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입학식/靑石 전성훈
짬짬이 막내 노릇을 하는 손자가 초등학교에 입학한다. 손자의 아빠이자 내 아들이 다녔던 초등학교에 들어간다. 학교 강당에서 열리는 입학식에 아내와 함께 참석하여 입학식을 바라보니 그 옛날 내 모습이 어렴풋이 생각난다. 상의 오른쪽에 커다란 손수건을 달아매어 코 흘릴 때마다 코를 닦는 ‘코흘리개’의 조금은 지저분하고 장난꾸러기 모습에 피식하고 웃음이 나온다. 6.25 전쟁이 끝난 지 몇 년 지나지 않은 그때 그 시절, 정말로 까마득한 먼 옛날이야기다.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는 (그때는 국민학교) 집에서 아주 가까웠다. 대문을 나와 5분 정도 걸어서 폭 4~5m의 작은 개울을 건너면 바로 학교였다. 교실이 부족하여 운동장 한구석에 군용천막으로 교실을 지었다. 1학년 때는 목조 교실에서 배웠는데, 오래된 교실이라서 학생들이 뛰면 나무 바닥이 삐거덕삐거덕 소리가 심하여, 선생님이 교실에서 뛰어다니지 말고 천천히 살살 걸으라고 하루에도 몇 번이나 말씀하셨다. 학생이 많은 탓에 오전반, 오후반 그리고 저녁반으로 나누어서 배웠다. 저녁반은 오후 2시경에 시작하여 오후 5시경에 끝났던 것 같았다. 2학년인가 3학년 때는 천막 교실에서 배웠다. 선풍기도 없었던 그 시절, 천막 옆구리를 걷어 올려서 바람이 통하게 하였는데, 바람도 불지 않는 여름날은 그야말로 한증막 같아서 땀을 뻘뻘 흘렸다. 천막 교실은 신발을 신고 있어서 먼지가 많이 났다. 구구단을 배울 때 단번에 외우는 아이들은 수업이 끝나면 곧바로 집으로 가고, 나처럼 잘 외우지 못하는 아이들은 남아서 힘들게 구구단을 외웠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나는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까지도 숫자는 열까지만 셀 수 있었고 한글을 완전히 깨우치지 못하였다. 길을 걸어갈 때 부모님이 길거리 간판을 읽어보라고 자주 말씀하시곤 하셨다. 집에 보관하고 있는 통신부(성적표)를 보면 그 내용이 참 재미있다. 1학년 통신부에는 ‘수업시간 중 자리에 가만히 앉아있지 않고 돌아다녀서 매우 산만한 아이’라는 담임선생님의 글씨가 보인다. 그때에는 통신부에 과목별 성적을 ‘수우미양가’로 표시하였는데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는 ‘수, 우’는 거의 없고 대부분 ‘미’이고, ‘양’이 몇 개 그리고 ‘가’도 눈에 띈다. 5학년 통신부를 보니까 실과(實科)에 ‘수’가 있다. 아마도 선생님 심부름을 잘하고 머리 쓰는 것보다는 몸을 쓰는 일에 재빠르게 행동하여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학교 운동장 가운데에 빗물 통로로 쓰는 커다란 하수관이 있었다. 물이 없을 때 하수관에 들어가 끝으로 빠져나오면 바로 개울이고 동네였다. 언젠가는 동무들과 겁도 없이 운동장 하수관에 들어가 몸을 수그리고 기어서 개울로 나온 적도 있었다. 5학년 때는 동네 후배 꼬마들을 모아서 대여섯 명이 성북구 월곡동에서 남산까지 걸어서 갔다 온 적이 있었다. 그 먼 거리를 어떻게 다녀왔는지 지금 생각해도 너무나 무모하고 어이없는 행동이었다. 아침에 집을 나간 아이들이 해 질 무렵에 도착하였으니 동네에서는 난리가 났다. 내가 인솔해 갔다는 사실을 알고 동네 어른들이 어머니께 아이를 잘 키우라는 등 이런저런 소리를 하였다. 동네 사람들의 원성을 들으신 어머니께서는 무척 속이 상하여 심하게 꾸지람을 하셨다. 나는 자랄 때 정말 늘 장난꾸러기이고 자주 말썽을 피우는 아이였던 것 같았다.
손자 입학식은 작년 손녀 입학식과 거의 똑같다. 세 학급의 담임선생님이 새내기 꼬마들 한 사람 한 사람을 가슴으로 안으며 등을 가볍게 두드려준다. 촛불을 하나씩 켜면서 두려움과 설레는 마음을 가득히 가진 아이들에게 학교는 사랑을 주고받는 것을 배우는 따뜻한 곳임을 느끼게 하는 것 같다. 손자가 잘 적응하여 학교생활을 재미있게 보낼 수 있으면 좋겠다. 2학년이 되는 손녀의 모습을 볼 때 손자도 충분히 잘할 수 있을 것 같다. 세월 따라 내 역할은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을 옆에서 조용히 지켜보는 것으로 만족하면 된다. (2024년 3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