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목련과 동백꽃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다.
우리가 봄을 기다리는 것은 꼭 추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뿐만 아닐 것이다. 우리가 봄을 그토록 기다리는 이유 중의 하나는 꽃을 보기위해서가 아닐까?
무채색 죽음의 색깔로 우리의 중추신경을 자극할 만한 색깔이 전혀 없는 겨울 풍경은 어쩌면 과거의 색 바랜 흑백사진 이고 산하가 푸른 생명의 색깔로 바뀌고 그 속에 알록달록 꽃이 피는 봄 풍경은 현재 벌어지고 있는 총천연색 축제 사진인 것이다.
사람들은 축제를 기다리듯이 봄을 기다리고 꽃을 기다린다.
뜰에 심을 묘목을 사러나가는 나에게 아내는 백목련 묘목을 꼭 사오라고 다짐을 한다. 아내는 백목련을 좋아해서 정원을 가지게 되면 백목련을 심을 것이라고 전부터 말해 왔던 터라 그 자리에서 박절하게 거절하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나의 뜰에 백목련만큼은 심고 싶지가 않다. 그러마하고 건성으로 대답을 했지만 사오지 않았다. 왜 사오지 않았느냐는 아내의 성화를 적당히 얼버무리고 말았다. 언젠가는 아내도 나와 공감하고 나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리라.
백목련은 남의 집 담장너머로 잠깐 잠깐 감상하기에는 좋은 꽃이기는 하나 내 안뜰에 심어놓고 처음부터 끝까지 장시간 바라보기에는 부담스러운 꽃이다.
백목련은 겨울동안 갈색 껍질 속에서 겨울잠을 잔다. 그러다가 아직 매서운 한기가 가시지 않은 겨울의 끝자락부터 잠든 가지 끝에 작은 꽃봉오리가 맺히고 겨울한기의 매서움이 누그러짐에 따라 사춘기 소녀 젖가슴처럼 꽃봉오리가 차츰차츰 부풀어 오른다. 때가 되면 뽀송뽀송한 흰털이 덮인 연갈색 껍질을 뚫고 싸늘한 하늘을 배경으로 정말 꿈처럼 피어난다. 백목련은 그렇게 막 피기 시작 할 때가 가장 순수하고 아름답다. 마치 예쁜 소녀가 계곡 맑은 물에 갓 세수한 맨 얼굴을 쳐 든 것처럼 순수하고 싱싱하다. 그리고 활짝 핀 모습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꽃 중의 여왕이라는 백합보다 더 고귀하고 화사하여 맑은 하늘아래 환하게 만개한 모습을 보면 마치 내가 푸른 하늘로 날라 오르는 듯 기분이 환해진다. 어느 시인은 사월의 백목련을 정갈하고도 도도한 맵시라고 표현하였다.
하지만 내가 백목련을 나의 뜰에 심지 않는 이유는 떨어질 때의 모습이 너무 처참하게 추하다는 것이다. 백목련이 질 때는 참으로 보기가 민망할 정도로 추하다. 이러한 민망함을 해마다 겪어야 하는 것이 백목련을 쉽게 나의 안뜰에 심지 못하는 나의 부담스러움이다.
덩치가 큰 백목련 꽃잎은 벚 꽃잎처럼 나풀나풀 허공을 유린하는 꽃비가 되지도 못하고 도화처럼 시냇물에 동동 흘러서 이상향의 소재도 알리지 못한 채 담 너머 호박 떨어지듯이 그냥 툭 떨어지고 만다. 떨어져서는 바나나 껍질처럼 통째로 시꺼멓게 썩어 들어가고 비라도 내리면 그 추함은 절정에 달한다. 비 오는 봄날 봉곡사 앞뜰에 떨어져 흐무러지고 있는 백목련의 모습은 차라리 보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다. 썩어 널브러져 뒹구는 모습이 마치 마음속으로 동경하던 아름다운 여인이 천박한 시정잡배와 어울리며 타락해가는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추하다 못해 배신감까지 들었다.
나는 떨어진 꽃까지 아름다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렇게 욕심 많은 사람은 아니다. 비록 떨어진 꽃일지라도 한 때 아름다움을 품었던 꽃이었다면 꽃으로서의 작은 자존심이라도 지키기를 바라는 것이다. 인간사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한 때 품었던 고귀함을 헌 신짝처럼 버리고 최소한의 자존심도 지키지 않은 채 그냥 시류에 영합하여 타락해 가지 않는가?
같은 시기에 피었다가 지는 동백꽃을 보라.
동백꽃은 꽃잎 낱개로 하나하나 떨어지지 않고 꽃송이 통째로 떨어진다. 그리고 떨어져서도 얼마동안은 꽃다움을 잃지 않는다.
동백꽃은 하얀 눈 속에 붉게 피는 그 모습도 보기 좋지만 떨어질 때 미련 없이 질질 끌지 않고 통째로 댕강 떨어지는 모습이 좋아 동백을 좋아 하는 지도 모른다. 사월의 백목련을 정갈하고 도도한 백목련이라고 노래한 시인은 동백을 붉은 그리움으로 멍울진 동백이라고 노래했다. 동백꽃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정서에는 그리움의 대명사가 된 모양이다. 하지만 왜 동백이라고 그리움에 대한 미련이 없었겠나? 꽃잎 하나 떨어뜨리고 벌을 유혹하고 꽃잎 하나 떨어뜨리고 또 나비를 기다리고 싶은 마음이 왜 없었겠냐 말이다. 하지만 갈 때가 되면 미련 없이 가는 것이다. 동백꽃의 이런 모습 때문에 일본사람들이 좋아하고 모가지 채 댕강 떨어지는 꽃이기에 사무라이꽃이라고 부르기도 한단다.
우리는 때를 놓치고 질질 끌다가 끝내 추한 모습을 보일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동백꽃에서 되지 않는 미련을 버리고 담박하게 포기하는 미덕을 배운다.
그리고 동백꽃은 땅위에 떨어지고도 며칠정도는 가지위의 모습이나 별반 다를 바가 없다. 떨어진 꽃이지만 꽃의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는다. 떨어지자마자 흐무러져 타락하는 백목련에 비해 얼마나 배포있고 자존심이 강한 꽃인가? 꽃이란 피는 모습이 좋았다면 지는 모습도 그렇게 추하지는 않아야 한다.
나는 막 피어나는 백목련의 모습을 너무 사랑한다.
그래서 나의 안뜰에는 백목련을 심지 않는다.
백목련은 반드시 떨어진 꽃이 보이지 않는 높은 담장 너머로 볼 것이로다.
첫댓글 목련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이 있구먼
올해엔 날씨탓에 동백이랑 매화랑 죽어서 꽃도 별로 볼수 없구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