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역사박물관에 다녀왔습니다. 지금은 공식 개관 전이라 사전 개방을 하고 있습니다. 24일까지 사전개방 후 26일 공식 개관, 27일부터 공식 관람 가능합니다.
최초의 국립근현대사박물관으로서, 개항기부터 오늘날까지의 역사를 중심으로 기획, 구성하였는데요. 첨단 정보기술과 문화기술을 활용하여 대한민국의 정치·사회·경제·문화 분야를 살펴볼 수 있는 관련유물 1,500여 점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개항 이후 우리나라의 역사를 한눈에 보여주는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종로구 세종로의 옛 문화체육관광부 건물을 리모델링했습니다. 8층 옥상에서 바라본 광화문 풍경은 청와대와 경복궁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으며 세종로 종합청사 등 서울의 중심을 다 볼 수 있습니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8.15 광복 후 6.25 전쟁 그리고 산업발전 역군들의 종잣돈 마련 후 유신과 5.18를 거쳐 민주주의가 꽃을 피운 뒤 지금의 현재까지를 고증된 자료들로 전시 된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에 둘러보게 된다면 대한민국 역사를 제대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시대를 겪은 시대에게는 향수를 불러 일으키고 젊은 세대는 모르던 역사를 제대로 볼 수 있는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국가상징거리에 위치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경복궁, 광화문광장 및 중학천을 연계하고 국민과 소통하는 공간으로서 건물의 역사성과 상징성을 살리는 친환경 구조변경을 통해 과거·현재·미래가 어우러지는 대한민국 대표 전시문화 공간이 될 것입니다.
규모: 대지면적 6,445㎡, 건축연면적 10,734㎡ 건립형태: 구 문화체육관광부 청사 본관 구조변경 및 별관부지 일부 증축 주요시설: 전시·수장·교육·연구·사무·부대시설 등 - 전시실(3,090㎡), 수장고(434㎡), 교육시설(506㎡) 인증획득: 친환경건축물(최우수/그린1등급) 인증, 장애물 없는 생활 환경(우수등급) 인증 울타리와 문턱 없는 누구에게나 열린 공간으로 광화문 광장과 연계하여 '문화적 쉼'과 '역사와의 대화'가 가능한 공간 구조변경 건축, 친환경 에너지 절감기술 적용 등으로 국내 대표적인 녹색문화시설의 모델 제시 광화문 주변 문화시설로 접근을 용이하게 하는 동선의 중심으로 문화관광 중심축 기능 수행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국민 여러분의 기증 자료로 만들어집니다.
자료기증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시작입니다. 대한민국은 숱한 굴곡을 겪으며 많은자취를 남겼고,자취는 자료로 남아 역사 그 자체가 되었습니다. 국민 여러분의 체취가 묻어있는 기증자료는 대한민국이 걸어온 흔적으로 국민을 하나로 묶어주는 고리가 될 것입니다.
기증 대상
개항(1876년)부터 현재까지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조망할 수 있는 관련 기록물(문서, 출판·인쇄물, 사진, 동영상 등)과 유품, 기념품, 생활용품 등 역사자료
기증 문의 안내 문의: 기증담당자 02-3703-9307
김왕식 대한민국역사박물관장 인사
광화문 4거리에 위치한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경복궁과 청와대가 내려다 보이는 곳에 위치
박물관에 들어서자마자 병풍처럼 펼치는 영상
대한민국의 4계와 지난 역사를 한 눈으로 볼 수 있도록 상영
직접 만지고! 발견하고! 이해하는!우리역사 보물창고
우리 역사 보물창고(Discovery Center)에서 재미있는 우리 역사를 탐험하세요!
우리 역사 보물창고는 대한민국의 역사를 어린이를 중심으로 한 가족들이 생동감 있는 자료를 통해 함께 체험하는 공간입니다. 직접 만지고(Hands-on), 발견하고(Finds-on), 이해하는(Minds-on) 경험을 바탕으로 한 근?현대사 학습의 새로운 지평을 만들겠습니다.
3대의(할아버지~손녀) 일기를 통해! 함께 겪은 우리 역사를 실물자료를 통해 탐구하며 체험하는 우리 역사 보물창고는 옛날 전차, 엄복동 자전거(동일모델), 흑백 텔레비젼, 옛날 공중전화기, 퍼블리카 등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체험 방법 우리 역사 보물창고 안에서의 모든 활동은 태블릿PC, 멀티터치 테이블 등의 IT기기, 그림동화책, 2D영상, 재미있는 컴퓨터 게임 등을 통해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인터넷 예약(매회 20명) 및 현장접수(매회 10명)로 운영됩니다
1층에 위치한 기획전시실 화면을 터치하지 않아도 움직일 수 있는 최첨단 시설
박수를 치면 홈으로 이동하고 손을 펼쳐 움직이면 마우스처럼 화면을 이동 시킬 수 있습니다.
상설전시
3층 1전시실
자주적 근대국가의 꿈과 노력, 국권회복을 위해 희생한 선열들의 숭고한 정신
대한민국의 태동에서는 조선이 세계에 문호를 개방한 1876년부터,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1945년 독립에 이르는 시기의 대한민국의 역사를 전시하고 있다.
자주적 근대국가의 꿈과 좌절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 미국, 영국, 러시아 등 서구 열강이 조선의 문을 두드렸다. 조정의 의견은 개화와 위정척사로 나뉘어졌고, 임오군란, 갑신정변, 동학농민운동, 갑오개혁 등 근대를 위한 진통이 잇따랐다.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일본군과 일본인 불량배들에 의해 시해를 당하고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사태도 이어졌다. 1897년 경운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임을 선언하였다. 이어 광무개혁을 추진하여 산업 발전과 교육 진흥을 통한 자주적인 근대화의 길을 모색했다. 그러나 러일전쟁을 일으켜 마지막 경쟁자 러시아를 축출한 일본은 1905년 강압적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고, 1907년에는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며, 군대까지 해산시켰다. 국권상실의 위기 속에서 각계각층의 저항운동은 이어졌다.
개항과 근대화의 모색, 대한제국의 선포, 국권상실
전기 의병(1894-1895, 을미의병), 중기 의병(1905-1906; 을사의병), 후기 의병(1907-1909 ; 정미의병) 등 시기마다 의병들의 저항이 계속되었다. 헤이그 특사 파견과 같은 외교적인 노력, 국내에서의 학교 설립, 언론활동 등의 애국계몽운동,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을 비롯한 항일 의거 활동도 계속되었다. 우리 민족의 지속적인 반일 항쟁을 무력으로 철저히 진압한 일본은 1910년 ‘한일병합조약’으로 한국의 국권을 강탈하였다. 개항 이후 전개된 우리 근대사는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 되어 국권이 상실되는 고난에 찬 시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민족은 저항과 자주의 길을 멈추지 않았다. 대한제국의 선포와 의병 전쟁, 애국계몽운동의 방식으로 자주적 근대 국가의 꿈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면서 역사의 격랑에 맞서 나갔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독립운동
잃어버린 국토를 되찾고 이 땅에 독립 국가를 세우려는 독립운동이 국권 침탈 후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전 민족적 만세 시위인 3.1운동을 일으켜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세계에 알렸고, 군주제를 대신하여 모든 인민이 평등하고 자유를 누리며 주권을 가진 민주공화제를 제창하였다. 3.1운동의 주권 의지로 수립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한국현대사에서 민주공화제를 정착시키는 이정표가 되었다.‘대한제국’을 ‘대한민국’으로 새롭게 세웠으며, 봉건적 잔재를 청산하고 민주주의를 구현했다는 점에서 독립운동은 근대화 운동의 성격을 또한 지녔다. 대한민국은 헌법에 명시되었듯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였다. 이런 점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역사적 원류이자 모태이다. 임시정부는 한민족의 독립의지를 모아 민주적 원칙에 따라 수립된 정부였으며, 조국 광복의 날까지 독립운동을 전개하면서 국민들에게 독립정신을 일깨웠다
1945년 8·15광복
한국은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연합국에 항복하면서 일본 식민통치에서 벗어나 자주 독립국가를 건설할 수 있게 되었다. 모든 사람들이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쏟아져 나와 광복의 기쁨을 만끽하였고 새로운 시대에 대한 희망에 부풀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였다.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미국과 소련의 군대가 남북을 분할 점령한 후, 미국과 소련의 냉전체제가 시작되면서 한반도는 이들의 세력 다툼 장소가 되었다. 남한에는 미군정이 들어섰고, 북한에는 소련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김일성이 권력을 장악해 갔다. 미국, 소련, 영국은 1945년 12월에 모스크바 3국 외무장관 회의에서 그 입장을 조율하여, 미소공동위원회 설치와 5년간의 신탁통치를 결의하였다. 이에 대해 한국 정국은 좌익과 우익이 신탁통치 찬성과 반대로 입장이 나뉘어져 혼란이 가중되었다. 북한에서 사회주의화가 일방적으로 추진되고 미국과 소련의 대립이 심화되면서, 점차 분단이 기정사실화 되었다.
광복의 기쁨과 열망, 38선 설정과 민족분단, 미군정기 한국사회의 변화
이러한 가운데서도 한편에서는 식민잔재를 하루 빨리 벗어버리기 위한 움직임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잃어버렸던 이름과 한글을 되찾고, 공민증제를 실시하였으며, 화폐를 새롭게 발행하는 등 빠르게 사회 안정화를 추진해 나갔다. 특히 민주주의 교육을 실시해 근대국가 건설의 주역을 배출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6.25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근대국가 토대를 구축한 불굴의 의지
[대한민국의 기초확립]에서는 대한민국정부 수립의 의미와 6.25 전쟁의 참혹한 실상 그리고 그 어려움을 이겨내고 근대국가의 토대를 구축해 가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또한 시민의 힘으로 지켜낸 민주주의 초석 4.19혁명의 의미를 되살펴 본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한반도에 몰아친 냉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남한 사회는 다양한 정치세력이 난립하는 혼란을 겪는 반면, 북한은 소련의 강력한 지원 아래에서 김일성을 중심으로 공산주의 정부 수립을 위한 준비를 진행하였다. 이런 혼란스런 상황 속에서도 남한에서는 참정권이 부여된 국민(만 21세 이상의 남녀)이 참여한 최초의 민주적 선거를 통해 자유민주주의 공화국이 성립되었다.
4층 2전시실
6.25 전쟁과 전후 복구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야기된 6.25전쟁은 국토의 상당 부분이 일시적으로나마 공산군의 지배하에 들어가는 수난을 가져왔다. 우리 국민은 사력을 다해 국가를 지켜냈으나 전쟁 뒤에 남은 것은 막대한 인명피해와 폐허가 된 국토였다. 그러나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우리민족의 강인한 의지와 저력은 좌절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희망의 원동력이 되었다.
근대국가 토대 구축
전후 1950년대 후반은 6.25 전쟁 이후의 가장 어려운 시기였지만 오늘날의 산업화와 민주화의 토대가 구축되는 시기이기도 하였다. 정부는 해외 원조를 기반으로 자립경제의 기틀을 마련하고, 의무교육을 통해 산업화 민주화의 역군이 되었던 인재를 육성하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하였다. 또한 부정과 부패에 맞서 시민 스스로가 민주주의 원칙을 수호하려 했던 4.19 혁명은 민주주의가 꽃피울 수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4.19 혁명으로 탄생한 2공화국은 다양한 실험적 정치를 시도하였으나 5.16 군사정변으로 막을 내렸다.
5층 3전시실
절대적 빈곤 속에서도 경제성장과 민주주의를 동시에 일궈낸 국민의 헌신과 노력
[대한민국의 성장과 발전]에서는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경제 성장과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 노력했던 모습들을 살펴본다. 또한 우리의 생활 모습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다양한 사회?문화적 현상을 통해 알아본다.
파독광부협회에서 보내온 파독광부 간호사들의 물품들
대한민국 종잣돈을 마련한 우리의 아버지, 할아버지 세대(60~70대)
경제개발과 산업화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대한민국은 근대국가의 위상을 확립하는 시기였다. 남북한의 긴장상태와 대결구도는 지속되고 있었지만 정치경제적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이 시기 대한민국은 경제적으로는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초고속 경제성장을 달성하였으며, 정치적으로는 우여곡절을 거쳐 본격적인 민주화시대를 준비하는 기간이었다
우리나라가 만든 삼륜차와 전자제품들
경부고속도로
변모하는 도시와 농촌
1960년대 이후 경제개발과 고도성장으로 산업화와 도시화가 급격히 진행되었고, 이농현상이 본격화되었다. 급속한 산업화와 인구의 대도시 집중에 따른 이면에는 농촌소외문제, 노동문제, 도시빈민문제 등이 새로운 사회문제로 등장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교통과 통신, 대중매체가 발달함에 따라 문화가 다양해지고, 국민들의 삶이 양적인 성장과 함께 질적인 성장으로 이어지는 발판이 마련되었다.
그시절 대중 문화로 영화관과 LP판
버스 차장과 차장의 가방과 모자
만원버스의 출발을 알리는 차장 아가씨의 오라이~~
시민사회의 성장과 민주주의
비약적인 경제성장과 더불어 민주화의 바람은 오늘날 대한민국의 모습을 만들어낸 양대 기둥이었다. 오랜 군사독재에 맞서 민주주의를 지켜내고자 했던 국민들의 염원은 대한민국에 자유와 평등, 평화와 인권의 가치를 확립시켰다. 또한 민주주의가 확산되고 시민사회가 성숙해가는 과정에서 국민들의 삶은 한층 더 풍요로워졌다.
역대 대통령 사진 전시
5층 4전시실
세계로 나아가는 대한민국, 더 큰 대한민국으로 도약하는 우리의 모습과 미래이야기
[대한민국의 선진화, 세계로의 도약]에서는 불과 반세기만에 후진국에서 선진국으로 발돋움하며, 스포츠, 문화, 경제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대한민국을 소개한다. 또한 국제사회에서 선도적 역할을 하며 세계와의 공생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대한민국의 미래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세계로 나가는 대한민국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룩한 대한민국은 1988년 개최한 서울올림픽을 통해 국제사회로 한 단계 더 나아갈 계기를 마련했다. 서울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는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대한민국의 저력을 전 세계에 보여주었으며, 화해와 협력의 국제관계를 형성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대한민국은 인류의 제전인 올림픽 유치를 바탕으로 다양한 국제사회에서 문화 ? 외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아시아에서 시작한 한류는 국제사회에서 대한민국을 알리고 위상을 한층 높여주는 역할을 했다. 한류에 대한 관심은 대한민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학문적 관심으로 이어져 세계인들에게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한류와 스포츠는 세계와 대한민국을 이어주는 교량 역할을 하고 있다. 해외거주 한국인들은 대한민국 발전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경제 선진국을 향하여
1960년대 이후 30여 년에 걸친 고도성장으로 대한민국의 국민소득은 크게 증가하였다. 1990년대에는 민주화의 물결을 타고 복지증진에 대한 각계각층의 다양한 요구가 분출되었고, 2000년대에는 삶의 질 향상과 생활환경개선에 더욱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국민의 생활과 삶의 질이 향상되는 밑바탕에는 대한민국의 반도체, 디스플레이, 이동통신 등 IT산업의 발전이 큰 몫을 담당했으며 이 분야에서 터득한 세계적인 기술력은 새로운 경제성장 원동력이 되었다. 현재 대한민국은 다양한 국제기구 및 단체에서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며, 첨단 기술을 바탕으로 이룩한 경제력과 외교력으로 세계의 중심에 우뚝 서 있다.
대한민국의 미래
1950년대, 대한민국은 세계 최빈국의 하나로 UN과 외국의 원조를 받았다. 그러나 이제는 수혜국에서 저개발 국가를 원조하고 있다. 반세기만에 이루어낸 경제성장과 민주화의 역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개발도상국에 대한 공적개발원조(ODA)를 늘리고 한국의 경제 개발 경험을 전수하고 있으며, 민간 차원의 자발적 해외봉사도 늘고 있다. 현재 대한민국은 인간과 자연이 공생하는 친환경 성장에 주력하고, 국제안보와 평화, 그리고 세계의 공생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등 전 지구적 현안에 중심적 역할을 하며 더 큰 대한민국을 향해 나아가고자 한다.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에 다녀왔습니다. 지금은 공식 개관 전이라 사전 개방을 하고 있습니다. 24일까지 사전개방 후 26일 공식 개관, 27일부터 공식 관람 가능합니다.
최초의 국립근현대사박물관으로서, 개항기부터 오늘날까지의 역사를 중심으로 기획, 구성하였는데요. 첨단 정보기술과 문화기술을 활용하여 대한민국의 정치·사회·경제·문화 분야를 살펴볼 수 있는 관련유물 1,500여 점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개항 이후 우리나라의 역사를 한눈에 보여주는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종로구 세종로의 옛 문화체육관광부 건물을 리모델링했습니다. 8층 옥상에서 바라본 광화문 풍경은 청와대와 경복궁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으며 세종로 종합청사 등 서울의 중심을 다 볼 수 있습니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8.15 광복 후 6.25 전쟁 그리고 산업발전 역군들의 종잣돈 마련 후 유신과 5.18를 거쳐 민주주의가 꽃을 피운 뒤 지금의 현재까지를 고증된 자료들로 전시 된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에 둘러보게 된다면 대한민국 역사를 제대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시대를 겪은 시대에게는 향수를 불러 일으키고 젊은 세대는 모르던 역사를 제대로 볼 수 있는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국가상징거리에 위치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경복궁, 광화문광장 및 중학천을 연계하고 국민과 소통하는 공간으로서 건물의 역사성과 상징성을 살리는 친환경 구조변경을 통해 과거·현재·미래가 어우러지는 대한민국 대표 전시문화 공간이 될 것입니다.
규모: 대지면적 6,445㎡, 건축연면적 10,734㎡ 건립형태: 구 문화체육관광부 청사 본관 구조변경 및 별관부지 일부 증축 주요시설: 전시·수장·교육·연구·사무·부대시설 등 - 전시실(3,090㎡), 수장고(434㎡), 교육시설(506㎡) 인증획득: 친환경건축물(최우수/그린1등급) 인증, 장애물 없는 생활 환경(우수등급) 인증 울타리와 문턱 없는 누구에게나 열린 공간으로 광화문 광장과 연계하여 '문화적 쉼'과 '역사와의 대화'가 가능한 공간 구조변경 건축, 친환경 에너지 절감기술 적용 등으로 국내 대표적인 녹색문화시설의 모델 제시 광화문 주변 문화시설로 접근을 용이하게 하는 동선의 중심으로 문화관광 중심축 기능 수행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국민 여러분의 기증 자료로 만들어집니다.
자료기증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시작입니다. 대한민국은 숱한 굴곡을 겪으며 많은자취를 남겼고,자취는 자료로 남아 역사 그 자체가 되었습니다. 국민 여러분의 체취가 묻어있는 기증자료는 대한민국이 걸어온 흔적으로 국민을 하나로 묶어주는 고리가 될 것입니다.
기증 대상
개항(1876년)부터 현재까지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조망할 수 있는 관련 기록물(문서, 출판·인쇄물, 사진, 동영상 등)과 유품, 기념품, 생활용품 등 역사자료
기증 문의 안내 문의: 기증담당자 02-3703-9307
김왕식 대한민국역사박물관장 인사
광화문 4거리에 위치한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경복궁과 청와대가 내려다 보이는 곳에 위치
박물관에 들어서자마자 병풍처럼 펼치는 영상
대한민국의 4계와 지난 역사를 한 눈으로 볼 수 있도록 상영
직접 만지고! 발견하고! 이해하는!우리역사 보물창고
우리 역사 보물창고(Discovery Center)에서 재미있는 우리 역사를 탐험하세요!
우리 역사 보물창고는 대한민국의 역사를 어린이를 중심으로 한 가족들이 생동감 있는 자료를 통해 함께 체험하는 공간입니다. 직접 만지고(Hands-on), 발견하고(Finds-on), 이해하는(Minds-on) 경험을 바탕으로 한 근?현대사 학습의 새로운 지평을 만들겠습니다.
3대의(할아버지~손녀) 일기를 통해! 함께 겪은 우리 역사를 실물자료를 통해 탐구하며 체험하는 우리 역사 보물창고는 옛날 전차, 엄복동 자전거(동일모델), 흑백 텔레비젼, 옛날 공중전화기, 퍼블리카 등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체험 방법 우리 역사 보물창고 안에서의 모든 활동은 태블릿PC, 멀티터치 테이블 등의 IT기기, 그림동화책, 2D영상, 재미있는 컴퓨터 게임 등을 통해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인터넷 예약(매회 20명) 및 현장접수(매회 10명)로 운영됩니다
1층에 위치한 기획전시실 화면을 터치하지 않아도 움직일 수 있는 최첨단 시설
박수를 치면 홈으로 이동하고 손을 펼쳐 움직이면 마우스처럼 화면을 이동 시킬 수 있습니다.
상설전시
3층 1전시실
자주적 근대국가의 꿈과 노력, 국권회복을 위해 희생한 선열들의 숭고한 정신
대한민국의 태동에서는 조선이 세계에 문호를 개방한 1876년부터,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1945년 독립에 이르는 시기의 대한민국의 역사를 전시하고 있다.
자주적 근대국가의 꿈과 좌절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 미국, 영국, 러시아 등 서구 열강이 조선의 문을 두드렸다. 조정의 의견은 개화와 위정척사로 나뉘어졌고, 임오군란, 갑신정변, 동학농민운동, 갑오개혁 등 근대를 위한 진통이 잇따랐다.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일본군과 일본인 불량배들에 의해 시해를 당하고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사태도 이어졌다. 1897년 경운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임을 선언하였다. 이어 광무개혁을 추진하여 산업 발전과 교육 진흥을 통한 자주적인 근대화의 길을 모색했다. 그러나 러일전쟁을 일으켜 마지막 경쟁자 러시아를 축출한 일본은 1905년 강압적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고, 1907년에는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며, 군대까지 해산시켰다. 국권상실의 위기 속에서 각계각층의 저항운동은 이어졌다.
개항과 근대화의 모색, 대한제국의 선포, 국권상실
전기 의병(1894-1895, 을미의병), 중기 의병(1905-1906; 을사의병), 후기 의병(1907-1909 ; 정미의병) 등 시기마다 의병들의 저항이 계속되었다. 헤이그 특사 파견과 같은 외교적인 노력, 국내에서의 학교 설립, 언론활동 등의 애국계몽운동,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을 비롯한 항일 의거 활동도 계속되었다. 우리 민족의 지속적인 반일 항쟁을 무력으로 철저히 진압한 일본은 1910년 ‘한일병합조약’으로 한국의 국권을 강탈하였다. 개항 이후 전개된 우리 근대사는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 되어 국권이 상실되는 고난에 찬 시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민족은 저항과 자주의 길을 멈추지 않았다. 대한제국의 선포와 의병 전쟁, 애국계몽운동의 방식으로 자주적 근대 국가의 꿈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면서 역사의 격랑에 맞서 나갔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독립운동
잃어버린 국토를 되찾고 이 땅에 독립 국가를 세우려는 독립운동이 국권 침탈 후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전 민족적 만세 시위인 3.1운동을 일으켜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세계에 알렸고, 군주제를 대신하여 모든 인민이 평등하고 자유를 누리며 주권을 가진 민주공화제를 제창하였다. 3.1운동의 주권 의지로 수립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한국현대사에서 민주공화제를 정착시키는 이정표가 되었다.‘대한제국’을 ‘대한민국’으로 새롭게 세웠으며, 봉건적 잔재를 청산하고 민주주의를 구현했다는 점에서 독립운동은 근대화 운동의 성격을 또한 지녔다. 대한민국은 헌법에 명시되었듯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였다. 이런 점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역사적 원류이자 모태이다. 임시정부는 한민족의 독립의지를 모아 민주적 원칙에 따라 수립된 정부였으며, 조국 광복의 날까지 독립운동을 전개하면서 국민들에게 독립정신을 일깨웠다
1945년 8·15광복
한국은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연합국에 항복하면서 일본 식민통치에서 벗어나 자주 독립국가를 건설할 수 있게 되었다. 모든 사람들이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쏟아져 나와 광복의 기쁨을 만끽하였고 새로운 시대에 대한 희망에 부풀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였다.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미국과 소련의 군대가 남북을 분할 점령한 후, 미국과 소련의 냉전체제가 시작되면서 한반도는 이들의 세력 다툼 장소가 되었다. 남한에는 미군정이 들어섰고, 북한에는 소련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김일성이 권력을 장악해 갔다. 미국, 소련, 영국은 1945년 12월에 모스크바 3국 외무장관 회의에서 그 입장을 조율하여, 미소공동위원회 설치와 5년간의 신탁통치를 결의하였다. 이에 대해 한국 정국은 좌익과 우익이 신탁통치 찬성과 반대로 입장이 나뉘어져 혼란이 가중되었다. 북한에서 사회주의화가 일방적으로 추진되고 미국과 소련의 대립이 심화되면서, 점차 분단이 기정사실화 되었다.
광복의 기쁨과 열망, 38선 설정과 민족분단, 미군정기 한국사회의 변화
이러한 가운데서도 한편에서는 식민잔재를 하루 빨리 벗어버리기 위한 움직임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잃어버렸던 이름과 한글을 되찾고, 공민증제를 실시하였으며, 화폐를 새롭게 발행하는 등 빠르게 사회 안정화를 추진해 나갔다. 특히 민주주의 교육을 실시해 근대국가 건설의 주역을 배출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6.25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근대국가 토대를 구축한 불굴의 의지
[대한민국의 기초확립]에서는 대한민국정부 수립의 의미와 6.25 전쟁의 참혹한 실상 그리고 그 어려움을 이겨내고 근대국가의 토대를 구축해 가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또한 시민의 힘으로 지켜낸 민주주의 초석 4.19혁명의 의미를 되살펴 본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한반도에 몰아친 냉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남한 사회는 다양한 정치세력이 난립하는 혼란을 겪는 반면, 북한은 소련의 강력한 지원 아래에서 김일성을 중심으로 공산주의 정부 수립을 위한 준비를 진행하였다. 이런 혼란스런 상황 속에서도 남한에서는 참정권이 부여된 국민(만 21세 이상의 남녀)이 참여한 최초의 민주적 선거를 통해 자유민주주의 공화국이 성립되었다.
4층 2전시실
6.25 전쟁과 전후 복구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야기된 6.25전쟁은 국토의 상당 부분이 일시적으로나마 공산군의 지배하에 들어가는 수난을 가져왔다. 우리 국민은 사력을 다해 국가를 지켜냈으나 전쟁 뒤에 남은 것은 막대한 인명피해와 폐허가 된 국토였다. 그러나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우리민족의 강인한 의지와 저력은 좌절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희망의 원동력이 되었다.
근대국가 토대 구축
전후 1950년대 후반은 6.25 전쟁 이후의 가장 어려운 시기였지만 오늘날의 산업화와 민주화의 토대가 구축되는 시기이기도 하였다. 정부는 해외 원조를 기반으로 자립경제의 기틀을 마련하고, 의무교육을 통해 산업화 민주화의 역군이 되었던 인재를 육성하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하였다. 또한 부정과 부패에 맞서 시민 스스로가 민주주의 원칙을 수호하려 했던 4.19 혁명은 민주주의가 꽃피울 수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4.19 혁명으로 탄생한 2공화국은 다양한 실험적 정치를 시도하였으나 5.16 군사정변으로 막을 내렸다.
5층 3전시실
절대적 빈곤 속에서도 경제성장과 민주주의를 동시에 일궈낸 국민의 헌신과 노력
[대한민국의 성장과 발전]에서는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경제 성장과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 노력했던 모습들을 살펴본다. 또한 우리의 생활 모습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다양한 사회?문화적 현상을 통해 알아본다.
파독광부협회에서 보내온 파독광부 간호사들의 물품들
대한민국 종잣돈을 마련한 우리의 아버지, 할아버지 세대(60~70대)
경제개발과 산업화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대한민국은 근대국가의 위상을 확립하는 시기였다. 남북한의 긴장상태와 대결구도는 지속되고 있었지만 정치경제적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이 시기 대한민국은 경제적으로는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초고속 경제성장을 달성하였으며, 정치적으로는 우여곡절을 거쳐 본격적인 민주화시대를 준비하는 기간이었다
우리나라가 만든 삼륜차와 전자제품들
경부고속도로
변모하는 도시와 농촌
1960년대 이후 경제개발과 고도성장으로 산업화와 도시화가 급격히 진행되었고, 이농현상이 본격화되었다. 급속한 산업화와 인구의 대도시 집중에 따른 이면에는 농촌소외문제, 노동문제, 도시빈민문제 등이 새로운 사회문제로 등장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교통과 통신, 대중매체가 발달함에 따라 문화가 다양해지고, 국민들의 삶이 양적인 성장과 함께 질적인 성장으로 이어지는 발판이 마련되었다.
그시절 대중 문화로 영화관과 LP판
버스 차장과 차장의 가방과 모자
만원버스의 출발을 알리는 차장 아가씨의 오라이~~
시민사회의 성장과 민주주의
비약적인 경제성장과 더불어 민주화의 바람은 오늘날 대한민국의 모습을 만들어낸 양대 기둥이었다. 오랜 군사독재에 맞서 민주주의를 지켜내고자 했던 국민들의 염원은 대한민국에 자유와 평등, 평화와 인권의 가치를 확립시켰다. 또한 민주주의가 확산되고 시민사회가 성숙해가는 과정에서 국민들의 삶은 한층 더 풍요로워졌다.
역대 대통령 사진 전시
5층 4전시실
세계로 나아가는 대한민국, 더 큰 대한민국으로 도약하는 우리의 모습과 미래이야기
[대한민국의 선진화, 세계로의 도약]에서는 불과 반세기만에 후진국에서 선진국으로 발돋움하며, 스포츠, 문화, 경제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대한민국을 소개한다. 또한 국제사회에서 선도적 역할을 하며 세계와의 공생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대한민국의 미래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세계로 나가는 대한민국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룩한 대한민국은 1988년 개최한 서울올림픽을 통해 국제사회로 한 단계 더 나아갈 계기를 마련했다. 서울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는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대한민국의 저력을 전 세계에 보여주었으며, 화해와 협력의 국제관계를 형성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대한민국은 인류의 제전인 올림픽 유치를 바탕으로 다양한 국제사회에서 문화 ? 외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아시아에서 시작한 한류는 국제사회에서 대한민국을 알리고 위상을 한층 높여주는 역할을 했다. 한류에 대한 관심은 대한민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학문적 관심으로 이어져 세계인들에게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한류와 스포츠는 세계와 대한민국을 이어주는 교량 역할을 하고 있다. 해외거주 한국인들은 대한민국 발전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경제 선진국을 향하여
1960년대 이후 30여 년에 걸친 고도성장으로 대한민국의 국민소득은 크게 증가하였다. 1990년대에는 민주화의 물결을 타고 복지증진에 대한 각계각층의 다양한 요구가 분출되었고, 2000년대에는 삶의 질 향상과 생활환경개선에 더욱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국민의 생활과 삶의 질이 향상되는 밑바탕에는 대한민국의 반도체, 디스플레이, 이동통신 등 IT산업의 발전이 큰 몫을 담당했으며 이 분야에서 터득한 세계적인 기술력은 새로운 경제성장 원동력이 되었다. 현재 대한민국은 다양한 국제기구 및 단체에서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며, 첨단 기술을 바탕으로 이룩한 경제력과 외교력으로 세계의 중심에 우뚝 서 있다.
대한민국의 미래
1950년대, 대한민국은 세계 최빈국의 하나로 UN과 외국의 원조를 받았다. 그러나 이제는 수혜국에서 저개발 국가를 원조하고 있다. 반세기만에 이루어낸 경제성장과 민주화의 역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개발도상국에 대한 공적개발원조(ODA)를 늘리고 한국의 경제 개발 경험을 전수하고 있으며, 민간 차원의 자발적 해외봉사도 늘고 있다. 현재 대한민국은 인간과 자연이 공생하는 친환경 성장에 주력하고, 국제안보와 평화, 그리고 세계의 공생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등 전 지구적 현안에 중심적 역할을 하며 더 큰 대한민국을 향해 나아가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