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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생활사 서평 (역사학과 20173310 고창연).hwp
조선시대 생활사 서평
『조선의 옛 사람들에게서 우리를 만나다』를 읽고
-고문서 해석, 풍수지리를 중심으로-
역사학과 20173310 고창연
Ⅰ. 서론
1) 선정이유
흰색 도화지에 검은 점 하나만 찍으면 사람들은 검은 점에만 집중한다. 현재 사람들의 역사 인식이 그러하다. 조선시대라는 특정 시기를 떠올릴 때, 대중들은 대부분 조선왕조의 역사를 떠올린다. 하지만 조선 ‘왕조’의 역사는 조선시대라는 흰 도화지 위에 찍힌 검은 점에 불과하다. 조선시대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것은 일반 민중의 생활임에도 불구하고 조선왕조의 역사를 조선시대 전체의 역사로 일반화시켜버리는 것은 큰 오류이다. 이러한 점에 문제를 느끼고 흰 도화지 즉, 조선시대 일반 민중의 생활사에 집중을 해보고자 하였다.
또한 조선시대 생활사는 필자가 고등학교 시절 관심을 갖고 탐구했던 분야이다. 필자는 원래 대전에 거주하였는데, 집 근처에 진잠향교가 있었다. 진잠향교에서 봉사활동을 하며 향교의 관리자분께 강의를 듣고, 서적을 찾아 읽으며 지방사에 대한 관심을 키워갔다. 이러한 경험과 맞물려 요즈음 지방자치시대, 여성사의 부각 등 지방사 및 생활사에 관심이 많아지는 추세이기 때문에 이러한 흐름에 발 맞춰 나가고자 이 책을 읽게 되었다.
본 도서는 조선시대의 왕조, 양반, 평민, 천민 등 다양한 계층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앞에서 밝혔듯, 필자가 주목하고자 하는 부분은 지금껏 잘 다뤄지지 않은 일반 민중 및 소외계층의 생활사 부분이다. 때문에 평민 및 천민을 다룬 본 도서의 제2부 ‘문화유산으로 배우는 역사와 문화’ 부분을 발췌하고, 이를 중심으로 서평을 작성하였다.
2) 서지 및 저자 소개
본 책은 2011년 8월 15일 푸른사상 출판사에서 출간된 책이다. 저자는 이성무 외 9명이다. 본 서평을 위해 중점을 두고 읽은 부분은 이성무의 ‘조선시대사 총설’, 김학수의 ‘고문서를 통해 본 옛 사람들의 삶과 문화’, 김기덕의 ‘풍수의 핵심이해’이다.
우선 故 이성무는 올해 2018년 1월 29일 별세했다. 생전에 서울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였고,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 및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국민대학교 교수 및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또한 한국역사문화연구원을 설립하고 연구원장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조선 초기 양반 연구』(1980), 『조선 양반사회 연구』(1995), 『조선의 사회와 사상』(1999) 등이 있다. 김학수는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을 졸업하였다.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로 재직 중이며 저서로는 『조선양반의 일생(공저)』 등이 있다. 김기덕은 건국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건국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건국대 문화콘텐츠 학과 전임교수를 지내고 있다.
Ⅱ. 본론
1) 고문서를 통해 본 옛 사람들의 삶과 문화
조선시대에도 개명이 가능했을까? 이는 상당히 낯선 질문일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조선시대에도 개명을 자유로이 할 수 있었으며, 그것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경상도 진주의 하명상이다. 그에게는 특이한 이력이 있다. 바로 개명을 수차례 했다는 것이다. 그는 쉰 즈음이 될 때까지 과거에 거듭 낙방했고, 이름을 고침으로써 합격을 기원했다. 그의 원래 이름은 자륜(自崙)이었다. 그러나 과거에 급제하기 위해 이름을 고쳐 세륜(世崙-19세) → 대륜(大崙-22세) → 즙(楫-34세) → 인즙(仁楫-43세) → 정황(挺黃-46세)에 이르는 무려 5차례나 바꾸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에 낙방하자 하정황은 명상으로 이름을 다시금 바꾸게 된다. 그런데 1751년 하명상은 진주목사에게 올린 진정서 한 통을 올리게 된다. 이 진정서에는 하명상의 개명에 대한 집착과 과거에 붙길 염원하는 간절함이 잘 드러난다. 당시의 법으로 개명은 3년 단위로 신청을 받았다. 또한 나라의 인준이 없으면 효력이 발생하지 못했는데, 만약 하명상이 바뀐 이름으로 과거를 보기 위해서는 1753년 과거 시험까지 기다려야했다. 그러나 당장 있을 과거에 조급해진 하명상은 개명확인서를 애청했고, 이러한 사연 덕분인지 허가 받기에 이른다. 그 해 가을 하명상은 과거에 급제하였다.
조선시대에도 동기가 있었고, 그 사이가 유별했다. 이는 방목과 계회도로 알 수 있다. 동년이라는 말이 현재는 동갑을 칭하는 말로 쓰이지만, 옛 사람들은 같은 연도에 과거에 함께 급제한 동기들을 동년이라 불렀다. 동년을 다른 말로 동방이라 했는데, 이 동방들의 이름을 수록한 책자가 바로 방목이다. 동기의식은 유독 사마시(司馬試)에서 각별했다. 마치 우리가 대학에 오기 전 고등학교 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를 더욱 친하고 긴밀하게 여기듯이 조선시대에도 문과에 합격하기 전 예비시험이었던 사마시에서의 동기의식이 컸던 것으로 보이니 이 점은 상당히 흥미롭다. 이러한 사마시의 각별한 우정은 「임오사마방회지도(壬午司馬榜會之圖)」등의 계회도에 잘 그려져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사회생활의 폐단은 비단 현재뿐만이 아니라 과거에서부터 이어진다. 마치 오늘날의 신고식과 같은 행사가 조선시대에도 있었다. 조선시대 면신례(免新禮)가 바로 그것이다. 이런 면신례 문화가 유독 심했던 부서가 있는데, 바로 사헌부와 의금부가 대표적인 곳이었다. 물론 사헌부는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감찰하던 기관이었고, 의금부는 왕의 직속 사법기관이었기 때문에 철저한 위계질서 및 기강이 필요했다. 분명 면신례의 본래 취지도 이러한 목적이었을 것이다. 허나 이러한 과정에서 신임 관리가 부담해야 될 비용이 만만치 않았으며, 심한 경우 면신례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다고 하니, 오늘날의 대학 신입생 환영회나 군대 신병 맞이 가혹행위가 이와 비슷한 면모를 보인다. 이러한 악습이 조선시대나 오늘날까지나 거의 다름이 없는 것을 보고 있자니 안타깝고 씁쓸하기도 하다.
이렇게 과거부터 이어지는 악습의 폐해도 있지만, 과거로부터 배워야하는 좋은 미담도 있기 마련이다. 바로 「이경검부처별급문기(李景儉夫妻別給文記)」가 그 예시이다. 선조 대에 이경검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에게는 효숙이라는 딸이 하나 있었는데, 딸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던 이경검은 파손된 가옥을 수리하는 도중 실언을 하게 된다. 수리하고 있는 가옥을 효숙에게 주겠다는 약속을 하게 됐는데 이경검은 농담으로 한 말이었으나, 효숙은 아버지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훗날 이경검은 효숙이 진심으로 받아들였음을 알게 되고 약속을 이행하기로 결심한 후 부부가 공동으로 기와집 한 채를 구입해 효숙에게 양도하게 된다. 이러한 것을 성문화 한 것이 이경검부처별급문기이다. 오늘날 약속을 가벼이 여기는 세태를 반성하고 역사를 배우고 본받아야하는 이유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생각한다.
조선시대 소외계층의 삶도 흥미롭다. 사육신 중 한 명인 하위지의 조카, 하원(河原1451~1518)이란 사람이 있었다. 사육신의 변이 일어나자 피신을 다니며 겨우 목숨만 부지하였고, 중년이 되어서야 하급직으로 그나마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던 처지였다. 그에겐 첩이 한 명 있었는데 감장이라는 이름의 평민이었다. 감장에게 큰 애정이 있었던 하원은 노년에 들면서 본인과의 사이에서 자식이 없던 감장을 과연 누가 돌봐줄 것인지 걱정하기 시작한다. 그는 유서를 한 장 써주기로 결심하였고, 유서에는 다음과 같은 조항을 실었다. ‘감장이 생전에는 본인이 양도한 일정 재산을 향유하다가 일정 시기에는 다시 본처의 자식들에게 되돌려준다.’ 이렇게 단서조항을 달음으로써 다음 상속권은 감장에게 위임했고, 이 재산을 상속받기 위해서는 본처의 자식들도 감장을 무시할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하원의 뜻이 통해 하원의 자식들은 감장을 잘 섬겼고, 특히 손자 철민이 가장 지극히 모셨다고 한다. 결국 감장이 죽기 전 철민에게 모든 재산을 위임했다고 한다. 처첩제가 허용된 조선사회에서도 첩을 많이 두는 것은 좋은 시선으로 바라볼 수 없었다. 처와 첩 사이의 갈등 및 여러 가지 상속 문제로 가족들의 정신적 스트레스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하원의 이러한 조치는 처와 첩, 그리고 그 자손들에게 화합할 수 있게끔 한 모두를 포괄하는 가족애를 잘 보여준다.
2) 풍수의 핵심 이해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적절한 환경이 필요하다. 적절한 환경을 찾은 후에는 본인의 몸을 지킬 수 있는 집을 짓고 살아가는 것이 본능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연유로 터 잡기는 인류에게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동양 문화권에서 터 잡기에 사용된 것이 풍수지리이다. 즉, 풍수지리는 터를 잡기 위해 인류가 노력했던 경험들의 정리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산악지역이 70% 가량이고, 농경사회였기 때문에 바람을 막을 산과 농사를 지을 물을 찾아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지형을 찾은 것은 필연이라고 볼 수 있다.
터 잡기의 기본은 사신사(四神砂) 이론이다. 후현무, 전주작, 좌청룡, 우백호가 터를 감싸고 도는 듯한 모양의 땅이 기운이 모이는 이상적인 명당이라고 보는 것이다. 사신사가 갖추어지면 자연히 배산임수의 지형이 되는 것은 덤이다. 이러한 기본적인 풍수 원리에 여러 가지 해석을 덧붙이던 것이 풍수지리였다.
이러한 풍수지리는 한반도 역사에 상당히 많이 반영되었다. 풍수사상은 고려시대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활용되었는데, 대표적으로 고려의 도읍을 개경으로 정하는 데 풍수가 적용되었다. 또한 고려시대에 유행한 천도론(遷都論)을 살펴보면 풍수사상이 당시 얼마나 큰 사상적 기반이었는지 반증한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묘지의 자리를 풍수에 입각에 정하는 음택풍수(陰宅風水)가 유행하게 된다. 조상의 유골이 좋은 땅에 묻혀 자연으로 환원(還元) 되면서 발산하는 기는 후손으로 하여금 좋은 영향을 준다는 게 음택풍수의 핵심적인 논리였다. 이러한 풍수사상은 과학적이지 못하다는 비난을 받으나, 현대에 이르러서도 상당히 영향을 미치고 있다.
Ⅲ. 결론
조선왕조의 역사를 통해서도 현대를 살아가는 데 필요한 교훈들을 상당히 많이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왕조의 역사만큼, 어쩌면 더욱 많은 의미를 전해주는 것이 민중들의 생활사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일반 민중들의 생활사를 배워야한다고 말하고 싶다. 현대인이 갖추지 못한 미덕들, 예컨대 약속의 중요성을 일러주는 이경검부처별급문기(李景儉夫妻別給文記)의 사례 등은 오늘날의 우리가 배워야할 점을 전해준다. 또한 오늘날의 경우와 좋은 방면이든 나쁜 방면이든 많은 곳에서 닮아있다는 것을 깨달은 후 적잖이 놀랐다. 동년의 동기의식을 보며 오늘날과 같은 동기 사이의 끈끈한 정을 보며 필자에게까지 참된 우정이 전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으며, 면신례를 보고 악습의 골이 예전부터 참으로 깊어왔다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좋지 못한 역사적 사례를 보고 비판한 후 오늘날 반복되지 않도록 고쳐나가는 것이 역사를 배우는 이유이자, 사학도로서의 임무라는 것을 다시금 되새기는 계기가 되었다.
풍수지리 부분에서는 강의 시간 배웠던 양택풍수, 음택풍수 및 풍수지리의 요소들을 재정리하는 기회가 되었다. 또한 부족했던 부분은 채우고, 필자가 더 아는 부분은 보충해서 다시 복습해보며 공부할 수 있어 의미 있는 독서였다. 선생님의 강의, 스스로의 독서를 통해 이론적 바탕을 착실히 쌓고 이를 답사를 통해 보고 깨닫는 것이 진정한 공부라고 생각이 되어, 훗날 꼭 풍수지리적 명당을 직접 눈으로 보고 깨달으며 복습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중앙대학교에 입학하여 ‘조선시대 생활사’ 강의를 들을 때까지 일반 민중들의 생활사를 접할 기회는 많지 않았다. 교과서에도 아주 간략히 기재되어있을 뿐이었다. 이번 기회로 관심은 있었지만 잘 배우지는 못했던 생활사에 대해 조금이라도 다가가게 되어 학문적 기쁨을 얻었다. 앞으로도 사학도로서 좀 더 깊이 민중들의 생활사를 탐구하겠다는 의지를 다지고, 학문적인 성과를 도출해내는 등 스스로에게 있어 뜻 깊은 결과를 얻길 바라본다.
<참고문헌>
『조선의 옛 사람들에게서 우리를 만나다』(푸른사상사, 2011)
『한국전통문화론』(북코리아, 2006)
『山, 水, 風의 조화를 꿈꾸는 풍수』(한국국학진흥원, 2007)
첫댓글 수업시간에 배운 풍수를 다른 방면으로 이해할 수 있어서 정말 유익한 글이었습니다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