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부력, 부재 증명 / 이승우 / 현대문학
적지 않은 사람들이 우주와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 경전이라 불리우는 책을 들여다보고 깊은 묵상을 통해 진리를 향하여 한걸음 나아 가고자 한다.
경전을 통하는 길은 길고 험난한 길이기에 사람들은 타인의 이야기를 통해 사람을 배우고 경험한다. 그것이 그냥 재미나 취미 생활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상관없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의 상황에 처해 있지만 각자는 각자의 위치에 근거해서 형편과 처지 그리고 앞에 놓인 상황을 바라본다. 당연하게 우리는 내가 바라보는 세계에서 바라보는 것에 익숙해지기 마련이고 시간이 지나면서 나도 모르게 그 방향에 집착하고 자리를 고정한다.
좋은 소설은 내가 경험할 수 없는 상황, 경험할 수도 있는 상황을 제시하고, 내가 주로 바라보는 방향과 다른 각도가 있음을, 그 자리에 내가 알고 있는 사람 외에 다른 사람도 있을 수 있음을, 그래서 다른 세계를 다른 사람을 알 수 있도록 깨우쳐준다. 작가 이승우의 이야기 세계가 나에게는 그렇다.
2021 제43회 이상문학상 작품집을 통해 두 편의 단편을 만났다.
마음의 부력 - 대상 수상작
영화 이반 올마이티에 이런 부분이 나온다. 부부 싸움을 하고 집을 나온 아내가 휴게소에서 만난 사람에게 가족을 사랑하게 해달라고 그렇게 기도를 했는데 이것이 무엇이냐고 푸념한다. 그러자 옆에 앉은 남자가 대답한다. 만약 하나님이 가족을 사랑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사람에게 가족을 사랑할 마음을 주시겠느냐 아니면 가족을 사랑할 기회를 주시겠느냐.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반문하는 내용이다. 대충 기억하고 있으므로 다소의 오차가 있을 수 있다. 여자는 남편을 향해 차를 돌린다.
사람의 말은 이해인 수녀의 시를 소환하지 않더라도, 말해 '버렸다'지만 어디에선가 싹을 피우고 자라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소설은 어머니와 아들 내외가 등장하는 짧은 이야기이다. 먼저 떠난 큰 아들도 등장한다. 등장 인물의 구조는 구약성경의 쌍둥이 에서와 야곱 그리고 어머니 리브가가 등장하는 부분과 거의 비슷하다. 작가도 소설 안에서 지적하였듯이 성경 이야기를 다룰때면 에서와 야곱의 입장을 주로 이야기하고 어머니 리브가의 입장은 다루지 않는다. 편애라는 주제로 다룰때도 리브가 어떤 형편과 처지에 있으며 그녀의 마음상태에 대해서는 주목 받지 못한다. 작가는 어머니의 애정을 그닥 받지 못한 큰 아들이 어머니에게 처음으로 부탁한 것을 어머니가 들어주지 않았다는 사실이 어머니의 마음에 흩어지지 않고 몽오리져 남겨 있었다고 보았다. 그 사실은 아들이 저세상 사람이 되었을때, 아들의 존재와 무관하게 때가 차자 갚아야 하는 빚처럼 요구되어 어머니의 마음에 떠오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고 하듯 부모의 자식 사랑은 차별이 없다고 한다. 동의한다. 그러나 각 자녀에 대한 사랑의 합은 어느 순간에는 동일하지 않다. 그것은 신일지라도 이룰 수 없는 것이다. 사랑의 합이 같다는 것은 인생의 전반에 쏟아진 사랑의 합을 말하는 것이어야 옳다. 그리고 그 계산은 부모의 계산기로 측정되는 것이어서 자녀의 계산기로 계산할 수 있는 없다. 나가는 사랑이 사랑인지 아닌지는 건네는 자만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건네는 자도 깨닫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추론해보건데 그걸 계산해보는 부모라면 언제나 내가 동일한 사랑을 베풀지 못했음을 자책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특히나 소설처럼 먼저간 자식에 베푼 사랑이 모자랐다고 생각하고 어떤 형태로든 아들의 사후에 베푸는 사랑을 떠난 자식에게 베푼 사랑의 총합으로 더해서 계산 해야하나 말아야하나를 우리는 고민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건 하등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애초에 사랑은 계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은 언제나 모자라고 언제나 충분하다.
소설에서 어머니는 큰 아들에게 적기에 사랑을 베풀지 못했음을 괴로와했다. 베풀어야만 했다고 생각했기에 둘째를 큰 아들로 보았고, 둘째는 어머니의 마음을 다행하게도 알아차렸기에 큰 아들인 척하면서 전화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사랑은 공기와 같은 것이다. 때가 차면 떠오른다. 때론 빚으로 때론 커피의 크레마처럼.
상실감과 슬픔은 시감과 함께 묽어지지만 회한과 죄책감은 시간과 함께 더 진해진다는 사실을, 상실감과 슬픔은 특정 사건에 대한 자각적 반응이지만 회한과 죄책감은 자신의 감정에 대한 무자각적 반응이어서 통제하기가 훨씬 까다롭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했다. 47
부재 증명 - 문학적 자서전
나는 내가 누구인지 확실하게 증명할 수 있을까? 나를 나로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은 불행하게도 내가 아니고 다른 사람이다.
사회관계망 여러 곳에 글을 끄는 사람이 있다. 관계망의 모임마다 다른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나는 한번도 가보지 않은 마을에서 나를 만났다는 복수의 사람들이 나타난다. 그리고 그 마을에 잔인한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답답함에 직접 그 마을로 내려간 그는 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잡혀간다. 용의자의 몽타쥬와 얼굴이 완전하게 일치하고, 피해자가 범인으로 특정한다.
나는 어떻게 내가 나임을 증명할 수 있을까?
하지만 정말로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상태라면, 내가 인식하는 나를 빼놓고 구성된 나를 빼버리면 존재의 기틀을 놓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라면, 나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겠는가? 내가 나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면 타인들이 증명하는, 내가 인식하지 못하는 나를 어떻게 부정할 수 있겠는가. 나를 빼놓고 구성된, 내가 인식하지 못하는 나에 대한 확실하고 완벽한 부재 증명을 통해서만 겨우 성공할 수 있는 나의 불안전한 존재 증명. 이 가혹한 운명인지, 나는 당신들의 부재 증명을 통해서만 가까스로 존재하게 된다. 그러니까 이 글은 당신들 속의 나의 알리바이를 증명해줄 사람을 찾는다는 공고문과도 같은 것이다. 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