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왕비, 어떤 역할을
했나?
험난한 정치
세계에서
유교적인 여성관을
교육받고 자란
왕비들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
생존하기 위해서는
남성들과 정치게임을
해야 했을 뿐더러
때로는 같은
여성과도 마찬가지였다.
이 게임에서
패배한 왕비들은
폐비가 되기도 했고
자신의 친정
집안까지도
멸문지화를 당한
경우도 허다했다.
- '글을
시작하면서' 중에서
유교적 여성관에
순종하지 않으면
즉각적으로
마녀사냥의 희생자가
될 수밖에 없었으며,
생존하기 위해서
남성들보다 훨씬 더
기민하게 지지세력을
만들고
권력을 휘두를
수밖에 없었던 조선의 왕비들,
과거 5백년 동안
조선 정치 세계에서
위태롭게 삶을 영위했던
그녀들의
처세술이 무척
궁금하다.
이 책은
1999년에 출간된
<조선의 왕비>,
2008년에 출간된
<조선왕비 오백년사>의 개정판인 셈이다.
특히,
2010년 9월
일본 출판사인 <일본평론사>에서
<왕비들의
조선왕조>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어
지금까지 많은
판매부수를 올렸다.
한편 2011년
일본 NHK에서는
이 책을 바탕으로
조선 왕비들에 관한
이야기를
특집 프로그램으로
만들어 방송하기도 했다.
저자
윤정란은
숭실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전남대학교
호남문화연구소 학술연구교수로 재직했으며
숭실대학교에서 한국사를
강의했다.
현재는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대학원 한국학과에 출강중이며
서강대학교 종교연구소 연구원이기도
하다.
그녀는
조선시대 사회와
정치사로 본 역사
속의 여성을 탐구하는데
심혈을 기울여왔다.
특히
조선시대 왕실정치와
정치 중심부에 있었던
왕비들의 생애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면서
방대한 자료와
연구를 바탕으로
2008년
<조선왕비 오백년사>를 저술하였다.
그 후
조선시대 여성사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면서
여성의 정체성을 새롭게 조명하고
최고의 여성 정치권력에 대한 학계의
다각적이고
심도 있는 연구 자료들이 발표되었는데,
이러한 연구를 토대로
철저한 고증을 거쳐 개정판을 출간했다.
특히,
책은 조선 후기 국정을 주도한
왕비들의 이야기에 더욱 중점을
두었다.
중국의 부녀자 들은
문자를 알고 있어서 정사에 참여하여
나라를 그르치는 수가 있었다.
그런데
우리 동방은
부녀자들이 문자를 알지 못하므로
정사에 참여할 수 없는 것이
진실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 <세종실록> 79권
중에서
조선 최고의
성군으로 알려진
세종대왕이
1437년 평소처럼 경연에 나가
<시경>을
강독하는 도중
신하들에게 한 말이다.
조선시대 여성들은
공적인 영역에서
사용되던 언어에서
소외되었으며,
외부와의 접촉이
엄격하게 차단되어 있었다.
당시
양반 사회를
주도하던 사대부들은
여성들이 외부와
접촉하게 되면
부덕(婦德)을
상실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여성들의 활동
공간은 집이었다.
가옥도 중문을
사이에 두고
안채와 사랑채로
구분하여 외부와
철저하게 차단시키는
구조로 건축했다.
가족일지라도
남자면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만
중문을 통해 안채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래서
19세기 말
20세기 초
기독교가 처음
조선에 들어왔을 때
중문 안의 여성들과
접촉하기 위해
전도부인이라는
새로운 직업을
만들어 낼 정도였다.
-허난설헌-
사대부 집안의
여성으로서
조선 최고의
여류문필가였던 허난설헌도
자신의 고달픈 삶을
시로 표현했는데,
⊙첫째는
왜 변변치 못한
남편의 아내가 되었을까,
⊙둘째는
왜 여자로
태어났을까,
⊙셋째는
왜 조선에서
태어났을까 였다.
이런 고민 속에서
살면서
훌륭한 문학작품을
남겼지만
결국
조선사회와 타협하지
못한 채
젊은 나이에 죽고
말았다.
그렇다면,
여성들 중에서
가장 큰 권리를
누렸던
왕비들의 삶은
어떠했을까?
그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쩌면
백성들의 이목이
집중되기에
더 많은 구속과
억압을 강요받았는지도 모른다.
비록
최고층의 여성
신분이었지만
오히려 가장
철저하게
유교적 여성관을
지켜야만 했다.
조선왕조 5백년 동안
추존내지는 책봉된 왕비는 총 44위에
이른다.
이 책은
기록 자료가 남아
있는 왕비들을 중심으로
조선 최초의 왕비인 신덕왕후 강씨,
마지막 황후 순정효황후 윤씨 등
조선 역사에서
족적을 남긴 30명을 선별하여
이들의 정치적인
삶을 살펴본다.
책은 4부 즉,
시대적인 특성을
고려해
기반확립을 위해
희생양이 된 왕비들,
유교적 이념을
철저히 실행하는 왕비들,
정쟁의 소용들이에
휘말려
친정 가문과
함께하는 왕비들,
국정을 주도하는
왕비들로 구성되어 있다.
●왕자의 난을 성공으로 이끈 전략가, 조선의 여걸
"정안군이
자신의 집 앞 어귀 군영에 이르러 말을 세우고
이숙번을 불렀다.
곧
이숙번은 두 명의 장사를 거느리고
갑옷 차림으로 나왔다.
익안군, 상당군, 회안군 부자도 역시 말을 탄
채였고
이거이, 조영무, 신극례 등도 자리를 함께했다.
이들은
정안군을 추종하는 자인데
이때 민무구와 민무질과 함께 모두 모이게 되었다.
그러나
기병은 겨우 10면뿐이고 보졸은 9명뿐 이었다.
그러지
부인(민씨)이 준비해 둔 철창 가운데
절반을 군사들에게 나눠주었다.
여러 왕자의 시중꾼들과 노복들은
10여명으로 모두 막대기를 쥐었고
소근만이 칼을 쥐고
있었다"
이는 이방원이
주도한
'제1차 왕자의 난'의 거사 장면을
기록한
<태조실록>의 일부다.
태조
7년(1398)
경복궁 근정전 앞에
한씨 소생의 왕자들이
초조한 기색으로
모여 있었다.
음력 8월이라
선선한 가을바람과
높은 하늘이 어우러진
청명한 계절이
계속되었는데,
이날따라
유독 하늘은
먹구름이 뒤덮여
앞뒤를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왕자들은 환후가
깊은
태조 이성계의
호출로 모인 것이다.
모두 모여야만
궁궐로 들어갈 수
있다는 명령 때문에
기다리고 있는
상태였는데
사실
이는 정도전 일파의
술책이었다.
왕자들이 궁궐
안으로 들어오면
몰살시키려는
음모였다.
하지만
다른 왕자들은 이를
몰랐지만
이방원과
그의 아내 민씨만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방원은 태연하게
경복궁에 모습을 보였다.
물론 아내 민씨는
거사 준비에 만전을
기하고 있었다.
"큰일 났사옵니다. 대군마마!
부부인 아씨께서 별안간
배와 가슴앓이가 일어난
듯하옵니다"
방원의 종 소근이
급히 이 말을 전하자
그는 급히 말을
타고 집으로 달렸다.
이때
다른 왕자들도
눈치를 채고
하나 둘 모두
방원의 뒤를 따랐다.
민씨는
미리 친정집에
숨겨둔 병기들을 반출했다.
무장을 마친 방원이
궁궐로 향하자
민씨는
대문 밖까지 따라
나와 몸조심을 당부했다.
이 날 방원의
곁에는
판단력과 대담성을
갖춘 민씨가
보좌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정도전은 전혀 이를
눈치 채지 못하고
자신들의
성공적인 거사를
미리 축하라도 할 요량으로
남은의 첩 집에서
남은, 심효생 등과
술을 마시다가
갑작스런 기습에
포위당한 채
쫓기다가 살해되고 만다.
이후 방원은
문제의 근원이었던
세자 방석과
그의 형 방번을
비롯해
신덕왕후 강씨의 딸
경순공주와
그 남편까지 모두
죽인다.
민씨는
고려 후기 유교적
명문가인
여흥 민씨 민제의
여식이었다.
민제는
고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여러 고위직을 고루
거쳤다.
어머니 송씨도
고위직 아버지를 둔
온건한 인물이었다.
이런
배경 속에서 성장한
민씨는
정숙하고 지혜로운
여성 그 자체였다.
1382년,
고려 우왕 8년 때
18세의 나이에
16세의 방원과
백년가약을 맺었다.
시아버지 이성계가
정도전의 머리를
빌려 조선을 건국하고
왕이 되는 것을
목격한 그녀는
왕가의 일원이 된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조선은 개국 후 두
파로 양분되어 있었다.
정도전을 필두로
재상중심체제를 꿈꾸는 집단과
이방원을 중심으로
한
왕권중심체제를 주장하는
무리였다.
정도전은
이성계의 지지를
등에 업고 개혁에 나서면서
많은 개국공신들을
소외시켰다.
당연히
이방원도 그랬다.
그런데,
왕비 강씨가 아들
방석을 후계자로 삼아서
자신들의 안위를
보장받고자
정도전이 말하는
재상중심체제의
지지에 동참한다.
한편,
방원은 어머니
한씨가 죽은 것이
강씨 때문이라고
늘 서운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강씨의 정치력에
밀려
세자 책봉은 더
멀어진 느낌이 들었다.
이때
머리를 쓴 인물이
바로
원경왕후
민씨였다.
정도전이
사병(私兵) 혁파를 내세워
이방원의 힘을
무력화시키려 하자
그녀는 동생
민무구, 민무질을 이용해
사병과 무기를
친정으로 빼돌렸기 때문에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를 십분 활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뿐 만이 아니라
이방원을 위기에서
여러 번 구해주었고,
왕위에 오르는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한
여장부였다.
하지만
이후 태종 이방원이
왕권강화정책을
펼치면서 권세가 갈수록 커지는
민씨 집안의 견제에
나섰다.
또
그 세력을
분산시키고자 후궁을 계속 늘려갔다.
그녀와 태종의
불화는
회복하기 힘들
정도가 되었으며,
그 영향은 민씨
집안에도 미쳤다.
태종의 선위
파동으로
민씨 형제들이
귀양을 갔다가
결국
귀양지에서 죽고,
그녀 또한 폐비의
위기에 몰리기도 했다.
이후 그녀는
아들 세종의 지극한
효심에도 불구하고
병으로 인해
56살에 생의 일기를 마감했다.
마무리 큰 공을
세웠어도
남편의 행동에 따라
자신의 운명이 결정되고 만
조선 여인의 고달픈
삶이 처량하기만 하다.
서울 서초구
내곡동에 위치한 헌릉,
태종과 원경왕후가
묻혀 있다
여성교양서 <내훈>을 편찬한
지식인
어둠이 짙은 궁궐,
모두가 잠든 시간에
대비전만 아직
촛불이 타고 있었다.
대비
소혜왕후
한씨는
뭔가 열심히 붓글을
써내려가고 있었다.
이는
성종
6년(1475)에 완성된 <내훈(內訓)>이었다.
자신이 홀어머니이기
때문에
혹시
자녀들에게 누가
되어
잘못된 길로 나가게
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
시작되었다.
왕실의 여성으로서
보기 드문
유학자였던 소혜왕후가 편찬한
<내훈>은 열녀전, 소학, 명감 등에서
발췌한 내용을
7장3권으로 구성한 교훈서로
당시
삼강행실도와 함께
여성 교육의
기본서로 꼽혔다.
이 책에는 여성이
아버지, 남편,
아들을 따라야 한다는
유교적 여성관이
담겼다.
이는 이후 조선시대
'남존여비' 사상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세조3년(1457)에
21살의 나이로
청상과부가 된 한씨는
자신에게 엄격했을
뿐만 아니라
자녀교육에도
남달랐다.
엄격한 궁중법도로
자식들을 대하고 가르쳤다.
그녀는
내명부의 기강을
위해
왕실어른으로서
호랑이 같은 위엄을 보였다.
얼마나 엄했던지
시부모인 세조와
정희왕후 윤씨는
그녀를
폭빈(暴嬪)이라
부를 정도였다.
제헌왕후 윤씨가
성종의 얼굴에
생채기를 내자
왕실에서 불호령이
떨어졌고,
결국
폐비가 된다.
이런 엄격함 때문에
인수대비는
나중에는 손자
연산군에게 죽음을 당하는
불행한 여인이 되고
말았다.
비바람에 떨어지는 무정한
모란꽃
그 붉은 꽃잎이 난간에
가득하구나
모란정 연회에서 놀던 양귀비
죽자
후궁의 여인들도 꽃을 돌보지
않네
-
의경세자
소혜왕후.
우리에게는 성종의
모후 인수대비로
더 친숙하게 알려진
여인이다.
소혜왕후는 세자빈
시절,
의경세자의 죽음으로
인해 출궁했다가
자을산군이 보위를
잇게 되자
왕의 모후 대비로
다시 입궁했다.
중전에 오르지 않고
대비가 된
유일한 여인이 바로
인수대비이다.
그녀와 덕종이
잠들어 있는 경릉은
다른 왕릉과 차이가
있다.
죽은 왕이
자리하는 오른쪽에
인수대비가,
왕비의 자리인
왼쪽에는
훗날 덕종으로
추존되는
의경세자가 안치되어
있다는 점이다.
묘를 쓸 때에는
왕이 바라보는
시선으로 오른 쪽이
상석이 되는데,
여인이 상석에
자리하고 있다.
그 까닭은
덕종은 세자의
신분으로
소혜왕후는
대비의 신분으로
죽었기 때문이다.
'여자
대통령'으로서의
삶을 산
인수대비의 업적이
덕종보다 더
위대하다고 평가되었기에
여인으로서 상석에
위치할 수 있었던 셈이다.
덕종의 능과
인수대비의 능을 한
눈에 구분 짓게 한다.
서오릉에 묻힌 분들
중에서도
가장 높은
계급으로서 눈을 감았으니
그 능의 크기 또한
충분히 짐작될 것이다.
성리학이 대세였던
당시
선비사회의 분위기로 미루어 볼 때,
꽤나 혁신적인 릉이다.
조선이라고 해서
남존여비사상으로 똘똘 뭉친
꽉 막힌 사회는 아니었나
보다.
의경세자(훗날 덕종으로 추존)와
소혜왕후(인수대비)가
모셔져 있는 경릉(敬陵)
사적 제198호로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에 소재해 있다.
소혜왕후의 리더십은
상대방에게 엄격했으나
자신에겐 관대하다는 약점이 있다.
그녀는 모든 여성들에게
유교적
여성관을
강요한 내훈을 편찬해
내명부를 장악하려 했지만
실제
그의 삶은 여필종부와 거리가 멀었다.
성리학적 기준에 벗어난
며느리 폐비 윤씨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
오늘날의 리더는
자신에게 한없이 엄격하되,
상대에게는 관용을 베풀 줄 알아야
한다.
●수렴청정으로 군주의
권력을 휘두르다
중종의 세번째 부인인 문정왕후 윤씨는
왕비자리에 오른 후
차례차례 정적을 제거해나가며
친아들 명종을 왕위에 앉혔다.
그는 이후 20년 간
국왕 이상의 권력을 휘두르며 국정을 장악했다.
권력투쟁 속에서도
과감하게 자신의 길을 찾은 전략가,
냉철한 피의 여인으로
평가된다.
그녀가 왕비로 간택돼 들어온 궁궐 안은
훈척신 세력들과 사림(士林)들 간의
세력다툼으로 조용할 날이 없었다.
왕비로 간택된 지 2년 만에
조광조가 훈척신 세력의 모함으로 제거되자
사림세력들도 연루돼 제거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그녀는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후 그녀는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는 처세의 길을 걷는다.
중종이
아무리 후궁의 처소에 드나들어도
질투를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의연하게 대처했다.
그녀는
부녀자의 덕목을 강조하는 서적보다는
역사책을 더 즐겨 읽었다고 한다.
특히
여성들이 권력을 휘두르면서 정사를 펼치는
이야기들을 더 재미있어 했다.
이와같은 독서는
그녀에게 왕실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처세의 지혜를 안겨
주었다.
또
왕비가 된 그녀에게는
중종의 두번째 왕비 장경왕후가 낳은
원자 호(인종)를
양육하고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었다.
이는
그녀의 입지를 강화시키는 요인이기도 했다.
하지만
4명의 딸을 낳고 이어
아들 환(명종)을 낳은 그녀는
세자 호에게 적개감을 품게 된다.
한편으론
인간이기에 이해되는
부분이다.
조선시대 여성들은
직접
공적인 영역에 진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아버지, 남편, 아들 등에 의해 운명이 결정됐다.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아들인 환이 왕위에 올라야
자신도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자신의 아들을 위협할만한 세력은
모두 제거 대상이었다.
그녀는 인종이 세자였을 때부터
그를 죽이려 했으나 항상 실패했다.
중종 24년(1527) 2월
세자 생일에는
쥐를 잡아 사지와 꼬리를 가르고 입, 귀, 눈을
불로 지져 동궁의 후원 은행나무에 걸어
세자를 저주했다는 기록도 있다.
'작서의 변'이다.
"나야 말로 이제는
외로운 자녀 하나마저
보전치 못하겠구나!
대윤의 득세가
눈 앞에 있으니
앞길이 캄캄하구나.
나는 아주 절에
들어가
선왕의 명복이나
빌어야겠다"
그녀는
효심이 깊은 인종이 계모인 자신을
함부로 할 수 없을 것이라 확신하고
고의적으로
'우리 모자를 언제 죽일 것이냐'며
이런 행동을 일삼았다.
이에 인종은 예상대로
강한 햇빛이 쏟아지는 5월
대비전 앞에서 석고대죄를 했다.
인종의 석고대죄에도
그녀는 조금도 끄떡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자
더 이상 견디지 못한 인종은 쓰러져
몸져눕고 말았다.
6월에는
인종이 이질 증세까지 보이기 시작했다.
결국
인종은 재위 1년도 못 채우고 생을
마감했다.
문정왕후는 권력을 얻기 위해
이외에도 많은 정적들을 일소했다.
만일
그녀가 다른 정적보다 처세에 능숙하지 않았다면
권력을 잡지 못했을 것으로 평가된다.
폐비가 됐을지 모른다.
여성에게 많은 제약이 있던 조선시대에
자신의 위치를 이용해 권력기반을 다진 그녀는
이러한 면에서 뛰어난 전략가로
평가된다.
그녀는 사대부들의 제거 1순위 대상이었다.
유교국가에서 여성으로서 정숙하지 못하고
모든 국정을 마음대로 운영했다는 이유였다.
사대부들은
문정왕후도 조선의 다른 여성들과 같은 존재,
즉
삼종지도에 따라야 하는 아녀자로서
임금을 따라야 하는 신하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수렴청정을 마치고
명종이 친정을 시작한 이후에도
윤원형을 통해 조정을 움직였고
환관과 궁녀를 시켜 명종을 감시했다.
직접
명종과 담판을 벌린 일도 부지기수였다.
사대부들은 문정왕후가
위계질서를 무너뜨리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에
그녀는 사대부들을 제압하기 위해
호불정책을 폈다.
다른 한편으로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입원이 필요했다.
왕실 재정은
각종 진상과 소유 토지에서 거둬들이는
조세 수입이 대부분이었다.
이외에
왕실과 관련된 사원의 토지에서도
그 일부를 충당했다.
사원들은
왕실로부터 사회적 존립을 보장받으면서
왕실 불사를 담당하는 한편
왕실의 사재정 일부를 충당하는
공생관계를 갖고 있었다.
그녀는 사대부들을 견제하는 한편
사적인 수입을 위해 불교계를 중흥하려 했다.
그러나
유교를 신봉하는 조선에서
그녀의 권력이 아무리 강하다고 하더라도
힘에 부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불교계를 관리할
새로운 인물 보우를 등용했다.
"윤씨는 가히
사직의 죄인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
<명종실록> 중에서
그러나
국왕 이상의 권력을 휘둘렀던
그녀의 삶은
죽는 그 순간부터 부정됐다.
그녀는 자신을 위협할만한
모든 세력들을 적으로 몰아 제거했기 때문에
조선 사대부들의 영원한 저주 대상이 됐다.
그녀의 지나친 집권욕은
명종대의 정치적 혼란을 가중시키고
법 질서를 크게 해치는 주 원인이 되기도 했다.
카리스마적
리드십도
적절한 조율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호불정책은
나름대로 역사에 기여했다는 평가도 받는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이 정책의 결과로
증가한 승려들이 의병을 일으켜
구국활동에 나섰기
때문이다.
왕비의 단릉單陵이라
믿기 힘들만큼 웅장해 조성 당시
문정왕후의 세력이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서울 노원구 공릉동에 위치한 태릉)
●세계화 시대로
나아갈 준비가 된 여인
인조의 며느리인 소현세자빈(민회빈)
강씨는
조선의 왕실 여인 중
조선 땅을 벗어났던 유일한 인물이다.
세자빈이었지만
병자호란 패전에 따른 인질 신세가 돼
수천 리 나라 밖으로 떠났다.
하지만
강씨는 인질생활에 좌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가운데 기회를 찾고
국제
무역을 주도하는 경영자로 변신했다.
소현세자빈 강씨의 삶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청의
볼모로 잡혀가
선양(瀋陽)에서 힘든 고비를 넘겼고
귀국 후 삶도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그는
결국 시아버지인 인조의 의심으로 누명을
쓰고
역도로 몰려 세상을 떠났다.
숙종 때서야
'민회'라는 시호를 받고 명예가 회복됐다.
강씨의 죄명은
조선의 세계화를 외쳤다는
것이었다.
병자호란 이후
강씨는 소현세자, 봉림대군 부부 등과 함께
청나라의 수도 선양으로 끌려갔지만
청나라에서
소현세자와 함께 새로운 세상에 눈뜨게 된다.
소현세자는
청나라와 조선 사이에서 중재 역할을 맡았다.
인조는
오랑캐에게 굴욕당한 것을 수치스럽게 여겨
청나라와 직접 교류하지 않고
소현세자를 통해 모든 일을 처리했다.
결국
왕권이 양분되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중재과정에서는 많은 자금이 필요했다.
그 자금을 대는 역할을 주도적으로 했던 사람이
바로 강씨였다.
청나라는
유목민족으로 군사력은 강하지만
문화적 수준이 떨어졌기에
조선의 물품을 필요로 했다.
강씨는
이런 상황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선양관에서
청나라인과 활발한 거래를 시작한다.
소현세자는
청 황제의 수행으로
선양관을 비우는 일이 잦았으므로,
강씨는 세자의 역할을 대신해
조선에 보내는 장계까지 직접 챙기며
선양관의 실질적 경영자가 된다.
이후
청이 선양관에 식량공급을 중단하고
황무지를 내주자 강씨는 직접 농사를 지어
선양관 비용으로 사용했다.
청나라에 끌려온
조선인들을 속환해 농장에서 일하게 하고
인센티브 제도를 도입해 생산량을 높였다.
해가 거듭될수록 큰 수확을 이루며
한 해 필요한 양의 3배가 넘는 곡식이
선양관에 쌓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나아가
그녀는 직접 사(私)무역에 뛰어들었고
선양에서
조선의 인삼, 약재 등을 파는 일을
주도했다.
그녀의
경영수완 덕에 선양관 앞 거리는
무역하는 인파로 북적거렸다고 한다.
<인조실록> 23년 6월조는
"포로로 잡혀간 조선 사람을 모집해
둔전(屯田)을 경작해서 곡식을 쌓아 두고는
그것을
진기한 물품과 바꾸는 무역을 하느라
관소(館所)의 문이
마치 시장 같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녀는 생존하기 위해
조선시대 여성
이데올로기를 과감히 벗어던지고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였다.
위기를 기회로 바꾼 선택이었다.
또한
그녀는 조선시대 여성도
세계 무역상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줬다.
소현세자가
천주교와 서양과학기술을 받아들이는
개방주의자로 변화한 것과 같은 맥락의 변화였다.
이들 부부가
조선의 임금과 왕비가 됐다면
분명
조선은 변화했을 것이었다.
우리 역사의 아쉬운
대목이다.
그러나
조선은 이러한 리더십을 가진
그녀를 수용하기에는 너무 좁았다.
또한
그녀의 세계관은
조선에서
받아들이기에 너무 빨랐다는 평가다.
인조는
소현세자 부부를 늘 의심했다.
청나라와 손잡은 아들이 자신을 폐하고
왕위에 오를 것이라는 의심 탓에
인조는
그녀의 아버지 강석기의 사망 후
선양에서 잠시 귀국한 그녀가
빈소에
왕곡(往哭)조차 하지 못하게
막았다.
인조 23년(1645)
9년간의 인질 생활을 끝내고
부푼 가슴으로 귀국했던 소현세자는
부왕 인조의 냉대를 받고
귀국 두 달 만에 죽게 된다.
독살로 의심되는 의문의 죽음이었다.
인조는
아들의 죽음에 대한 진상조사를 덮고
소현세자와 강씨의 아들인 경선군이 아닌,
소현세자의 동생인 봉림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준다.
"소현세자의 시신은 새까맣게 변해있었고
7군데의 혈(穴)에서 피가
나왔다"
- <인조실록> 중에서
그녀 역시 비참한 운명에 처해졌다.
그녀는
소용 조씨 저주사건과 인조의 수라에 올린
전복구이에 독을 탔다는 혐의를 받고
사약을 마시고 사사된다.
세 아들은 유배되고
그녀의 어머니와 사형제는 처형당하거나 장살됐다.
17살
꽃다운 나이에 세자빈에 간택되었던
조선 여인은 당시 사관이 비난할 정도로
무고한 죽음을 당했던 것이다.
경기 광명시 노온사동에 위치한 민회빈 강씨의 무덤
못난 왕 인조는
병자호란 때 경기도 광주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가
포위당한지 47일 만에 삼전도에서
삼배구도구(三拜九叩頭)의 예를 행하는 치욕을
겪었다.
이후
국력의 강화를 위해 노력한
소현세자와 빈 강씨의 힘이 강해지는 것을 두려워 한 나머지
아들과 며느리를 독살과 사사로 죽이고
만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찬탈을 한 전과와
자신을 부추긴 정치세력들에게 농간당한 셈이다.
왕의 열등감이 빚어낸 가슴 아픈
역사다.
●여주(女主)를 자처하며, 천주교도를
학살하다
순조
즉위년(1800) 문무백관들이
용상 아래 모두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용상에는 솜털도
가시지 않은
보송보송한 얼굴을
한 앳된 11세의 순조가 앉아 있었다.
순간
긴장된 분위기를
깨는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수렴 뒤에서 터져 나왔다.
"사람이 사람
구실을 하는 것은 인륜이 있기 때문이며,
나라가 나라 꼴이
되는 것은 교화가 있기 때문이오.
그런데
지금 이른바 사학은
어버이도 없고 임금도 없어서
인륜을 무너뜨리고
교화에 배치되어
저절로 금수와 같은
지경에 이르렀으며,
저 어리석은
백성들이 점점 물들고 어그러져서
마치
어린 아기가 우물에
빠져 들어가는 것 같으니,
이 어찌
측은하게 여겨
상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수령은 각기 그
지역 안에서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닦아 밝히고,
그 통 내에서 만일
사학을 하는 무리가 있으면
통수(統首)(민가의
우두머리)가
관가에 고하여
징계하여 다스리되,
마땅히
의벌(코를 베는
형벌)을 시행하여 진멸하도록 하라"
목소리의 주인공은 정순왕후 김씨였다.
그녀는
순조가 즉위하자
왕실에서
최고의 어른이라는 이유로
수렴청정을
시작했는데
이때 나이
56세였다.
그녀는 순조
즉위 초
정국 최대의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는 사학에 대해
엄금한다는
명령을 내리고 있는 중이었다.
이는 마치
조선의
신분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정순왕후
김씨와 뜻을 같이 하는 노론 벽파가
반대당인
남인들과
일부 노론 시파를 탄압하기 위한 구실이었다.
개혁군주 정조가 나라를 다스리는 동안
남인들은
하나의 세력을 이루게 되었다.
일부
남인들은
새로운
학문이자 종교였던 서학,
즉
천주교를
받아들였는데 이를 신서파(信西派)라 한다.
그리고
정조가 죽고
정순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에 나서면서
사학을 뿌리
뽑는다는 명목으로
신서파를
공격했던 노론 벽파 중심의 정치세력을
공서파(攻西派)라 부른다.
정순왕후
김씨는
그 공서파의
가장 강력한 배후인물이었다.
15살의 나이에
66살의
영조와 결혼했던 정순왕후는
아버지
김한구의 사주로
사도세자를
뒤주에서 죽게 만들더니
정조
재위시에는 때만 노리고 있다가
정조가 죽고
순조가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수렴청정으로
왕권과
다름없는 정치력을 행사하였다.
국왕과
똑같은 권위에
똑같은
방식으로 권력을 행사하여,
본인
스스로도
여주(女主), 여군(女君)임을 자처할 정도였다.
김씨의
전횡으로
개혁으로
나아가던 조선의 역사를
몇 십 년
뒤로 물리는 흑역사를 만든 장본인이다.
조선의
정치가
당파중심에서
왕비 가문 중심의 정치시대로
나아가는
발판이 되었다.
경기도 구리 인창동에 위치한
원릉
(영조와 정순왕후 김씨가 묻혀 있다)
조선의 왕비들은
시대에 따라 크게 네 형태로 삶을
살았다.
먼저
조선의 기반확립을
위해
희생양이 되는 왕비들로서
책은
태조 이성계의 비 신덕왕후 강씨부터
왕자의 난을 성공으로 이끈 지략가이지만
친정 집안이
쑥대밭이 되는 태종 이방원의 비,
원경왕후 민씨가 대표적이다.
소현왕후 심씨, 현덕왕후 권씨도 그 뒤를 따른다.
다음은
정희왕후 윤씨와 소혜왕후 한씨, 폐제헌왕후 윤씨,
폐비 신씨, 단경왕후 신씨, 문정왕후 윤씨 등은
체계화되는
유교적 이념을
철저하게 실행한 왕비로 꼽혔다.
셋째로
인순왕후 심씨, 의인왕후 박씨, 인목왕후 김시,
폐비 유씨, 인열왕후 한씨 등은
정쟁(政爭)의 소용돌이
속에서
친정가문과 함께한
왕비들이었다.
마지막으로
정순왕후 김씨부터 순원왕후 김씨, 명성왕후 민씨,
순헌황귀비 엄시, 정화당 김씨, 순명효황후 민씨는
비운의
역사 속에서 국정을 주도했던 왕비다.
조선의 마지막 왕인 순종의 비,
즉
순정효황후 윤씨는
8월15일 광복, 6월25일 한국전쟁,
4월19일 혁명, 5월16일 쿠데타를 목도하며
조선의 '마지막 국모'로 살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