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0년(영조 37) 4월 사도세자는 20일 동안 대궐에서 사라진다. 자기 대신 내관을 방에 앉혀 놓고 평양으로 밀행을 떠났던 것이다. 하지만 평양밀행은 정치적 사건으로 비화된다. 사도세자의 떠들썩한 비밀여행은 금방 들통이 날 수 밖에 없었고 세자의 행위를 비판하는 상소가 연일 대궐로 쏟아져 들어왔다.
대간들은 “왕세자의 지위에 있으면서 무뢰배들과 어울려 마음대로 미행하는 것은 나라를 망하게 하는 일”이라고 강도높게 비난했다. 세자는 며칠 동안 금식하면서 대죄했지만 영조는 용서하지 않았다.
이듬해 1월부터 3월까지 두 어 달 사이에 세자를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 현직 3정승이 한꺼번에 음독자살하는 초유의 일이 발생한다. 1761년 1월 먼저 영의정 이천보(1698~1761)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천보는 한문사대가(漢文四大家) 중 한사람인 월사 이정구의 6대손이다. 이어, 2월 5일에는 우의정 민백상(1711∼1761)이 자살한다. 민백상은 숙종비 인현왕후의 아버지인 민유중의 증손자이다. 마지막으로 3월 4일에는 좌의정 이후(1694∼1761)가 그들의 뒤를 따른다. 이후의 고조부는 인조반정의 주역이자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 수어사를 지냈던 이시백이다.
이들 3인은 약방도제조를 지내면서 사도세자의 병환을 치료하려고 했거나, 사도세자의 스승에 임명된 경력을 갖고 있었다. 이들 모두 노론명문가 출신이었지만 정치적으로는 비주류로 분류됐다. 노론이 사도세자를 비판했던 것과는 달리 세자를 끝까지 지지하고 보호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들의 노력도 무색하게 사도세자는 1년 뒤 뒤주에 갇혀 죽고 만다. 세자의 나이 28세였다.
원본보기 [1761년 우의정 민백상, 영의정 이천보, 좌의정 이후 등 3정승은 사도세자가 몰래 평양유람을 간 것에 대한 책임을 지고 음독자살했다. 민백상, 이천보, 이후] |
사도세자 이선(1735~1762)은 ‘당쟁의 희생양’으로 주로 인식돼 왔다. 사도세자는 남인, 소론, 소북세력과 가까이 하면서 집권세력인 노론을 꺼려했다는 것이다. 이런 시각에 의하면 노론은 자신들을 멀리하는 세자에게 불안감을 느낀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 씨, 영조가 총애하던 후궁 숙의 문 씨 등과 공모해 세자의 비행을 자주 왕에게 고해 바쳤다. 영조가 세자를 불러 심하게 꾸짖는 일이 잦아지게 되면서 아들은 그런 아버지에게 공포감을 느꼈다. 세자는 자신을 지지하던 3명의 대신들이 잇달아 세상을 뜨고 조정에서 강경 노론들이 득세하자 극심한 신경증과 우울증 등 정신병에 시달렸고 결국 영조는 그런 아들을 죽이게 됐다는 것이다.
분명 당쟁도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몬 원인 중 하나이겠지만 보다 본질적으로는 사도세자 본인에게서 그 이유를 찾아야 한다는 의견이 최근 자주 제기된다. 사도세자는 영조가 장자인 효장세자를 잃은 뒤 42세에 극적으로 얻은 아들이다. 처음에는 아들에 대한 영조의 기대가 자못 높았다. 세자는 총명했다. 돌을 갓 넘었을 때 병풍에 쓰여진 왕(王)자를 보고 영조를, 그리고 세자(世子)라는 글씨를 보고 자신을 가리켰다. 탄생과 동시에 원자로 정해졌고 생후 13개월만인 영조 12년(1736) 3월 15일 왕세자로 책봉됐다. 영조는 왕세자 책봉식 때 아들을 안고 “내가 너를 늦게 얻었지만 하늘이 특이한 자질을 부여했다. 똑똑하고 침착하기가 남다르니 자라서 총명하고 어질며 효성스러울 것”이라고 크게 만족감을 드러냈다.
무수리 출신의 어머니를 둔 영조는 열등감이 강했다. 그래서 아들이 어릴 때부터 엄격한 제왕교육을 통해 이상적인 군주를 만들려는 꿈을 꿨다. 유년기부터 당대 최고의 스승을 데려다가 강도 높은 경전공부를 시켰다. 아버지의 기대가 너무 컸던 것일까. 조기교육은 부작용을 낳기 시작한다. 아들은 아버지의 강압적인 교육에 흥미를 잃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사도세자가 10세 되던 영조 20년(1744) 11월 4일 왕은 아들에게 “글을 읽는 것이 좋으냐, 싫으냐”고 물었다. 그러자 세자가 망설임 끝에 “싫을 때가 더 많다”고 답했다. 영조는 강론하는 관원을 시켜 세자가 하루 동안 글을 읽는 것이 좋을 때는 흰콩을 놓고, 싫을 때는 검은콩을 놓아 콩이 많고 적음을 검사받도록 했다.
세자는 머리가 비상했지만 식탐이 많아 뚱뚱했으며 무인 기질이 강했다. 승정원일기에는 아들의 비만을 염려하는 대목이 수도 없이 등장한다. 영조 20년 (1744년) 4월 14일자에는 “세자가 식사량이 너무 많고 식탐을 억제하지 못해 뚱뚱함이 심해지고 배가 나와 열 살 아이 같지 않다”고 기록돼 있다. 또한 9월 15일자에서 영조는 “(세자가) 글을 이해하는 능력은 뛰어 나지만 뚱뚱해서 얼굴 생김새가 별로라 답답하다”고 한탄했다. 사도세자의 아내 혜경궁 홍씨도 말년에 쓴 회고록 ‘한중록’에서 “사도세자의 체격이 크고 굵다”고 기술했다.
세자는 딱딱한 경전보다는 병서를 탐닉했다. 정조실록은 “(사도)세자가 어릴 때부터 군대놀이를 좋아했고 병서도 즐겨 읽었다. 한가할 때면 말을 달리며 무예를 시험했으며 15~16세부터는 건장한 군사들도 들기 힘들어하는 청룡도와 커다란 쇠몽둥이를 자유자재로 사용했다”고 썼다.
원본보기 영화 '사도' 중 |
15세에 대리청정을 한후부터 사사건건 아버지와 갈등을 빚으면서 정신이상 증세가 심해지고 악행이 본격화된다. 사도세자의 일탈은 궁밖으로 유람을 나가고 여승을 몰래 궁궐로 데려오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마음 속의 병을 사람을 죽이는 것으로 달랬던 것이다. 칼을 좋아한 세자는 날카로운 칼을 여러 자루 갖고 있었다. 이 칼을 가지고 옷이 잘 맞지 않는다며 옷시중을 드는 내관을 죽였고 영조에게 자신의 비행을 고해 바친다고 의심해 주위 사람을 마구 죽였다. 세자는 내관 김한채가 영조에게 밀고한다고 여기고 그를 죽인 뒤 목을 잘라 들고 궁을 돌아다니는 엽기행각을 벌였다. 한중록은 “(세자가) 그 머리를 들고 들어 오셔서 궁인들에게 돌려가며 보여주시었다. 그때 사람의 머리 벤 것을 (처음) 보았다”고 그날의 충격적인 장면을 회고했다.
세자는 자신의 후궁도 무참히 살해했다.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나경언의 고변이 있던 날 밤 영조는 뜰에 엎드린 세자에게 “네가 왕손의 어미를 박살내 죽였다”며 “왕손의 어미는 네가 처음에 우물에 빠진 것 처럼 매우 사랑했지 않느냐. 그는 강직한 사람이었다. 네 행실을 간하다가 이로 말마암아 죽임을 당했을 것”이라고 꾸짖었다.
사도세자는 친모인 영빈 이 씨의 나인을 죽이는 것으로도 모자라, 어머니의 생명을 위협하기도 했다. 영빈 이 씨는 “세자에게 갔다가 거의 죽을 뻔 하다가 간신히 몸만 빠져 나왔다”고 증언했다. 뿐만 아니라 세자의 친동생인 화완옹주에게도 칼을 들이대고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영조는 세자를 폐하면서 “세자가 죽인 중관, 나인, 노속이 100여명에 이른다”라고 발표했다. 불에 달군 쇠로 지져 죽이는 낙형은 참혹했다. 사람을 죽이지 못할 땐 짐승이라도 죽여야 했다. 세자는 영조에게 “화가 나면 닭이나 짐승을 죽여야 화가 내린다”고 털어놓아 아버지를 놀라게 했다. 하루는 애지중지하는 애견을 죽이고 말았다. 정신이 돌아온 후 울부짖으며 후회를 하기도 했다. 결국 영빈 이씨가 나서 “세자를 죽여야 한다”고 간청했고, 장인 홍봉한은 사위가 뒤주 속에서 죽자 “(왕께서) 혈기가 왕성할 때와 다름없이 결단하셨으니 흠앙해 마지 않는다”고 말했다.
사도세자의 이 같은 잔혹 행위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정조가 사도세자의 비행이 낱낱히 적힌 승정원일기를 모조리 삭제했기 때문이다. 승정원일기에서 오려지고 통째로 찢겨 나간 곳이 100여곳이 넘는데 곳곳에 “병신년 (정조의) 전교로 인해 세초됐다”고 적혀있다.
세자가 무고한 사람을 100여명이나 직접 살해한 일은 동서고금을 통해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희대의 폭군으로 불리는 연산군도 직접 사람을 죽인 경우는 성종의 후궁 정씨, 엄씨 등에 불과하다. 그리고 적어도연산군은 세자시절에는 매우 모범적이었다. 연쇄살인마가 죽지 않고 무사히 왕위를 물려 받았다면 어떤 사태가 벌어졌을까.
목숨까지 버리면서 이런 사도세자를 지켜려던 이천보, 민백상, 이후 등 3정승의 초상화가 모두 현전한다.
[배한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