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1월 15일(주일) 낮 설교 - 성령강림 후 제25주[추수감사절] -
주님, 너무나 감사합니다!
{ 레위기 23 : 33~44 }
Ⅰ. Story. 「 또 다른 손이 있다! 」
화창한 토요일 오후, 오랜만에 아빠가 하는 정원 가꾸기를 돕고 있는 한 아들이 있었습니다. 잔디를 깎고 잡초를 뽑고, 정원수들도 다듬었고, 화단의 꽃들에게 시원한 물도 주었습니다. 때마침 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은 아빠를 돕기에 딱 좋은 날씨였습니다. 아들과 함께 잔디밭의 여기저기 자란 잡초를 뽑고 있던 아빠는 잔디밭 한가운데 돌이 놓여있는 것을 보고는, 아들에게 잔디밭 밖으로 ‘돌을 굴려버리라’고 말했습니다. 아빠 말씀대로 힘껏 돌을 굴리려고 했지만, 돌은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한참 동안 낑낑대던 아들은 결국 두 손을 들고 말았습니다.
“아빠, 못하겠어요. 제 힘으론 이 돌을 움직일 수가 없어요.” “아들아, 네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한다면, 너도 얼마든지 그 돌을 치울 수 있단다.” 아들은 다시 기운을 내서 돌을 움직여 보려고 안간힘을 써 보았지만, 여전히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결국 아들은 눈물을 글썽이며 울먹이게 되었고, 아빠는 아들의 등을 토닥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네가 돌을 움직여보려고 애쓰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단다. 그런데 한 가지 사실을 잊고 있더구나.” 아빠의 말씀에 아들은 두 눈이 호기심으로 동그래졌습니다. 아빠는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습니다.
“너는 네 옆에 아빠가 이렇게 서 있다는 것을 잊고 있더구나. 나는 언제든지 너를 도와줄 준비가 되어 있는데, 나에게 도움을 구할 생각조차 하지 않더구나.” 아들은 금방 눈을 반짝이며 아빠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아빠와 힘을 합쳐 큰 돌을 잔디밭 밖으로 밀쳐낸 아들은 기뻐하며 외쳤습니다. “아빠, 우리가 해냈어요.” 내가 모든 것을 다 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혼자 하지 못하는 일이라면, 어느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다면 생각보다 쉽게 할 수도 있습니다. 언제나 우리를 돕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바로 도움자(Helper)이신 보혜사 성령님이십니다.
세상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홀로서기를 하라’ ‘일등은 단 한 명이다’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 물론 때로는 그런 것도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이 또 있습니다. ‘모두 함께하기’ ‘같이 우승하기’ ‘서로 도와주기’ 등입니다. 류노스케 사토로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서로 떨어져 있으면 한 방울에 불과하다. 그러나 함께 모이면 우리는 바다가 된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함께 나누고 의지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의지하는 것은 한계가 분명합니다. 그러하기에 성도들은 주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어려울 때 주님께 손을 내미는 것입니다.
Ⅱ.
오늘은 추수감사절입니다. 농촌 실정으로 보면, 이 맘 때 추수감사절을 지키는 것이 적절하다는 생각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초막절에 관한 말씀입니다. 초막절이 오늘날로 하면 ‘추수감사절’입니다. 장막절이라고도 하지만, 이는 초막절과 같은 뜻입니다. 또 수장절이라 하는데, 이는 ‘거두어들여 저장한다’는 뜻입니다. 본문 39절을 보면, “너희가 토지소산 거두기를 마치거든 일곱 째 달 열닷새 날부터 이레 동안 여호와의 절기를 지키되…”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즘 말로 표현하면, 가을걷이를 모두 마치고 초막절을 지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 농촌실정으로 보면 이 맘 때가 되는 것입니다. 도시교회에서는 추수의 의미가 퇴색해서 꼭 11월 셋째 주일을 추수감사절로 지키지 않고, 추석 때를 추수감사절로 한다든지, 아니면 11월 첫 주일을 추수감사절로 지키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유대력 7월15일로 날짜가 정해져 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지키는 추수감사절은 다분히 미국의 영향이 크다 할 것입니다. 미국은 교회에서만 지키는 것이 아니라 아예 국가적 명절로 지킵니다. 그래서 날짜가 정해져 있는데, 11월 넷째 주 목요일입니다. 미국의 추수감사절(Thanksgiving Day)은 몇 차례 날짜가 바뀌기도 했지만, 최종적으로 [11월 넷째 주 목요일]로 정해졌고, 이 날에는 멀리 떨어져 있는 가족들이 모두 함께 모여 추수감사절 전통음식을 먹고 가족들과 함께 연휴를 보내는 미국의 가장 큰 명절입니다. 우리나라의 추석과 비슷하다고 보면 됩니다. 우리말에도 ‘감사’라는 말이 담겨있듯이 미국의 추수감사절도 마찬가지입니다. Thanksgiving Day라고 합니다. ‘감사하는 날’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날 밤부터 대대적인 세일을 합니다. 미국 최대 세일기간입니다. 바로 Black Friday입니다. 그 만큼 미국의 추수감사절은 국가적인 큰 명절이라는 뜻입니다. 문제는 현대에는 감사의 의미는 퇴색되고 그저 명절로 지키고 대대적인 세일에만 관심을 가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올해 추수감사절을 맞이하면서 진정 “주님, 너무나 감사합니다!”하는 감사의 마음을 더욱 크게 가져야 할 것입니다. 올해를 마무리 하려면 아직 한 달 이상 남았지만, 한해 농사를 잘 지어 거두게 하신 하나님께 참 마음으로 감사로 영광을 돌려야 할 것입니다. 어떤 마음으로 추수감사절을 지켜야 하는지 생각하며 은혜 나누는 이 시간이 되기 바랍니다.
Α. 이 날은 함께 즐거워하며 감사하는 날입니다(신 16:14).
구약성경에는 3대 절기가 나옵니다. 유월절과 칠칠절 그리고 초막절입니다. 이 절기는 ‘온 이스라엘이 함께 지킨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너의 가운데 모든 남자는 일 년에 세 번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를 뵈옵되…”(신 16:16) 모든 남자가 지켜야 한다고 했습니다. 모두 함께 지켜야 한다는 뜻입니다. 초막절 즉 추수감사절을 지키는 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신명기 16장14절을 보면, “절기를 지킬 때에는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주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즐거워하되” 그렇습니다. 함께 즐거워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소외된 사람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을걷이의 풍성함으로 함께 즐거워해야한다는 것은 소외된 사람들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야한다는 뜻입니다. ‘너와 네 자녀’까지는 가족이기에 별 이견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끝이 아니고 노비도 함께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노비는 평상시에는 차별 받음의 대명사입니다. 인권이 없습니다. 그런데 추수감사절을 지킴에 있어 노비도 함께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레위인을 포함시켰습니다. 레위인은 땅의 분깃(기업)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땅이 없으니 거두어들일 것도 당연히 없습니다. 그러니 그들도 함께 즐거워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그네(객)와 고아, 과부가 포함되었습니다. 만약 이들이 차별을 받는다면 그 공동체는 결코 평안할 수 없습니다. 공동체 안에 차별받고, 고통당하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랑과 정의가 실현된 공동체가 되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함께 살게 될 것입니다. 그곳에서 함께 즐거워할 것입니다. 그곳에는 차별도, 소외도, 고통도 없습니다.
Β. 여전히 복 주실 것을 믿고 감사하는 날입니다(신 16:15).
추수감사절은 이미 주신 은혜와 복에 대하여 감사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신명기 16장15절을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너는 이레 동안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절기를 지키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소출과 네 손으로 행한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이니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미 베풀어주신 은혜와 복에 대한 감사는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복을 받았기 때문에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도 당연히 감사드려야 함이 맞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미래에 대한 믿음’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이 네 모든 소출과 손으로 행한 모든 일에 복을 주실 것’이니 온전히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온전히 즐거워한다’는 것은 즐거움 외에 다른 요소가 전혀 없는 상태입니다. 오직 즐거움만 가득한 상태입니다. 즐거움으로 충만한 상태입니다. 이것은 믿음의 확신입니다. 지금까지 복 주신 ‘에벤에셀의 하나님’께서 앞으로 내가 살아가는 모든 순간에 복을 주실 것이라 믿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럴 것이다’가 아닙니다.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믿음입니다.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믿음입니다. 그렇기에 어느 순간에도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살전 5장18절에 보면,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어떻게 일어나는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을까요? 나에게 꼭 유익하고 좋은 일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역경을 만났음에도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하는 일마다 형통이 아니라 불통인데도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죠? 하나님이 우리의 앞날을 책임져주실 것을 믿을 때 가능합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잘 될 것(善)이라는 확신을 가질 때(롬 8:28), 우리는 언제어디서나 감사할 수 있습니다.
Γ. 주신 복을 따라 예물을 드려 감사하는 날입니다(신 16:16-17).
*신 16장16절 하반절부터 17절을 보면, “…빈손으로 여호와를 뵈옵지 말고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드릴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빈손으로 절기를 지켜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화해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 형제와 화목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예물 드리는 일도 당연한 것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동방박사들의 경배이야기에서도,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님께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렸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신명기에는 추수감사절을 비롯한 절기를 지킴에 있어서 “빈손”으로 하나님을 뵈옵지 말라고 했습니다. 또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그 힘대로’ 드리라는 것은 형편에 따라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평상시 희생제물을 드릴 때도 소를 드릴 수 있는 사람은 소를 드리고, 양이나 염소를 드릴 수 있는 사람은 염소나 양을 드리고, 그것도 형편이 안 되는 사람은 비둘기를 드리도록 했습니다. 비둘기 중에는 집에서 기르는 집비둘기나 산에서 잡은 산비둘기도 있습니다. 정 없으면 산에 가서 잡아서라도 드리라는 것입니다. 정성이란 말로만 표현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을 담아 예물을 준비하고 드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예물을 요구하시는 것일까요? 사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큰 선물과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것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를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Ⅲ.
기록에 의하면, 미국의 첫 번째 추수감사절은 1621년 가을에 지켜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영국에서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미국으로 건너온 청교도들은 베리얼 힐에 오두막을 짓고 1621년 3월에 배에서 내렸습니다. 청교도들은 목책으로 요새를 만들고 대포를 설치했지만, 인디언들은 오히려 우호적이었습니다. 사모세트(Samoset)라는 영어를 아는 인디언이 캠프를 찾아왔고, 며칠 후에는 추장이 보낸 스콴토(Squanto)라는 인디언이 찾아와서 옥수수 재배법, 물고기를 잡는 법, 기타 살아남는 법을 가르쳐주었습니다. 그해 가을 풍성한 수확을 하게 된 청교도들은 농사짓는 법을 가르쳐준 스콴토를 비롯한 추장과 90명의 전사를 초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음식축제를 벌이게 됩니다. 이것이 첫 번째 추수감사절입니다. 특별히 추수감사절 음식으로 칠면조 고기를 먹는 전통이 생긴 것도 매우 단순한 이유 때문입니다. 첫 추수감사절을 위하여 총을 들고 새를 잡으려고 나갔던 사냥꾼이 부근에서 발견한 칠면조를 잡게 되어 칠면조 고기를 먹게 된 것이고, 그 이후 추수감사절이 되면 칠면조 고기를 먹는 전통을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의 추수감사절이든, 한국의 추수감사절이든 감사절은 말 그대로 감사하는 날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믿는 이들의 삶이지만, 이렇듯 날을 정하고 감사하는 것은 ‘공동체의 감사’를 의미합니다. 함께 즐거워하는 것이고, 복 주신 것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복 주실 것에 대해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감사가 “주님, 너무나 감사합니다!”하는 마음과 뜻과 정성이 담겨져 있어서 주님이 진정 기뻐 받으시는 감사가 되기를 간절히 축복(祝福)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