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참 좋은
최상의 말이다. 어떤 종교 단체이든
어떤 경전에서든 사랑은 교리중의 의뜸 강령이며,
인간세상의 기본이 되는
모든 도덕교과서의 가름침이 또한 사랑이다.
하면, 성경에 기록된 사랑도 이같은
도덕교과서적 사랑인가? 물론 그렇다.
하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음이 또한 성경기록이 된다. 왜 성경은 이중적 기록인가?
이는 지금까지 수없이 밝혔듯이, 성경은
율법(초림주의 말씀)과
구원(재림주의 말씀)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율법의 말씀은 문자 그대로
보는 성경관이요, 구원의 말씀은 그 성경문자(율법)를 오늘날 낱낱이
해석되어진 진리의 새 말씀으로 거듭나야 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비유이며 그 비유가 재림때 풀어져야 한다는 뜻에서 이중적인 것이다.
즉 겉 말씀이 있고 속 말씀이 있는데 "사랑" 이라고
하는 명제가
또한 겉 사랑이 있고 속 사랑이 있다는
뜻이다.
겉 사랑에 대해서, 즉 인간도덕적
사랑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편지글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인간도덕적
사랑이므로 세상사람들도 많이 인용해
쓰는 명문구이다.
[고전13:4-7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그러나 본질적 속 사랑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35-40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
예수께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했다. 즉 성경 가르침의
의뜸이며 핵심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일이야말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예수님은 사랑에 대한 실천을 가장 먼저 하신 분이다. 그리고 그것을(사랑을)
"구원" 이라고 가르치셨다. 즉 사랑이 곧
구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성경문자 그대로 바울이 고전 13장에서
말한 사랑의 개념이나
혹은 예수께서 돌아가신 육적 피흘림의 사랑의 개념 같은 인간도덕적,
인간육적 사랑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신 "본질적 구원의 사랑" 이
되는 것인가? 절대로 아니다.
바울이 말한 사랑은 모두 "율법적 사랑" 일 뿐이다. 구원의 사랑이 아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지금까지 예수님이 말씀하신 구원의 사랑은 버리고
바울이 말한 율법적 사랑만을 인정하는 믿음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까지
율법적 사랑을 하며 처음하늘 처음땅인 율법시대를 살아왔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처음 하늘 처음땅인 율법시대에서 새하늘과 새 땅인
구원시대로 넘어가야 하는 과도기에 있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유월을
해야하는 천지개벽기를 맞았다.
물리적 거리를 이동하는 유월이 아니며 물리적 세상의 천지개벽이 아니다.
모두 우리의 생각을 바꾸는 정신적 가치의 유월이며 천지개벽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구원의 사랑" 이 곧 우리가 바꿔야 하는
그 중심자리에 있다.
예전의 사랑은 인간도덕적 사랑이고 육적 사랑이었으며 그것이 구원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사랑에
대한, 그 구원에 대한 생각을 바꿔야 한다.
인간도덕적 사랑과 육적 사랑은 인간역사 수수천년 동안 종교계에서나
세상에서나 워낙 우리의 몸과 영혼을 온통 점령해 왔기 때문에, 바꾸기가
힘들겠지만 그 개념을 과감히 바꿔야 한다.
인간도덕적 사랑은 하나님을 아는 "진리에 대한 사랑으로" 바꿔야 하고,
인간육적 사랑은 "영적 사랑으로" 바꿔야 한다.
사랑은 곧 "진리자체" 였으며 "말씀자체(영)" 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서로 사랑하라는 것은, 곧
이웃에게 진리를 전해주어 영생을 안겨주는 사랑을 하라는 것이다.
진리로서 영생을 안겨주는 사랑만이 무한히 큰 영원한 사랑이 된다.
사람들은 사랑을 말하고 사랑을 행한다. 심지어
혹자는 그 사랑을 실천하기
위하여 자기 아들을 죽인 원수를 용서하고 그 살인자를 자기의 아들로
대신해서 삼는 살신성인의 경지에 오른 위인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리자체는 모르고 말씀자체는 모르고 있으니,
허당을 짚고 있는 것이 된다. 본질이
아닌 것은 잘도 알고 행하고 있으나,
사랑의 본질은 모르고 있으니 그게 허당이 아니고 무엇인가.
진리, 즉 말씀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 망한다(호4;6)" 고 했다. 지식이 있어야 망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야말로 영생을 받는 지식이라고 알려 주고 있다(요17:3).
그 지식을 깨달아서 사람들에게 전하여 줌으로써,
영생을 받게 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요, 본질적 사랑 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한결같이 육적 사랑과 인간도덕적 사랑은 너무나 달콤해
하며 무척이나 좋아하고 따르면서도, 하나님을
알려주는 지식, 즉 오늘의
새양식인 말씀(영적 사랑)에 대해서는 머리가 아프고 입이 써서 도무지
먹지 못하겠다고 도리질이니 그게 문제로다.
예전의 감성적 하나님(육적 사랑)에 대해선 춤추며 따르면서도
오늘의 이성적 하나님(영적 사랑)에 대해선 냉혹하기 짝이 없다.
하나님은 이에 대한 예언을 이미 에덴동산에서 보이셨다.
[동산각종나무열매는 임으로 먹되 동산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열매는 먹지말라]
에덴동산은 하나님의 백성이 사는 곳이므로 동산중앙 자리엔 하나님의
백성이 있는 곳이다. 그리고 동산중앙이
아닌, 그 주변은 타종교인들과
일반세상이 살고 있는 곳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동산각종나무열매를 임으로 먹으라고 한것은 타종교의
가름침 속에 들어 있는 핵심교리와 세상의 여타 사상들을 임으로
수용하라고 한것이다. 그래야 비유로
기록된 성경이 풀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산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열매는 먹지 말라고
하신 것은 기독인의 복음만이 최고선이요, 타의 것은
악으로 재단하지 말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불순종하여 달콤한 선악판단의 선악과를 먹었다.
동산각종나무열매는 관심도 없다. 관심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원수시하고
악으로 저주한다.
즉 모든 게 선악판단의 대상이다. 나는 축복받은 선이요, 너(내 이웃)는
저주받는 악이란다. 이같이 하나님을
아는 진리에서는
나와 너를 선과 악으로 가르는 선악판단의 흑백논리 속에서 인간의
도적적 사랑과 육적 사랑만을 외치고 그게 구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내 몸처럼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다. 오늘날
그 속뜻은
하나님이 동산각종나무열매(이웃)를 임으로 먹으라고 하신 말씀과 맥을 같이 한다.
쓰디쓴 동산각종나무열매를 임으로 먹을 때(내이웃을 내몸처럼 사랑할 때),
성경이 풀리고, 해독된 그 진리의
새 말씀만이 살려주는 말씀이 되고,
살려주는 말씀만이 곧 "본질적 사랑" 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랑 이시다. 그리고 아니 계신 데 없이
무소부재 하시다.
무소부재 하시다 함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고 그 안에 계심을 뜻한다.
성경이 주어진 기독교는 하나님이 본족으로 지으셨다.
그러나 서족으로는 불교 등 여타 종교도 하나님이 지으시고 거기 계시며,
세상학문도 지으시고 거기 계신다. 따라서
그 모든 것은 성경을 가지고 있는
기독교를 중심으로 해서 세상의 여타 가르침들
(동산각종나무열매) 중에
그 핵심 사상들이 반드시 들어와야 전체적인 하나님의 크신 모습이
드러나게 된다. 즉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그 온전한 모습을 드러낸다.
동산 여기저기에 부분적으로 흩어져 있던 지식들이 아우러질 때, 한 논리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신다. 오늘날 새하늘
새땅, 새로운 창조에서는 반드시
크신 하나님으로 나타내실 터이므로
[렘31:22 패역한 딸아 네가 어느
때까지 방황하겠느냐 여호와가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니 곧 여자가 남자를 안으리라]
라고 하셨다. 여자(기독교)가 남자(동산각종나무열매)를 안아야, 즉 임으로
먹고 수용할 것은 수용해야 여자가 크신 하나님을 온전히 아는 새로운
창조가 되는 것이다. 이같이 전체를
아우러 한 논리의 크신 하나님이 되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일컬어 "사랑" 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사랑은 편협함이 아니다. 사랑은 온
세상에 충만한 공기와도 같은 것이다.
사랑은 기독교인만의 구원이 아니다. 사랑은
궁극적으로 온 세상 인류의
구원이다. 하나님이 모두 지으셨고, 하나님이 계셨던 곳마다 두루두루
차례를 따라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구원으로 마감하신다.
그게 6일창조의 완성이 된다.
그러므로 인간의 도덕적 사랑이나 육적 사랑은
비본질적 사랑이며 지엽적 사랑이라면
하나님을 아는 온전한 지식, 즉 영생케
해주는 진리의 새말씀은 본질적 크신 사랑이다.
전자의 작은 사랑에 달콤함을 느끼며 만족하는 자, 우물안 개구리이다.
새 창조에서 여자가 남자를 안는 후자의 큰 사랑에 뜻을 두는 자,
세계를 제패하는 왕과 제사장반열에 오를 것이다.
기독인들이여!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라는 말씀을 이제 어떻게 받아드릴
것인가? 이제 어서어서 진리의 새
말씀을 깨달아 그 진리의 새말씀을
서로 전해줌으로써 서로 살려 주는 넓고 큰 사랑으로 수용하고 이해해야 한다.
진리의 새말씀을 서로 전해주는 일에 게으르지 않기를 바란다.
그게 사랑인 것을.
그 사랑을 실천하기가 얼마나 힘든 줄도 아시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