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장이 부반장
송남석
내 학창시절에 대리시험 경력이 한 번 있었던 것 같다. 지금의 법리로는 범죄에 해당하는 나쁜 짓이지만 64년 이 지난 일이고 당시로서는 대리시험이라는 낱말 자체도 흔치 않았을 것이며, 나 또한 우연히 겪은 일일뿐 목적도 대가도 전혀 고려한 일이 아니었기에 쉽게 말하면 장난 비슷한 일이었다. 1957년 3월, 내가 시골 한 초등하교를 졸업하게 된다. 외가 살이를 했던 화순 도곡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자 고향인 광산군 대촌면 정착리 본가로 오게 된다. 당시 전남도내 어느 초등학교를 막론하고 초등학교 졸업생 중 광주서중을 한명이라도 합격시켰다면 담임의 유명세는 물론 학교 자체로도 큰 잔치가 열릴 만큼 대단한 자랑거리었다.
그때는 졸업하면 바로 농사꾼에 취업해야 했지 중학교 진학은 십분의 일도 안 되는 세 네 명에 불과 했다. 우리 학교에서는 서중은 못가고 2급 수준인 북성 중에 김학귀가 들어갔다는 소문이 돌아 그가 무척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나는 졸업생 대표 격인 도지사 상까지 받았지만 중학교진학은 어림도 없이 가난하여 어느 한 곳 입학원서조차도 내보지 못하고 백부님이 훈장이신 한문서당에 다시 들어가서 명심보감(明心寶鑑)을 배우기로 하고 곧 끝나는 대로 상급인 대학(大學)과 논어(論語) 맹자(孟子)를 배우기로 되어 있었다. 내 부친의 둘째형님이신 기홍(基鴻)님의 셋째 아들이 나와 동갑나기 2개월 늦은 동생 은석(殷錫)이가 있었다.
당시 우리가 사는 근방에 김회국(金會國)이란 독지가가 진남중학교 라는 사립학교를 세웠는데 은석이는 제 친형이신 준석형님이 돈을 좀 만지는 분이라 학교에 원서를 냈고 나는 엄두도 못 내고 서당을 다니게 된 것인데 어느 날인가 은석이가 나더러 시험을 좀 봐 주겠냐 하기에 그러라고 수험표를 받아들고 교실 에 들어갔는데 아마 반배치 고사 같은 성격의 시험이었고 그때는 원서에 사진을 안 붙인 애들이 태반이어서 무리 없이 필기시험이 곧바로 끝나고 면접시험까지 보았다. 면접시험 때 아버지 이름이 뭐냐고 묻기에 송 기자 홍자 이십니다. 하고 큰아버지 이름을 대면서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그렇게 끝났고 뒷일은 모른 채 두 달이 지나 5월 초가 된다. 그때 이웃집 친구 태상이가 한 손님을 모시고 왔다.
태상이는 진남중학교에 다니는 학생이었다. 집 앞 한 길가에 신사 어른 한분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회국 교장선생님이었다. 이웃집 친구 이태상이가 나를 김 교장님에게 소개했던 모양이었다. 김 교장님께서 너 공부를 잘 한다며, 학교에 다녀라 공부 잘하면 납부금도 면제 받을 수 있다. 지금 생각하면 완전 특혜였지만 그때는 무슨 행운일까라는 생각뿐이었다. 어머니께 사정을 알리고 학교를 가기는 갔는데 당장 책을 한 권도 구할 수가 없어서 노트만 한 권 들고 다니는데 김용준이란 친구가 누군가에게 헌책으로 영어 책 한 권을 구해 주었다. 교과서라고는 영어책 1권에 노트 한권이 전부였다. 다들 헌책방에 가서 개인이 구입하거나 선배에게 사거나 물려받거나 했던 시기였다.
5월 첫 주라 곧바로 중간고사 시험이 있었는데 가장 큰 걱정이 영어 과목이었다. 제9과까지가 시험범위였는데 Lesson 9 This is my face 였다. 교과서 없이 노트만 가지고도 다른 과목은 다 90점 이상을 받았는데 영어만 75점이었다. 지금까지 모든 시험이 실수해야 95점 정도였고 항상 100점이었는데 75점이라니 이건 치욕이었다. 그렇게 1학년이 지나고 2학년부터는 일제고사에 수석이 나왔는지 그 상장 2개가 지금도 보관 중이고 납부금을 면제 받았는데 어머니께는 내막을 보고하지 않고 납부금을 타가지고 일요일에 걸어서 광주시내 삼복서점에 가서 이 책 저책 구경하다가 디자인이 어찌나 깨끗하고 화려하든지 깔끔하고 멋진 지도책을 샀다.
내가 2학년에 올라 왔을 때 임승미 라는 학생과 유독 친하게 지냈는데 그는 반장이었고 체격도 나 보다는 훤칠하고 노트 필기도 썩 잘해서 나와는 항상 라이벌 이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 그는 1학년부터 첫 부반장이었는데 중도에 반장과 부반장이 교체되었고 첫 반장은 은석 이었다고 한다. 한 달 후 쯤 반장이 교체된 사건이 은석이가 통솔력도 없고 공부도 시원치 않아 선생님들 가운데 참 이상한 일이다 의아해 하다가 임승미 로 교체되었는데 그 후로 은석이는 공부에 취미가 없어서였는지 학교를 그만두게 된다.
이 학교는 우리가 2학년 때 재정이 빈약하여 운영난으로 문을 닫게 되어 본인의 원에 따라 조대부중으로 편입학 시켜주게 되지만 거의가 농사꾼으로 주저앉고 말았으며 그때 약 30여명의 동창들은 사진 2장과 내가 받았던 일제고사 상장 2장이 내게 보관되어 있었는데 지금도 현역으로 활동 중인 자랑스러운 동창이자 대촌농협조합장으로 3선을 하게 될 때 내가 축시를 지어 보냈던 일로 사진이 내게만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이달 말 연락 가능한 동창 세 네 명이 모이기로 하였다. 사진 2장을 10차 수필집 앞면에 넣어 증정할 예정이다.
내가 아직 서울 살이로 현직에 있을 때 25년 전 쯤 고향에 내려와 김회국(金會國) 교장선생님을 찾아보려고 노력하며 고향 서창면에 가서 수소문하여 추적해본 결과 이미 작고하셨다는 소식에 아직 나이가 있으신데 왜 일찍 가셨냐고 물으니 국회의원 출마해서 몇 번 떨어지니 화병 겸해서 일찍 가신 것 같다고 하였다. 내가 듣기로는 김회국 선생님은 조선대 부속고등학교를 나오시고 연세대학교 법정대학을 졸업하신분이라고 들었다. 지하에 계신 김회국(金會國) 교장선생님 뒤 늦게나마 명복을 빕니다.