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호와 <대동여지도>

김정호의 초상화
김정호가 없었더라면 한국의 지리학계는 서양의 지리학자들에게 참으로 면목이 없었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이미 15세기에 <동국지도>라는 세계적으로 뛰어난 지도를 제작한바 있는 문화 민족이면서도, 왜란과 호란을 치른 이후 그것에 대신할 수 있는 자세하고 분명한 지도 한 장 제대로 제작하지 못했다. 그런데 불굴의 의지를 지닌 집념의 사나이며, 지도 제작의 천재 김정호가 등장한 것이다.
⌈내가 정확한 우리나라 지도를 만들어야지. 사람들이 쉽게 지리를 익힐 수 있도록 말이야.⌋
이것은 소년 김정호가 어린 시절부터 굳게 마음먹고 있던 꿈이요, 각오였다. 김정호는 우리나라 삼천리강토를 전부 자기 손으로 자세히 그린 지도를 갖고 싶었다. 일단 결심을 굳힌 그는 고향인 신천읍을 떠나 개나리 봇짐 하나만 달랑 걸머지고 지도 제작을 위해 정처 없는 유랑의 길을 떠났다. 그야말로 그런 힘겨운 여행이었다.
그가 처음으로 도착해 지도를 작성한 곳이 평양이었다. 평양지도를 그린 김정호는 다시 압록강으로 재촉하여 압록강을 두루 살핀 후, 압록강 하구인 의주에 들러 다시 국경을 따라 동북으로 배두산까지 올라갔다가, 동쪽으로 발길을 돌려 재차국경 지대를 밟아 두만강에 이르렀다. 이런 식으로 전국 팔도강산을 누비기를 수십 년, 때로는 고단한 발걸음에 발이 부르터서 진물이 흐르기도 했고, 굶기를 밥 먹듯 하며 거지처럼 이 집 저집 신세를 지는 초라한 행색으로 돌아다녔다. 그렇게 죽을 고생을 한 끝에 마침내<처구선표도> 2첩을 완성햇다. ⌈청구⌋란 조선이란 뜻이고, ⌈선표⌋는 가로와 세로에 줄을 쳐서 거리를 정확히 계산했다는 뜻이다.

대동여지도
그는 <청구선표도>를 몇 부 제작하여 몇몇 아는 학자들과 신은 단 하나, 평소 그와 절친한 최한기라는 학자뿐이었다. 최한기 만이 김정호를 친히 찾아 따뜻한 위로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어느 날 김정호가 더욱 정확하고 훌륭한 지도를 만들기 위해 막 대문을 나서려는데 딸이 쫓아와 목놓아 울면서 어머니가 위독하니 가지 말라고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무정한 남편의 뒷바라지에 지쳐 오랜 지병을 이겨내지 못한 그의 부인은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채 그대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김정호는 자신의 실수를 한탄하며 부인의 주검 앞에서 통곡했다.
그가 오늘까지 집안 거정을 안 하고 지도 제작에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어진 부인 덕이었다. 당장 끼니를 이을 쌀 한톨 없어도 아무 불평 없이 묵묵히 뒷바라지를 해주던 그런 아내였다.
김정호는 이웃 사람들의 호의로 겨우 아내의 장사를 치르고, 서둘러 딸을 시집보내 다음 또다시 지도 제작을 위해 정처 없는 유랑의 길을 떠났다. 김정호는 체구는 작았으나 몸은 무쇠같이 단단했다. 남들은 한 번 오르기도 힘든 백두산을 일곱 번도 더 올랐으니, 가히 그 의지와 신념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고 할 것이다.

김정호는 좀더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가는 곳마다 그 지방의 지리적 특색, 이름난 고적, 산의 형세, 성곽 등 모든 부분에 걸쳐 상세히 물어 보고 실제로 직접 그곳까지 가서 하나하나 확인했다. 이렇게 하여 몇 년이 걸려 그린 지도를 갖고 집으로 돌아온 김정호는 다시 목판에 그대로 본떠 새기기 시작했다. 원래 조각에도 뛰어난 솜씨를 지녔던 까닭에 그는 조금도 틀리지 않게 정확히 새길 수 있었다.
<청구선표도>에서 불편하게 기입했던 글자 대신 여러 지점을 각각 다른 모양으로 간단하게 표시했으며, 주요한 도로에는 4km마다 점을 찍어 놓아 쉽게 거리를 알 수 있게 했다. 목판을 새기기 시작한 김정호는 3년의 세월을 소비하여 가로 30, 세로 30cm 짜리의 목판 22장으로 된 우리 나라 지도를 완성했다. <청구선표도>를 완성한 지 30년 만의 일이었다. 이것이 바로<대동여지도>이다.
시집간 딸도 가끔 와서 애쓰는 아버지를 도와 기름칠을 하는 등 일을 거들어 주었다. 예전 같으면 부인이 해주었을 일을 딸이 대신 해준 것이다.<대동여지도>의 완성에는 이런 갸륵한 딸의 정성과 노력이 있었다. <대동여지도>가 완성되어 지도를 찍어낸 김정호는 감격한 나머지 눈물까지 흘렸지만, 그는 그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김정호는 다시 전국 각 지방의 연혁, 인물, 산수, 거리 등을 자세히 기록하고 설명한 대동지지 15책을 제작했다. 이렇듯 그는 오직 지도 제작과 지리 연구를 위해 몸바쳐 훌륭한 업적을 남겼던 것이다.
김정호는 나라가 외적의 침입을 받았을 때 적을 물리치거나 도적이나 난폭한 무리들을 토벌하는 데 도움이 되며, 모든 백성들이 지리를 익히는 데도 자신의 지도를 이용하게 될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대동여지도>를 완성하여 기쁨에 넘친 김정호는 곧장 <대도여지도>를 대원군에게 바쳤다. 그러나 대원군은 국가의 기밀을 외국 사람에게 팔기 위해 만들었다며 김정호를 감옥에 거두고 끝내는 감옥에서 죽게 했다.
밤하늘의 큰 별이 남모르게 떨어져 버리듯 한국 지도의 아버지 김정호는 어이없게 가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가 남긴 정신과 업적은 아직도 우리 역사 속에 살아서 맥맥히 흐르며 별처럼 빛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