깃대봉 / 송신근
깃대봉은 바다의 벽으로 둘러쳐진 홍도의 상징이다. 높은 산은 아니지만 저마다의 색깔과 자태를 드러내고 있는 섬의 산들은 바다의 꿈이 외연적으로 표출된 것이다. 가없는 물마루로부터 밀려온 하얀 꿈들이 차곡차곡 쌓여 산이 되었다. 숨찬 생의 길목에서 가끔은 나아갈 길을 잃고 나를 찾지 못해 바둥거릴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오랜 세월 망각의 여백 속에 묻어 두었던 깃대봉을 꺼내 본다. 오르고 보기를 수없이 반복해 온몸으로 체화시켜야 알 수 있는 거룩한 자연의 언어를 내포한 깃대봉은, 내 사고의 근간을 형성하고 있는 징표이기 때문이다.
깃대봉은 홍도 1리와 2리 두 마을로 이어져 있는 산길 중간쯤에 깃대처럼 뾰족이 서있다. 산정에서 쉬면서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홍도의 절경을 조망하도록 데크로 전망대를 만들어 놓았다. 이 봉우리를 지나지 않고는 마을로 내려갈 수가 없다. 풍랑으로 바닷길이 막히면 두 마을 사람들은 이 산길로 왕래를 한다. 육칠 십년대에는 홍도에 동력선이 흔치 않았다. 그래서 전마선이라 부르는 작은 나무배로 힘겹게 노를 저어 다녔다. 조류가 거센 바다로 두 시간 남짓 노를 젓는 것은 젊은 사람도 힘에 부치는 고된 노역이었다. 그래서 배로 운반해야 하는 큰 짐이 아니면 산길을 이용하였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도 지게로 소금 포대와 옹기 등 생활 용구들을 운반했다고 한다.
기억 저편, 아득한 풍경 하나가 안개처럼 피어오른다. 초등학교에 다니면서 여름방학 때가 되면, 산길로 1리 마을에 가서 친구들과 어울렸다. 늘 젊음의 함성이 식을 줄 모르고 불타오르는 몽돌 해수욕장에서 수영을하며 더운 여름을 보냈다. 1리 마을에서 제법 큰 가게를 운영하는 이모 집에 가서 매점 일을 도와주며 일주일간 있다 오기도 하였다. 홍도에는 마을 하나에 초등학교가 하나씩 있었다. 깃대봉 너머에서 소슬한 가을바람이 불어오면 두 마을 초등학교에서는 가을 소풍 준비를 했다.
내가 흑산 신흥 초등학교 4학년 다닐 무렵, 가을 소풍을 두 마을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한데 어울려 정겹게 하루를 보낸 적이 있었다. 우리 학교 전교생과 교직원, 학부모 60여 명은 일 열로 줄을 지어 큰 재봉과 깃대봉을 지나 소풍 장소인 미새밭이라고 불리는 곳에 한 시간쯤 걸어 도착하였다.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던 1리 홍도 초등학교 소풍 참가자 80여 명과 한 팀을 이루어 보물찾기, 씨름, 그림 그리기 등을 하며 가난했던 섬마을 아이들은 파란 동심을 그려 나갔다. 어머니가 정성 들여 챙겨준 도시락을 친구들과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깃대봉은 한국의 100대 명산 중의 하나로 지금도 육지 등산 동호회원들이 찾아와 홍도 최고봉의 매력에 흠뻑 젖어 들기도 한다. 정상에서 서서 멀리 서해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주변을 둘러보면, 섬 속에 펼쳐져 있는 자연은 육지와 격절된 자연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들과 실존적으로 밀착된 자연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깃대봉에는 눈으로 보는 현상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바다를 일구며 살아가는 홍도 사람들의 애환과 흐느끼는 영혼이 크나큰 상처로 묻혀있다. 그 상처를 들여다보지 않고서는 거기에 서려 있는 여린 색채의 풍경들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깃대봉 아래에는 거친 해풍을 맞으며 모진 생명력으로 자생하고 있는 소사나무, 구실잣밤나무, 황칠나무, 황칠나무, 후박나무 등 육지에서 보기 힘든 나무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뿌리내린 터전이 척박하다고 하여 남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넓게 펼쳐진 푸른 바다와 조응하며 제자리를 지키고 서 있다. 깃대봉은 예부터 마을주민들이 노낭골이라고 부르는 깊은 계곡을 품고 있다.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원시림이 빽빽이 우거져 있는 노낭골은 천연기념물인 풍란과 백동백나무가 서식하고 있다. 육지로 나오기 전, 어린 시절 즐겨 먹었던 간식거리인 잣밤을 주우려 노낭골에 다니면서 고목에 붙어 뿌리를 드러내 보이며 자라고 있는 풍란과 하얀 동백꽃을 자주 보았다.
옛날에는 마을 사람들이 땔감을 구하려 자주 드나드는 곳이다. 준비해간 톱으로 나무를 베어 가지를 제거한 후 수분이 빠질 때까지 두서너 달 말려서 통나무를 바다로 던져 배로 실어 날랐다. 1960년 중반 홍도가 천연기념물로 보호되고 다도해 해상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자연훼손을 막기 위해 출입이 금지되었다. 높낮이가 유려하게 조화를 이루는 산봉우리와 계곡은 원초적인 교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로를 불편하게 하지 않으면서 지루하지 않은 장구한 쾌감을 누리고 있는 깃대봉과 노낭골은 천년의 사랑으로 맞붙어있다.
홍도의 최고봉인 깃대봉은 신령한 힘과 영험한 기운을 담고 있다. 섬의 모든 생명체의 삶을 조직하고 운영케 하는 메신저이자 지고한 수련을 요구하는 침묵의 경전이다. 홍도의 오래된 고전이기도 하다. 고전은 성숙을 내포하기에 섬의 가혹한 환경 속에서도 홍도 사람들은 깃대봉의 순리를 읽어 내면서 완숙한 심성을 길러왔다. 오늘날 홍도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고 해마다 수십만 명의 관광객들이 찾아오는 것은 빼어난 절경이 있어서만은 아닐 것이다. 홍도에 은폐된 자연의 본원적 속성을 탐구하고 이해하여 상실된 인간의 가치를 회복하기 위해서 일수도 있다. 멀지 않아 깃대봉에도 산 꽃들이 흐드러지게 지천으로 피어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