근대적인 생산수단을 임대한 고용인의 현실적인 모습이다.
김소영은 면밀한 텍스트 분석으로 들어가 모더니티를 다루고 있지는 않지만, 60년대 영화를 모더니티라는 관점에서 다루기 위해 마샬 버만의 논의를 빌어온 것이다. 버만에게 모더니즘은 전통적인 모든 관습을 해체시키는 모더니티의 역동적인 힘 속에서 모더니티의 주체가 되거나 대상이 되는 시도 양자이다.13) 모더니즘은 자아실현에 따른 자기 영역의 확장을 뜻하는 동시에 고립감과 혼란, 동요와 불안의 경험을 뜻하기도 한다. 이러한 모더니티의 양면성 속에서 김소영은 영화에 나타난 모더니티를 평가한다.
이효인과 김소영의 모더니티 논의가 서구 학계에서 논의된 것을 빌려오고 있지만, 조혜정의 모더니티 논의는 한국의 모더니티가 서구와는 다른 과정 속에서 진행되었다고 보기에 이들과 변별점을 지닌다.14) 식민지적 경험을 한 한국과 같은 제3세계에서 모더니티는 모든 전통적인 것을 산화시키는 합리화의 과정으로 진행되지 않았다. 외세 의존적인 상태에서 자본주의를 하려할 때 초반에는 외부에 연줄을 잘 대어 돈을 끌어들여 사업을 차리는 브로커들이 나올 수밖에 없었는데, 이러한 브로커들은 고정된 권력 구도 속에서 권력과 연줄을 통해 부를 축적했다. 이러한 사회 구조에서 생존 전략은 합리적인 양상을 띠지 않았으며, 도둑질을 해서라도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가장 중심의 가족주의 이데올로기를 심어놓았다. 가족은 전통적인 친족 중심체와는 다른 배타적인 모습을 띠었으며 특권을 나눠먹기 위한 인맥 결탁 관계에서 만족을 얻으려는 신분 의식을 고양했다. 한국의 근대사는 합리성이 빠진 도구화의 과정이었으며, 그러한 과정에서 파생되는 소외는 '믿을 것은 가족 밖에 없다'는 가족주의로 보상받았다. 가족주의는 생존에 허덕이다가도 여유가 생기면 결혼식, 회갑연에서 신분을 과시하기 위해 애를 쓰는 것처럼, 신분의식과 깊은 관계를 가졌다.
조혜정의 논의는 한국의 근대사에서 계급 못지 않게 가족과 신분 문제가 중요하다는 사 실을 지적한다. 이러한 사실은 앞서 이효인이 <마부>를 근대에 대한 회의없는 적응이라고 비판하고, 김소영이 <마부>에서 장남의 고시합격이 어떠한 내러티브 상의 해결점도 갖지 못한다는 점을 지적한 것과 차이를 갖는다. <마부>의 내러티브 갈등들은 장남의 고시합격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 당시 관객들에게 그럴듯하게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권력에 가장 근접한 자리는 바로 신분으로, 신분의식은 가족의 정체성을 바로 잡고, 권력의 비호 아래 자본에 접근하기도 용이하기 때문이다. <박서방>에서 박서방이 자신의 가치관을 바꾸게 된 결정적 계기도 자신의 계급 정체성이라기보다는 가문이 별 볼 일 없다는 비난 때문이었다. 삶에서 중요한 문제는, <박서방>의 경우, 경제력보다 신분 문제로 귀결된다. <박서방>에서 성대한 결혼식 장면은 바로 박서방 집안의 위세를 뜻하면서 모든 갈등을 해소하고 있다.
4. 젠더의 문제
앞서 살펴본 모더니티의 문제는 영화의 전통/근대라는 '시간' 대립쌍과, 동양/서양, 농촌/도시라는 '공간' 대립쌍의 문제로 귀결되었다. 이러한 대립쌍은 젠더의 문제에서도 나타나는데, 여성은 근대적이고 서양적인 가치관을, 남성은 전통적이고 동양적인 가치관을 지닌 것으로 묘사되었다. 김소영은 이러한 대립쌍이 60년대 한국영화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작동하는 질서라고 보았다.15) 김미현은 50년대 멜로드라마인 <자유부인>에서 여성성은 서양적/부정적 가치로, 남성성은 전통적/긍정적 가치로 묘사되었고, 이후 한국영화에서 이러한 구분이 끊임없이 재현되었다고 보았다.16)
그러나 김미현은 60년대 가족멜로드라마에 표상된, 근대화 과정 가운데 발생한 가족 관계와 성적 역할의 변화에 주목한다.17) <마부>, <박서방>, <로맨스 빠빠> 등에서 김승호가 연기하는 아버지 상은 전통적인 가부장과 상당히 차이를 갖는다. 사회의 변화에 크게 좌우되지 않는 어머니, 믿음직한 장남, 새침떼기 막내딸 등 다른 가족구성원들이 전형적 역할로 재현되는 것과 달리 아버지 상은 엄격하고 완고한 이미지가 아니라 경제적으로 무능하지만 자식에 대해 희생적인 애정을 마다하지 않는 이미지로 재현된다. 영화에서 무시된 어머니의 역할이 아버지에게 전이되며, 희생적, 신파적 측면은 그러므로 아버지에게 집중된다. 김미현은 이러한 것들이 국가에 대한 은유로서, 나약하고 감정적인 아버지나 남성을 통해 국가의 운명에 대한 자기 연민적인 재현에 가깝다고 보았다. 김소영은 60년대 초반 멜로드라마에서 이러한 측면이 근대화와 더불어 가부장적 특권을 잃을 것이라는 남성성의 불안을 나타낸다고 보고, 그것은 그의 아들이 현대 사회에 성공적으로 진입함으로써 대체되고 보상받는다고 보았다. 김소영은 이러한 부자관계의 부상에 초점을 맞춘다.18)
이러한 남성성 재현의 변화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서구의 멜로드라마 이론에서 멜로드라마는 주로 희생자에게 초점을 맞추는데, 주인공이 남성일 경우 근대화의 불가피한 희생자로서 가정을 이끄는 가장이 등장한다. 이러한 멜로드라마들로는 <이유없는 반항 Rebel Without a Cause>(1955)과 <실물보다 큰 Bigger than Life>(1956) 등이 있는데, 이러한 영화들은 위기에 처한 남성성을 묘사하고 있다. 로라 멀비에 따르면, 멜로드라마에 나타난 성적 차이는, 가족이 살아남기 위해서 타협점을 찾아야 하는데, 그 결과 남성이 가족의 가치를 깨닫는 지점에서 발생한다고 보았다. 갈등을 성공적으로 해소하기 위해서 남성은 가정의 영역에 적합한 기준에 따라 행동해야 하고, 이런 식으로 그는 덜 남성적이 되며 그 과정에서 여성화된다는 것이다.19)
60년대 가족멜로드라마에 나타난 성적 역할의 모호함은 남성성이 가족관계에서 타협점을 찾기 위해 여성화된 지점에서 연유한다고 김미현은 보았다. 사회적으로 소외된 가장은 가정 안에서 소외를 보상받기 위해 가족 구성원들의 가치관을 이해하려 한다. <박서방>에서 가부장은 새로운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에서 소외되면서 딸들의 자유연애를 인정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갈등의 해소를 지배적인 계급에 편승한 장남의 부상에 주목한 김소영의 논의는 변화된 남성성의 영역을 간과하고 있다. 김미현이 변화된 아버지 상에 주목한 것처럼, 60년대 한국의 멜로드라마에서 아버지와 장남간의 차이는 엄연히 존재한다. 조혜정은 현대 한국 사회의 남성다움을 이야기하며, 비교적 빠른 시일 내에 본격적인 산업화 단계에 들어선 한국 사회에서 남성들은 책임있는 가장으로, 믿을 수 있는 고용원으로 새롭게 태어날 것이 요구되었다고 보았다.20) 실제 전통 사회에서 이상적 남성은 명분주의적이고 이상주의적이면서 현실 생활에서는 상당히 나약하고 상호 의존적인 인간이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특수한 인간관계(정과 의리)를 중시하는 사회성이 높은 남성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측면은 현대적 '남성다움'과 전통적 '남성다움'의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남성성의 역사적인 차이는 젠더에 따른 영화적 구성이 각 시기마다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이러한 변화는 전통과 근대, 동양과 서양의 이분법을 따라온 남성과 여성의 구별이 60년대 멜로드라마에서 변화하는 것을 보여준다. 남성은 전통과 동양적인 가치로 재현되는 모습에서 탈피해 근대적이고 서양적인 모습으로 재구성된다. 더불어 근대적이고 서양적인 가치도 긍정적인 것으로 변화된다.
나오며
앞에서 살펴본 장르 구분의 문제, 장르의 역사적 위치 문제, 모더니티와 젠더의 문제를 하나의 캐터고리로 묶는다면, 결국 모더니티의 문제로 국한될 수 있다. <로맨스 빠빠>, <박서방>, <마부>와 같은 60년대 한국 영화가 멜로드라마인지 리얼리즘 텍스트인지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영화들을 멜로드라마로 분류하는 것은 모더니티라는 문제 설정에 상당히 유용하기 때문에 멜로드라마의 이론틀을 일단 빌려오자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멜로드라마의 소재, 인물, 내러티브는 한국 사회의 모더니티와 영화, 관객의 관계에 따라 역동적으로 변화했다. 영화는 각 시기마다 관객들의 정체성에 영향을 주거니, 또는 사회 상황에서 영향받아 제작되었을 것이다. 모더니티의 문제에서 전통과 근대, 남성과 여성이라는 대립쌍은 한국의 멜로드라마에서 중요한 의미화 수단이자 관객에게 정체성을 할당하는 수단이었다.
본론에서 다룬 김윤아, 이영일, 김소영, 이효인, 김미현의 논의는 60년대 초반 한국영화에 대한 연구가 풍부하지 못한 현실에서 아주 유용한 자료였다. 60년대 한국영화를 연구하고자 하는 이들은 아마도 그들의 논의에서 출발점을 찾아야 할 것이다. 필자의 논의가 그들의 논의에 비판적으로 보였다면 아마도 그것은 필자가 학문적으로 미성숙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글의 의도는 이전까지 60년대 초반 한국의 멜로드라마에 대한 비평적 쟁점들을 정리하는 것이었고, 그 와중에서 다른 학계의 논점들과 접합점을 찾아보고자 한 것이다. 그들의 비평에서 나타난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것보다는 공유점을 찾아내고 자료를 쌓아가는 것이 한국 영화연구에서 필요한 부분일 것 같다.
필자가 보기에, 60년대 초반 한국의 멜로드라마 캐릭터와 내러티브들은 서구의 모더니즘 이론서보다 한국의 근대 사회를 훨씬 잘 표현하고 있다. 서구의 모더니즘 이론서는 분석에 유용한 개념틀을 제공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한국사회에 그대로 적용되지는 않는다. 60년대 한국 사회를 연구한 학자들에 의하면 한국에서 근대화는 서구와 다른 과정을 겪었다고 한다. 계급보다는 신분이, 개인보다는 집단이 중요하게 자리잡고 있었고, 그것은 산업화를 저해했던 것이 아니라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다. 이러한 상호모순적인 측면을 해결해 주는 것이 멜로드라마의 사회적 기능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측면을 멜로드라마 연구에서 중요한 과제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가령 60년대 멜로드라마에서 신분 상승으로 인해 갈등 요소들이 해결되는 것과, 전통적인 가치관에서 벗어난 남성 캐릭터의 모습 같은 상호 모순성을 설명하는 것이 그러한 과제로 설정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