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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지사불교문화 답사자료
제5회 서예세상 정기답사
일시 : 2010. 6. 6(일)
장소 : 김천 직지사
주제 : 불교문화 답사
주최 : 다음카페 서예세상
답사 공지사항
☞승차장소 및 확인(출발 15분전 대기요망, 시간엄수)
1. 1호차 서울권 팀장 : 삼구동 서재철님(019-201-8004 )06시 30분 출발 서울역대우센터 앞 출발, 1호선 9번출구 앞 출발
2. 2호차 수도권 팀장 : 다인 장경순(010-7189-7388) 07시 출발
사당역 10번출구 앞 출발
3. 3호차 청주권 팀장 : 원교 김재규 (010-3403-4005)
08시 청주체육관 앞 출발
08시 20분 용암동 농협물류센타 앞 경유
4. 4호차 대전권 팀장 : 중재 신윤구(010-9589-1066)08시 30분 출발
대전연정국악문화회관(구 시민문화회관)
5. 5호차 대구권 팀장 : 삼도헌 정태수(010-5386-5869)
범어동검찰청주차장 08시 30분 출발,
성서홈플러스앞 경유, 09시 통과예정
6. 6호차 부산권 팀장 : 현강 김동성 (010-7761-3185)
김해출발 : 김해 삼방동 신어초등 버스정류소앞
06시50분 출발
부산출발 : 부산서면 롯데백화점 정문 맞은편 도로
07시30분 출발
7. 7호차 호남권 팀장 : 석인 강수호 (010-6645-0045) 07시 00분 출발
전주 월드컵 경기장 옆(호남제일문)
8. 8~13호차 : 각 지역별로 10인이내 개인자동차로 이동
9. 김천 현지 안내 팀장 : 무루헌 안홍표님 (010-5570-6274)
답사일정 안내
☞답사 일정 안내
◎답사신청한 곳에서 버스에 승차해 주시기 바랍니다.(15분전 대기요망)
→ ○○○ 출발(신청지역)
→ ○○○ 경유(시간엄수 바람)
→ 직지사 주차장 도착
→ 10:30 직지사 답사(2시간 소요)
→ 12:30 점심식사 및 자유시간(1시간 소요)
→ 13:30 불교문화 답사(1시간 소요)
→ 14:30 전체회원 만남의 시간(2시간 소요)
→ 16:30 각 출발지로 이동(해산)
→ ○○○ 경유
→ ○○○ 도착 (처음 출발지)
☞답사 개인준비물
1. 메모용지 및 필기도구 지참(답사시 필요한 내용 기록)
2. 카메라(기념사진 촬영 및 영상자료기록)
3. 간식 및 식수 등 간단한 음식물 준비
4. 6일 답사당일 간식(간단한 먹거리, 마실거리 등을
버스별로 준비하나 부족함)
5. 6일 답사당일 석식(이동중 휴게소 등에서 해결함을 원 칙으로 함, 단 버스별로 답사본부에서 특식 제공)
6. 답사게시판에 소개된 각종 답사자료를 복사하거나
메모해 활용하기 바람.(답사본부 답사안내자료 제공)
답사본부 제공
1. 점심 및 저녁식사(점심:직지사 특식 산채밥식당 예약완료, 저녁:특식준비, 각 버스별로 제공)
2. 참가자 전원에게 기념타올 증정(운영자회에서 제공,
단, 아이를 동반한 가정엔 어른에게만 제공)
3. 참가자 전원에게 1봉지씩 간식거리 제공
(물 1병, 과일, 사탕, 떡, 먹거리 등)
4. 직지사 전체 모임장소 수박파티(10통 준비)
5. 각 버스별로 이동중 마실 식수 및 음료준비
(안주거리, 먹거리 등)
6. 전체 참가회원 명찰 및 상비약 준비
7. 행운상품(서예용품<대전 일신필방제공>)
8. 운영자 및 작가가 휘호한 작품 및 부채 휘호작품 증정
(현장에서 추첨하여 표구된 작품 증정)
9. 직지사성보박물관장 흥선스님특강(불교문화재전문가)위촉
(문화유산 해설사 예약대기)
10. 답사안내자료 인쇄하여 배포
*평생 기억에 남는 유익한 답사가 되도록 준비했으니 답사자료를 반드시 먼저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답사를 마친 뒤 카페에서 답사후기 콘테스트를 합니다. 답사후기는 동영상부문, 사진부문, 답사기부문이 있으니 답사 후에 응모하시기 바랍니다. 각부문 장원에게는 푸짐한 상을 준비했습니다.
직지사(直指寺)는 어떤 절일까요?
1. 직지사의 위치
황악산(黃岳山) 동남쪽 산자수명(山紫水明) 한 곳에 대한불교 조계종 제8교구 본사 직지사(直指寺)가 자리해있다. 해발 1,111m에 달하는 황악산은 북쪽으로 충청도,서쪽으로 전라도, 동남쪽으로는 경상도에 연이은 삼도(三道)의 도계(道界)에 접하였으며, 이중심에 눌러 앉은 본사는 행정구역상으로는 경상북도(慶尙北道) 김천시(金泉市) 대항면 (代項面) 운수리(雲水里) 216번지이다.
황악산(黃岳山) 의 황자는 청(靑), 황(黃), 적(赤), 백(白), 흑(黑)의 5색(色) 중에서도 중앙색을 상징하는 글자이다. 따라서 예로부터 직지사는 해동(海東)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는 으뜸가는 가람이라는 뜻에서 동국제일가람(東國第一伽藍)이라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본사(本寺)로부터 김천까지는 12km이고, 다시 김천에서 서울까지의 거리는 230km, 부산까지는 218km로서 남한의 중앙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경부선(京釜線)을 비롯하여 태백산(太白山), 삼척(三陟)등 동해방면(東海方面)으로도 연결되는 한반도(韓半島) 교통의 요충지이며, 예로부터 길상지지(吉祥之地)로 전해져 내려오는 곳에 직지사는 정좌(定座)하고 있다.
따라서 절의 위치가 산곡(山谷)이면서도 높지 아니하고, 야지(野地)인듯 하면서도 산사(山寺)의 풍취(風趣) 가 항상 흘러 넘쳐서 4계절 내내 도량을 참배하는 신남신녀(信男信女)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잠시 황악산의 산세와 지형을 살펴보면, 최상봉인 비로봉(毘盧峰)에서는 경상, 충청, 전라의 3도를 한눈으로 굽어볼 수 있으며, 바로 아래에는 선유봉(仙遊峰)을 비롯하여 천룡봉(天龍峰)과 운수봉(雲水峰)이 있고, 조금 내려와서 절경대(絶景臺)가 있으며, 그 중턱에 운수암(雲水庵)이 있어 승경(勝景)을 이룬다. 운수봉(雲水峰)에서 다시 2km쯤 올라가면 백운봉(白雲峰)이 있고, 그 아래로 만경대(萬景臺)가 펼쳐진다. 다시 남서로 난 능선을 따라가면 망월봉(望月峰)과 함께 신선봉(神仙峰)을 만날 수 있으며, 그 위에 형제봉(兄弟峰)은 백운봉과 마주하여 아름다운 절경을 이루고 있다.
2. 직지사의 역사
직지사는 신라 눌지왕(訥祗王) 2년(418) 아도 화상(阿道和尙)에 의하여 도리사(桃李寺)와 함께 개창(開創)되었다. 그 사명(寺名)을 직지(直指)라 함은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이라는 선종(禪宗)의 가르침에서 유래되었다 하며, 또 일설에는 창건주(創建主) 아도 화상이 일선군(一善郡, 善山) 냉산(冷山)에 도리사를 건립하고 멀리 김천의 황악산을 가리키면서 저 산 아래도 절을 지을 길상지지(吉祥之地)가 있다고 하였으므로 하여 직지사(直指寺)라 이름했다는 전설(傳說)도 있다. 또는 고려의 능여 화상이 직지사를 중창할 때 자를 사용하지 않고 직접 자기 손으로 측지(測地)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란 설도 있다.
이는 모두 창건설화와 연관된 직지(直指)의 미화(美化)된 전설에서 유래되고 있지만, 실은 불교 본연의 직지인심(直指人心)을 상징하는 의미로 풀이 될 수 있다. 즉 창건 설화의 직지(直指)와 선가(禪家)의 직지(直指)가 둘이 아니라고 볼 때, 이는 곧 불교의 본질을 나타내는 이름이라 하겠으며, 또한 사명 (寺名)에 불교의 본지(本旨)를 이처럼 극명(克明)하게 나타내는 사찰도 흔치 않으리라 본다.
아도 화상에 의하여 개창된 직지사는 신라시대에 2차에 걸친 중수가 있었다. 그 첫째는 선덕여왕(善德女王) 14년(645) 자장 법사(慈藏法師)에 의한 중수를 들 수 있고, 두 번째는 경순왕(敬順王) 4년(930) 천묵대사 (天默大師)에 의한 2차 중수가 그것이다.
먼저 자장 법사의 중수는 자세한 기록이 없어 잘 알 수 없고, 오히려 경순왕대의 사실이 보다 자세히 전해진다. 아마 이때는 신라의 국운이 쇄진하여 경순왕이 고려에 투항(投降)하기 불과 5년 전의 일이며, 이 시기는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변혁기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직지사 사적에 따르면 이러한 시기에 천묵 대사는 본사를 중수하고, 더 나아가 금자대장경(金字大藏經)을 서사(書寫)하여 신라 조정(朝廷)에 헌상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는 현존 유품(現存遺品)이 전해지지 않아 그 내용을 자세히 알 수 없지만, 다음에 언급하게 될 금자대장경비(金字大藏經碑)가 이를 입증(立證)하고 있다. 다만 이제 지난날 직지사의 찬란하였던 사격(寺格)을 밝히면서 신라시대에 이미 금자대장경을 제작하였다는 이 놀라운 사실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 우리들은 대장경이라고 하면 해인사(海印寺)의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을 그 대표로 삼아 왔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서 이미 신라시대에, 그것도 금자대장경을 만들었다는 사적기의 내용은 진실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더구나 이를 접한 경순왕은 어찰(御札)로써 점제(點題, 經名을 쓰는 것)하였다고 하였으므로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에 대한 현품이 전래되지 않아 그간의 사정을 잘 알 수 없지만, 왕조(王朝)가 바뀐 고려시대 초기에 본사(本寺)에는 금자대장경이 봉안되었고, 또한 대장당비(大藏堂碑)가 건립되고 있다. 즉 고려 태조(太祖) 왕건(王建)은 직지사의 고승 능여 조사(能如祖師)의 도움으로 후백제(後百濟)와의 불리한 싸움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고, 이로 인해 직지사는 국가적 비호(庇護)를 받았으며, 이후 능여 조사(能如祖師)의 제자들 역시 대대로 본사를 중흥(中興)하더니 광종 원년(光宗元年, 950)에는 3월 1일부터 약 50일 간 법회(法會)를 개설(開設)하여 경찬회(慶讚會)를 성대히 베풀었다.
그런데 이때의 경찬법회는 금자대장경을 다시 필사한 것에 대한 법회인지, 아니면 경순왕이 점제(點題)하였던 금자대장경을 경순왕의 투항 후 신라 조정으로부터 인수하고 대장당(大藏堂)을 건립한 낙성연(落成宴)인지는 자세한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지만, 아마도 후자일 가능성이 더욱 짙다. 그것은 신라의 국운이 고려로 이양되는 과도기적 상황과 함께 태조 왕건의 불교신앙과 아울러 능여 조사로 인한 그간의 사정에서 짐작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보다 분명한 것은 금자대장당비(金字大藏堂碑)를 새겨 절을 북정(北亭)에 세웠다는 사적기의 내용에서 더욱 그러하다. 이에 대한 물적 근거는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에 실려 있는 직지사 대장당기비(大藏堂記碑)의 탁본(拓本)이며, 이는 왕우군(王右軍)의 집자(集字)로서 유명하다.
조선시대(朝鮮時代)의 직지사는 제 2대 정종 원년(定宗元年, 1339) 정종의 어태(御胎)를 절의 북봉(北峰)에 봉안함으로써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고, 이로 인하여 조선시대에도 줄곧 사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조선 중기에는 사명 대사(四溟大師)가 본사(本寺)에 출가(出家)하여 신묵 대사(信默大師)의 제자가 된 것이 유명하거니와, 이로 인하여 직지사는 배불(排佛)의 그늘 속에서도 사운(寺運)을 유지할 수 있었다.
30세에 직지사 주지(主持)가 된 사명 대사는 이후 임진왜란(任辰倭亂)이 발발(勃發)하자 구국제민(救國濟民)의 선봉(先鋒)에서 큰 공을 세웠음은 너무나 유명하다. 이렇게 구국(救國) 사명 대사의 공로로 인하여 직지사는 조선(朝鮮) 8대가람(八大伽藍)의 위치에 놓이게 되었고,300여 소속사암(寺庵)을 거느리게 되었다.
그리고 직지사의 사세가 가장 흥성했던 시기에는 현재 김천시내 법원이 있는 곳을 비롯하여 구화사(九華寺)까지가 직지사의 사유지였으며, 뿐만 아니라 상주 통로 우시장(牛市場) 근처의 다리이름이 직지교(直指橋)였고, 그 상류(上流)는 모두 직지사의 영유(領有)였다 하니 그 규모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직지사는 조선시대 말엽 국운의 쇠퇴와 함께 그 사운(寺運)을 같이 하여 한때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다. 무엇보다 직지사는 일제시대(日帝時代)사찰령(寺刹令)이 제정되면서 한때 해인사(海印寺)의 말사(末寺)로 전락하기도 하였으나, 광복 이후 50년대에 본산제도(本山制度)가 재편성되면서 본산(本山)으로 승격되어 그 사세를 차츰 회복하기 시작하였다.
현재는 국내 25본산(本山) 가운데 하나로서 제8교구(第八敎區) 본사(本寺)이며 소속 말사(末寺) 54개 사찰에 이르고 있다. 관할 구역은 4개시(個市), 1개군(個郡)으로 김천, 구미, 상주, 문경시와 예천군이다. 또한 본사의 산림(山林)은 약 600정보(町步)에 달하며, 사찰 경내 면적만도 약 30,000평에 이른다. 그리고 본사에 소속된 말사 역시 수많은 성보문화재(聖寶文化財)와 고적을 지니고 있다.
3. 직지사의 주요 문화재
1) 대웅전과 삼층석탑
대웅전은 2층 5간의 웅장한 규모였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735년(영조11년)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아미타여래불과 약사여래불을 모시고 정면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으로 중건되었다. 대웅전 앞 삼층석탑은 1974년 문경 도천사 절터로부터 이전한 것으로 보물 606호로 지정되었다.
2) 대웅전 후불탱화
불전 내부의 후불탱화는 보물 제 670호로 1744(영조20년)에 조성된 것으로, 대웅전 외벽 3면에는 인간이 본성을 찾아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을 묘사한 선종화가 그려져 있다.
3)도리사 금동육각 사리함
선산 도리사에서 세존사리탑 이전과정에서 발견된 사리함으로 국보 제208호로 지정되었으며 직지사 성보박물관에 보존하고 있다.
4. 직지사의 설화
1) 비로전(毘盧殿)과 동자상
고려태조 때 능여조사에 의해 세워진 비로전은 태조 14년 경잠대사에 의해 천불상이 봉안됨으로써 천불전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임진왜란 때 소실을 면한 유일한 불전으로 정면 7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구조이다. 14개의 나무계단에 경주옥돌로 조성된 천개의 불상 중 발가벗은 동자상을 첫눈에 발견하면 아들을 낳는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2) 사명대사와 직지사
직지사는 임지왜란 때 나라를 구한 사명대사가 출가하고 득도한 사찰이다. 사명대사(1544~1610)는 경남 밀양 태생으로 속명이 임응규(任應奎), 법명은 유정(惟政), 호는 사명당(四溟堂)이다. 16세에 부친을 여의자 직지사에 출가하여 신묵대사의 제자가 되었다. 18세에 선과(禪科)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30세에 직지사 주지가 되었다. 32세 때 봉은사 주지로 천거되었으나 사양하고, 묘향산 보현사로 휴정(休靜, 서산대사)을 찾아가 제자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승병을 조직해 승병장으로 명성을 떨쳤다.
어느날 신묵대사가 참선을 하던 중 꿈에 천왕문 옆 은행나무에 황룡이 서려있는 것을 보고 깨어나 그 자리에 가보니 한 소년이 자고 있었다. 신묵대사는 그 소년을 제자로 삼았는데 이 소년이 사명대사이다. 당시 은행나무는 1800년 만세루가 불타면서 같이 불에 타버렸고, 현재 천왕문 앞에 있는 돌은 소년 사명당이 낮잠을 자던 돌이라고 전한다.
직지사의 사물(답사집중자료 1)
모든 사찰에는 사물(四物)이 있습니다. 사물(四物)이란 무엇일까요?
오늘은 사물에 대해서 알아봅니다.
사물이란 절에서 의식이나 법회시 사용하는 대표적인 4가지 물건으로 범종루
(범종각, 종루, 종각)에 보관하며, 범종, 법고, 목어, 운판을 말합니다.
1. 범종(梵鐘)
절에서 사용하는 종을 가르키며, 「 범(梵) 」이란 맑고 깨끗하다는 뜻으로
불교의 여러 행사에 사용되는 용어입니다.
범종은 원래 절에서 대중들에게 시간을 알려주는 기구로 사용하다 그 소리가
워낙 아름다워 여러 의식에까지 사용되었으며, 큰종을「 인경 」이라고 합니다.
특히 예불시간에 치는 범종소리는 지옥중생을 비롯한 일체중생을 위해 치며,
아침에는 28번, 저녁에는 33번을 치는데 이것은 선종의 초조 마하가섭으로부터
28대 보리달마까지를 상징하며 아침에는 낮은 소리로부터 큰소리로 높이며
저녁에는 33번을 치는데 이것은 불교에서 뜻하는 하늘의 28천과 육도윤회중의
5곳을 합한 33곳에 있는 모든 중생들을 깨우치기 위해 친다고 합니다.
2. 법고(法鼓)
홍고(弘鼓)라고도 하며 절에서 조석으로 예불할 때 또는 의식을 치를 때 쓰는
북을 말합니다. ‘마음심(心)’의 한자를 그리듯이 치며 특히 가죽있는 축생제도를
목적으로 하기에 그 대표적인 상징으로 북의 두 면은 「숫소와 암소」 가죽으
로 만듭니다.
3. 목어(木漁)
나무의 속을 파내어 「 잉어 」모양으로 예불시나 경전을 읽을때 두드리는데
「 방 」이라고도 합니다.
물 속 생물들을 제도하기 위하여 사용하며 최초 절에서는 대중을 모으는데 사
용했습니다.
목어는 물고기처럼 항상 눈을 뜨고 게으름 없이 수행정진하라는 뜻이며,
물 속의 생명과 게으른 중생을 일깨우기 위하여 나무로 만든 고기에 뿔이 달려
있습니다.
물고기 형상의 몸통 사이에서 생겨나는 공명의 울림으로 물밑에 사는
물 속 중생들에게 한 없는 해탈을 가질 수 있게 합니다.
4. 운판(雲版)
구름 모양의 청동으로 만든 넓은 쇠판을 말합니다.
「 하늘을 나는 모든 날짐승에까지 불법을 전하여 」그들의 괴로움과 아픔을
덜어 주기 위한 것으로 조석으로 칩니다.
구름 형상을 한 운판을 울림으로써 허공세계를 날고 있는 수많은 중생들이 영
원한 안식을 얻기를 기원합니다.
자아~~~! 이제 사물에 대해서 이해를 하셨죠?
그러면 직지사의 사물을 아래 사진에서 직접 보시겠습니다^^
직지사의 범종(梵鐘)
직지사의 목어(木漁)
직지사의 운판(雲版)
직지사의 법고(法鼓)
종의 명칭 및 김용사 동종(답사집중자료 2)
보물 제11-2호 문경 김용사 동종 (2000. 2. 15 지정)과 범종의 각부 명칭 |
<범종의 명칭>
◎ 용뉴(龍뉴) : 용의 모양을 취한 범종의 가장 윗부분으로 종을 매다는 역할을 함.
◎ 음관(音管) : 용의 바로 옆에 붙어있는 음관은 용통(甬筒) 음통(音筒)이라고도 불
리어지는 소리대롱이다. 우리나라 범종에서만 볼수 있는 특징이다.
◎ 상대(上帶) : 하대(下帶) : 상대는 종의 어깨 부분에 둘려진 무늬띠이고,
하대는 종의 아랫부분인 종구에 둘려진 무늬띠이다.
◎ 유곽(乳廓) : 유두(乳頭) : 유곽은 상대 밑쪽의 네 곳에 붙어있는 네모난 테이며
이 유곽속에는 각각 9개씩 볼똑 솟아있는 도들꼭지가 있는데 이를 유두라고한다. 그 솟은 부분 주위에 꽃판이 있는데 흡사 젖꼭지 모
양과 같다고 하여 유두라 부르게 된 것이다. 이 유곽과 유두도 다른 나라 종에는 없는 한국종만이 갖는 뚜렷한 특징이다.
◎당좌(撞座) : 당좌는 종을 치는 당목이 직접 접촉되는 부분이다.
종의 구조
사찰에서는 조석으로 예불이 시작되기 전에 세상에 살아있는 모든 것을 깨우치기
위해 북, 범종, 목어, 운판 등을 차례로 칩니다. 마지막에 치는 운판의 짧은소리를
이어받아 법당의 작은 종이 울리면 스님들이 예불을 시작합니다.
직지사 성보박물관에 있는 보물인 김룡사 동종은 법당에서 사용하는 작은 종입니
다. 조선시대 사인(思印)스님이 이 종을 만들었는데 통일신라시대 종의 모습을 가지
고 있습니다. 위의 그림에서 보듯이 종은 매다는 고리와 소리를 내는 몸통으로 되
어있습니다.
고리는 보통 용을 구부려 만든 고리라 하여 용뉴라고 부릅니다.
통일신라시대의 종은 마치 종을 들고 있는 듯한 용의 모습과 그 뒤로 소리가 울리
는 원통형의 음통이 있습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로 내려오면서 음통은 사라지고
용의 모습만 남게 됩니다.
김용사 동종은 조선 현종~숙종 연간에 주종장이었던 사인(思印 : 숙종 때의 인물
로 경상도와 경기도 지역에서 활동했으며 동시대에 활동했던 전라지역의 김애립金
愛立과 쌍벽을 이룬 승장) 이라는 스님이 만든 종입니다. 사인스님은 신라종의 양식
을 계승한 조선종을 제작한 거장(巨匠)으로 그의 작품이 국내에 8점이 남아 있으며
모두 보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사인비구스님이 제작한 범종]
▲경북 포항시 보경사 서운암 동종(1667) / ▲경북 문경시 김용사 동종(1670) /
▲강원도 홍천군 수타사 동종(1670) / ▲경기도 안성군 청룡사 동종(1674) /
▲서울 화계사 동종(1683) / ▲경남 양산시 통도사 동종(1686) /
▲경기도 의왕시 청계사 동종(1701) / ▲경기 강화군 고려궁지 동종(1711)
김용사 동종 (연화기, 緣化記)
종의 명문을 통해 이 종은 1670년에 당시 상주목 운달산 운봉사(雲峰寺, 현재의
김용사)에서 주조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위의 종에 조성된 명문을 통해 사인 스님은 17세기 중엽에서 18세기 초엽까지 주
종장(鑄鐘匠)으로 활동했으며, 병자호란 이후 17세기 사찰의 재건 과정에서 범종생
산의 중요한 축을 맡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김용사 동종은 사인 스님의 주종 활동
시기 가운데 중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가장 완성도가 높으며 크기가 더 큰 수타사
동종의 원형이 되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현재 김용사 동종은 제8교구 본사인 김천
직지사 성보박물관에 보관중입니다.
김룡사 종에는 조선시대 일반적인 종과는 다르게 통일신라시대 종에서 볼 수 있는
용과 음통이 있습니다.
또 다른 차이점은 통일신라시대 종은 몸통 어깨부분에 무늬를 넣은 넓은 띠가 둘
러지고 바로 그 밑에 유곽대라고 불리는 네모난 틀이 있습니다.
그리고 종 중앙에는 아름다운 비천상이 있습니다. 조선시대 종은 어깨부분에 범자
(梵字)가 둘러지고 아래에 있는 유곽대 사이로 보살상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 모습은 김룡사 동종에서도 보입니다.
이밖에도 김룡사 동종에는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撞座)가 연꽃모양으로 4개가 있
고 종 맨 밑에는 용과 연꽃이 어우러진 조각이 있습니다.
이제 종에 대해서 어느정도 이해가 되셨습니까?
답사 때 상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석탑의 명칭 및 직지사 3층석탑(답사집중자료 3)
1. 탑의 역사
탑(塔)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왜 만들어졌을까요?
탑은 인도의 범어(梵語)인 스투파(stupa)를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탑파 혹은 탑이라고 읽습니다. 탑은 부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만들어진 하나의 무덤양식인데, 일반 승려의 사리가 안치된 사리탑 혹은 부도(浮屠)와는 구분됩니다. 불탑의 경우 사찰의 중심부(주로 대웅전 앞마당)에 위치하며 신앙의 중심역활을 하지만 부도탑은 사찰 밖이나 뒤에 위치하며 승려의 무덤일 뿐입니다.
탑은 기원 1세기경 대승불교의 영향으로 불상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가장 중요한
예배 대상이었고 불자들이 기도하는 사찰도 탑을 중심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밥그릇을 엎어놓은 듯한 복발형의 인도 스투파는 동아시아로 전해지면서 누각형태로 변하고 그릇을 뒤짚어 놓은듯한 복발형의 스투파는 현재 탑의 가장 윗부분인 상륜부에 남아있습니다. 동아시아의 탑은 재료에 따라 목탑(나무), 석탑(돌), 전탑(벽돌)으로 구분되는데 자연적 여건과 관련되어 중국에서는 전탑, 일본에서는 목탑, 한국에서는 석탑이 유행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중국은 황토가 많은 자연환경이고, 일본은 수목이 우거진 나라이며, 우리나라는 주변에서 쉽게 화강암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불교의 창시자는 인도의 석가모니(영어로는 싯다르타)인데, 부처가 열반하자, 부처의 제자들은 당시 인도의 장례풍습에 따라 화장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화장 후 일반 뼈 조각이 아닌 영롱한 사리를 발견하였습니다. 그 때 인도의 여덟나라는 부처의 사리를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싸움을 하였습니다. 부처의 제자인 도로나가 부처의 사리를 똑 같이 여덟나라에 나누어 주어 싸움은 일단락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사리 신앙이 생겨난 것으로 보고 있는데, 부처의 진신사리는 곧 부처와 다름없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부처의 사후 백년이 지나 인도의 전설적인 제왕 아쇼카는 대인도 제국을 세우고, 부처의 진신사리가 안치된 8대탑을 발굴하여, 그것을 다시 8만 4천개로 나누어 전 인도와 동아시아에 나누어 주었습니다. 인도인들에 있어 8만4천이라는 수는 많다는 뜻으로 동시에 인간의 육신이 8만4천개의 부분으로 이루어졌다는 믿음의 반영이었습니다. 이렇게하여 불교는 사리탑과 함께 크게 번영을 누릴 수 있었는데, 현재 남아있는 산치대탑은 기원전 3세기 것으로 가장 오래된 불탑양식입니다. 아래 사진에서 보는 것이 산치대탑입니다.
기원전 3세기 조성된 산치대탑
그렇다면 한국의 탑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요?
인도의 탑이 불교의 전래와 함께 중국을 거치면서 고층 누각형태로 변하였고,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초기에는 중국의 전탑흉내를 내다 건축구조를 따라 목탑으로 제작되었고, 후에 석탑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렇더라도 석탑에는 목탑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백제시대 석탑은 주로 5층으로 조성되었고, 신라의 석탑은 3층이 주종을 이루게 됩니다. 특히 통일신라시대는 한국석탑의 전형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석가탑이 그 대표입니다. 석가탑은 그 후 많은 석탑의 모델이 됩니다. 특히 이형탑(異形塔)의 대표인 다보탑도 이 시기에 만들어 집니다. 고려는 불교의 국가였지만 탑이 양식상 퇴행을 보였고, 조선은 유교국가였기 때문에 탑이 거의 만들어지지 않게 됩니다.
우리가 답사에서 살펴볼 직지사 삼층석탑도 통일신라기에 조성된 탑양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탑의 대표스타인 통일신라의 석가탑을 아래에서 감상하겠습니다. 석가탑은 일반적으로 751년경(경덕왕 10년, 742년설도 있음) 김대성이 불국사를 세울 때 조성한 것으로, 높이 10.4미터이며, 2층 기단의 웅대함과 탑의 아름다움이 잘 조화된 당대의 대표적인 석탑입니다.
국보 21호 통일신라 석가탑
2. 탑의 형태
이제, 본격적으로 석탑의 형태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합시다. 석탑은 맨 아래의 기단부와 중간의 탑신부 그리고 맨 위의 상륜부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초기 석탑의 대표적인 양식을 보여주는 정림사지오층석탑의 기단부와 탑신부를 살펴보겠습니다. 탑의 층수는 탑신부의 몸돌과 지붕돌의 층수만 계산합니다.
3. 기단부
석탑의 기단부는 탑의 중심부분인 탑신부와 상륜부를 올리기 위해 터다짐의 목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우리나라 석탑은 처음에는 정림사지석탑에서 보는 것처럼 목탑을 근거로 해서 백제탑은 축대(기단부)가 단층이었으나 통일신라시대에 들어 오면서 신라탑은 2층의 축대(기단부)를 조성하였습니다
먼저, 지대석은 울퉁불퉁하고 자연환경에 의해 쉽게 변형되는 땅을 평평하게 유지토록 하기 위해 깔아 놓은 석재를 말합니다. 다음, 지대석 위로 기단괴임석을 놓습니다. 본격적인 축대쌓기가 시작되는 곳입니다.
괴임석은 목조건물의 원형을 따르기 위해서 라고 보는 것이 좋을듯 합니다. 또한 말 그대로 기단을 굳건하게 괴기위해 사용된 돌입니다.
이 기단괴임석을 딛고 기단면석을 세웁니다. 기단부의 중심돌이기도 합니다. 면석(面石)이란 뜻은 굳이 한글로 풀이하자면 얼굴돌인데, 이 돌에 여러가지 문양을 새겨 놓았던 까닭에 그렇게 부릅니다. 기단석에는 모서리에 우주라고 하는 기둥모양의 돌을 세웁니다. 위로 부터의 하중을 떠 받들기 위해서입니다. 무게분산을 위해 가운데에도 기둥을 세웠는데, 이것은 탱주라고 합니다. 이 기단석을 위에서 마치 뚜껑처럼 덮고 있는 돌이 바로 기단갑석입니다. 다시 한번 기단석을 위에서 부터 압박하며 고정시키기 위함이고, 바로 위에서 부터 올려질 탑신부의 평평한 면을 유지시키기 위함입니다.
이와 같이 기단부는 땅의 수평면을 유지하기 위한 지대석과 본격적으로 탑신부를 받치기 위한 기단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위의 그림은 초기석탑의 기단부 그림인데, 통일신라로 들어 오면서 기단이 1층에서 2층으로 바뀝니다. 즉, 똑같은 모양의 기단이 하나 더 얹혀진다는 것인데 전체적인 균형을 위해 아래기단(1층기단)은 큰반면, 2층기단은 작은 모양으로 이루어 집니다.
4, 우주와 탱주
위의 우주와 탱주는 탑의 각층 몸돌과 기단석에 자주 새겨져 있는 양식입니다.
목조건축물에서는 건물의 무게를 떠받들기 위해서 있는 아주 중요한 기둥이다. 석탑의 우주와 탱주는 사실 탑의 무게를 지탱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냥 목조건축물의 양식을 본뜨기 위해서 탑의 몸돌에 기둥의 모양을 새겨넣은 것입니다.
이것은 탑의 건축연대를 파악하기 위한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즉 탱주의 수량이 2개이상일 경우는 통일신라시대와 그 이전의 탑으로 추정하고, 1개이거나 없을 경우에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탑으로 추정합니다. 예를들면, 익산의 미륵사지탑은 전형적인 목조형식을 빌어서 만든 석탑입니다. 이곳의 탱주는 마치 목조건축물의 평주와 다름없이 많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5. 지붕돌의 옥개받침과 풍탁(風鐸)
옥개받침은 흔히 '지붕주름', '옥개주름' 이라고도 말하는데 목조건물의 서까래를 응용한 것입니다. 중첩된 주름의 이미지는 옥개 즉, 지붕의 크기를 강조할 목적으로 쓰여졌습니다. 초기에는 받침의 수가 5개였고, 후기로 오면서 차츰 줄어드는 경향입니다.
반전(反轉)은 처마끝이 위로 치켜올라간 정도를 말하는데 '반전이 심하다'라고 하면 처마끝이 위로 급하게 치켜올라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통일신라시대의 탑은 반전이 약하고 다소 밋밋했으나, 후기 고려로 넘어 오면서부터는 옥개석의 규모가 작아지면서 낙수면의 흐름이 급해졌습니다. 또한 반전이 심하여 경쾌하면서도 상대적으로는 왜소한 느낌을 줍니다.
풍탁(風鐸)이란 말은 법당안에서 스님이 예불을 모실 때 쓰는 목탁을 응용하여 생긴 용어로, '바람이 불어 와서 종을 친다'는 말입니다. 흔히 탑의 처마끝에는 구멍을 내어 이 풍탁을 달았는데 이는 석탑에서 치장의 의미라고 보면 됩니다.
6. 낙수면
석탑은 별도의 건축물이나 구조물 내에서 보관하는 그런 형식의 문화재가 아닙니다. 산이나 들판에 서서 그대로 자연의 풍상을 겪어야 하는 노천(露天)문화재 입니다. 따라서 자연 환경중에서 비[雨]에 대한 구조적인 배려가 가장 중요합니다.
탑을 자세히 바라다보시면 기단갑석이나 옥개석 밑의 첫 옥개받침의 모양이 빗물의 흐름에 대하여 민감하게 반응한 흔적을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
7. 상륜부(相輪部)-(노반,복발,앙화,보륜,보개)
1. 옥개석에는 옥개받침 부분이 있습니다. 마치 기와지붕의 서까래처럼 보입니다.
우리나라 석탑의 원형은 백제의 목탑에서 가져왔고, 이 목탑의 원형은 목조건축물에서 본떠 왔습니다. 따라서 초창기의 석탑에는 이 옥개받침이 5개입니다, (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 중기까지) 그 후 통일신라중기부터 고려초에는 4개로 줄어들다가 고려말에는 3개로 작아졌습니다. 조선시대에는 탑이 거의 조성되지 않습니다.
2. 반전이라 함은 옥개석의 귀마루 부분인데 구조명칭은 아닙니다. 즉, 귀마루(우동) 선이 밑으로 내려오다 그 끝에서 위로 갑자기 치켜오르는 각도(정도)를 말하는데 초창기의 석탑에는 이 반전의 정도가 아주 약합니다. 후기 통일신라시대에 오면서 반전은 심해지고 고려시대의 탑들은 너무 심해서 날카롭기까지 합니다. 왜냐하면 고려시대의 탑 옥개석은 상대적으로 왜소한데다가 반전이 심하기 때문입니다.
3. 전각이라고 나와 있는 부분은 옆에서 보면 옥개석의 두께를 말하는것처럼 보입니다. 초창기의 석탑에는 이 전각의 높이가 아주 약합니다. 부여 정림사지 석탑을 보시면 참 얇습니다. 통일신라 시대에 넘어 오면서 높이는 차츰 높아지다가 고려시대에는 몽땅그리한 옥개석의 모양에다 전각도 한층 높아집니다.
4. 낙수면은 비가 오면 빗물이 흘러내리는 경사면을 말합니다. 초창기 석탑일수록 경사면은 완만합니다. 어찌보면 평평한 느낌이 올 정도입니다. 후기에는 이 낙수면의 경사가 높아집니다.
8. 직지사 3층석탑(보물 606호)
직지사 대웅전 앞에 동·서로 서 있는 2기의 석탑으로, 원래 경북 문경의 도천사터에 있던 것을 이 곳으로 옮겨 놓은 것입니다. 두 탑 모두 각 부분의 양식이 같아서 1단의 기단(基壇)위로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리고 있습니다. 여러 장의 넓적한 돌로 짜여진 기단은 4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의 우주와 탱주를 조각해 두었습니다.
탑신의 각 층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뚜렷한 기둥 모양의 조각이 새겨져 있습니다. 얇고 평평한 지붕돌의 밑면 받침으로 1·2층은 5단, 3층은 4단을 두었고, 수평을 이루던 처마는 네 귀퉁이에서 경쾌하게 들려 있습니다. 꼭대기에 올려진 거대한 모습의 머리장식은 1976년 탑을 옮겨 세울 때 새로 만들어 장식해 놓은 것입니다.
탑신의 1층 몸돌 높이가 지나치게 높긴 하나, 전체적으로 세련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습니다. 기단이 1단이고, 지붕돌의 들린 정도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짐작됩니다. 서예세상 답사 때 자세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문화연구소장 삼도헌 정태수
1. 직지사의 위치
황악산(黃岳山) 동남쪽 산자수명(山紫水明) 한 곳에 대한불교 조계종 제8교구 본사 직지사(直指寺)가 자리해있다. 해발 1,111m에 달하는 황악산은 북쪽으로 충청도,서쪽으로 전라도, 동남쪽으로는 경상도에 연이은 삼도(三道)의 도계(道界)에 접하였으며, 이중심에 눌러 앉은 본사는 행정구역상으로는 경상북도(慶尙北道) 김천시(金泉市) 대항면 (代項面) 운수리(雲水里) 216번지이다.
황악산(黃岳山) 의 황자는 청(靑), 황(黃), 적(赤), 백(白), 흑(黑)의 5색(色) 중에서도 중앙색을 상징하는 글자이다. 따라서 예로부터 직지사는 해동(海東)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는 으뜸가는 가람이라는 뜻에서 동국제일가람(東國第一伽藍)이라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본사(本寺)로부터 김천까지는 12km이고, 다시 김천에서 서울까지의 거리는 230km, 부산까지는 218km로서 남한의 중앙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경부선(京釜線)을 비롯하여 태백산(太白山), 삼척(三陟)등 동해방면(東海方面)으로도 연결되는 한반도(韓半島) 교통의 요충지이며, 예로부터 길상지지(吉祥之地)로 전해져 내려오는 곳에 직지사는 정좌(定座)하고 있다.
따라서 절의 위치가 산곡(山谷)이면서도 높지 아니하고, 야지(野地)인듯 하면서도 산사(山寺)의 풍취(風趣) 가 항상 흘러 넘쳐서 4계절 내내 도량을 참배하는 신남신녀(信男信女)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잠시 황악산의 산세와 지형을 살펴보면, 최상봉인 비로봉(毘盧峰)에서는 경상, 충청, 전라의 3도를 한눈으로 굽어볼 수 있으며, 바로 아래에는 선유봉(仙遊峰)을 비롯하여 천룡봉(天龍峰)과 운수봉(雲水峰)이 있고, 조금 내려와서 절경대(絶景臺)가 있으며, 그 중턱에 운수암(雲水庵)이 있어 승경(勝景)을 이룬다. 운수봉(雲水峰)에서 다시 2km쯤 올라가면 백운봉(白雲峰)이 있고, 그 아래로 만경대(萬景臺)가 펼쳐진다. 다시 남서로 난 능선을 따라가면 망월봉(望月峰)과 함께 신선봉(神仙峰)을 만날 수 있으며, 그 위에 형제봉(兄弟峰)은 백운봉과 마주하여 아름다운 절경을 이루고 있다.
2. 직지사의 역사
직지사는 신라 눌지왕(訥祗王) 2년(418) 아도 화상(阿道和尙)에 의하여 도리사(桃李寺)와 함께 개창(開創)되었다. 그 사명(寺名)을 직지(直指)라 함은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이라는 선종(禪宗)의 가르침에서 유래되었다 하며, 또 일설에는 창건주(創建主) 아도 화상이 일선군(一善郡, 善山) 냉산(冷山)에 도리사를 건립하고 멀리 김천의 황악산을 가리키면서 저 산 아래도 절을 지을 길상지지(吉祥之地)가 있다고 하였으므로 하여 직지사(直指寺)라 이름했다는 전설(傳說)도 있다. 또는 고려의 능여 화상이 직지사를 중창할 때 자를 사용하지 않고 직접 자기 손으로 측지(測地)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란 설도 있다.
이는 모두 창건설화와 연관된 직지(直指)의 미화(美化)된 전설에서 유래되고 있지만, 실은 불교 본연의 직지인심(直指人心)을 상징하는 의미로 풀이 될 수 있다. 즉 창건 설화의 직지(直指)와 선가(禪家)의 직지(直指)가 둘이 아니라고 볼 때, 이는 곧 불교의 본질을 나타내는 이름이라 하겠으며, 또한 사명 (寺名)에 불교의 본지(本旨)를 이처럼 극명(克明)하게 나타내는 사찰도 흔치 않으리라 본다.
아도 화상에 의하여 개창된 직지사는 신라시대에 2차에 걸친 중수가 있었다. 그 첫째는 선덕여왕(善德女王) 14년(645) 자장 법사(慈藏法師)에 의한 중수를 들 수 있고, 두 번째는 경순왕(敬順王) 4년(930) 천묵대사 (天默大師)에 의한 2차 중수가 그것이다.
먼저 자장 법사의 중수는 자세한 기록이 없어 잘 알 수 없고, 오히려 경순왕대의 사실이 보다 자세히 전해진다. 아마 이때는 신라의 국운이 쇄진하여 경순왕이 고려에 투항(投降)하기 불과 5년 전의 일이며, 이 시기는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변혁기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직지사 사적에 따르면 이러한 시기에 천묵 대사는 본사를 중수하고, 더 나아가 금자대장경(金字大藏經)을 서사(書寫)하여 신라 조정(朝廷)에 헌상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는 현존 유품(現存遺品)이 전해지지 않아 그 내용을 자세히 알 수 없지만, 다음에 언급하게 될 금자대장경비(金字大藏經碑)가 이를 입증(立證)하고 있다. 다만 이제 지난날 직지사의 찬란하였던 사격(寺格)을 밝히면서 신라시대에 이미 금자대장경을 제작하였다는 이 놀라운 사실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 우리들은 대장경이라고 하면 해인사(海印寺)의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을 그 대표로 삼아 왔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서 이미 신라시대에, 그것도 금자대장경을 만들었다는 사적기의 내용은 진실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더구나 이를 접한 경순왕은 어찰(御札)로써 점제(點題, 經名을 쓰는 것)하였다고 하였으므로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에 대한 현품이 전래되지 않아 그간의 사정을 잘 알 수 없지만, 왕조(王朝)가 바뀐 고려시대 초기에 본사(本寺)에는 금자대장경이 봉안되었고, 또한 대장당비(大藏堂碑)가 건립되고 있다. 즉 고려 태조(太祖) 왕건(王建)은 직지사의 고승 능여 조사(能如祖師)의 도움으로 후백제(後百濟)와의 불리한 싸움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고, 이로 인해 직지사는 국가적 비호(庇護)를 받았으며, 이후 능여 조사(能如祖師)의 제자들 역시 대대로 본사를 중흥(中興)하더니 광종 원년(光宗元年, 950)에는 3월 1일부터 약 50일 간 법회(法會)를 개설(開設)하여 경찬회(慶讚會)를 성대히 베풀었다.
그런데 이때의 경찬법회는 금자대장경을 다시 필사한 것에 대한 법회인지, 아니면 경순왕이 점제(點題)하였던 금자대장경을 경순왕의 투항 후 신라 조정으로부터 인수하고 대장당(大藏堂)을 건립한 낙성연(落成宴)인지는 자세한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지만, 아마도 후자일 가능성이 더욱 짙다. 그것은 신라의 국운이 고려로 이양되는 과도기적 상황과 함께 태조 왕건의 불교신앙과 아울러 능여 조사로 인한 그간의 사정에서 짐작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보다 분명한 것은 금자대장당비(金字大藏堂碑)를 새겨 절을 북정(北亭)에 세웠다는 사적기의 내용에서 더욱 그러하다. 이에 대한 물적 근거는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에 실려 있는 직지사 대장당기비(大藏堂記碑)의 탁본(拓本)이며, 이는 왕우군(王右軍)의 집자(集字)로서 유명하다.
조선시대(朝鮮時代)의 직지사는 제 2대 정종 원년(定宗元年, 1339) 정종의 어태(御胎)를 절의 북봉(北峰)에 봉안함으로써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고, 이로 인하여 조선시대에도 줄곧 사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조선 중기에는 사명 대사(四溟大師)가 본사(本寺)에 출가(出家)하여 신묵 대사(信默大師)의 제자가 된 것이 유명하거니와, 이로 인하여 직지사는 배불(排佛)의 그늘 속에서도 사운(寺運)을 유지할 수 있었다.
30세에 직지사 주지(主持)가 된 사명 대사는 이후 임진왜란(任辰倭亂)이 발발(勃發)하자 구국제민(救國濟民)의 선봉(先鋒)에서 큰 공을 세웠음은 너무나 유명하다. 이렇게 구국(救國) 사명 대사의 공로로 인하여 직지사는 조선(朝鮮) 8대가람(八大伽藍)의 위치에 놓이게 되었고,300여 소속사암(寺庵)을 거느리게 되었다.
그리고 직지사의 사세가 가장 흥성했던 시기에는 현재 김천시내 법원이 있는 곳을 비롯하여 구화사(九華寺)까지가 직지사의 사유지였으며, 뿐만 아니라 상주 통로 우시장(牛市場) 근처의 다리이름이 직지교(直指橋)였고, 그 상류(上流)는 모두 직지사의 영유(領有)였다 하니 그 규모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직지사는 조선시대 말엽 국운의 쇠퇴와 함께 그 사운(寺運)을 같이 하여 한때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다. 무엇보다 직지사는 일제시대(日帝時代)사찰령(寺刹令)이 제정되면서 한때 해인사(海印寺)의 말사(末寺)로 전락하기도 하였으나, 광복 이후 50년대에 본산제도(本山制度)가 재편성되면서 본산(本山)으로 승격되어 그 사세를 차츰 회복하기 시작하였다.
현재는 국내 25본산(本山) 가운데 하나로서 제8교구(第八敎區) 본사(本寺)이며 소속 말사(末寺) 54개 사찰에 이르고 있다. 관할 구역은 4개시(個市), 1개군(個郡)으로 김천, 구미, 상주, 문경시와 예천군이다. 또한 본사의 산림(山林)은 약 600정보(町步)에 달하며, 사찰 경내 면적만도 약 30,000평에 이른다. 그리고 본사에 소속된 말사 역시 수많은 성보문화재(聖寶文化財)와 고적을 지니고 있다.
3. 직지사의 문화재
1) 대웅전과 삼층석탑
대웅전은 2층 5간의 웅장한 규모였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735년(영조11년)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아미타여래불과 약사여래불을 모시고 정면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으로 중건되었다. 대웅전 앞 삼층석탑은 1974년 문경 도천사 절터로부터 이전한 것으로 보물 606호로 지정되었다.
2) 대웅전 후불탱화
불전 내부의 후불탱화는 보물 제 670호로 1744(영조20년)에 조성된 것으로, 대웅전 외벽 3면에는 인간이 본성을 찾아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을 묘사한 선종화가 그려져 있다.
3)도리사 금동육각 사리함
선산 도리사에서 세존사리탑 이전과정에서 발견된 사리함으로 국보 제208호로 지정되었으며 직지사 성보박물관에 보존하고 있다.
4. 직지사의 설화
1) 비로전(毘盧殿)과 동자상
고려태조 때 능여조사에 의해 세워진 비로전은 태조 14년 경잠대사에 의해 천불상이 봉안됨으로써 천불전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임진왜란 때 소실을 면한 유일한 불전으로 정면 7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구조이다. 14개의 나무계단에 경주옥돌로 조성된 천개의 불상 중 발가벗은 동자상을 첫눈에 발견하면 아들을 낳는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2) 사명대사와 직지사
직지사는 임지왜란 때 나라를 구한 사명대사가 출가하고 득도한 사찰이다. 사명대사(1544~1610)는 경남 밀양 태생으로 속명이 임응규(任應奎), 법명은 유정(惟政), 호는 사명당(四溟堂)이다. 16세에 부친을 여의자 직지사에 출가하여 신묵대사의 제자가 되었다. 18세에 선과(禪科)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30세에 직지사 주지가 되었다. 32세 때 봉은사 주지로 천거되었으나 사양하고, 묘향산 보현사로 휴정(休靜, 서산대사)을 찾아가 제자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승병을 조직해 승병장으로 명성을 떨쳤다.
어느날 신묵대사가 참선을 하던 중 꿈에 천왕문 옆 은행나무에 황룡이 서려있는 것을 보고 깨어나 그 자리에 가보니 한 소년이 자고 있었다. 신묵대사는 그 소년을 제자로 삼았는데 이 소년이 사명대사이다. 당시 은행나무는 1800년 만세루가 불타면서 같이 불에 타버렸고, 현재 천왕문 앞에 있는 돌은 소년 사명당이 낮잠을 자던 돌이라고 전한다.
석탑의 명칭 및 직지사3층석탑(답사자료 5)
1. 탑의 역사
탑(塔)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왜 만들어졌을까요?
탑은 인도의 범어(梵語)인 스투파(stupa)를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탑파 혹은 탑이라고 읽습니다.
탑은 부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만들어진 하나의 무덤양식인데,
일반 승려의 사리가 안치된 사리탑 혹은 부도(浮屠)와는 구분됩니다.
불탑의 경우 사찰의 중심부(주로 대웅전 앞마당)에 위치하며 신앙의
중심역활을 하지만 부도탑은 사찰 밖이나 뒤에 위치하며 승려의 무덤일 뿐입니다.
탑은 기원 1세기경 대승불교의 영향으로 불상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가장 중요한 예배 대상이었고 불자들이 기도하는 사찰도 탑을 중심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밥그릇을 엎어놓은 듯한 복발형의 인도 스투파는 동아시아로 전해지면서 누각형태로 변하고 그릇을 뒤짚어 놓은듯한 복발형의 스투파는 현재 탑의 가장 윗부분인 상륜부에 남아있습니다.
동아시아의 탑은 재료에 따라 목탑(나무), 석탑(돌), 전탑(벽돌)으로 구분되는데 자연적 여건과 관련되어 중국에서는 전탑, 일본에서는 목탑, 한국에서는 석탑이 유행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중국은 황토가 많은 자연환경이고,
일본은 수목이 우거진 나라이며, 우리나라는 주변에서 쉽게 화강암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불교의 창시자는 인도의 석가모니(영어로는 싯다르타)인데, 부처가 열반하자, 부처의 제자들은 당시 인도의 장례풍습에 따라 화장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화장 후 일반 뼈 조각이 아닌 영롱한 사리를 발견하였습니다. 그 때 인도의 여덟나라는 부처의 사리를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싸움을 하였습니다. 부처의 제자인 도로나가 부처의 사리를 똑 같이 여덟나라에 나누어 주어
싸움은 일단락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사리 신앙이 생겨난 것으로 보고 있는데, 부처의 진신사리는 곧 부처와 다름없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부처의 사후 백년이 지나 인도의 전설적인 제왕 아쇼카는 대인도 제국을 세우고, 부처의 진신사리가 안치된 8대탑을 발굴하여, 그것을 다시 8만 4천개로 나누어 전 인도와 동아시아에 나누어 주었습니다. 인도인들에 있어 8만4천이라는 수는 많다는 뜻으로 동시에 인간의 육신이 8만4천개의 부분으로 이루어졌다는 믿음의 반영이었습니다. 이렇게하여 불교는 사리탑과 함께 크게 번영을 누릴 수 있었는데, 현재 남아있는 산치대탑은 기원전 3세기 것으로 가장 오래된 불탑양식입니다. 아래 사진에서 보는 것이 산치대탑입니다.
기원전 3세기 조성된 산치대탑
그렇다면 한국의 탑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요?
인도의 탑이 불교의 전래와 함께 중국을 거치면서 고층 누각형태로 변하였고,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초기에는 중국의 전탑흉내를 내다 건축구조를 따라 목탑으로 제작되었고, 후에 석탑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그렇더라도 석탑에는 목탑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백제시대 석탑은 주로 5층으로 조성되었고, 신라의 석탑은 3층이 주종을 이루게 됩니다. 특히 통일신라시대는 한국석탑의 전형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석가탑이 그 대표입니다. 석가탑은 그 후 많은 석탑의 모델이 됩니다. 특히 이형탑(異形塔)의 대표인 다보탑도 이 시기에 만들어 집니다. 고려는 불교의 국가였지만 탑이 양식상 퇴행을 보였고, 조선은 유교국가였기 때문에 탑이 거의 만들어지지 않게됩니다. 우리가 답사에서 살펴볼 직지사 삼층석탑도 통일신라기에 조성된 탑양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탑의 대표스타인 통일신라기의 석가탑을 아래에서 감상하겠습니다. 석가탑은 일반적으로 751년경(경덕왕 10년, 742년설도 있음) 김대성이 불국사를 세울때 조성한 것으로, 높이 10.4미터이며, 2층 기단의 웅대함과 탑의 아름다움이 잘 조화된 당대의 대표적인 석탑입니다.
국보 21호 통일신라 석가탑
2. 탑의 형태
이제, 본격적으로 석탑의 형태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합시다. 석탑은 맨 아래의 기단부와 중간의 탑신부 그리고 맨 위의 상륜부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초기 석탑의 대표적인 양식을 보여주는 정림사지오층석탑의 기단부와 살펴보겠습니다. 탑의 층수는 탑신부의 몸돌과 지붕돌의 층수만 계산합니다.
3. 기단부
석탑의 기단부는 탑의 중심부분인 탑신부와 상륜부를 올리기 위해터다짐의 목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우리나라 석탑은 처음에는 정림사지석탑에서 보는 것처럼 목탑을 근거로 해서 백제탑은 축대(기단부)가 단층이었으나 통일신라시대에 들어 오면서 신라탑은 2층의 축대(기단부)를 조성하였습니다먼저, 지대석은 울퉁불퉁하고 자연환경에 의해 쉽게 변형되는땅을 평평하게 유지토록 하기 위해 깔아 놓은 석재를 말합니다.다음, 지대석 위로 기단괴임석을 놓습니다.본격적인 축대쌓기가 시작되는 곳입니다.괴임석은 목조건물의 원형을 따르기 위해서 라고 보는 것이 좋을듯 합니다.또한 말 그대로 기단을 굳건하게 괴기위해 사용된 돌입니다.이 기단괴임석을 딛고 기단면석을 세웁니다. 기단부의 중심돌이기도 합니다.면석(面石)이란 뜻은 굳이 한글로 풀이하자면 얼굴돌인데,이 돌에 여러가지 문양을 새겨 놓았던 까닭에 그렇게 부릅니다.기단석에는 모서리에 우주라고 하는 기둥모양의 돌을 세웁니다.위로 부터의 하중을 떠 받들기 위해서입니다.무게분산을 위해 가운데에도 기둥을 세웠는데, 이것은 탱주라고 합니다.
이 기단석을 위에서 마치 뚜껑처럼 덮고 있는 돌이 바로 기단갑석입니다.다시 한번 기단석을 위에서 부터 압박하며 고정시키기 위함이고,바로 위에서 부터 올려질 탑신부의 평평한 면을 유지시키기 위함입니다.
이와 같이 기단부는 땅의 수평면을 유지하기 위한 지대석과 본격적으로 탑신부를받치기 위한 기단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위의 그림은 초기석탑의 기단부 그림인데,통일신라로 들어 오면서 기단이 1층에서 2층으로 바뀝니다.즉, 똑같은 모양의 기단이 하나 더 얹혀진다는 것인데전체적인 균형을 위해 아래기단(1층기단)은 큰반면,2층기단은 작은 모양으로 이루어 집니다.
4, 우주와 탱주
위의 우주와 탱주는 탑의 각층 몸돌과 기단석에 자주 새겨져 있는 양식입니다.목조건축물에서는 건물의 무게를 떠받들기 위해서 있는 아주 중요한 기둥이나,석탑의 우주와 탱주는 사실 탑의 무게를 지탱하기 위한것이 아니라그냥 목조건축물의 양식을 본뜨기 위해서 탑의 몸돌에 기둥의 모양을 새겨넣은 것입니다.
이것은 탑의 건축연대를 파악하기 위한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즉 탱주의 수량이 2개이상일 경우는 통일신라시대와 그 이전의 탑으로 추정하고,1개이거나 없을 경우에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탑으로 추정합니다.예를들면, 익산의 미륵사지탑은 전형적인 목조형식을 빌어서 만든 석탑입니다.이곳의 탱주는 마치 목조건축물의 평주와 다름없이 많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5. 지붕돌의 옥개받침과 풍탁(風鐸)
흔히 '지붕주름', '옥개주름' 이라고도 말하는 옥개받침은목조건물의 서까래를 응용한 것입니다.중첩된 주름의 이미지는 옥개 즉, 지붕의 크기를 강조할 목적으로 쓰여졌습니다. 초기에는 받침의 수가 5개였고, 후기로 오면서 차츰 줄어드는 경향입니다.
반전(反轉)은 처마끝이 위로 치켜올라간 정도를 말하는데'반전이 심하다'라고 하면 처마끝이 위로 급하게 치켜올라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통일신라시대의 탑은 반전이 약하고 다소 밋밋했으나,후기 고려로 넘어 오면서부터는 옥개석의 규모가 작아지면서낙수면의 흐름이 급해졌습니다. 또한 반전이 심하여 경쾌하면서도상대적으로는 왜소한 느낌을 줍니다.
풍탁(風鐸)이란 말은 법당안에서 스님이 예불을 모실 때 쓰는목탁을 응용하여 생긴 용어로,'바람이 불어 와서 종을 친다'는 말입니다.흔히 탑의 처마끝에는 구멍을 내어 이 풍탁을 달았는데이는 석탑에서 치장의 의미라고 보면 됩니다.
6. 낙수면
석탑은 별도의 건축물이나 구조물 내에서 보관하는 그런 형식의 문화재가 아닙니다. 산이나 들녁에 서서 그대로 자연의 풍상을 겪어야 하는 노천(露天)문화재 입니다.따라서 자연환경중에서 비[雨]에 대한 구조적인 배려가 가장 중요합니다. 탑을 자세히 바라다보시면 기단갑석이나 옥개석 밑의 첫 옥개받침의 모양이 빗물의 흐름에 대하여 민감하게 반응한 흔적을 찾아 보실수 있습니다.
7. 상륜부(相輪部)-(노반,복발,앙화,보륜,보개)
1. 옥개석에는 옥개받침 부분이 있습니다.마치 기와지붕의 서까래처럼 보입니다. 우리나라 석탑의 원형은 백제의 목탑에서 가져왔고, 이 목탑의 원형은 목조건축물에서 본떠 왔습니다.따라서 초창기의 석탑에는 이 옥개받침이 5개입니다,
(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 중기까지) 그 후 통일신라중기부터 고려초에는 4개로 줄어들다가 고려말에는 3개로 작아졌습니다. 조선시대에는 탑이 거의 조성되지 않습니다.
2. 반전이라 함은 옥개석의 귀마루 부분인데 구조명칭은 아닙니다.
즉, 귀마루(우동) 선이 밑으로 내려오다 그 끝에서 위로 갑자기 치켜오르는 각도(정도)를 말하는데 초창기의 석탑에는 이 반전의 정도가 아주 약합니다.후기 통일신라시대에 오면서 반전은 심해지고 고려시대의 탑들은 너무 심해서 날카롭기까지 합니다. 왜냐하면 고려시대의 탑 옥개석은 상대적으로 왜소한데다가 반전이 심하니 그렇습니다. 한마디로 몽땅그리한 옥개석입니다.
3. 전각이라고 나와 있는 부분은 옆에서 보면 옥개석의 두께를 말하는것처럼 보입니다. 초창기의 석탑에는 이 전각의 높이가 아주 약합니다. 부여 정림사지 석탑을 보시면 참 갸날프고 애처로워 보입니다. 통일신라 시대에 넘어 오면서 높이는 차츰 높아지다가 고려시대에는 몽땅그리한 옥개석의 모양에다 전각도 한층 높아집니다.
4. 낙수면은 비가 오면 빗물이 흘러내리는 경사면을 말합니다. 초창기 석탑일수록 경사면은 완만합니다. 어찌보면 평평한 느낌이 올 정도입니다.
후기에는 이 낙수면의 경사가 높아집니다.
8. 직지사 3층석탑(보물 606호)
종의 명칭 및 직지사 김용사 동종(답사자료 4)
보물 제11-2호 문경 김용사 동종 (2000. 2. 15 지정)과 범종의 각부 명칭 |
<범종의 명칭>
◎ 용뉴(龍뉴) : 용의 모양을 취한 범종의 가장 윗부분으로 종을 매다는 역할을 한다.
◎ 음관(音管) : 용의 바로 옆에 붙어있는 음관은 용통(甬筒) 음통(音筒)이라고도 불리어지는 소리대롱이다. 우리나라 범종에서만 볼수 있는 특징중의 하나이다.
◎ 상대(上帶) : 하대(下帶) : 상대는 종의 어깨 부분에 둘려진 무늬띠이고
하대는 종의 아랫부분인 종구에 둘려진 무늬띠이다.
◎ 유곽(乳廓) :유두(乳頭) : 유곽은 상대 밑쪽의 네 곳에 붙어있는 네모난 테이며 이 유곽속에는 각각 9개씩 볼똑 솟아있는 도들꼭지가 있는데 이를 유두라 한다. 그 솟은 부분 주위에 꽃판이 있는데 흡사 젖꼭지 모양과 같다고 하여 유두라 부르게 된 것이다. 이 유곽과 유두도 다른 나라 종에는 없는 한국종만이 갖는 뚜렷한 특징이다.
◎ 당좌(撞座) : 당좌는 종을 치는 당목이 직접 접촉되는 부분이다.
종의 구조
사찰에서는 조석으로 예불이 시작되기 전에 세상에 살아있는 모든 것을 깨우치기 위해 북, 범종, 목어, 운판 등을 차례로 칩니다. 마지막에 치는 운판의 짧은소리를 이어받아 법당의 작은 종이 울리면 스님들이 예불을 시작합니다.
직지사 성보박물관에 있는 보물인 김룡사 동종은 법당에서 사용하는 작은 종입니다. 조선시대 사인(思印)스님이 이 종을 만들었는데 통일신라시대 종의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위의 그림에서 보듯이 종은 매다는 고리와 소리를 내는 몸통으로 되어있습니다.
고리는 보통 용을 구부려 만든 고리라 하여 용뉴라고 부릅니다.
통일신라시대의 종은 마치 종을 들고 있는 듯한 용의 모습과 그 뒤로 소리가 울리는 원통형의 음통이 있습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로 내려오면서 음통은 사라지고 용의 모습만 남게 됩니다.
김용사 동종은 조선 현종~숙종 연간에 주종장이었던 사인(思印 : 숙종 때의 인물로 경상도와 경기도 지역에서 활동했으며 동시대에 활동했던 전라지역의 김애립金愛立과 쌍벽을 이룬 승장) 이라는 스님이 만든 종입니다. 사인스님은 신라종의 양식을 계승한 조선종을 제작한 거장(巨匠)으로 그의 작품이 국내에 8점이 남아 있으며 모두 보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사인비구스님이 제작한 범종]
▲경북 포항시 보경사 서운암 동종(1667) / ▲경북 문경시 김용사 동종(1670) /
▲강원도 홍천군 수타사 동종(1670) / ▲경기도 안성군 청룡사 동종(1674) /
▲서울 화계사 동종(1683) / ▲경남 양산시 통도사 동종(1686) /
▲경기도 의왕시 청계사 동종(1701) / ▲경기 강화군 고려궁지 동종(1711)
김용사 동종 (연화기, 緣化記)
종의 명문을 통해 이 종은 1670년에 당시 상주목 운달산 운봉사(雲峰寺, 현재의 김용사)에서 주조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위의 종에 조성된 명문을 통해 사인 스님은 17세기 중엽에서 18세기 초엽까지 주종장(鑄鐘匠)으로 활동했으며, 병자호란 이후 17세기 사찰의 재건 과정에서 범종 생산의 중요한 축을 맡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김용사 동종은 사인 스님의 주종 활동 시기 가운데 중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가장 완성도가 높으며 크기가 더 큰 수타사 동종의 원형이 되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현재 김용사 동종은 제8교구 본사인 김천 직지사 성보박물관에 보관중입니다.
직지사 성보박물관에 있는 <김룡사 동종> 김룡사 종에는 조선시대 일반적인 종과는 다르게 통일신라시대 종에서 볼 수 있는 용과 음통이 있습니다.
또 다른 차이점은 통일신라시대 종은 몸통 어깨부분에 무늬를 넣은 넓은 띠가 둘러지고 바로 그 밑에 유곽대라고 불리는 네모난 틀이 있습니다.
그리고 종 중앙에는 아름다운 비천상이 있습니다. 조선시대 종은 어깨부분에 범자(梵字)가 둘러지고 아래에 있는 유곽대 사이로 보살상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 모습은 김룡사 동종에서도 보입니다.
이밖에도 김룡사 동종에는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撞座)가 연꽃모양으로 4개가 있고 종 맨 밑에는 용과 연꽃이 어우러진 조각이 있습니다......
이제 종에 대해서 어느정도 이해가 되셨습니까?
답사 때 상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문화연구소장 삼도헌 정태수 배상
직지사의 사물(답사자료 3)
모든 사찰에는 사물(四物)이 있습니다. 사물(四物)이란 무엇일까요?
오늘은 사물에 대해서 알아봅니다.
사물이란 절에서 의식이나 법회시 사용하는 대표적인 4가지 물건으로 범종루(범종각,종루,종각)에 보관하며, 범종, 법고, 목어, 운판을 말합니다.
1. 범종(梵鐘)
절에서 사용하는 종을 가르키며, 「 범(梵) 」이란 맑고 깨끗하다는 뜻으로 불교의 여러 행사에 사용되는 용어입니다. 범종은 원래 절에서 대중들에게 시간을 알려주는 기구로 사용하다 그 소리가 워낙 아름다워 여러 의식에까지 사용되었으며, 큰종을「 인경 」이라고 합니다.
특히 예불시간에 치는 범종소리는 지옥중생을 비롯한 일체중생을 위해 치며, 아침에는 28번, 저녁에는 33번을 치는데 이것은 선종의 초조 마하가섭으로부터 보리달마까지를 상징하며 아침에는 낮은 소리로부터 큰소리로 높이며 저녁에는 33번을 치는데 이것은 불교에서 뜻하는 하늘의 28천과 육도윤회중의 5곳을 합한 33곳에 있는 모든 중생들을 깨우치기 위해 친다고 합니다.
2. 법고(法鼓)
홍고(弘鼓)라고도 하며 절에서 조석으로 예불할 때 또는 의식을 치를때 쓰는 북을 말합니다.「 마음심(心)」의 한자를 그리듯이 치며 특히 가죽있는 축생제도를 목적으로 하기에 그 대표적인 상징으로 북의 두 면은 「숫소와 암소」 가죽으로 만듭니다.
3. 목어(木漁)
나무의 속을 파내어 「 잉어 」모양으로 예불시나 경전을 읽을때 두드리는데
「 방 」이라고도 합니다. 물 속 생물들을 제도하기 위하여 사용하며 최초 절에서는 대중을 모으는데 사용했습니다. 목어는 물고기처럼 항상 눈을 뜨고 게으름 없이 수행정진하라는 뜻이며, 물 속의 생명과 게으른 중생을 일깨우기 위하여 나무로 만든 고기에 뿔이 달려 있습니다. 물고기 형상의 몸통 사이에서 생겨나는 공명의 울림으로 물밑에 는 물 속 중생들에게 한 없는 해탈을 가질 수 있게 합니다.
4. 운판(雲版)
구름 모양의 청동으로 만든 넓은 쇠판을 말합니다.
「 하늘을 나는 모든 날짐승에까지 불법을 전하여 」그들의 괴로움과 아픔을 덜어 주기 위한 것으로 조석으로 칩니다. 구름 형상을 한 운판을 울림으로써 허공세계를 날고 있는 수많은 중생들이 영원한 안식을 얻기를 기원합니다.
자아~~~! 이제 사물에 대해서 이해를 하셨죠? 그러면 직지사의 사물을 아래 사진에서 직접 보시겠습니다^^
직지사의 범종(梵鐘)
직지사의 목어(木漁)
직지사의 운판(雲版)
직지사의 법고(法鼓)
*답사를 가서 직접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삼도헌 정태수 배상
첫댓글 존경하는 송정선생님, 이번 답사 홍보위원장으로서 댓글천사로서 수고많으셨습니다.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